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 사티쉬 쿠마르

YOROKOBI 2007. 6. 3. 21:58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사티쉬 쿠마르 

 

   녹색평론 13호

 

  

 

 


"어리석은 자는 실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회의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고뇌하기보다는 실천한다." - 사티쉬 쿠마르 -



 

어머니는 가장 좋은 스승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고 대학에 다니지도 않았고 학위도 없습니다. 나의 스승도 역시 교육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가장 훌륭한 스승인 우리 어머니에게 깊은 존경심을 보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에서는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느낀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각이나 관념, 견해를 나에게 준 일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ꡐ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갈망하는 생명이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어도 되지만 생각을 주어서는 안된다ꡑ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들, 우리 대학과 정부, 교육 기관들은 밤낮으로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케케묵고 쓸모없는,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생각들을 쏟아 넣느라고 바쁘게 바쁘게 돌아 가면서 사랑은 한 조각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 까?


아이는 하나의 씨앗, 한 개의 도토리입니다. 우리는 ꡒ아니, 어린애잖아. 가만 있으라고 해. 아이 들은 몰라. 경험이 없거든. 나는 나이를 먹었으니 내가 더 많이 알아.ꡓ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ꡒ얘야, 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네 속에, 너의 영혼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 도토리처럼!ꡓ 산림전문가나 정원사나 어느 누구도 도토리에게 참나무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작은 씨앗, 도토리 속에 참나무가 되는 방법에 대한 모든 정보가 씌어 있습니다. 글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곳에 들어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오만하게 이렇게 생각합니다.ꡐ우리는 마이크로 칩이나 컴퓨터 디스켓, 컴팩트 디스크 같은 멋진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가. 이 디스크 하나에 몇 메가바이트를 저장할 수 있는가!ꡑ 사람들은 조금 겸손해져서 도토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 수백 년을 살면서 수백만 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가지들을 만들어 낼 저 조그만 도토리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와 도토리를 모두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와 모든 어머니 여러분에게 존경심을 보냅니다.


꿀벌을 보아라


어머니는 꿀벌을 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꿀벌은 얼마나 좋은 스승입니까? 꿀벌은 꽃에서 꽃으로, 한 꽃에서 꿀을 조금씩 따면서 날아다닙니다. 꿀벌은 꽃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고 꽃과 꿀벌 사이에는 완전히 폭력없는 관계, 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인간사회가 땅에서 무엇을 캐내거나 얻어낼 때 우리는 계속해서 빼앗고 빼앗고 마침내 바닥나고 고갈되어 그 자원이 끝장날 때까지 씁니다. 우리는 꿀벌에게서 조금만 얻어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 나서 꿀벌은 무엇을 합니까? 그것을 달콤하고 맛있고 영양분이 많은 꿀로 바꿉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산업화되고 현대적인, 기술주의적인, 합리적인, 선진적인, 진보적인, 발전된 - 이것은 모두 한 흐름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 우리 사회는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꿀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어디든 큰 도시 바깥으로 나가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 내고 던져버린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쓰레기와 오염의 산더미들!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흙이 오염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연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꿀벌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얻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든지 변화시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꿀처럼 신성하고 맛있고 달콤한 것으로 변화시키세요. 어머니는 자기 지혜를 말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으로 지혜를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매우 솜씨가 좋습니다. 어머니는 손을 쓰지요. 아름답고 다채로운 실과 거울 조각들, 조그만 바늘을 가지고 바느질을 해서 멋진 숄이나 치마나 블라우스를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누이는 ꡒ어머니, 숄 하나 만드는데 너무 오래 걸려요. 여섯 달이나요. 제가 어머니께 선물을 할께요. 수놓는 기계를 사드리겠어요.ꡓ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ꡒ왜? 왜, 수놓는 기계를 사준다는 거냐?ꡓ

ꡒ시간을 절약해 줄테니까요.ꡓ

ꡒ시간을 절약해? 시간이 부족하니? 신이 시간을 만들때 넉넉히 만들었단다. 어리석은 아이야! 무한한 것을 절약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한도가 있는 것을 소비하려고 하고 있어. 전기니 금속이니 기계를 만드는데 쓰는 모든 재료들, 그런 것은 한도가 있는 자원이지. 너는 무한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한도가 있는 자원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만 둬. 나는 바늘을 쓰는 게 좋아!ꡓ

바늘은 사람이 손수 만든 가장 작은 연장입니다. 땅에서 조그만 금속 한 조각을 얻으십시오. 꿀처럼, 이 작은 바늘을 말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명상하며 앉아서 당신의 사랑을 그 속에 넣으십시 오. 그것이 예술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동안 당신의 손 속에 사랑을 담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를 숄처럼 아름다운 물건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어머니나 나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은 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ꡒ어머니 숄은 무척 아름다워요. 그렇지만 저는 이걸 쓸 수 없어요.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벽에 걸어 놓고 싶어요.ꡓ그러면 어머니는 말합니다. ꡒ아니다, 아니야! 그러지 마라. 네가 그걸 썼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것들을 벽에다 걸어 두기 시작하면 보기 싫은 것들을 몸에 지니게 된단다. 왜 보기 싫은 것을 몸에 지니고, 벽에 걸려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든단 말이냐?ꡓ


이 말에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깊고 심오한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예술작품은 너무나 벽 위주로, 너무나 작품 위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예술은 화랑에 있어야 되고 무대에 있어야 되고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걸로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든지, 구두든 옷이든 음식을 담는 접시든 의자든 다른 무엇이든지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도전이 개입되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는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흙이나 벽돌이나 나무나 금속이 나 무엇이든지 가지고 아주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에 게 기쁨을 줍니다. 그것은 변화의 예술이며 바로 교육의 핵심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될 수 없다면 교육이 아닙니다.


작은 학교 - 촛불 밝히기


어둠을 저주하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정부와 교육기관과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거대한 학교들을 계속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비판에서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침마다 먼 길을 버스로 등교합니다. 열한 살짜리 아이가 아침에 한 시간, 저 녁에 한 시간, 날마다 두 시간씩 차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통근자의 삶을 시작하는 거지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 ꡐ지금 통학을 시작하는 게 낫지. 남은 평생동안 통근을 하며 지내야 할 테니까.ꡑ 하는 그 생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 보면 천오백 명, 이천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숫 자' 가 되어 버립니다. 아이를 알지 못한다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와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칠판 옆에 서서 ꡒ나는 수학선생이다. 나는 영어선생이다. 나는 불어선생이다. 나는 과학선생이다.ꡓ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합니 다.


ꡒ당신이 수학이나 과학이나 영어의 선생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선생이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ꡐ아이들의ꡑ 선생입니다!ꡓ 수학이나 과학이나 물리 따위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신뢰관계를 만들기 위한 구실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흔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서른 명, 스물다섯 명 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으며, 이천 명, 천 오백 명 되는 아이들을 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까? 모든 학교는 생활하고 학습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를 학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장의 복제품, 지식공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학교는 가정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고 친근하고 두려움 없 는 가정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ꡐ학교를 만들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원칙에 근거한 조그만 학교를 하트랜드에 세우자.ꡑ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ꡐ작은 학교ꡑ라고 불렀고 서른 명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된 학교지만 공립학교는 아닙니다. 돈을 내는 학교도 아니고 부유한 부모를 위한 학교도 아닙니다. 배경이나 능력이 어떻든 트랜드에 사는 어린이로서 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 모두를 위한 학교입니다. 전혀 돈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려 뽑지도 않는 보통 지역학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를 가정의 연장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ꡐ가정의 중심은 무엇 인가? 가정의 심장은 무엇인가?ꡑ생각했습니다. 내 경험으로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엌입니다. 또 하나는 난로입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불가에 모입니다. 불이, 타고 있는 살아 있는 불이 옛날부터 모든 가정의 중심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는 중앙난방시설을 갖고 있지만요!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불을 피웁니다. 아이들이 둘레에 모여서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 만들기가 교과과정의 하나로 자리잡기 때문에 부엌 역시 중요한 교육장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그런 것처럼 음식 만들기가 귀찮거나 짐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 입니다. 음식만들기는 가장 기본이 되는 학과목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교육


무엇이 사람에게 필요합니까? 음식과 옷, 집,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학교가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식물 키우는 방법이나 요리하는 법, 음식의 영양가치에 대해 가르쳐 줍니까? 없습니다. 가르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적습니다. 그것도 구석진 곳 어디에 - 가정학인가 뭔가 하는 곳에 - 조그맣고 특별한 것으로 끼여 있습니다.


음식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음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작은 학교에서는 채소밭과 부엌을 두고 음식을 학습 도구, 교육의 기본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이 심성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아이들에게 고약한, 포장된, 깡통에 든 신성하지 못한 음식을 주지 마십시오. 낡은 지식, 책에서 나온 신선하지 못한 정보처럼 깡통에 담긴 신선하지 못한 음식이라니요! 학교는 모두 제대로 된 음식을 우리 교육 속에 되가져 와야 합니다.


또한 작은 학교에서는 옷을 디자인하는 법, 천을 짜는 방법, 털실을 잣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집을 직접 지어 보기도 합니다. 이년 걸려서 우리는 근사한 작업장을 지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 합니다. 사람들에게 그 작업장을 보여주면서 ꡒ우리가 지었어요.ꡓ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과과정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학구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중등교육 학력평가도 치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학과시간의 절반이면 충분합니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나머지 반은 정신, 영혼, 마음, 몸, 상상력, 시, 연극같이 측정하고 평가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교육하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교육, 진정한 학습은 평가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시에서 중등교육 학력평가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상상력이나 영성이나 텃밭가꾸기에서 중등교육 학력평가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학교로 우리는 하나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영향력이 더 미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장 같은 커다란 대규모 학교, 아이들은 숫자에 지나지 않고 탁아소나 아이 봐주는 곳 같은 학교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정부가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학교를 더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하트랜드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 번창하고 아름답고 전통이 살아있는 좋은 영국 마을입니다. 지금 이 마을에는 도자기 굽는 사람, 집짓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정원 돌보는 사람, 음악가, 미술가, 시인, 작가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마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를 시작할 때 나는 마을의 도공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ꡒ우리는 학교를 시작합니다. 정규 도자기 선생님을 모실 여유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셔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ꡓ 그 사람은 ꡒ네. 기쁘게 하지요. 날마다 도자기만 만드는 게 지루했습니다. 하루를 비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겠어요.ꡓ하고 말했습니 다.


이런 식으로 농부와 집 짓는 이, 목수 등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루나 반나절 또는 필요한 시간만큼 옵니다. 와서 실제로 필요한 것들을 가르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가 자기들의 학교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 모두를 저마다 잘 압니다. 그저 정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전시하고 팔고 도자기에 대해 장부를 정리하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생생한 모범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선생님은 그저 교실에 와서 몇 가지를 가르치고는 자기 집으로 달아나 버리고 아무도 그 선생님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마을 전체가 우리의 학교라고 말합니다. 학교 모임이 있고 부엌이 있고 선생님들이 있는 그 건물만이 학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을 전체가 학교, 우리의 학교입니다. 그러니까 학교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그러면 당신은 심성교육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편집자 해설 

사티쉬 쿠마르는 인도출신으로 현재 영국의 농촌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생태학 잡지 <리서전스>의 편집장이며 교육센터인 <슈마허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티쉬 쿠마르에 대한 책은 <사티쉬 쿠마르> (한민사 1997)란 책이 나와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작은 학교에 대한 문제나 대안학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고 제도권 학교교육에 대한 염증이 심각한 상태다. 학교붕괴가 전국의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우리 교육이 살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글이다.

 

 

 

 

 

우리 곁의 간디, 사티쉬 꾸마르

황대권 (생태공동체 운동가, <야생초 편지>의 저자)

만약 오늘날 간디가 서양에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황당한 질문일지 모르겠으나 대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사티쉬 쿠마르야말로 서양에 살고 있는 간디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는 20대 중반에 핵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하나로 4대 핵강국을 도보로 두루 돌아다니는 대장정을 떠난 이래 지금까지 주로 영국에 머물며 서구인들에게 간디식 평화와 공존의 이념을 가르쳐 왔다. 젊은 시절에 인도를 떠나왔지만 그 나이에 이미 간디의 온전한 후계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간디의 정신과 인도의 종교전통을 제대로 체득하고 있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자이나교의 승려가 되어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가 성인이 되는 열여덟에 비폭력적 방법으로 사회적 영성을 추구하는 간디의 가르침을 듣고 교단을 나와 간디주의자가 된다.

간디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그가 찾아간 첫 번째 사람이 비노바 바베였다. 비노바 바베는 간디가 세상을 떠난 후 가장 간디적인 방법으로 인도사회의 변화를 위해 애쓴 인물이다. 간디는 살아생전에 이미 비노바를 자신이 주창한 "사르보다야"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비노! 바가 주도하는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하여 "걷기"를 통한 명상과 사회개혁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티쉬 쿠마르는 메논이라는 친구 한 명과 "반핵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인도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워싱톤까지 걷는 평화 캠페인에 나선다.

어마어마한 수고와 위험을 극복하고 평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티쉬 쿠마르는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 영국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저로 유명한 프릿츠 슈마허의 권유로 <리서전스>라는 대중적 생태잡지의 편집장을 맡아 일을 한 지 어언 30년, 사티쉬 쿠마르는 어느새 자존심 강한 영국의 지성계와 활동가들 사이에 간디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한편 어린이를 위한 "작은학교"와 성인을 위한 "슈마허 대학"을 설립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안학교로 만들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3년 전 슈마허 대학에서 생태학 관련 강의를 들으며 잠시 그와 함께 생활한 것이 가슴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와 대면해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주제일지라도 사티쉬 쿠마르의 입을 통해 나오게 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얘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쉽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생태위기에 직면한 현대 사회에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 독특한 생태 이론들을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어법으로 풀어내어 쉽게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녹여낼 수 있는 영혼의 깊이와 포용력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 책에는 사티쉬 쿠마르가 비폭력과 생태적 영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비노바 바베를 비롯하여 인도 현지에서 만난 여러 구루들, 크리슈나무르티, 버틀런트 러셀, 마르틴 루터 킹, 프릿츠 슈마허, 반다나 쉬바 등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기의 지성들이다. 사티쉬 쿠마르는 이 걸출한 지성들과의 만남을 자양분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간디주의를 만들어 낸다. 비노바 바베와 마찬가지로 그는 살아생전 수많은 지성들을 만났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영혼이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자식사랑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볼 수 있다.

사티쉬 쿠마르는 땅에 근거한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땅, 영혼, 사회"라는 세 마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땅, 영혼, 사회"는 "천, 지, 인"이라는 우리의 전통 사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때 그가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들이 급속한 근대화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생태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에 근거한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 특히 개인의 영성과 사회의 영성 사이에 연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사티쉬 쿠마르 저
정도윤 역
달팽이
2004년 05월
335페이지


책소개

어린 승려였고, 생태운동의 영성적 지도자이자인 사티쉬 쿠마르의 영적 여행을 담은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합류지점에서 서로가 다양하게 연결된 관계라는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핀다.

이 책의 구성은 1장은 어머니와 선생, 구루와 종교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과 그에게 영적 여행을 시작하게 해준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하고 있고, 2장은 인도의 현자인 비노바, 크르슈나무르티, 버트란트, 마틴 루터 킹, 프릿츠 슈마허와 함께 보낸 기록하고 있다. 3장에서는 인도여행을 기록하고, 4장에서는 세계관의 기초가 데카르트의 이론인 이원론과 분열, 분리의 철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에 있음을 전하고자 하는 네 부분으로 그 맥을 가져간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역자 : 정도윤
1960년생, 한국여성민우회,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주민생활협동조합 등 여러 사회단체를 거치면서 내면의 성장과 미래의 지속 가능한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나무 심기를 평생의 마음공부로 여기고 있다.

저자 : 사티쉬 쿠마르
정신혁명과 녹색운동의 성자로 불리는 사티쉬 쿠마르는 인도 출신의 국제적인 평화운동가이며 녹색운동가, 교육자로 아홉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열강의 핵무기 폐지를 위해 무일푼으로 인도에서 러시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오직 걸어서 3만리의 평화를 위한 순례를 감행하고, 동지이자 스승인 E.F.슈마허의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녹색사상 연구 교육기관인 '슈마허 대학'을 설립 운영한 교육자이다.


목차


한국독자여러분에게 - 사티쉬 쿠마르
추천사 - 황대권
감사의 말
머리말

제1부: 영혼은 서로를 섬기게 한다
1 자연에서 배우다
2 힌두교 정신
3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4 시간은 언제나 오고 있다
5 가네샤는 왜 코끼리 머리를 하고 있는가
6 모든 생명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을
7 세상을 포기하라
8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법
9 나와 세상

제2부: 땅, 영혼, 그리고 사회
10 세상으로 돌아오다(비노바 바베와 걷다)
11 끊임없이 흐르는 강
12 태양에게 배우다
13 진리는 길이 없는 땅(크리슈나무르티와 대화하다)
14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
15 합리주의와 비폭력(버트란트 러셀과 만나다)
16 질서 이전의 정의(마틴 루터 킹을 만나다)
17 빈곤과 진보(슈마허의 통찰력)

제3부: 인도 여행
18 평화의 종교, 이슬람
19 양극이 공존하는 땅
20 기쁨과 환희의 절
21 수공업 문화
22 순례자가 되어
23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
24 재생의 씨앗(반다나 시바를 만나다)

제4부: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한다
25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26 의존을 선언하다
옮긴이의 말
부록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 데릭 젠슨


책속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그 자체로 보상이 됩니다.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고, 자발적이며 기쁘고 순수하게 일할 우리의 호의는 지금 여기에 나타납니다. 교활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으며, 추측하지 않고, 계획이 없고 미래나 과거가 없으며, 걱정이 없고 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압박감이나 흠이나 중압감이 없이 흘러나옵니다.
---p. 141


출판사 리뷰

관계철학

이야기는 그의 첫 번째 영적 스승인 어머니와 함께 했던 인도에서의 어린시절의 생생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는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 나무에서 다시 씨앗이 생기는 이치를 삶의 순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개인성은 나눌 수 없다. 씨앗은 땅을 풍요롭게 하고, 땅은 씨앗이 자라게 한다. 나무가 땅에 나뭇잎을 떨어뜨리면 땅은 나무뿌리의 자양분이 된다. 그러므로 영혼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풍요로워진다”고 사티쉬를 가르친다. 또, 꿀벌의 수분작용에서도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어머니에게 나중에 직접 이름붙인 ‘관계철학’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배운다.

출가,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사티쉬는 9살부터 18살까지 자이나교의 승려로 살았다. 그는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배운 자이나교의 철학원리를 설명한다. 이 원리들은 사티쉬가 당시에 구두로 전수받은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승려의 은둔생활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세상에 기여하는 활동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자정을 넘긴 어느 날 밤, 절을 빠져나와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승려로서 했던 서약을 깬 사실을 반기지 않는다. 사티쉬는 단념하지 않고 그 길로 비노바 바베를 만나러 케랄라로 향한다. 비노바 바베는 간디의 이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실현한 사람으로 인도 전역을 걸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땅을 기증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행동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면 영성추구와 사회운동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바가바드 기타』의 고전적인 가르침을 배운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사람의 안녕을 뜻하는 ‘사르보다야’이다. 비노바 바베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기가 중심이며, 사회주의는 사회가 중심이다. 그러나 사르보다야는 삶이 중심이다.’

이는 사티쉬가 말하는 ‘삼위일체’에서 반영된다. ‘삼위일체’는 기존의 정신과 육체와 영혼이 아니라 땅과 영혼, 그리고 사회이다. 이는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현자들과의 만남

2부에서는 인도의 현자인 비노바 바베를 비롯해 크리슈나무르티, 버트란트 러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슈마허와 나눈 토론을 소개한다. 이 다섯 명의 위대한 활동가와 사상가들은 그가 사회적, 생태적, 정치적 이슈에 관여하는데 영감을 주었다.

‘진리는 길이 없는 땅’이라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메세지는 승려였던 쿠마르에게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종교가 자유가 아닌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도 상호관계가 우리 존재의 근본원리라고 말한다. 러셀과의 만남은 전혀 다르다. 러셀이 강조하는 것은 합리성이지만, ‘그에게 평화는 삶의 방식이라기보다 정책문제이며, 성취해야 할 목표’이다. 마틴 루터 킹은 사티쉬가 평화를 위해 오랫동안 걸어온 점에 큰 감명을 받고 ‘우리가 미사일은 제대로 유도했을지 모르지만 정치인들은 잘못 유도했다’는 주목할 만한 말을 만들어낸다. 3부에서는 자신의 정신을 키우고, 자신의 뿌리를 재확인했던 인도여행을 이야기한다. 인도여행에서 사티쉬는 반다나 시바 등과의 만남을 소개한다. 땅에 관한 쟁점은 생태운동가인 반다나 시바의 활동을 통해 언급된다. 학문으로서 과학은 결핍을 불러오는 단일작물을 주장하는 반면, 반다나 시바는 ‘다양성’이 풍요의 어머니임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격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타나는 이원론과 분리주의 철학에 반해 관계와 모든 존재사이의 연결에 기초한 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사티쉬 쿠마르는 서양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산스크리트 격언인 소훔-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으로 요약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은 ‘공경의 생태학’으로 ‘공경이 없으면 생태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성이 없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도 없다’고 강조한다. 사티쉬는 결론적으로 지금처럼 진행되는 산업화 속에서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길과 가치, 도덕, 그리고 자연을 향한 공경의 길이 교차하고 있다고 본다. 첫 번째 길은 데카르트식 이분법에 기초한 분열과 통제, 조종을 반영하는 길이며, 두 번째 길은 상호의존과 더불어 평화와 조화를 향한 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사이에 중도의 길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이 우리의 장기적인 번영을 위해 필요한 길이며, 이 길이 현재의 경제시스템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