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리라` [중앙일보 2007.3.15 목요일 A21]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선종 6대 선사를 만나다 상.달마의 기다림.혜가의 절박함 참 궁금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참선법(參禪法)을 처음 들고 왔다는 초조(初祖, 선종의 종조라는 뜻) 달마(達磨)대사, 그의 선맥을 이어받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燦),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그리고 선의 전성기를 꽃 피웠던 6조 혜능(慧能)대사. 불교의 역사에서 이들은 동북아의 조사(祖師)선맥을 일궈낸 거대한 산맥이다. 나중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흘러간 법맥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문답집에서 만났던 이들은 전설 속 인물에 불과했다. 마치 묵고 묵은 옛이야기, 도저히 '실제'였다고 믿기지 않는 설화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이들이 남겼던 흔적, 그 앞에 직접 서면 어떨까. 수행을 위해 뼈를 깎고 피울음을 토했던 이들의 절규, 수십 년 세월을 버티던 외로움, 그리고 끝내 들어선 '여여(如如)함'의 경지는 과연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을까.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마련한 '선의 원류를 찾아서'는 바로 그 흔적을 찾아가는 행사였다. 5일부터 11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대륙의 남단 광저우(廣州)까지, 버스를 타고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지난 1년간 조계종 총무원 청사에서 '육조단경 강의'를 열었던 고우 스님(전 전국수좌회 공동대표, 전 각화사 태백선원장)과 70여명의 순례단이 함께했다. 허베이(河北)성의 쑹산(嵩山)은 높았다. 봉우리만 72개나 된다. 경운기를 타고 오솔길을 따라 산 기슭까지 갔다. 가파른 돌계단을 헉헉거리며 1시간 동안 올랐다. 1500여년 전, 달마는 이 길을 어찌 오르내렸을까. 계단도 없던 시절, 밥은 또 어찌 해결했을까. 도우 스님은 "기록에는 달마대사가 며칠째 수행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산 아래 절에 내려가 밥을 먹기도 했다"고 했다. 정상 바로 밑에 작은 바위 동굴이 있었다. 그곳이 '달마굴'이다. 어른 서너 명이 앉을 만한 좁은 공간. 달마대사는 여기서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했다. 그게 달마대사가 헤쳐갔던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달마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하여 내가 쑹산이 되고, 쑹산이 내가 되는 경지에 들었을 것이다. 그가 보낸 9년의 치열함은 산 아래 소림사에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달마대사가 마주 봤다는 동굴의 벽면 바윗돌이다. 유리관 속에 보관된 바윗돌에는 달마의 얼굴과 수염, 좌선하는 모습의 윤곽이 보인다. 오랜 세월, 꿈쩍도 않던 달마의 그림자가 바위에 물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놀라울 뿐이다. 달마대사는 중국 선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제자가 있어야만 중국땅에서 선의 맥을 이을 수 있음을 말이다. 그가 필요한 건 '딱 한 명의 제자'였다. 숱한 이들이 달마대사를 찾았으나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땅에서 싹을 틔우려면 척박한 땅보다 강한 법맥, 제대로 된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마흔 살이나 된 신광이란 스님이 가파른 산을 타고 달마굴을 찾아왔다. 그는 유교와 도교에 정통한 '고수'였으나, 삶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은 어쩌지 못했다. 눈이 펄펄 날리는 동굴 밖에서 그는 꼬박 사흘 밤을 샜다. 드디어 달마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구하느냐?" "뭇 중생을 건져주십시오." "만약 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겠다." 달마대사는 그렇게 거절했다. 이에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주위의 눈밭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달마대사가 말했다. "부처나 보살도 몸으로 몸을 삼지 않는다. 목숨으로 목숨을 삼지 않으니 법을 구할만 하다." 깨달음의 걸림돌은 나의 몸과 마음이다. 그걸 비워야만 온 우주의 몸과 마음, 본래 면목이 드러난다. 달마는 팔을 자른 신광의 '무모함'에서 '비움의 싹'을 본 것이다. 그래서 신광에게 법명을 내렸다. 그가 바로 2조 혜가선사다. 소림사 안에는 입설정(立雪亭)이 세워져 있었다. 눈 속에 서있던 혜가선사를 기리는 곳이다. 안에는 달마대사 곁에 소매 사이로 팔을 넣은 혜가대사의 입상이 있다. 가까이 갔다. 아무리 봐도 왼팔은 보이지 않았다. 혜가가 다시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혜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라."(달마)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혜가) "네 불안한 마음이 모두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달마) 달마대사의 유명한 안심(安心)법문이다. 짓고 부수는 내 안의 숱한 마음이 본래 없는 것임을 알라는 얘기다. 그래서 마음이 없어진 자리, 거길 보라는 뜻이다. 빈 채로 차있고, 찬 채로 비어있는 나의 본질, 그 삼라만상의 바탕으로 들라는 의미다. 달마굴의 맞은편 산으로 갔다. 그곳에 혜가선사가 팔을 치료하고 머물렀다는 이조암(二祖庵)이 있었다. 가파른 산에는 스키장에서 보던 리프트가 있었다. 그걸 타고 산을 올랐다. 이조암의 앞산 꼭대기는 아직도 눈에 덮여 있었다. 백설(白雪)을 홍설(紅雪)로 바꾼 혜가선사의 절박함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이튿날 '중국의 배꼽'이라는 우한(武漢)의 삼조사(三祖寺)로 갔다. 새벽에 출발, 해질 무렵에야 도착했다. 절은 상당한 규모였다.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38세의 젊은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다. 이 곳에 삼조 승찬대사가 14년간 머물던 동굴이 있다. 출가 전 그는 풍질(한센병)에 걸려 있었다. 그가 혜가선사를 찾았다. "전생의 죄로 인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저를 위해 업장 참회를 해주십시오."(승찬) "그 죄를 가져오너라."(혜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승찬) "그대의 죄가 다 참회되었느니라."(혜가) "오늘에야 죄의 성품이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승찬) 혜가선사는 그가 법을 담을 그릇임을 알고 직접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리고 '승찬'이란 법명을 주었다. 몹쓸 병으로 인해 일종의 '원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승찬은 죄도 없고, 그걸 담는 마음도 본래 없음을 깨친 것이다. 평생 은거하며 살았던 그는 삼조사의 큰 나무 밑에서 법회를 하다가 합장한 채 서서 입적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승찬대사의 사리탑이 서 있었다. 죄도 벗고, 마음도 벗고, 여여하게 몸까지 벗었던 그 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별이 떴다. 역대 조사들이 들었던 그 자리가 어디 따로 있을까. 눈 앞에 펼쳐진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아닐런지. 다만 바라보는 '나'만 없을 뿐이다. 정저우.우한(중국)=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vangogh@joongang.co.kr]<VANGOGH@JOONGANG.CO.KR>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꼭 봐야 하나` [중앙일보 2007.3.16 A21]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선종 6대 선사를 만나다
하. 혜능의 등신불, 꽃피는 선종 중국 대륙의 남녘은 봄이 완연했다. 들에는 가는 곳마다 유채꽃이 흐드러졌다. 매화도 활짝 피었다. 사조사로 가는 길, 가로수 대신 홍매(紅梅)가 봄을 적시고 있었다. 1400여년 전, 어린 아이가 삼조 승찬대사(511~606년)를 찾아왔다.
[사진] 중국선종 사찰 탐방 - 소림사 입구 [연합]
소림사는 불교 선종의 1대조(一代祖)인 보리 달마(普提 達摩)대사가 9년간 면벽 수행한 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선법을 2조(二祖) 혜가(慧可·487-593)에게 전한 곳이다. (장저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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