노통의 피 흔적을 찾아가보았더니 이미 피 흙을 파서 도랑에 던져...
마애불상이 산에서 추락하면서 양 손과 어깨가 다쳤다는 안내 간판이 있는데......
투신위장 암살자들이 노통의 피 흔적까지 파서 없애버린 목교 밑 도랑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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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했다는 부엉이바위 밑에는 조작한 한 두 방울의 혈흔만 있을 뿐
두부손상(정수리 11cm 열상)으로 흘린 다량의 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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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당한 후에도 또 다시 투신자살했다는 누명을 쓰시고 돌아가신 우리 노짱을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투신자살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우리 노짱을 절대로 그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제가 감옥에 가서, 법정에서 밝혀서라도 노무현의 타살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 분의 피를 찾아 그 분이 흘린 고귀한 피에 우리의 눈물을 섞어서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직도 우리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사나이의 눈물을 삼키며 으~흑...흑....
한번 쏟아진 노무현의 피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직도 육안으로 찾지 못한 노무현이 흘린 고귀한 피를 수십 수백 수천 명의 마음에 담아서
검찰에게 재수사 요구하면 검찰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불상사를 재수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49재를 기점으로 노무현 투신자살정국은 가고,
노무현 암살후 투신위장실패 정국이 전국을 뜨겁게 달아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에 있는 사진과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타살의혹에 관련 아고라 조사대의 3차조사까지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뭔지, 민주주의의 맛을 알게 해 주셨던 우리 임금님!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노통의 불상사를 법정으로까지 비화시켜
현재의 공포정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가 아닙니다. 암살후 투신자살 위장실패 사건입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위인들(예수, 간디, 링컨, 케네디, 이순신, 김구 등등)의 죽음은 타살이었습니다.
나의 님이여!
노통의 피를 찾았사오니 복수는 님께서 대신하여 주시고
울 노짱님은 저들을 용서하시고, 우리 마음에 다시 살아 숨쉬소서
6월 16일 밤12시경 세영병원
문용욱 비서실장에게 07:00에 연락하고 비서진 등이 경호차량으로
07:00에 도착했다는 세영병원 응급실,
아고라 2차 조사대가 막 도착한 고요한 밤(6월 16일 12시경)은 정적 靜寂 이 감돌고
노통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왔다는 세영병원 응급실입니다.
CCTV 설치유무에 관심히 집중된 응급실 내부, 세영병원 옆에 30년동안 살았다는 가게주인도
세영병원에는 CCTV가 없었다고 하니 CCTV 존재 유무는 나중에 밝혀질 사소한 문제인 듯
지금 시점에 중요한 문제는 형사 콜롬보의 귀류법(쥐덫 놓기식 증명방법)수사로
어떻게 사건의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느냐?였다.
작년 시위때 돌멩이에 맞아도 이 정도였는데
부엉이바위 이외의 장소에는 피가 없어야 투신자살을 위장할 수 있으므로 상의로 노통의 머리를 감쌌겠죠.
정수리 11cm 열상, 피범벅이 된 노통의 얼굴, 피묻은 상의는?
아침 안개 자욱한 사고 현장이 한 눈에 보입니다.
사고 당일 아침에도 저 앞에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걸어가는 노짱 모습이 어른 거립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노짱이 不歸의 客이되어 ........
사고당일 아침, 응급실에 있었던 간호사(피범벅된 노짱의 얼굴을 닦아냈다는 간호사?)는
잘 안나온다는 답변을 동료간호사로부터 들었고, 또 다른 간호사는 잘 모르는지 아는지 아무 말 없고
노짱님이 어디에서 응급처치를 받으신거 같으냐고 물었더니 ↓이 곳에서 받지 않았을까요~ 하더군요~
노통의 불상사는 형사 콜롬보의 귀류법수사(쥐잡기 수사방식)로만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다.
부엉이바위 투신으로 사인이 두부손상(두부골절, 頭頂部11cm 裂傷, 뇌좌상)이므로
부엉이바위 밑에는 다량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대 전제
1. 부엉이바위 밑에 다량의 피가 없으면 부엉이 바위투신이 아니다.
2. 부엉이바위 투신이 아니라는 결론으로부터 다른 장소에서의 타살유추
수집된 타살 정황/증거에 맞춰 암살 예상경위를 작성한 후에는 부엉이바위 이외의 장소에서
다량의 피 흔적(쏟아진 피는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진리)을 찾으면 쥐새끼는 잡힌다 .
작년 시위때 돌멩이에 맞아 머리가 1cm 찢어져도 머리가 피로 젖을 정도인데
정수리 11cm 열상으로 돌아가신 부엉이바위에는 노통의 피가 없다?
노통서거후 아고라인들의 와신상담... 그 중 5명(7인)의 아고라 조사대는 찜질방에서 새우 잠을 잔 후
아침식당까지 운영하는 정토원 가는 길 편의점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편의점이 봉하마을 가기전 "y"자 갈림길에 있는 식당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자주 들렸다는 편의점입니다. 아이스케키를 먹는 울 노짱!
사기꾼 암살자들이 국민의 눈을 속이고 정토원 주차장에서 노통의 시신을 경호차량에 싣고,
이 편의점 앞을 통과했다고 생각하니 분노의 눈물이.......
아침식사로 국밥까지 먹고나니 두번째 와신상담의 날..
범행(시해) 현장을 역추적하여 쥐새끼들의 지름길인 정토원 찻길(노통사저 뒷길)로 계속 가보겠습니다.
위 안내도에는 정토원 가는 찻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기꾼 암살자들이 이런 안내도를 이용하여 국민의 눈을 부엉이 바위로만 향하게 하였습니다.
수구언론은 물론 노통측근들까지 정토원 찻길을 보지 못하도록 속였지만 아고라 조사대는 안 속는다.
봉화산 위성사진
http://local.daum.net/map/index.jsp?t__nil_bestservice=map
위 주소를 열고 "부엉이바위"로 지도 검색해 보고
"y"자 길에서 왼쪽으로 (노통사저가 있는 쪽이 아닌 정토원 찻길로) 한 번 가 보겠습니다.
(허지우바님 작성)
왼쪽 세 갈래 길에 있는 빨간 화살선부터 정토원까지 아고라 조사대의 이동경로입니다.
노통 암살자차량도 이 빨간화살선을 따라 정토원 주차장으로 갔겠죠...
그러나 쥐새끼들도 "공수래 공수거" 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사고발생 예상 시간 동안(06:00~07:00)에 경호동 앞 도로 CCTV에는
사저 반대방향(봉하마을 밖)으로 나가는 경호차량이 두 대가 찍혔기 때문에
CCTV를 공개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이런 쥐새끼들의 사정을 이 정토원 찻길을 가다보면서 알게 될 겁니다.
범행차량과 위장차량
쥐새끼의 원래계획은 노통의 시신을 부엉이바위 옆 지름길(오솔길)로 부엉이바위 밑까지 옮긴 후에
비서관 등에게 타살을 투신사고로 위장하여 연락할 계획(06:40)이었지...
그런데 이른 새벽부터 부엉이바위 옆에는 농부들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부엉이바위 뒷편 길로 노통의 시신을 싣고 세영병원으로 갔었지...
병원도착 전에는 경호동에 연락하여 부엉이바위 주차장에 위장 흰색차량(06:56)을 보내어
안는 장면을 연출한 2명의 경호원을 싣고 빨리 뒤따라 오라고 연락했지.
막힘없이 잘 달립니다.
노통의 시신을 차에 실은 암살자들도 암살이 성공했다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이곳을 막힘없이 통과했겠죠.
가면서 부엉이 바위밑에 있는 2명의 경호원에게 안는 장면 계속 연출하도록 연락했겠죠.
"안는 장면 연출 이상무!"
"고추밭 이씨 안는 장면 보았음. 멩가카 연출 수법으로 성공"
이때 시간이 아침식사(06:30)하러 가기 전, 시간 06:25(이씨 집에서 고추밭까지 걸어서 5분거리 확인)
가다가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 갑니다.
이 "ㅏ" 자형 갈림길 모퉁이에는 신진중공업공장(토목자재)이 있습니다.
쥐새끼도 정토원 찻길에서 나와 두리번 거리며 우회전 할 때는 농촌 아침 식사 시간이라
지나는 사람도 차도 없다!고 했겠지... 혹 차가 지나더라도 노통을 실은 차는 썬팅이 되어 있어서
차 안에 있는 노통의 시신은 밖에서는 안 보인다. 그래! 이 때부터 쥐새끼들은 방심하였지, 아니 노무현의
넋이 아직 차 안에 맴돌고 있었지.그래서 헛것이 보였겠지
봉화산 호랑이 노통을 잡았더니 땀이 나서 목이 컬컬하여 준비된 맥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시다보니 무전연락을 깜박했지... 고추밭 이씨가 집에 도착(06:30) 후에
즉시 06:40분 이전에 경호동 차량을 부엉이바위 주차장으로 보냈어야 하는데 말이야......
16분이나 늦게 06:56에 흰색차량이 경호동출발 후, 06:59에 부엉이바위 주차장을 출발했다고
경찰이 발표했으니 위장 흰색차량의 세영병원 도착시간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1분 안에 세영병원도착
(07:00)말입니다.(세영병원 차트에는 도착시간을 7시 4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영병원 관계자는
"차트에 기록되어 있는 시간은 이미 환자가 들어 온 이후다. 환자를 보지 않은 상황에서 차트를 기록하는 것
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들어온 환자를 본 상황에서 차트를 기록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d20090602170809n4983
경호동 앞 CCTV의 처음시간(흰색 차량의 경호동 출발 06:56)은 공개하는 척하더니만 나중 시간( 흰색차량
의 경호동 앞 통과CCTV)까지 공개 못하는 쥐새끼의 사정이 여기에 있었지...
병원도착시간(07:00)에 맞춰 1분 전 06:59을 흰색 차량의 경호동 앞 통과CCTV시간이라고 말입니다.
사건사고 수사에서는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만 맞으면 몇십분 시간이 안 맞더라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경찰은 1분을 가지고 그렇게 야단법석(부엉이바위 주차장출 발시간 06:59)을 했느냐하면 다 이유가 있었
지롱! 그 이유는 실제로 울 노짱님은 피범벅이 된 상태로 07:00 이전에 세영병원에 도착한 것이지요.
정토원 지름길(찻길)로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노짱님! 맞고요 맞고요 맞습니다.
노무현의 정신(넋)이 썬팅된 차 안에서도 이 "개독" 멩가카 "장로"의 신또라이들에게
" '도로나무아미타불'로 막 가자는 거지요 "라는 노통의 말씀때문에 깜박하여 16분(56-40)이나 지체했나
봅니다. 이런 쥐새끼의 16분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해하여 넘어갑니다.
"왕쥐를 잡는 것이 아고라 수사의 최종목적"
우측으로 올라가는 입구도 아스팔트 길입니다
(이 곳에 경호원을 배치하여 정토원으로 가는 등산객/차량통제했을 가능성)
노통의 시신을 실은 경호차량은 잠시 세우고 경호원을 태우고 급하게 출발했겠죠.
"야! 경호원! 정토원으로 올라오는 차 없었지?" " 예! 없었습니다."
가다보면 편편한 시멘트 포장길이 나옵니다. 이쯤에서 암살자들도 암살에 성공했다고
편한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경호처로 연락했겠죠.
"멩가카 성공했습니다."
다 왔습니다.
암살자들도 정토원 선법사/보살의 눈을 피해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정토원 주차장 "도로"를 유유히 빠져나왔겠죠.
그런데 이 멍청한 멩가카 하수인들이 하나 같이 도로에 있는 부처님의 성경구절을 못 봤겠지!
정토원입구 도로 "나무아미타불"상 "도로나무아미타불"
비포장길 옆(오른쪽)에 정토원 주차장이 보입니다.
아침시간이라 도로에 깔아놓은 석분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서 암살자들이 조마조마했을 걸
"도로나무아미타불" 될까 봐!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정토원 새벽예불(04:00)에 참석하러 왔다가 부엉이바위 산행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기분으로 차를 댈만 한 으슥한 구석을 찾아 보았습니다.
암살자가 차 대는 것처럼 "빨리 차대! "
암살자도 어디쯤에 차를 댈까 고민하였을 겁니다.
헷갈려! 사전 모의 범행 연습때와는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오솔길이 있어 한 번 올라 가 보았습니다. (아고라 2차조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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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사항은 폐 타이어 태운 흔적과 먹다남은 요구르트 병 숫자였습니다.
폐 타이어를 태운 이유로 범행 예행연습?
한 군데 모아놓은 요구르트 병 숫자가 다섯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3, 4, 5인으로 이루어지는 경호조 중에
노통 암살 때는 5명의 경호조에 미지수가 추가된 범행자의 총수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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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갔다가 다른 길로 내려왔습니다. 여기는 정토원 주차장 중간 지점입니다
목교에서 두 번째 가까운 텃밭입니다.
이 사진 끝에 있는 장소(텃밭입구)에 차를 댔다면
차 바퀴 흔적이 남지 않도록 컨테이너 창고 앞에 넓게 깔아놓은 부직포(不織布)위가 안성맞춤
오른 쪽 컨테이너 창고 앞에 넓게 깔아져 있는 하얀 부분이 부직포입니다.
이 부직포 위에 범행차량이 주차했을 가능성이 젤 많았습니다.(아고라 2차 조사때 판단)
이곳이 목교하고 젤 가까운 주차장(공터)입니다.
텃밭에 사용할 물통 둘이 있고, 경운기 뒤부분 짐칸도 있고, 불 때는 가마도 보입니다.
여기서 암살자들은 만약을 대비해서 농부인척 하며 노통의 시신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1차 조사 때 이 정토원 텃밭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를 몽둥이로 두 번 쎄게 쳐 보았습니다.
아침시간에도 마늘밭에서는 안 들렸습니다.
정토원 주차장 부근은 타격장소가 아니었다는 실험입니다.
조금 올라가서 Y 자 지점(주차장 길과 정토원 가는 등산로)에서 뒤돌아
텃밭 옆 주차장을 향해 찍은 사진입니다.
앞에 하얀 부분이 목교에서 젤 가까운 정토원 주차장입니다.
위 사진의 정반대로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서도 바로 왼 쪽 소나무를 쳐보아도 마늘 밭에서는 안 들렸습니다.
정토원에 가면 그 옆에 오래된 상이 있습니다
봉하마을 내려다보는 오래된 상은 사명대사성상이라고 합니다.
http://cafe.naver.com/tjswotjswo.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55
지금은 오래되어 보기 흉한 상이 되었지만 노통은 사고당일 아침에 무슨 중대한 결심을 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의병장 사명대사에게 간 것일까?
살생을 금지는 스님이 칼을 들어야만하는 시대 정신을 생각한 것일까? BBK를 생각했을까?
노통은 저 빈 의자에 앉았을 까?
암살자는 정토원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노통이 단말마 비명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먼저 노통의
입부터 마비시켰을 겁니다. 여기서 노통이 암살의 낌새를 눈치채고 도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올라왔던 목교 쪽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인지 상정...
정토원 보살이 본 노통의 뒷 모습일까?
이 길의 끝에는 정토원이 있고, 거기서 나오면 사저도 보이는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정토원에서 나와 언덕에서 부엉이바위를 향해 찍은 사진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시멘트 길은 주차장 바로 위쪽에서 옆으로 저수지 길로 빠지는, 공사중인 새 길입니다.
이 새 길이 정토원 찻길로 연결되어 있고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은 은폐/엄폐된 길이기 때문에
노통의 시신을 옮겼을 거라는 추론을 저도 한 때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신자살위장하는 암살자 입장과 도피하는 노통 입장,
두 심리를 종합해 본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여 사건예상경위에서 배제하였습니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농부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폐쇄된 등산로)
저도 현장에 가서 깊게 생각하기 전에는 저수지 길을 이용한 노통시신 이송 경로를 예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1차 조사 때) 하지만 저수지 길을 이용한 노통시신 이송을 사건예상경위에서 배제한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암살자가 저수지 길을 이용하여 노통의 시신을 옮기려면 노통이 부엉이바위 꼭대기 부근에 있어야 하는 가정이 있어야하고, 거기서 입이 마비된 노통이 어쩔수 없이 도피한 방향이 폐쇄된 등산로일 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위 가정의 경우에 투신자살을 위장하려는 암살자 입장에서는 노통의 시신을 차량으로 옮길 필요없이,
은폐/엄폐된 폐쇄된 등산로를 이용하여 노통의 시신을 부엉이바위 밑으로 옮겨 완전범죄(피흘리도록 방치)
하였을 겁니다
따라서 저수지 길을 이용하여 노통시신을 세영병원으로 옮겼다는 사건 예상경위는 현실(투신자살위장)과는
전혀 맞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2차 아고라 조사로 말씀드렸습니다.
경호원의 경호차량대기 무전연락을 엿들은 노통이 암살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사랑하는 가족(집)으로 돌아가려고, 왔던 길로 내려가는데 마비된 몸이 비틀거렸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세 갈래 길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팔뚝만한 몽둥이로 소나무를 두번 치는 소리가 마늘밭에서 들렸습니다. 툭! 탁!
노통이 마지막 가는 길에도 눈에 보였을 세 갈래 길입니다.
노통이 암살의 낌새를 느껴 도피하다 몸이 마비가 와서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여 은신한 장소였을 가능성을 2차 조사 때 판단하였습니다
(왼쪽 숲에는 도랑이 있습니다. 다음 조사때 극비리에 확인하려고 그동안 공개하지 못한 장소입니다)
목교 (나무다리)
목교밑으로 작은 도랑이 있고 물이 조금씩 흐릅니다. 이 물로 저들이 손에 묻은 시뻘건 피를 씻었을까?
하늘은 알고 있다. 저 물 밑에 고여있는 흙을 유심히 보아주십시오.
영결식 하루 전의 명경지수입니다.
(영결식이 한참 지난 후 어느 날에 갔을 때 흙탕물로 변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까몽이 확인한 사진)
영결식이 지난 6월1일은 현장재연 감식일이었습니다.
이 때 경찰은 현장주변을 통제하여, 범행장소에 쏟아진 노통의 피(추모인파 때문에 아직 완전히 은폐하지 못한 피 흔적)를 은폐했을 거라는 예상을 하였습니다.
3차 아고라 조사대가 극비리에 혈흔예상 지점에 도착한 7월 3일 오후 노통암살후 투신위장자들이 아고라에 공개된 조사 결과를 눈치 채고, 목교와 정토원 텃밭 콘테이너 창고 주차장 사이에는 이미 5명의 전경과 사복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사진이 안보이시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837510
2차 아고라 조사때 범행차량의 주차 예상 부직포 위 부직포 귀퉁이를 걷어보며 확인해 보았던
그대로 있었다.
순찰 전경의 시선을 피해 노통이 대나무 뒤에 숨듯이 대나무 사이로 혈흔 은폐장소(도랑)으로 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움푹 패여져 있었습니다.
움푹 패인 장소 앞에는 도랑이고 뒤에는 아무런 물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인위적으로 파헤쳤다고 판단...
많은 비가 온 다음 날이라 땅을 판 삽이나 괭이 자국이 없어졌군요
그렇지만 파헤쳐진 장소 옆, 동일한 위치의 둑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파헤쳤다는 증거로는 충분했습니다. 봉화산 현장주변에는 이곳 한군데만 유일하게 흙이 파헤쳐 있습니다.
영결식때까지는 맑았던 물(약수터로 흐르는 물)이 흙탕물이 된 목교 아래 도랑 사진입니다.
6월1일 현장재연 감식일에 현장을 통제한 암살조들이 피 흔적이 있는 흙을 한 리어어카 정도 파서 도랑으로 던졌기 때문에 명경수처럼 맑은 도랑물이 흙탕물이 되었다는 아고라 2차 조사 때의 예상을 3차 조사때에 확인하였습니다.
혹시나하여 주변에 피흙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3차 아고라 조사대가 도착하기전 내린 비로 인해 모두 씻겨 내려가서 육안으로는 피흙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육안으로 피 흔적을 찾는데는 한발 늦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교를 내려가면서 마애불상으로 무심코 갔는데 투신자살 기획을 암시한 문제의 내용을 발견하였습니다.
노통 암살 후 투신자살을 사전에 기획하였다는 논란 거리에 해당한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마애불상 안내간판입니다.
산에서 떨어진 마애불이 양손과 어깨부분이 훼손되었다는 내용을 가지고 민간신앙으로 노통의 투신을 알리는 안내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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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교 흙탕물이 흘러내려갔을 약수터를 찍은 사진입니다.
약수터 입구에는 암자가 있습니다.
07:20 봉하마을 뻐스를 타고 매일 출근한다는 암자의 보살은 이미 사건이 종료된 시각(사고당일 07:00)
이후에도 등산로 입구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았다고 전해 주었습니다.(2차조사때)
암자 보살도 노무현 대통령서거에 타살의혹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조직?)이... 어찌했다고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암살자가 노통의 피를 은폐하려고 피 묻은 흙을 퍼내어 목교도랑에 던졌기 때문에
여기 바위틈에서는 아직도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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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란 물통은 왜? 부엉이바위 옆 지름길에 있지? 노짱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담은 노란 물통인가?
이 노란 물통 옆으로 노통의 시신을 옮기다보면 농부들의 눈에 띌까봐 이곳으로 노통의 시신을 옮기는 계획을 포기한 건가?
노란 물통에서 조그만 더 앞으로 가면 감나무 사이로 노란 추모띠들이 보입니다.
이 길이 농부들의 눈에 안 띄는 지름 길인데
암살자가 노통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오는 모습이 농부들의 눈에 띌까봐 지레 겁을 먹었군요..
암! 그래야지. 암살자라고 시신을 메고 오는데 겁이 안 나겠어요.
만약 암살자가 큰 맘먹고 노란 물통 옆으로 노통의 시신을 옮겼더라면
"암살후 투신자살 위장 완전범죄"
노통의 시신은 부엉이바위 앞까지 옮겨지고, 다량의 피를 흘리도록 방치하여
비서관도 부르고, 농부들도 부르고, 경호원도 부르고, 기자들도 불러서
사진 찍고 조중동 대서 특필, "노무현 전대통령 투신자살 현장 발견" 전국노래자랑을 했을 걸!
경찰발표 투신예상지점(부엉이바위)의 왼쪽에는 폐쇄된 등산로가 있었지만
노짱은 그 쪽(부엉이바위)으로 등산 갈 이유가 없고,
사명대사 성상(정토원 근처에 이름없는 오래된 상)이 있는 쪽으로 갔었지
지금은 오래되어 보기 흉한 상이되었지만
노통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구한 사명대사에게 간 것이지요
완전범죄(암살후 투신자살 위장)를 못하도록 먼저 가신 님의 넋이 막으셨습니다.
"사기꾼은 지름길(오솔길) 출입금지!"
사고 전날에 비가 와서 농부들이 사고당일 아침일찍 밭에 나갔고,
노통이 이들과 대화를 했던 것이 신의 섭리였습니다.
오마이갓! (나의 신이시여!)감사합니다
부엉이바위 왼쪽에 있는 험한 길인데요.
이 길이 목교가 없을 적에 부엉이바위꼭대기로 올라가는 옛길입니다.
이 길이 등산로입구에 있는 농부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폐쇄된 등산로입니다.
폐쇄된 등산로 끝인 부엉이바위 정상입니다
현장감식반들이 노통의 혈흔이나 머리털 하나 찾아 내지 못한 부엉이바위의 모습입니다
경찰은 여러 혈흔과 머리털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작질하는 경호원, 참관인들아!
거기에 노무현대통령의 두부골절(두정부11cm열상) 때 흘린 피가 있더냐?
제시하는 즉시 거짓임이 계속 들통났었지
두려워서 말로만 혈흔이 있다고 하는 경찰이 불쌍타!
떨어진 곳에 혈흔돌멩이(돌밑에 솔잎이 있고 겹쳐있는 돌)는 어디로 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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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조작하여 제시했던 피 한방울
책상에 떨어진 코피도 이 보다 많을 텐데
그 보다 돌밑에 솔잎이 있어!
최근에 갖다놓은 돌로 판명나니 6월1일 현장재연 감식순서에는 아예 없었지요
혈흔 돌은 온데 간데 없고
부엉이바위에서 노통이 투신했다고 믿는 추모객들이 꽃다발을 가져다 놓은 사진
5명의 살인 경호조에게 바치는 꽃다발이 되었으면 합니다.
몹시 가파릅니다
경찰발표 현장재연(6/1)동영상입니다.
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324853
(혈흔이정표의 위치를 숨기는 조선 동영상)
신문방송까지 장악한 경호처(이명박정권의 실세)는
부엉이바위(투신예상지점)와
노통이송 재연주차장(혈흔이정표)의 실제경사거리(48보=20m)를
멀리 떨어진 거리(경찰발표 66m)로 생각하도록 조작하여 공중파로 보냈습니다
"실제로는 안는 장면만 연출했고 노통을 어깨에 멘 적도 없다."
공중파로 고인을 개망신 주려고
거꾸로 어깨에 멘 장면을 현장재연하였으나 실험해 보면...
어깨에 메고 가다가 힘들어 손으로 잡았다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저 현장재연자의 오른 손을 잘 보세요"
오른 쪽 어깨로 노통을 메고 가다가 힘들어서
오른손으로 이정표를 잡는다고? 웃겨도 한 참 웃긴다
혈흔이정표가 있는 곳은 부엉이바위 바로 앞입니다.
투신예상지점(폴리스라인)에서 밑으로 뛰어 보았습니다. 경사길 48보(약20m)였습니다.
현장재연 참관인들도 가파른 경사길에 있으려니 기우뚱!
내려가는 길이 너무 경사져서 위험하다보니
임시 돌계단이 파헤쳐질 정도였습니다.
옆으로 조심조심 내려가서 이정표 옆에 쪼그려
주후70강림이 직접 혈흔의 크기를 측정 해 보았습니다.
장정 허벅지 높이 즈음에 묻어있는 혈흔 달랑 두 방울입니다
쪼그려 앉아서 담배갑으로 혈흔 크기를 비교한 사진입니다
경찰발표사진의 혈흔 높이는 무쟈게 높게 조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