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월민주항쟁 20주년 맞아 '87년 6월' 재조명 활발

YOROKOBI 2007. 6. 10. 06:22
    1987년 6월의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사회체제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2007년의 한국인 역시 '87년 6월'의 성과물인 이른바 '87년 체제'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다음 달이면 '6월민주항쟁'이 20주년을 맞이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87년 6월'과 '87년 체제'의 성격과 의의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87년 6월'은 '항쟁'인가 '혁명'인가?
1987년 6월의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민주항쟁'으로 불러야 할까? 아니면 '민주혁명'으로 불러야 할까?

4월24일 국무회의에서 6월10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면서 '6.10 민주항쟁기념일'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87년 6월을 단순한 항쟁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6월민주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마련한 토론회에서 4ㆍ19혁명과 비교해 '87년 6월'의 성격을 규정했다.

도 교수는 4ㆍ19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합법적 절차에 따라 장면 정권을 탄생시켰으나 그 주도 세력이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봉기의 주도 세력이 시민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성과가 단 1년으로 끝나고 1961년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의 등장 앞에 그 성과를 허망하게 반납해야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87년 6월'은 다양한 시민 계층이 항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적 열망의 폭발력의 크기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도 교수는 "1987년은 현대 한국이 국가 수립 이후 사실상 처음이라 할 '시민의 탄생'을 목격하고 기록한 해"라며 "1948년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국민'은 탄생했으나 그 국민은 1987년에 와서야 근대적 '민주시민'으로 거듭났다"며 '87년 6월'의 의의를 평가한다.

보수 논객인 소설가 복거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87년 6월'을 '6월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복거일은 "'항쟁'은 부당한 강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할 따름이지 사회제도를 적극적으로 변환하거나 권위의 정통성을 새로 세우려는 노력은 포함하지 않는다"며 "'87년 6월'은 '직선제 헌법' 제정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통해 정부 체계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혁명'으로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87년 6월'은 혁명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혁명이었다고 피력한다. 폭력의 수준이 낮았고 사회적 비용도 적었다. 1986년의 경제성장률 11.0%가 1987년과 1988년에도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된 점을 볼 때 경제의 위축 역시 전혀 없었던 셈이다.

복거일은 "6월 혁명은 큰 희생 없이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를 내세워 정권의 정통성을 새로 세우려 했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룬 시민운동을 항쟁이라 부르는 것은 그 중요한 사건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한다.

◇87년체제는 아직도 유효한가?
일부에서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마련한 '87년 체제'가 이미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87년 체제'라고 반박한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유ㆍ무효론'이라는 학계의 오래된 화두 역시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계간 '황해문화'에서 "87년 체제가 이전보다 한결 개선된 질서이긴 하지만 수많은 일시적 타협을 한 불안정한 체제이며 오늘날 거의 그 한계점에 도달한 체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한다.

진보 사회학자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87년 체제'가 아니라 '97년 체제'라고 단정한다.

김 교수의 견해는 '87년 체제의 붕괴'를 주장하기 보다 '87년 체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체제(regime)란 포괄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조응관계를 의미하는데 87년 체제는 정치사회적 과정인 민주화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이전 시대와의 단절 및 전환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경제체제를 주목할 때 1987년 보다 1997년이 더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1997년을 기점으로 한국은 산업화시대에 대응하는 '61년 체제'에서 신자유주의 경제를 모델로 하는 '97년 체제'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97년 체제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 김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는 민주화시대와 세계화시대가 중첩돼 있는 상황"이라면서도 "세계화 시대의 원심력이 민주화시대의 구심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반면 우석춘 성공회대 교수는 "오늘날 한국인은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지만 결국에는 민중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87년 6월'의 부활을 전망한다.

우 교수는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 뒤에는 '민중'이 존재했으며 1987년 6월은 민중이 정치적으로 가장 화려한 위치에 달했던 순간이었다고 설명한다.

우 교수는 그러나 "'민중'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실종됐으며 그 자리는 '시민'이 대체했다"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설 정도로 한국은 고학력 사회로 다가섰고 농민의 비율은 전체 국민의 7%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사회는 1997년 이후 민중이라는 단어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고졸 이하 육체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사회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그 결과 한국의 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보다는 '산업화 세력'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며 오늘날 20대는 스스로를 고단함이 묻어나는 '민중'이 아니라 보다 세련된 '시민'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 교수는 "한국 경제가 다량으로 배출하는 평균임금 119만원의 비정규직 800만 명과 농업에서 내몰리게 될 100-150만 명의 사람들을 민중이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는가"라며 반전을 예견한다.

한국은 경제적 의미에서 '민중의 시대'를 다시 맞이하고 있으며 1987년처럼 이들이 정치적으로 가장 화려한 위치에 달하는 순간이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