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저도 어릴 적에 성당에 다녔고, 천주교에 순수한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저는 무조건 기독교가 옳고, 천주교는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천주 교회 보다 깨끗하지 못한 기독 교회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천주교의 시스템이 잘못되었고, 역사적으로 많은 과오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종교에서 시스템을 이루는 것은 교리와 관습과 의례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초대 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잃어 버리고, 이방 종교의 풍습과 성경에 근거 없는 인간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첨가했습니다. 또한 한 때 성경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고,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카톡릭은 역사적으로 순 기능도 가지고 있는데 삼위 일체론을 확립했고, 신본주의적 사상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황의 교시나 교리를 성경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전통과 권위도 성경에 적혀 있는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적혀 있는 진리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요,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 목차 1. 로마 카톨릭의 기원 2. 카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 역사 3. 교황 제도 4. 마리아 숭배 5. 카톡릭 성직제도와 고해 성사 6. 우상 숭배 7. 종교개혁과 기독교 박해 1. 로마 카톨릭의 기원 3세기까지도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기를 장악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기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 후의 신성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틴 황제(AD 306-337)와 유스티니안 황제(AD 527-565)는 교황권을 양육하여 중세기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수였던 막센티우스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313년 3월에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AD 313),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326년 콘스탄틴황제는 선동죄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 파우스타 (Fausta)의 라 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습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375년 이제까지 로마황제들이 공식명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비로소 포기하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고 있습니다. 476년 서로마가 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중세기 동안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했습니다. 533년에는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을 534년에 그의 법전에 편찬했습니다. 538년에는 아직도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 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드를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기의 권좌 (權座)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왕 피핀(Pepin 741-768)은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마교황을 적극 후원하여, 754년에는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피핀 왕의 아들 촬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신성 로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년 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습니다. 2. 카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 역사 3. 교황제도 교황 세르기우스 3세(A.D. 904~911)는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었고, 여자과 관계해 불법으로 사생아를 낳았습니다.교황 요한 12세(A.D. 955~964)는 성적으로 문란해 교황청에 창녀들을 불러들였고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교황 요한 15세(A.D. 985~996)는 교회 재정을 자기 친척들에게 나누어 줘 부패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8세(A.D. 1012~1024)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주고 교황직을 산 부도덕한 인물입니다 교황 베네딕트 9세(A.D. 1033~1045)는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가 추방당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3세(A.D. 1160~1216)는 종교재판소를 창설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백만명 이상 살해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A.D. 1410~1415)는 주교와 사제로 구성된 37명의 증인에 의해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의 수녀들을 겁탈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2세(A.D. 1458~1464)는 육욕에 빠지는 방법을 가르쳤고, 많은 사생아의 아버지였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8세(A.D. 1484~1492)는 여러 여인과 성관계를 통해 16명의 자녀를 두었고, 자녀 중 몇 명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고, 교회 직분을 늘려 돈을 받고 팔았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투우 경기를 벌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A.D. 1513~1521)는 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세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값비싼 유흥과 연회를
[우리(주: 교황들)는 이 땅 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상권을 뜻한 것으로 성경에서 그에게 돌려진 모든 명칭들은, 교황에게도 마찬가지로 [세 관으로 꾸며진 이 삼층관을 받으소서. 당신은 군주들과 제왕들의 아버지이며, 세계의 주교요, 구세주 예수 4. 마리아 숭배
A.D. 313년 로마 교회가 국교화 되면서 이방종교가 금지되었으므로 이교도들은 그들의 여신숭배 사상을 교회 내에 가져왔고, 로마 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이를 용인하였습니다.점차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는 마리아 숭배로 옮아가게 되었습니다. A.D.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는 마리아 숭배를 카톨릭의 공식 교리로 채택하였습니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처녀와 어미의 여신 다이아나를 숭배하던 도시였습니다.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에베소 거민들은 스스로 여신 우상을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일 2/1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누가 1/46~47 마리아가 이르되, 내 혼이 주를 드 높이고,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느니 우리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 중보자(Mediator)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라고 해서 평생 처녀로 지냈다고 합니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했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1854년 교황 피오 9세가 선언한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입니다.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명시합니다.(로마서 3/10~11) 카톨릭은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해 하늘 여왕이 됐다고 가르칩니다.몽소승천 교리는 A.D. 195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그러나 성경은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명시합니다. (요한 3/13)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는 고대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주교는 로사리오라고 불리는 묵주를 기도할 때 사용합니다.그런데 이 묵주는 불교에서 쓰는 염주와 다를 바 없고, 고대로부터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기구입니다.수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염주를 사용해 알라신에게 기도했습니다. * 묵주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에 친구하고 1)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이신 마리아 2)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 5. 다음의 묵주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묵상 주제인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중에서 완전한 로사리오에는 성모송 53번, 주기도문 6번. 성체송 5번, 성체 묵도송 5번, 영광송 5번, 사도신경 5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모송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 기도문보다 9배나 더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문 외듯이 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은 이교도적인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도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 6/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5. 카톨릭 성직계급과 고해성사신부님에 대한 호칭이 서양에서는 Father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서 신부(神父)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냅니다. 로마 교황을 나타내는 Pope란 단어도 아버지라는 의미의 단어를 조금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아버지(Father)라고 불렀습니다. 천주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속죄는 선행과 기도와 고해성사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의 권리는 예수님께만 있고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을 수 있는데도, 카톨릭은 죄 많은 인간인 신부에게 죄를 고백해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습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사함을 얻습니다. 구약시대에 내 죄를 어린양에게 안수해 전해준 후 양의 피를 흘림으로써 죄사함을 받았듯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 내 모든 죄를 가져가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내 모든 죄가 눈 보다 더 희게 씻어진다는 것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카톨릭에서 교황 다음 가는 직분으로 추기경이 있는데, 성경에는 추기경이라는 직분이 없습니다. 추기경은 원래 로마 이교도들의 성직으로 추기경을 의미하는 Cardinal은 돌쩌귀(문을 여닫기 위해 경첩과 같이 쇠붙이로 된 물건)를 의미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월을 의미하는 January도 시작의 신이란 의미를 가진 야누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자'로 알려진 야누스는 사탄이 하늘 시스템을 흉내낸 것이고, 천국과 지옥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계 3/7~8) 카톨릭의 교권체제는 이교도들의 대승원장(Pontifex Maximus)을 수장으로 하고 승원장(Pontiffs)들이 그를 신약시대에 성경에 명시된 교회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감독과 목자(목사)와 장로는 같은 직분입니다.)와 교회 실무를 담당하는 '집사'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했고, 장로는 양떼를 먹이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5/1~3) 카톨릭의 대주교(archbishop), 대사제(archpriest) 등에서 'arch'는 지도자 또는 선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선생(master)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고,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 하셨습니다.또한 교회에서 큰 자는 오히려 형제를 섬겨주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상하관계는 있을 수 없으며, 개신교에서도 목사와 성도는 주님을 모시는 한 형제입니다. 마태 23/10~11 또 너희는 선생이라고도 불리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라. 6. 우상 숭배 그리스도인 감독(司敎)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다른 종교의 숭배자들이 그들의 상상적인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였던 종교의식들과 제도들을 조금씩만 고쳐서, 그리스도교 예배에 끼어 넣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교도(異敎徒) 대중들로 하여금 이런 의식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래(傳來)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바뀐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순교자들도 이전에 자기들의 신들이 경배받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배되고 있는 줄로 안다면, 그들이 더욱 쉽사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 카톨릭교회들은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고, 분향하고,절하는 일이 지나쳐,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등 그 퇴폐함이 극에달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상 파괴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인데 우상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지금도 그 때와 a) 오벨리스크 숭배
더구나 이 오벨리스크는 모조품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던 고대 유물을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바티칸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4m이며, 기초까지 합치면 40m이고, 무게는 무려 320톤이나 나갑니다. A.D. 1586년에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령으로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으로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일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이 오벨리스크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폰타나라는 사람이 책임을 맡고 45개의 감아 올리는 기계와 180마리의 말과 800명의 작업대원을 이끌고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1586년 9월 10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벨리스크는 운반되었고, 성공적으로 세워지자 수백개의 교황청은 이집트 우상 꼭대기에 십자가를 안치함으로써 신성 모독적인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후 교황은 미사를 거행하였고, 작업대원과 말들에게 복을 선포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주위에는 24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런 건축양식은 이교도들의 신전설계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b) 태양 숭배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태양을 숭배했습니다.이러한 태양 숭배의 영향을 받아 성찬에서 쓰이는 성병(聖餠)도 동그랗게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종교에서도 사제들이 태양신에게 둥근 빵을 재물로 드렸습니다.성체를 모시는 성체 헌사대는 좀 더 적나라하게 태양 햇살까지 표시되는 문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중앙 제단에는 뱀처럼 꼬인 기둥 사이에 빛이 들어 오는 태양 형상이 있습니다. 바빌론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단에도 이러한 형태의 금으로 만든 태양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건축가들이 신전에 태양 문양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는데, 태양신이 악령을 쫓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고, 태양신이 수레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바알과 태양신과 달과 행성에게 분향하던 제사장이 있어 요시아 왕이 이를 개혁한 적이 있습니다.(왕하 23/5) 바빌론의 벨 신전에서는 8개의 살을 가진 태양신을 상징하는 수레바퀴가 발견되어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수레바퀴 문양이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에도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버젓이 새겨져 있습니다. 카톨릭의 성화 속 인물의 머리 주위의 밝은 원과 수도승의 로마식 둥근 삭발도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찬란한 제복, 촛불, 종, 향, 음악 등이 모두 이교도의 풍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c) 우상숭배 금지를 제거한 카톨릭 십계명 바티칸 성당은 온갖 우상으로 불교의 사찰(寺刹)을 방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로마교회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5)는 둘째 계명을 달가와할 리가 없고, 첫째 계명에 포함되었다는 애매(曖昧)한 이유를 붙여 삭제(削除)해 버렸습니다.
7. 종교 개혁과 기독교 박해 a) 종교 개혁 유물과 교회 직책, 면죄부를 파는 일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큰 사업이었습니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A.D.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했습니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은 많은 도시와 땅을 소유했고, 교회에 강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축적했습니다. 중세에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죄를 용서하는 문서를 팔았습니다. 마틴 루터 당시에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기 때문에 교황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면죄부 판매에 열중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 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 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었습니다. 돈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고통 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 받습니다." 카톨릭 신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면제부를 파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b) 기독교 박해 (종교 재판) 중세시대에 카톨릭의 타락과 모순에 대항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되어 참혹한 고문과 희생을 당했습니다. A.D.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카톨릭과 카톨릭의 영향권에 있는 권력자들이
그들은 집게로 손톱을 뽑아냈고, 남녀 성기를 불로 지져댔으며, 큰 롤러에 송곳을 달고 개신교도 위에서 굴렸으며,고문기구로 손 마디와, 다리와 발가락을 뭉갰습니다.또한 희생자의 옷을 벗긴 뒤 줄로 팔을 등 뒤로 묶었고, 도르레를 사용하여 몸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귀와 입에 끓는 납을 부어 넣었고, 눈을 빼거나,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構킬? 긴 못이 박힌 낭떠러지에 던져 넣었습니다.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 당한 사람은 감옥에 벽의 쇠사슬에 묶였고, 피로 가득찬 고문실에 살고 있는 쥐와 해충의 먹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종교 재판은 점점 대량학살로 이어졌는데 A.D. 1209년 베지에르라는 도시에서는 6,000명이 칼로 살육당했고, A.D. 1211년 라바우어에서는 10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메린돌 대 학살에는 500명의 여인들이 창고에 갖힌 채 불어 타 죽었고, A.D. 1562년 오렌지 대학살에서는 교황 비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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