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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팔만대장경은 고려왕조에서 두 번째로 찍어낸 불교 일체경(一體經)이라는 의미에서 고려 당시에 이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불렀다. 그럼에도 속칭인 팔만대장경이 더욱 익숙하게 된 까닭은 이렇게 찍은 경판이 8만장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정확한 수량은 8만1천258장. 총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 글자 총수를 합치면 조선왕조실록 분량 전체를 모은 5천200여만 자에 이른다.
이 경판을 어디에서 제작했는지를 두고 지금까지 학계에서 논란을 벌어진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 임시수도인 강화도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남해안에서 제작했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그건 그렇고, 경판은 도대체 어떤 나무를 이용했을까?
목재조직학자 박상진(朴相珍. 67) 경북대 명예교수를 실상 본업보다는 역사와 문화재 분야로 이끈 주인공이 바로 팔만대경 경판이었다. 2년 전 경북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그는 90년대 초반에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 관재(棺材)가 이 지구상에서는 오직 일본열도에서만 자생하는 금송(金松)임을 밝혀냄으로써 역사학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박 교수에게 무령왕릉 관재 분석은 부업이었고, 정작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매달린 것이 팔만대장경판을 목재조직학적인 측면에서 구명하는 일이었다. 그런 성과물을 박 교수는 이미 1999년 운송출판사라는 곳에서 '다시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라는 소책자로 정리해 낸 적이 있다.
도서출판 김영사에서 최근 펴낸 그의 연속작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언뜻 보아 1999년작의 복간인 듯하지만, 그동안 새롭게 축적된 연구성과를 대폭 보충한 확대 개정판이다.
박 교수가 주력한 대목은 크게 두 가지. 첫째, 경판은 어떤 나무를 썼는가? 둘째, 그렇다면 경판은 어디에서 제작되었을까?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이를 위해 전자현미경 조사를 벌였다. 조사표본은 경판 209장과 마구리 27개, 나무못과 부위 불명 표본 8점을 포함하여 244점이었다.
그 결과 경판은 산벚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 전체 64%인 135장에 달했다. 돌배나무 32장(15%), 거제수나무 18장(9%), 층층나무 12장(6%), 고로쇠나무 6장(3%), 후박나무 5장(2%), 사시나무 1장(1%)이 뒤를 이었다.
이를 통해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를 이용했다는 종래의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박 교수는 나아가 팔만대장경 당시에는 한반도의 북부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를 이용할 환경이 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상황에도 주목했다. 당시 이들 지역은 몽고 치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팔만대장경판=자작나무'라는 신화가 구축된 것은 이에 대한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화(樺)'라는 글자를 자작나무로 판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樺'는 껍질이 하얀 나무는 어느 것이건 표현하는 말임에도, 그것을 쉽사리 자작나무로 이해한 데서 잘못된 상식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나아가 박 교수는 이런 분석결과와 당시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팔만대장경판은 해안사 일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강화도에서 만들어 해인사로 옮겼다는 통설 또한 거부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강화도에서는 경판 제작을 위한 나무를 조달해오는 것은 물론 그렇게 제작한 경판을 해인사로 옮기기가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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