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에 삿갓쓰고~방라앙 삼천리~기념관에 들어서니 구성지게 노래가 흘러 나온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어 들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1807년에 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난고(蘭皐)이며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고도 한다.
평안도 선천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었으나 노복 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세도가인 안동김씨들의 도움으로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은 홧병으로 사망한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이사와 이를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하여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으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자칭하여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1978년 김병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으며 1987년 이곳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시비를 세웠다.
시집으로는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이 있다 아래 사진은 김삿갓의 유적비다.

이곳엔 김삿갓계곡이 있어 맑은 계곡수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쎄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쎄"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 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뱅이된다오"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간 그는 끝없는 저항과 비판의식이 시로 표현되었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지고 회복이 되자 다시금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쇠잔한 몸으로 선비 집을 다시 찿아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후에 아들 익균이 유해를 이장하여 이곳에 묻었다 한다.
이곳에 묘지가 셋이 있어 어느 것이 김삿갓의 묘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설도 있고.....

김삿갓 동상과 뒤로 김삿갓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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