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스크랩] 중국 선종 6대 선사를 만나다.

YOROKOBI 2007. 5. 25. 12:45
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리라` [중앙일보 2007.3.15 목요일 A21]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선종 6대 선사를 만나다
상.달마의 기다림.혜가의 절박함

 

참 궁금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참선법(參禪法)을 처음 들고 왔다는 초조(初祖, 선종의 종조라는 뜻) 달마(達磨)대사, 그의 선맥을 이어받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燦),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그리고 선의 전성기를 꽃 피웠던 6조 혜능(慧能)대사. 불교의 역사에서 이들은 동북아의 조사(祖師)선맥을 일궈낸 거대한 산맥이다. 나중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흘러간 법맥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문답집에서 만났던 이들은 전설 속 인물에 불과했다. 마치 묵고 묵은 옛이야기, 도저히 '실제'였다고 믿기지 않는 설화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이들이 남겼던 흔적, 그 앞에 직접 서면 어떨까. 수행을 위해 뼈를 깎고 피울음을 토했던 이들의 절규, 수십 년 세월을 버티던 외로움, 그리고 끝내 들어선 '여여(如如)함'의 경지는 과연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을까.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마련한 '선의 원류를 찾아서'는 바로 그 흔적을 찾아가는 행사였다. 5일부터 11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대륙의 남단 광저우(廣州)까지, 버스를 타고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지난 1년간 조계종 총무원 청사에서 '육조단경 강의'를 열었던 고우 스님(전 전국수좌회 공동대표, 전 각화사 태백선원장)과 70여명의 순례단이 함께했다.

허베이(河北)성의 쑹산(嵩山)은 높았다. 봉우리만 72개나 된다. 경운기를 타고 오솔길을 따라 산 기슭까지 갔다. 가파른 돌계단을 헉헉거리며 1시간 동안 올랐다. 1500여년 전, 달마는 이 길을 어찌 오르내렸을까. 계단도 없던 시절, 밥은 또 어찌 해결했을까. 도우 스님은 "기록에는 달마대사가 며칠째 수행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산 아래 절에 내려가 밥을 먹기도 했다"고 했다.

정상 바로 밑에 작은 바위 동굴이 있었다. 그곳이 '달마굴'이다. 어른 서너 명이 앉을 만한 좁은 공간. 달마대사는 여기서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했다. 그게 달마대사가 헤쳐갔던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달마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하여 내가 쑹산이 되고, 쑹산이 내가 되는 경지에 들었을 것이다.

그가 보낸 9년의 치열함은 산 아래 소림사에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달마대사가 마주 봤다는 동굴의 벽면 바윗돌이다. 유리관 속에 보관된 바윗돌에는 달마의 얼굴과 수염, 좌선하는 모습의 윤곽이 보인다. 오랜 세월, 꿈쩍도 않던 달마의 그림자가 바위에 물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놀라울 뿐이다.

달마대사는 중국 선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제자가 있어야만 중국땅에서 선의 맥을 이을 수 있음을 말이다. 그가 필요한 건 '딱 한 명의 제자'였다. 숱한 이들이 달마대사를 찾았으나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땅에서 싹을 틔우려면 척박한 땅보다 강한 법맥, 제대로 된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마흔 살이나 된 신광이란 스님이 가파른 산을 타고 달마굴을 찾아왔다. 그는 유교와 도교에 정통한 '고수'였으나, 삶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은 어쩌지 못했다. 눈이 펄펄 날리는 동굴 밖에서 그는 꼬박 사흘 밤을 샜다. 드디어 달마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구하느냐?"

"뭇 중생을 건져주십시오."

"만약 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겠다."



달마대사는 그렇게 거절했다. 이에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주위의 눈밭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달마대사가 말했다. "부처나 보살도 몸으로 몸을 삼지 않는다. 목숨으로 목숨을 삼지 않으니 법을 구할만 하다."

깨달음의 걸림돌은 나의 몸과 마음이다. 그걸 비워야만 온 우주의 몸과 마음, 본래 면목이 드러난다. 달마는 팔을 자른 신광의 '무모함'에서 '비움의 싹'을 본 것이다. 그래서 신광에게 법명을 내렸다. 그가 바로 2조 혜가선사다.

소림사 안에는 입설정(立雪亭)이 세워져 있었다. 눈 속에 서있던 혜가선사를 기리는 곳이다. 안에는 달마대사 곁에 소매 사이로 팔을 넣은 혜가대사의 입상이 있다. 가까이 갔다. 아무리 봐도 왼팔은 보이지 않았다.

혜가가 다시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혜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라."(달마)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혜가)

"네 불안한 마음이 모두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달마)



달마대사의 유명한 안심(安心)법문이다. 짓고 부수는 내 안의 숱한 마음이 본래 없는 것임을 알라는 얘기다. 그래서 마음이 없어진 자리, 거길 보라는 뜻이다. 빈 채로 차있고, 찬 채로 비어있는 나의 본질, 그 삼라만상의 바탕으로 들라는 의미다.

달마굴의 맞은편 산으로 갔다. 그곳에 혜가선사가 팔을 치료하고 머물렀다는 이조암(二祖庵)이 있었다. 가파른 산에는 스키장에서 보던 리프트가 있었다. 그걸 타고 산을 올랐다. 이조암의 앞산 꼭대기는 아직도 눈에 덮여 있었다. 백설(白雪)을 홍설(紅雪)로 바꾼 혜가선사의 절박함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이튿날 '중국의 배꼽'이라는 우한(武漢)의 삼조사(三祖寺)로 갔다. 새벽에 출발, 해질 무렵에야 도착했다. 절은 상당한 규모였다.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38세의 젊은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다. 이 곳에 삼조 승찬대사가 14년간 머물던 동굴이 있다. 출가 전 그는 풍질(한센병)에 걸려 있었다. 그가 혜가선사를 찾았다.



"전생의 죄로 인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저를 위해 업장 참회를 해주십시오."(승찬)

"그 죄를 가져오너라."(혜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승찬)

"그대의 죄가 다 참회되었느니라."(혜가)

"오늘에야 죄의 성품이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승찬)



혜가선사는 그가 법을 담을 그릇임을 알고 직접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리고 '승찬'이란 법명을 주었다. 몹쓸 병으로 인해 일종의 '원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승찬은 죄도 없고, 그걸 담는 마음도 본래 없음을 깨친 것이다. 평생 은거하며 살았던 그는 삼조사의 큰 나무 밑에서 법회를 하다가 합장한 채 서서 입적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승찬대사의 사리탑이 서 있었다. 죄도 벗고, 마음도 벗고, 여여하게 몸까지 벗었던 그 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별이 떴다. 역대 조사들이 들었던 그 자리가 어디 따로 있을까. 눈 앞에 펼쳐진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아닐런지. 다만 바라보는 '나'만 없을 뿐이다.

정저우.우한(중국)=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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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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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꼭 봐야 하나` [중앙일보 2007.3.16 A21]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선종 6대 선사를 만나다
하. 혜능의 등신불, 꽃피는 선종

중국 대륙의 남녘은 봄이 완연했다. 들에는 가는 곳마다 유채꽃이 흐드러졌다. 매화도 활짝 피었다. 사조사로 가는 길, 가로수 대신 홍매(紅梅)가 봄을 적시고 있었다. 1400여년 전, 어린 아이가 삼조 승찬대사(511~606년)를 찾아왔다.



"해탈할 수 있는 법을 주십시오."(아이)

"누가 너를 묶었더냐."(승찬)

"아무도 묶은 이가 없습니다."(아이)

"그럼 무슨 해탈을 구하는가."(승찬)



그 말 끝에 아이는 깨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승찬 대사를 9년간 모셨다. 결국 스승의 인가를 받아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가사와 법을 받았다. 그건 법맥을 잇는 직계제자란 증표였다. 그가 바로 사조 도신대사(580~651년)다. 나를 묶는 이는 나밖에 없으며, 그 나도 본래 없던 허상임을 깨친 것이다. 결국 묶는 이도, 묶이는 이도 없음이다.

사조사에 도착했다. 사찰은 상당한 규모였다. 이층으로 된 황색 기와와 높다란 벽이 마치 '황궁'을 연상케 했다. 절을 찾은 중국인들이 피운 향으로 경내는 연기가 자욱했다. 70여 명의 순례단 일행은 사찰 옆 높은 언덕을 올랐다. 그곳에 '전법동(傳法洞)'이 있었다. 사조가 오조에게 가사와 법을 전한 곳이라고 한다. 의미심장한 장소다.

거기서 작은 법회를 열었다. 낮지만, 장엄하게 '반야심경'이 울렸다. 다들 쪼그리고 앉아 20여분간 좌선도 했다. 누군가 고우 스님(70.전 각화사 태백선원장, 현 경북 봉화 금봉암 주지)에게 물었다. "스님, 본질과 형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우 스님은 풀어서 말했다. "본질과 형상의 간격은 0.0000001㎜도 안됩니다. 너무도 가까워서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이죠. 굳이 말하자면 '눈 먼 거북이'와 '절룩거리는 자라'의 차이입니다."

무슨 뜻일까. 본질을 못 보면 결국 장님에 불과하다. 거북이든, 코끼리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눈을 뜨면 다르다. 본질을 보는 순간, 차원이 달라진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 차원'에서 '달 차원'으로 넘어서기 때문이다. 절룩이는 자라든, 뛰어가는 자라든 본질을 보면 그만이다. 그래서 자라는 거북이를 보지만, 거북이는 자라를 못 보지 싶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사조사에서 오조사까진 멀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산을 폈다. 오조사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입구에는 '방하착'이란 글귀가 선명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다리를 건너란 뜻이다. 숱한 이들이 이 앞에서 숱하게 들었다 놓았다한 게 또 마음이지 싶다.

오조 홍인대사(602~675년)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끈다. 길가던 한 스님이 마을의 아이에게 물었다.



"네 성(姓)씨가 무엇이냐?"(스님)

"성은 있지만, 일정치 않습니다."(아이)

"무슨 성인가?"(스님)

"불성(佛性)입니다."(아이)

"그럼 있네."(스님)

"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아이)



이 얘길 들은 도신대사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출가시켰다. 그 아이가 오조 홍인대사다. 홍인대사의 제자는 700여 명, 그중 신수화상이 으뜸이었다. 온갖 학문에도 능통하고, 인물도 좋았다. 어느 날 홍인대사는 "복도의 벽에다 게송을 써라. 그걸로 법맥을 이을 수제자를 가리겠다"고 했다. 신수화상은 밤에 벽에다 게송을 썼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이를 들은 젊은 혜능(628~713년)이 고개를 저었다. "좋기는 하나 깨치진 못했소." 사람들이 비웃었다. 혜능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이다. 밤에 혜능은 동자를 데리고 복도로 가서 자신의 게송을 쓰게 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부처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거니/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지금도 오조사의 복도에는 이 일화가 펼쳐져 있다. 동자를 데리고 글을 쓰는 혜능과 신수화상의 모습이 글과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나이로 보나, 인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혜능은 신수화상의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혜능은 당시 스님이 아닌 행자(스님이 되기 위한 훈련생) 신분이었다.

그러나 홍인대사는 혜능을 택했다. 신수화상은 문턱까지 왔고, 혜능은 이미 문턱을 넘었다는 이유였다. 문턱을 넘고 안 넘고의 차이, 먼지가 있고 없음의 차이, 그 작은 차이가 실은 '하늘과 땅 차이'인 까닭이다. 육조 혜능 이후에 중국에는 숱한 선사들이 출현한다. 달마 때 뿌린 씨앗 한 톨이 비로소 중국 대륙을 휩쓸며 선종의 꽃을 피우게 된다.

더 많은 혜능선사의 흔적을 찾아 광저우(廣州)로 갔다. 혜능선사가 머물렀던 조계산의 '남화선사'는 생기가 넘쳤다. 사찰은 녹음에 덮여 있고, 절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글을 몰랐던 혜능선사의 가르침을 기록한 '육조단경'도 이곳에 보관돼 있다.

남화선사에는 각별한 모습이 하나 있다. 부처 곁의 나한상은 좌우 9명씩, 모두 18명이 선다. 그러나 남화선사에만 20명의 나한상이 서있다. 전에 큰불이 났을 때 '육조단경'을 구하려고 책을 안고 목숨을 버린 두 스님이 있었다. 그들이 지금은 나한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혜능선사의 고향 신싱샨(新興縣)에 있는 국은사로 갔다. 이곳은 혜능선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절 입구에는 '勅賜國恩寺(칙사국은사)'란 현판이 붙어 있다. 스스로 '생불'이라 칭했던 당나라 측천무후가 내린 글씨다. 그의 국사가 신수화상이었다. 측천무후가 "국사보다 뛰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신수화상은 "혜능선사"라고 답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세 번이나 혜능선사를 불렀으나 거절 당했다. 결국 "대사가 못 오면 가사라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절대 권력자였던 측천무후의 명을 거절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문턱을 넘어선 자리, 혜능선사의 부동심은 거기서 나왔지 싶다.

어느 날 한 여승이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혜능은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달마부터 혜능까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숱한 손가락을 만났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쳤다. 그 너머에 달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뒤꿈치를 살짝 들어본다.

신싱샨.광저우(중국)=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 중국선종 사찰 탐방 - 소림사 입구 [연합]

소림사는 불교 선종의 1대조(一代祖)인 보리 달마(普提 達摩)대사가 9년간 면벽 수행한 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선법을 2조(二祖) 혜가(慧可·487-593)에게 전한 곳이다. (장저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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