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유진 피터슨 / 마르바 던
<1장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 /유진 피터슨>
‘불필요한 목회자’에 대한 설명과 그 의도
여기서의 주된 전제는 목회자가 한정된 의미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종종 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불필요함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자들은 오늘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세상은 목회자가 선함과 친절함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목회자들을 도덕과 질서의 파수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은 사회적 안정의 바탕을 제공하는 사람이요, 위기 때의 유용한 사람들이며, 의미와 목적의 상징으로서 봉사하는 자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런 면에서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둘째, 목회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본질적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불필요하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교인들을 한데 묶어놓는 연결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목사가 되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절정이라는 생각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거만한 방식으로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셋째, 목회자는 교인들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그런 측면에서 불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은 목회자를 자신들이 경쟁에서 앞서도록 도와주는 전문가라고 여긴다. 교인들은 이스라엘이 왕을 원했던 것-블레셋을 박살내기 위해-과 같은 이유에서 목회자를 원한다. 교인들은 성경이 아닌 세상 문화로부터 목회자에 관한 개념을 끌어온다. 나는 요즘 목회자가 되기 위해 청빙을 기다리는 몇몇 사역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나는 여러 교회들이 그들의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을 들으면서 침울함을 느낀다. 거의 예외없이 요즘 교회들은 목회자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이끌어갈 관리자를 원한다.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귀찮은 일을 회피하려 한다.
마르바와 나, 유진 피터슨
마르바 던과 나는 세상 문화와 자만심과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기대에 반대하기 위해 불필요함-무익함-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일을 감당하려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일’을 자유롭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신념이다. 영광스러우면서도 힘든 목회자의 삶에서 복음의 필요성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으려 하는 것이다.
서약 -안전 장치
나는 최근에 목사 안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렀다. 목회 사역 40주년을 기리는 기념일이 다가오자 목사 안수를 받았던 당시에 서약했던 8가지 서약의 내용들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특히 나는 얼마 전에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목사 안수 때 했던 서약이 지난 40년간 가파른 절벽 표면에 단단히 박혀있는 하켄 같은 기능을 해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서약은 감정이나 기후, 계산 착오와 피곤함에 상관없이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지탱해준 걸이못과 같았다. 비전과 소명, 위기와 영감 등은 목사가 되거나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이를 때 누구나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안전장치’가 없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약을 한다. 교파에 따라 서약의 표현 방식은 약간씩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동일한 기능을 담당한다. 서약은 안전장치인 것이다.
목회자로 부름받은 자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위험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직업적인 종교인이 되어 차츰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목회자들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라는 영역에서 언제나 초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목회자는 결코 ‘크리스천’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더 뛰어난 ‘사역’으로 나아갈 수 없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나 크리스천으로 해야 하는 사역은 “모두 초보자의 심정으로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다.. 크리스천들의 행위가 훈련된 일과나 절차나 학습된 기교적인 의의 형태를 보일 때, 그 행위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크리스천들은 여러 가지 일에서 대가나 거장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크리스천이라는 영역에서 대가나 거장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안수 받으며 한 서약의 여섯 번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이 여섯 번째 서약은 전문가처럼 행세하려는 잘못된 태도를 막아주는 보호 장치 역할을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주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는가?”
어떤 경우든 간에 목회자들은 교인들과의 별개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간주된다. 목회자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리더십이 향상될수록 겸손한 모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따라서 리더이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그 때 이런 안전 장치가 없으면 어떤 때는 경건으로 위장하고 남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자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겠는가?”
목사로 안수 받은 자가 수행하는 리더십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상처를 입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목회 사역과정에서 객관화된다. 목회자와 가장 가까운 이들은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애정(배우자, 자녀, 친구)이나 예수님의 명령(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 따라 최우선으로 사랑받아야 마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능적으로 변해간다.
‘예수님을 위한 사역’ 또는 ‘교회 사역’의 압박감 때문에 예전에 친밀했던 이들을 직무적인 관점에서 대한다. 이제 그들은 사역을 위한 ‘자원’ 또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거나 ‘자산’이나 ‘부채’ 또는 ‘선발대’나 ‘역기능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널리 유포된 ‘역기능적’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에게, 특히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 단어는 사람이 아닌 기계를 설명할 때나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은 효율성에 대한 평가에 따라 구석으로 밀려나고, 계획이나 프로그램, 목표와 비전, 복음 전도전략과 선교 전략과 같은 추상 개념들이 사랑으로 탈바꿈된다. 결국 목회자들은 순수하게 ‘크리스천’이 되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하도록 안수를 받은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적어도 교회를 위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이웃들은 목회 사역의 이면으로 사라지고 과다한 업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새로운 신자를 인도하고, 전화로 심방하며, 적대감을 품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무기력한 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을 확신하는 온갖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목회자의 그런 활동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역기능적인 존재로 낙인찍힌다.
‘죄인’이라는 성경적인 용어가 ‘역기능적인 인물’이라는 세속적인 용어로 대치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죄인이 범한 잘못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성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역기능적인 사람의 잘못은 목회자가 세운 계획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용어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사용된 단어는 우리의 인식 방법이나 생활 방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는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 “나와 너”를 저술했다. 부버는 그 책에서 사람들을 ‘너’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한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공동체가 비인간화된 폐허로 변질되는 무서운 사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는데, 사회는 중요한 역할과 효율적인 기능만을 중시하는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부버는 또한 인간 관계 속에서 ‘나와 너’ 라는 허물없는 친밀감을 연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인간은 때때로 역할과 기능이 심각하게 요구되지 않는 영역으로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영역이 인간의 영구적인 상태가 되고 주변의 가까운 이들이 대상으로 객관화되면, ‘너’는 사라지고 ‘그것’만 남게 된다. ‘그것’이라는 용어는 아무리 공정하고 명예롭게 사용된다 하더라도, 일단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이 자행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세상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역 환경으로 갖지만 또한 그 광대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교회 조직에 들어가 교회를 위한 사역을 감당한다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해 목회자 세계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적이나 경쟁자로 보기 쉽다. 목사로 안수 받은 이들은 여러 위원회와 계획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을 위한 시간이나 에너지는 그들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고 세상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져 버린다. 교회 업무가 유지되려면 목회 사역에 뛰어든 많은 남녀 사역자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목사로 안수받고 나서 오래지 않아 목회자들은 세상의 화목을 위한 사랑을 베푸는 사역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교회의 과다한 업무와 협의 사항에 징집된다. 교회 업무는 세상을 위해 세움을 받은 목회자들을 바로 그 세상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목회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공격하거나 회피하며, 또는 세상과 경쟁하는 데 급급하게 만들어 더 이상 세상의 화목을 위해 중요한 사역-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며 목회자들은 그 사역을 위해 세움 받았다-에 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회자와 증인으로 행하는 사역들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무디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세상과 경쟁하게 하고, 세상을 회피하도록 만들 때, 목회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심각하게 왜곡된다. 이럴 때 서약은 중요한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2장 회복을 위한 전주곡/ 마르바 던>
목회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면 목회 사역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게 솔직하고 정직한 자만이 진정한 성장과 안정을 맛볼 수 있다. 내가 한쪽 발에 교정신을 신은 이상한 모습으로 리젠트 신학교 컨퍼런스에 나타난 이후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목회자들은 교정용 신발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행하려면 겉만 화려한 모습들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저마다의 장애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한다.
당신도 시간을 내어 자신이 겉만 그럴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온갖 방법들과 모습들을 내세우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실체와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려 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사역’을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가? 유진 피터슨이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불필요한’ 역할 속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필요한’ 일들을 하려고 나서지는 않는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자.
앞에서 말한 겉만 화려한 모습에 대한 경고는 이 책에서 탐구하게 될 에베소서의 원색(原色)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속성과 중재 사역으로 그분의 종이 될 수 있는 토대가 자유롭게 형성되었으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송영(Doxology)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숙고하면, 절대로 거짓된 자아 뒤로 몸을 숨길 수 없다. 그리하면 찬송의 영광과 신비를 깨닫고, 우리의 불필요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된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책에서 에베소서의 모든 내용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목표는 각 장에서 ‘불필요한’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특정한 본문을 사용해 특정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에베소서의 원색을 제공해 줄 것이고,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원색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상황을 숙고함으로써 구체적인 적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놀라운 송영으로 시작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Doxology(송영)’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 즉 영광(doxa)과 ‘말씀(logos)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간단히 정의한다면 송영은 영광에 대한 말이다. 찬양, 진정한 찬양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찬양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찬양과 즐거운 노래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찬양은 단순히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나 기분이 들뜨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과 행동을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그저 “내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에 찬양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 시편들은 종종 찬양에로의 부름과 찬양의 선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찬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선포한다. 그러므로 송영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그 영광을 보고 듣는 자들에게 힘을 주는 찬양이다.
<3장 살아있는 송영이 되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비생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아무 사심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그 찬양이 우리 기분을 더 좋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참되고 올바른 기쁨-기쁨이 행복과 같은 말은 아니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겸손하고 성의있게 반응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순수하게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결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심없이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적인 이유다.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우리들은 언제나 죄악 된 자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사단으로 인해 시험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통과하게 해주는 것은 찬송의 훈련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우리가 받은 모든 복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완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분께 감사하라. 그 다음에 성도의 자유함을 가지고 거룩한 생을 영위하라.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청년들은 많지만 아들들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청년이 된다는 것은 순간적인 희열로 인해 소리치며 법석을 떤다는 뜻이다. 성경 저자들은 아들이 된다는 말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그들은 아들의 권리에는 일정한 책임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어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의무와 헌신과책임이 요구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소유라는 개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면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 문화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기쁨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다.
잠시 당신의 삶-사적인 생활, 공적인 생활, 교회 생활-에서 찬송의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라. 어떻게 하면 교회들이 더욱 깊은 찬송을 들릴 수 있을까? 찬송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찬송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송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을까?
<4장 바울과 로마 :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회복하라 /유진 피터슨>
바울이 목회신학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로마서에서 4가지 요소를 추출해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4가지 요소란 성경에 복종함, 비밀에 대한 인식, 언어사용, 공동체에 열중함 등이다.
성경에 복종함, 비밀에 대한 인식
성경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려는 학생의 태도가 아니라 성경본문에 따라 살아가려는 제자의 자세였다. 로마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비밀로서 받아들여질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에 대한 책이다. 바울에게 있어 비밀이란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알게 되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 사역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된 하나님의 계시다. 우리가 이러한 비밀을 받아들이려면 상당히 겸손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비밀 앞에서 우리는 어느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삶을 문제로 여겨 접근하는 태도와 삶을 비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구분했다. 삶을 문제로 여길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언가를 할수 있는 수준으로 삶을 하락시킨다. 하지만 삶을 신비로 여기고 접근하면 우리의 한계를 능가하는 의미에 영원히 다가가고, 우리의 계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힘과 자원들을 얻는다. “신비는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의 실재다.”
스스로 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목회자는 이미 알려져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사역한다. 그리고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 불필요한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항상 기쁨을 잃지 않는다.
언어사용
은유는 우리를 언어 속으로 끌어들여 그 언어에 참여자가 되게 함으로써 방관자로 남아있지 않게 한다. 불행하게도 일부 주석가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현실적인 은유들을 모호하게 추상적인 진리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은유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일종의 거짓말이다. 당신을 자기만족적인 방관자의 상태에서 이끌어내 언어자체 속에 연루되게 하는 의도된 거짓말이다.
공동체에 열중함
목회신학에서는 모든 사람을 관계성 속에서 파악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목회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관계성 속의 개인들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목회신학은 추상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사로운 경우에 치중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만 치중한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목회자는 사람들을 관리한다. 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고, 나이, 성별, 인종 그리고 여러 다른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목회자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다. 내가 어릴 적에 겪은 제초제와 살충제에 얽힌 경험담을 생각해보자. 정부의 농학 연구소와 화학비료 회사의 영업 사원들은 여러 곤충과 병을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화학비료를 사용하길 권했다. 전문가의 열성과 권유에 탄복한 농부들은 그들의 말을 따랐고 정말 생산량은 현저히 증가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농토는 불모의 땅이 되었고 토양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유기 농산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경작하는 목회 신학의 농토를 생각해 보자. 영적 리더십에 혁신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다고 약속하는 살충제와 제초제는 바로 이성주의와 기능주의다. 이성주의와 기능주의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사고 속에 숨어있는 무지와 오류들을 제거해준다고 약속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의 행동 방식에 내재된 비효율성과 쓰레기들을 일소시켜주겠다고 공언한다. 우리는 그러한 화학비료들을 구입한다. 실제로 그 약품들은 약속한 정도의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 화학 비료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더욱 박식하게 만들어주고, 교회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점차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신학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해 점점 관심을 잃게 만들며, 목회 사역은 관계성 속의 사람들을 외면하게 한다. 목회와 신학이 성경적인 원천에서 분리되고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전문화되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길을 잃고 헤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의 로마서는 유기적이고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본질적인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5장 정사와 권세에 대항해 승리하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나는 리젠트 신학교에서 열렸던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청지기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들이 ‘특급 우편 배달부’를 길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직분자들을 훈련시켜 교인들의 집에 보내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약속을 행랑에 모아서 가져오게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목회자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초청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교회 예산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는 공동체의 사역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당신의 교회가 청지기 훈련 프로그램과 같은 수단에 의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다른 영역에서 의심스러운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사실은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들이 예배시간에도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정사와 권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악한 세력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얼마나 교묘하게 공격해 오는지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런 세력들을 대적하고 그들의 공격에 저항할 때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신앙공동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호해야 한다. 악한 마귀가 던지는 불화살은 공동체 내에서 불평을 일삼는 자들을 통해 사정없이 날아든다. 우리가 성경적인 바탕에서는 진실한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들은 서슴지 않고 우리를 무능력한 목회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럴 때 목회자는 악한 세력들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불평하는 자의 입을 막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문제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영적인 싸움을 간파해야 한다.
<6장 디모데와 에베소 :지혜를 가르치라 /유진 피터슨>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가르치기에 교회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는가? 목회자는 가르치는 이들의 개성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의 가족, 직장, 이웃, 죄악, 그리고 그들의 삶의 여정-이 모든 영역을 오랜 시간을 두고 때로는 수십년 동안 관찰할 수 있다. 학교는 학생들을 한정된 시간 동안 그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가르친다. 학생들의 개성과 특성과 삶에 내재된 다양한 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환경에서 그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가르치는 대상인 교인들의 주된 삶의 영역이 생생하게 파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만난다.
지혜의 스승이 되기에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장소는 바로 교회다. 지혜의 가르침은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영역이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있었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를 맡고 있다. 바울의 말을 명심하자.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4:6) 진리는 순전하고, 분명하며,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7장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바울의 기도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하나님이 거론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인간 중심의 문화 속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은혜는 언제나 필수적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범하는 가장 심각한 잘못은 설교를 선포적인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치료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교의 초점은 듣는 이들에게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있지 않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그들의 삶을 고치며 그들의 태도를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전을 거부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설명하기 위해 설교한다.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점에 대해 과정하여 말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라는 충고가 필요 없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사역 대상인 무수한 형제 자매들에게는 그런 설교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교파를 초월해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러갈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설교가 아닌 사람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다.
<8장 디도와 그레데 : 공동체 형성을 위한 패러다임 /유진 피터슨>
일반 대중들의 여론과는 정반대로 목회자는 세상 모든 경향을 추구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악의는 없으나 무지한 요구들로 인해 충분히 괴롭힘을 당했다.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신앙의 텍스트인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목회 사역의 의미를 분명히 규정하는 안수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의 ‘필요성’에 대한 상황은 더욱 열악해진다. 이 책에서 마르바와 내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시켜주려고 애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세상 문화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기술과 경험을 측정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전산화되어 주일학교 교실을 도색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할 때는 자료들을 뒤적거려 적절한 인물을 찾아낸다. 게다가 큰 승용차를 소유하고, 문서 업무 수행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며, 재정적인 능력을 겸비하며, 꽃꽂이를 할 수 있고, 고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 중에서 중고등부 교사를 찾아내려 한다. 물론 교회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으므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공동체 속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찾고 그들의 수준을 결정하는 이런 방법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인들을 기능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이 신앙 공동체와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능력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목회 서신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관계성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남자와 여자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구성원들의 능력이 아닌 올바른 성품을 기대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조직체를 구성하는 업무가 아니다. 공동체 건설은 관계성에 바탕을 둔 사역이다. 성경에 제시된-여덟 가지의 긍정적 조건과 다섯 가지의 부정적 조건을 둔- 감독의 규율을 보자.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7절).
성경에서 직분자의 직무 내용 설명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인격 형성에 대한 관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도자들은 기능이나 그들의 ‘은사’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앙 공동체는 사람을 사용하는 성령에 의해 발전한다. 성령님께서는 성숙한 관계성을 유지한 인물들을 사용하신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습관을 지닌 이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더십’이라 일컫는 것들은 실질적인 리더십과 무관한 것이 태반이다. 한 학생이 학기말 리포트에 다음과 같이 내용이 있었다.
“내가 목회자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당신이 목회자들이 조작하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면 그들은 당신이 지닌 고귀함을 함부로 내팽개칠 것이다.. 리더십은 리더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 공동체에서 지도자를 양육하는 사역에 임할 때 목회 서신의 내용을 충실히 따른다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에 대해 설명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을 흔적없이 버려야 한다. 카리스마에 관한 언급은 모두 잊고 인격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 신뢰할 수 있고 신실한 믿음을 지닌 성숙한 사람을 먼저 찾으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하라. 칭찬을 받으려 하고, 정력적으로 위대한 사업을 추진하며, 교인들 속에서 활력소가 되려는 이들은 바람직한 리더십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9장 공동체를 세우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불필요하게 보이는 목회자들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성도들이 사회에서 화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그들이 서로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 위협하고 공동체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화해시키며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분임을 목회자는 말해야 한다.
에베소서의 화해에 관한 본문을 보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4~22)”
우리는 이 모든 화해와 건축 과정에 전혀 필요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친히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평안을 선포하셨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재발견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역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일을 완성하는데 우리는 전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닫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변화의 역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필수적이다. 세상에 난무하는 불일치와 분열은 스스로 화목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증거다.
이제 에베소서에서 이끌어낸 주요 주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1. 송영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우리가 혼자 힘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불필요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2. 정사와 권세들은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고, 우리 스스로를 필요한 존재로 여기게 하고, 우리의 소명을 망각하거나 혼동하게 하며, 선한 요소들을 적절한 한계 이상으로 확대시키려 한다.
3. 성경은 우리가 주변 문화에 대해 얼마나 불필요한지 보여주고, 그러한 불필요한 역할 속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의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상기시켜준다.
4.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의 불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는다. 모든 것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서로를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 그 몸이 자라나도록 협력하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 / 마르바 던
<1장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 /유진 피터슨>
‘불필요한 목회자’에 대한 설명과 그 의도
여기서의 주된 전제는 목회자가 한정된 의미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종종 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불필요함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자들은 오늘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세상은 목회자가 선함과 친절함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목회자들을 도덕과 질서의 파수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은 사회적 안정의 바탕을 제공하는 사람이요, 위기 때의 유용한 사람들이며, 의미와 목적의 상징으로서 봉사하는 자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런 면에서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둘째, 목회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본질적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불필요하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교인들을 한데 묶어놓는 연결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목사가 되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절정이라는 생각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거만한 방식으로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셋째, 목회자는 교인들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그런 측면에서 불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은 목회자를 자신들이 경쟁에서 앞서도록 도와주는 전문가라고 여긴다. 교인들은 이스라엘이 왕을 원했던 것-블레셋을 박살내기 위해-과 같은 이유에서 목회자를 원한다. 교인들은 성경이 아닌 세상 문화로부터 목회자에 관한 개념을 끌어온다. 나는 요즘 목회자가 되기 위해 청빙을 기다리는 몇몇 사역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나는 여러 교회들이 그들의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을 들으면서 침울함을 느낀다. 거의 예외없이 요즘 교회들은 목회자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이끌어갈 관리자를 원한다.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귀찮은 일을 회피하려 한다.
마르바와 나, 유진 피터슨
마르바 던과 나는 세상 문화와 자만심과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기대에 반대하기 위해 불필요함-무익함-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일을 감당하려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일’을 자유롭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신념이다. 영광스러우면서도 힘든 목회자의 삶에서 복음의 필요성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으려 하는 것이다.
서약 -안전 장치
나는 최근에 목사 안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렀다. 목회 사역 40주년을 기리는 기념일이 다가오자 목사 안수를 받았던 당시에 서약했던 8가지 서약의 내용들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특히 나는 얼마 전에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목사 안수 때 했던 서약이 지난 40년간 가파른 절벽 표면에 단단히 박혀있는 하켄 같은 기능을 해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서약은 감정이나 기후, 계산 착오와 피곤함에 상관없이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지탱해준 걸이못과 같았다. 비전과 소명, 위기와 영감 등은 목사가 되거나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이를 때 누구나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안전장치’가 없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약을 한다. 교파에 따라 서약의 표현 방식은 약간씩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동일한 기능을 담당한다. 서약은 안전장치인 것이다.
목회자로 부름받은 자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위험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직업적인 종교인이 되어 차츰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목회자들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라는 영역에서 언제나 초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목회자는 결코 ‘크리스천’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더 뛰어난 ‘사역’으로 나아갈 수 없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나 크리스천으로 해야 하는 사역은 “모두 초보자의 심정으로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다.. 크리스천들의 행위가 훈련된 일과나 절차나 학습된 기교적인 의의 형태를 보일 때, 그 행위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크리스천들은 여러 가지 일에서 대가나 거장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크리스천이라는 영역에서 대가나 거장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안수 받으며 한 서약의 여섯 번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이 여섯 번째 서약은 전문가처럼 행세하려는 잘못된 태도를 막아주는 보호 장치 역할을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주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는가?”
어떤 경우든 간에 목회자들은 교인들과의 별개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간주된다. 목회자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리더십이 향상될수록 겸손한 모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따라서 리더이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그 때 이런 안전 장치가 없으면 어떤 때는 경건으로 위장하고 남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자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겠는가?”
목사로 안수 받은 자가 수행하는 리더십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상처를 입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목회 사역과정에서 객관화된다. 목회자와 가장 가까운 이들은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애정(배우자, 자녀, 친구)이나 예수님의 명령(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 따라 최우선으로 사랑받아야 마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능적으로 변해간다.
‘예수님을 위한 사역’ 또는 ‘교회 사역’의 압박감 때문에 예전에 친밀했던 이들을 직무적인 관점에서 대한다. 이제 그들은 사역을 위한 ‘자원’ 또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거나 ‘자산’이나 ‘부채’ 또는 ‘선발대’나 ‘역기능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널리 유포된 ‘역기능적’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에게, 특히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 단어는 사람이 아닌 기계를 설명할 때나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은 효율성에 대한 평가에 따라 구석으로 밀려나고, 계획이나 프로그램, 목표와 비전, 복음 전도전략과 선교 전략과 같은 추상 개념들이 사랑으로 탈바꿈된다. 결국 목회자들은 순수하게 ‘크리스천’이 되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하도록 안수를 받은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적어도 교회를 위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이웃들은 목회 사역의 이면으로 사라지고 과다한 업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새로운 신자를 인도하고, 전화로 심방하며, 적대감을 품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무기력한 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을 확신하는 온갖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목회자의 그런 활동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역기능적인 존재로 낙인찍힌다.
‘죄인’이라는 성경적인 용어가 ‘역기능적인 인물’이라는 세속적인 용어로 대치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죄인이 범한 잘못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성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역기능적인 사람의 잘못은 목회자가 세운 계획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용어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사용된 단어는 우리의 인식 방법이나 생활 방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는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 “나와 너”를 저술했다. 부버는 그 책에서 사람들을 ‘너’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한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공동체가 비인간화된 폐허로 변질되는 무서운 사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는데, 사회는 중요한 역할과 효율적인 기능만을 중시하는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부버는 또한 인간 관계 속에서 ‘나와 너’ 라는 허물없는 친밀감을 연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인간은 때때로 역할과 기능이 심각하게 요구되지 않는 영역으로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영역이 인간의 영구적인 상태가 되고 주변의 가까운 이들이 대상으로 객관화되면, ‘너’는 사라지고 ‘그것’만 남게 된다. ‘그것’이라는 용어는 아무리 공정하고 명예롭게 사용된다 하더라도, 일단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이 자행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세상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역 환경으로 갖지만 또한 그 광대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교회 조직에 들어가 교회를 위한 사역을 감당한다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로 인해 목회자 세계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적이나 경쟁자로 보기 쉽다. 목사로 안수 받은 이들은 여러 위원회와 계획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을 위한 시간이나 에너지는 그들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고 세상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져 버린다. 교회 업무가 유지되려면 목회 사역에 뛰어든 많은 남녀 사역자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목사로 안수받고 나서 오래지 않아 목회자들은 세상의 화목을 위한 사랑을 베푸는 사역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교회의 과다한 업무와 협의 사항에 징집된다. 교회 업무는 세상을 위해 세움을 받은 목회자들을 바로 그 세상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목회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공격하거나 회피하며, 또는 세상과 경쟁하는 데 급급하게 만들어 더 이상 세상의 화목을 위해 중요한 사역-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며 목회자들은 그 사역을 위해 세움 받았다-에 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회자와 증인으로 행하는 사역들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무디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세상과 경쟁하게 하고, 세상을 회피하도록 만들 때, 목회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심각하게 왜곡된다. 이럴 때 서약은 중요한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2장 회복을 위한 전주곡/ 마르바 던>
목회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면 목회 사역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게 솔직하고 정직한 자만이 진정한 성장과 안정을 맛볼 수 있다. 내가 한쪽 발에 교정신을 신은 이상한 모습으로 리젠트 신학교 컨퍼런스에 나타난 이후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목회자들은 교정용 신발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행하려면 겉만 화려한 모습들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저마다의 장애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한다.
당신도 시간을 내어 자신이 겉만 그럴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온갖 방법들과 모습들을 내세우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실체와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려 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사역’을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가? 유진 피터슨이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불필요한’ 역할 속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필요한’ 일들을 하려고 나서지는 않는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자.
앞에서 말한 겉만 화려한 모습에 대한 경고는 이 책에서 탐구하게 될 에베소서의 원색(原色)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속성과 중재 사역으로 그분의 종이 될 수 있는 토대가 자유롭게 형성되었으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송영(Doxology)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숙고하면, 절대로 거짓된 자아 뒤로 몸을 숨길 수 없다. 그리하면 찬송의 영광과 신비를 깨닫고, 우리의 불필요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된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책에서 에베소서의 모든 내용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목표는 각 장에서 ‘불필요한’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특정한 본문을 사용해 특정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에베소서의 원색을 제공해 줄 것이고,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원색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상황을 숙고함으로써 구체적인 적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놀라운 송영으로 시작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Doxology(송영)’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 즉 영광(doxa)과 ‘말씀(logos)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간단히 정의한다면 송영은 영광에 대한 말이다. 찬양, 진정한 찬양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찬양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찬양과 즐거운 노래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찬양은 단순히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나 기분이 들뜨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과 행동을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그저 “내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에 찬양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 시편들은 종종 찬양에로의 부름과 찬양의 선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찬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선포한다. 그러므로 송영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그 영광을 보고 듣는 자들에게 힘을 주는 찬양이다.
<3장 살아있는 송영이 되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비생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아무 사심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그 찬양이 우리 기분을 더 좋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참되고 올바른 기쁨-기쁨이 행복과 같은 말은 아니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겸손하고 성의있게 반응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순수하게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결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심없이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적인 이유다.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우리들은 언제나 죄악 된 자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사단으로 인해 시험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통과하게 해주는 것은 찬송의 훈련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우리가 받은 모든 복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완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분께 감사하라. 그 다음에 성도의 자유함을 가지고 거룩한 생을 영위하라.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청년들은 많지만 아들들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청년이 된다는 것은 순간적인 희열로 인해 소리치며 법석을 떤다는 뜻이다. 성경 저자들은 아들이 된다는 말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그들은 아들의 권리에는 일정한 책임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어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의무와 헌신과책임이 요구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소유라는 개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면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 문화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기쁨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다.
잠시 당신의 삶-사적인 생활, 공적인 생활, 교회 생활-에서 찬송의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라. 어떻게 하면 교회들이 더욱 깊은 찬송을 들릴 수 있을까? 찬송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찬송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송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을까?
<4장 바울과 로마 :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회복하라 /유진 피터슨>
바울이 목회신학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로마서에서 4가지 요소를 추출해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4가지 요소란 성경에 복종함, 비밀에 대한 인식, 언어사용, 공동체에 열중함 등이다.
성경에 복종함, 비밀에 대한 인식
성경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려는 학생의 태도가 아니라 성경본문에 따라 살아가려는 제자의 자세였다. 로마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비밀로서 받아들여질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에 대한 책이다. 바울에게 있어 비밀이란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알게 되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 사역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된 하나님의 계시다. 우리가 이러한 비밀을 받아들이려면 상당히 겸손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비밀 앞에서 우리는 어느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삶을 문제로 여겨 접근하는 태도와 삶을 비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구분했다. 삶을 문제로 여길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언가를 할수 있는 수준으로 삶을 하락시킨다. 하지만 삶을 신비로 여기고 접근하면 우리의 한계를 능가하는 의미에 영원히 다가가고, 우리의 계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힘과 자원들을 얻는다. “신비는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의 실재다.”
스스로 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목회자는 이미 알려져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사역한다. 그리고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 불필요한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항상 기쁨을 잃지 않는다.
언어사용
은유는 우리를 언어 속으로 끌어들여 그 언어에 참여자가 되게 함으로써 방관자로 남아있지 않게 한다. 불행하게도 일부 주석가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현실적인 은유들을 모호하게 추상적인 진리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은유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일종의 거짓말이다. 당신을 자기만족적인 방관자의 상태에서 이끌어내 언어자체 속에 연루되게 하는 의도된 거짓말이다.
공동체에 열중함
목회신학에서는 모든 사람을 관계성 속에서 파악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목회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관계성 속의 개인들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목회신학은 추상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사로운 경우에 치중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만 치중한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목회자는 사람들을 관리한다. 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고, 나이, 성별, 인종 그리고 여러 다른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목회자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다. 내가 어릴 적에 겪은 제초제와 살충제에 얽힌 경험담을 생각해보자. 정부의 농학 연구소와 화학비료 회사의 영업 사원들은 여러 곤충과 병을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화학비료를 사용하길 권했다. 전문가의 열성과 권유에 탄복한 농부들은 그들의 말을 따랐고 정말 생산량은 현저히 증가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농토는 불모의 땅이 되었고 토양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유기 농산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경작하는 목회 신학의 농토를 생각해 보자. 영적 리더십에 혁신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다고 약속하는 살충제와 제초제는 바로 이성주의와 기능주의다. 이성주의와 기능주의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사고 속에 숨어있는 무지와 오류들을 제거해준다고 약속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의 행동 방식에 내재된 비효율성과 쓰레기들을 일소시켜주겠다고 공언한다. 우리는 그러한 화학비료들을 구입한다. 실제로 그 약품들은 약속한 정도의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 화학 비료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더욱 박식하게 만들어주고, 교회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점차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신학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해 점점 관심을 잃게 만들며, 목회 사역은 관계성 속의 사람들을 외면하게 한다. 목회와 신학이 성경적인 원천에서 분리되고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전문화되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길을 잃고 헤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의 로마서는 유기적이고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본질적인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5장 정사와 권세에 대항해 승리하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나는 리젠트 신학교에서 열렸던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청지기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들이 ‘특급 우편 배달부’를 길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직분자들을 훈련시켜 교인들의 집에 보내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약속을 행랑에 모아서 가져오게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목회자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초청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교회 예산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는 공동체의 사역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당신의 교회가 청지기 훈련 프로그램과 같은 수단에 의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다른 영역에서 의심스러운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사실은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들이 예배시간에도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정사와 권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악한 세력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얼마나 교묘하게 공격해 오는지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런 세력들을 대적하고 그들의 공격에 저항할 때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신앙공동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호해야 한다. 악한 마귀가 던지는 불화살은 공동체 내에서 불평을 일삼는 자들을 통해 사정없이 날아든다. 우리가 성경적인 바탕에서는 진실한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들은 서슴지 않고 우리를 무능력한 목회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럴 때 목회자는 악한 세력들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불평하는 자의 입을 막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문제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영적인 싸움을 간파해야 한다.
<6장 디모데와 에베소 :지혜를 가르치라 /유진 피터슨>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가르치기에 교회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는가? 목회자는 가르치는 이들의 개성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의 가족, 직장, 이웃, 죄악, 그리고 그들의 삶의 여정-이 모든 영역을 오랜 시간을 두고 때로는 수십년 동안 관찰할 수 있다. 학교는 학생들을 한정된 시간 동안 그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가르친다. 학생들의 개성과 특성과 삶에 내재된 다양한 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환경에서 그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가르치는 대상인 교인들의 주된 삶의 영역이 생생하게 파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만난다.
지혜의 스승이 되기에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장소는 바로 교회다. 지혜의 가르침은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영역이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있었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를 맡고 있다. 바울의 말을 명심하자.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4:6) 진리는 순전하고, 분명하며,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7장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바울의 기도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하나님이 거론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인간 중심의 문화 속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은혜는 언제나 필수적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범하는 가장 심각한 잘못은 설교를 선포적인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치료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교의 초점은 듣는 이들에게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있지 않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그들의 삶을 고치며 그들의 태도를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전을 거부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설명하기 위해 설교한다.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점에 대해 과정하여 말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라는 충고가 필요 없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사역 대상인 무수한 형제 자매들에게는 그런 설교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교파를 초월해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러갈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설교가 아닌 사람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다.
<8장 디도와 그레데 : 공동체 형성을 위한 패러다임 /유진 피터슨>
일반 대중들의 여론과는 정반대로 목회자는 세상 모든 경향을 추구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악의는 없으나 무지한 요구들로 인해 충분히 괴롭힘을 당했다.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신앙의 텍스트인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목회 사역의 의미를 분명히 규정하는 안수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의 ‘필요성’에 대한 상황은 더욱 열악해진다. 이 책에서 마르바와 내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시켜주려고 애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세상 문화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기술과 경험을 측정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전산화되어 주일학교 교실을 도색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할 때는 자료들을 뒤적거려 적절한 인물을 찾아낸다. 게다가 큰 승용차를 소유하고, 문서 업무 수행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며, 재정적인 능력을 겸비하며, 꽃꽂이를 할 수 있고, 고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 중에서 중고등부 교사를 찾아내려 한다. 물론 교회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으므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공동체 속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찾고 그들의 수준을 결정하는 이런 방법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인들을 기능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이 신앙 공동체와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능력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목회 서신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관계성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남자와 여자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구성원들의 능력이 아닌 올바른 성품을 기대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조직체를 구성하는 업무가 아니다. 공동체 건설은 관계성에 바탕을 둔 사역이다. 성경에 제시된-여덟 가지의 긍정적 조건과 다섯 가지의 부정적 조건을 둔- 감독의 규율을 보자.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7절).
성경에서 직분자의 직무 내용 설명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인격 형성에 대한 관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도자들은 기능이나 그들의 ‘은사’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앙 공동체는 사람을 사용하는 성령에 의해 발전한다. 성령님께서는 성숙한 관계성을 유지한 인물들을 사용하신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습관을 지닌 이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더십’이라 일컫는 것들은 실질적인 리더십과 무관한 것이 태반이다. 한 학생이 학기말 리포트에 다음과 같이 내용이 있었다.
“내가 목회자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당신이 목회자들이 조작하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면 그들은 당신이 지닌 고귀함을 함부로 내팽개칠 것이다.. 리더십은 리더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 공동체에서 지도자를 양육하는 사역에 임할 때 목회 서신의 내용을 충실히 따른다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에 대해 설명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을 흔적없이 버려야 한다. 카리스마에 관한 언급은 모두 잊고 인격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 신뢰할 수 있고 신실한 믿음을 지닌 성숙한 사람을 먼저 찾으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하라. 칭찬을 받으려 하고, 정력적으로 위대한 사업을 추진하며, 교인들 속에서 활력소가 되려는 이들은 바람직한 리더십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9장 공동체를 세우라는 부르심/ 마르바 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불필요하게 보이는 목회자들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성도들이 사회에서 화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그들이 서로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 위협하고 공동체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화해시키며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분임을 목회자는 말해야 한다.
에베소서의 화해에 관한 본문을 보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4~22)”
우리는 이 모든 화해와 건축 과정에 전혀 필요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친히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평안을 선포하셨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재발견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역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일을 완성하는데 우리는 전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닫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변화의 역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필수적이다. 세상에 난무하는 불일치와 분열은 스스로 화목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증거다.
이제 에베소서에서 이끌어낸 주요 주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1. 송영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우리가 혼자 힘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불필요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2. 정사와 권세들은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고, 우리 스스로를 필요한 존재로 여기게 하고, 우리의 소명을 망각하거나 혼동하게 하며, 선한 요소들을 적절한 한계 이상으로 확대시키려 한다.
3. 성경은 우리가 주변 문화에 대해 얼마나 불필요한지 보여주고, 그러한 불필요한 역할 속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의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상기시켜준다.
4.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의 불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는다. 모든 것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서로를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 그 몸이 자라나도록 협력하기 때문이다.
출처 :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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