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lligent Design, 지적 설계
...DNA가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은 1/1040,000 이다[프레드 호일에 따르면, Evolution from Space,1981].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매우 잘못된 것이다.
DNA는 순전히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연과 물리학 법칙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 법칙이 없이는 지구상의 생명체는 60억 년 간의 짧은 시간으로는 진화할 수 없을 것이다.
핵력은 프로톤과 중성자가 원자의 핵안에서 결합하는데 필요하며, 전자기력은 원자와 분자를 서로 모으는데 필요하며,
중력은 생명에 필요한 구성 성분들이 지구 표면으로 모으는데 필요하다. --Victor J. Stenger*
... 드믈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그 어떠한 것의 증거도 될 수 없다.
13개 카드로 이루어진 브릿지 게임을 생각해 보면, 어떤 특정한 패가 나올 확률은 6천억분의 1 미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패가 나올 확률이 6000억분의 1이라고 해서, 그것을 계산하고, 손에 쥐어진 패가 나올 확률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손에 쥔 그 패가 나오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 될 것이다. --John Allen Paulos, Innumeracy: Mathematical Illiteracy and its Consequences
지적 설계는 값싼 턱시도를 차려 입은 창조론에 불과하다. --Dr. Leonard Krishtalka, director of the University of Kansas Natural History Museum and Biodiversity Research Center
지적 설계(ID)는 지성체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다양성의 원인이라는 이론이다.*
지적설계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이며, 신의 존재나 초지성적인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그들의 생활 시스템안의 설계를 경험적으로 검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지적 설계는 과학적인 자연 선택설에 대안이기 때문에 과학 교실에서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한다.
지적설계의논증은 창조론 논증의 재탕처럼 보이지만, 지적설계를 방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신들이 이해하는 성경과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선택이 설계 혹은 창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넌센스이다.
신이 자연 선택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창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단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전능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지적 설계를 방어하는 사람들의 한명인 UC 버클리 대학의 법학 교수인 필립 죤슨은
자연선택에 대한 다윈의 이론이 (1)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자연 선택은 오직 무작위적이고 우연히 일어날 뿐이다. (3) 무작위적이거나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신에 의한 설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완전히 잘못이해하고 있다.
위에 말한 3가지중에서 자연 선택에 필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믿는 것과 자연 선택설은 전혀 불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신에 의해서 설계될 수도 있다. 혹은 자연선택은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적설계의 옹호자들이 범하는 몇가지 오류의 첫 번째는 거짓 딜레마이다.
선택해야 할 것은 자연선택이냐 혹은 신이나 다른 초지성적인 생명체에 의한 설계이냐가 아니다.
신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무작위적인 사건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발생하도록 우주를 설계했을 수도 있다.
신은 초지성체적인 외계인을 창조하여 그들이 자연선택 실험을 했을 수도 있다. 초지성적인 외계인은 자연 선택에 의해서 진화되었을 수도 있고, 그 이후에 그 과정을 지구에 옮겨 놓았을 수도 있다.
자연 선택 (혹은 지적설계)보다 생명체와 생태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과학적인 이론이 있을 수도 있다. 가능성만 말하자면 끝이 없으며, 분명한 것은 지적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지 2가지 뿐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지적설계의 옹호자로 자주 인용되는 두명의 과학자는 다윈의 블랙박스(The Free Press, 1996)를 쓴 마이클 비히와 '지적설계"과학과 신학의 다리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를 쓴 윌리엄 뎀스키이다.
뎀스키와 비히는 시애틀에 있는 '디스커버리 연구소(Discovery Institute)'의 동료이며, 이 연구소는 주로 기독교 신자들이 자금을 지원한다.
그들의 논증이 흥미를 끄는 것은 논증이 과학적인 용어로 구성되었으며, 과학적인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증은 기능 면에서는 창조론자들과 동일하다.
즉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자연 선택의 약함을 발견하는데 주로 노력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의 논증이 자연 선택에 대해서 성공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지적설계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비히는 리하이 대학의 생화학 부교수이다.
비히의 논증은 기본적으로 진화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적 설계의 질문에 대한 실제 실험실 연구"를 보기 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망이 그를 과학/형이상학의 구분에 무관심이 거짓임을 보이고 있다.
세상에 신의 존재하는가를 결정하는 적절한 실험은 없다.
어쨌거나, 비히는 생화학은 세포 세계에서 드러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분자와 경이적인 복잡성은 점진적인 진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지적인설계자 즉 하느님을 가정해야만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부 시스템은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보다 앞선 시스템은 정의에 의해서 하나의 구성성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경우에 전혀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39)."
그는 예를들어, 환원 불가능할 만큼 복잡한 시스템으로 쥐덫을 들고 있다. 즉 쥐덫이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이 꼭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비히는 오래된 술을 새 부대에 넣은 것이다. 즉, 설계 논증을 생화학에 끼워 넣은 것 뿐이다.
그의 논증은 설계논증의 다른 변종보다 더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기독교 신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비히가 그만 우쭐 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증이 모두 그렇듯이, 비히도 새로운 질문을 하게 한다(역주 : 미증명 가정 근거의 오류).
즉, 그는 설계를 증명하기 위해서 설계를 가정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비히가 훌륭한 과학자이고 작가로 보이지만, 그는 2류 형이상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논증은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의 개념에 의지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만약 여러 부분중에서 한 부분만 없어도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은 ...다윈 방식으로 진화할 수 없으며, 이는 자연 선택이 오직 한 번에 한 구성요소에서의 작은 돌연변이만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지석 설계가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의 원인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한다.
기독교 신자이며 생물학 교수인 케네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생물학 시스템은 비히가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같이 진화한 것이며, 시스템 자체가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확대되고, 새로운 목적에 알맞게 적응한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눈먼 시계공"에서 성공적으로 논증했듯이 자연 선택은 그들의 형태가 변화하는 모든 단계의 진화에 작용할 수 있다.*
바르텔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우리가 비히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설계를 분리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엉터리 설계로 보이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우리는 항상 엉터리 살계를 한 회사를 고발한다.)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비히는 설계를 "목적을 가지고 각 부분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만약 각 부분들이 어떠한 표준적인 공학 기준에 합당한 목적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척추, 여성의 산도(産道, birth canal), 전립선, 목구멍의 뒷부분 등과 같은 "완전 주먹구구식 설계"에 마주친다면, 비히와 지적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으로 물러난다.* [즉, 신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거나, 혹은 우리는 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다는 등으로 변명할 수 있다.]
알렌 오르(H. Allen Orr)는 다음과 같이 썼다.
비히의 커다른 실수는 이러한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다위니즘적인 해결책은 더 이상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하나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은 처음에는 단지 이익이 되기 위해서 한 부분이 추가되고 이것이 나중에 변화되어 필수적으로 되었을 수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일부 부분(A)이 처음에는 같은 일을 맡는다(아마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다른 부분 (B)는 A를 돕기 위해서 추가된다. 새로이 추가되는 부분은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고 단지 개선한 것일 분이다. 그러나 나중에 A 혹은 다른 것이 B가 필수적인 것이 되도록 변화한 것일 수 있다. 이 과정은 다른 부분이 이 시스템안에 더 들어오면 계속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부분들이 꼭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히의 논증은 자연 선택은 현재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질문을 야기한다(역주 : 미증명 가정 근거의 오류). 사실, 비히나 다른 지적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연선택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들의 몇가지는 사실 자연 선택으로 설명이 된다.
뎀스키(Dembski)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 Intelligent Design: The Bridge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1998)은, 베일러 대학의 교수이다.
뎀스키는 그가 생명과 우주는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우연히 발생할 수 없으며, 이것은 신에 의한 지적 설계의 결과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과학 이론의 개념적인 건전성은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유지될 수 없다" 주장했으며(209), 이러한 주장은 그의 형이상학적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다.
"The Emperor's New Designer Clothes,를 쓴 물리학자인 빅 스텐져에 따르면 뎀스키는 자신이 정보 보존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도하기 위해서 수학과 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생명체의 구조에 포함된 정보는 우연과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발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뎀스키의 정보 보존의 법칙은 "엔트로피 보존"과 다를바 없는 것이며, 엔트로피 보존은 열역학 2법칙의 아주 특수한 사례로, 마찰과 같은 무산구조가 없을 때 적용된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자연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 의해서 매일 수천번이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마찰이 발생할 때마다, 정보는 소실된다."
(역주 : 엔트로피는 열역학과 정보 이론에서 약간 다르게 사용됩니다. 열역학에서는 특정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무질서도가 증가되지만, 정보이론에서는 엔트로피가 높아질수록 정보량이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보이론에서는 정보의 내용의 진실 여부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이비과학
지적설계는 과학이론이 아니며, 자연 선택이나 혹은 그 다른 과학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는 신이 설계했거나 아니거나 우리에게 똑 같이 나타나 보일 것이다.
경험적인 이론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는가에 대해서 다루지 "왜"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는가 혹은, 우연히 이러한 것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설계되었을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에서나 하는 것이다. 지적설계는 과학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론이다. 지적설계가 경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예를들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나 소위 창조과학보다 더 과학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적설계는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형이상학에 불과하므로 사이비과학이다.
지적설계는 몇가지 형이상학적인 혼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중의 중요한 것 하나는 '경험적인 것을 다루면 반드시 과학적이다'라는 개념이다.
만약 '경험적인 것'이라는 것이 단지 관찰이나 경험에 근거를 두었다는 의미라면, 이것은 거짓이다.
경험적인 이론이라는 말은 과학적일 수도 있고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융의 집단무의식은 경험적이자만 과학적이지 않다.
성경 창조론은 경험적이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시는 역시 경험적이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이와는 달리, 만약 '경험적'이라는 의미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다는 의미라면 지적 설계는 경험적이지 않다.
자연계나 각각의 생태계는 지적 혹은 비지적으로 설계되었는지 어떠한 관찰을 이용해서도 증명하거나 반증될 수 없다.
설계이론과 자연 법칙 이론은 모두 설계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자연계 전체와 각각의 생태계를 설명할 수 있다.
과학에 일부 형이상학적인 가정이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한가지 중요한 가정는 우주가 자연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이 설계되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은 열려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다. 우주 혹은 우주의 일부분이 설계되었다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우주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만약 "신[혹은 초지성적인 외계인, 그렇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그 어떠한 것]이 그러한 방법으로 만든거야"라고 말했다면 나는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믿음은 엄격한 과학적인 설명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과학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에게 똑 같이 열려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지적 설계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매우 그럴 듯하다고 인정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예를들어, 한 특정한 생태계가 지적인 설계자의 창조라고 가정해보자. 지적인 설계지가 우리 인간의 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것이나 비슷한 설계자의 창조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것이 지적설계의 결과라는 것을 알지만, 그 설계자가 우리와는 다른 질서의 한 부분이라면, 우리가 이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진척시킬 수 있겠는가? 시스템이 설계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그 어떠한 질문에도 우리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겠는가?
바로 "지적설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라고.
게다가, 우리가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설계한, 지적설계자인 신을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이것은 지적 설계를 나타내거나 혹은 지적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이론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나, 아무것도 밝히지 못할 것이다.
지적설계를 이미 17세기에 진 전쟁에서 다시 싸우고 있다.
그 당시에는 자연을 이해하는데 최종적 원인(final causes)과 동인(動因: efficient causes)둘로 나뉘어 싸웠다.
17세기 이전에는, 자연의 기계론적인 관점과 목적론적 관점 간의, 자연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과 초자연주의적인 관점간의 근본적인 갈등이 없었다.
라이프니츠와 그의 지성적인 후예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과학적인 설명이 신학적인 것을 포함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과학의 진보는 부분적으로는 과학자들이 자연 현상의 작용을 창조, 설계, 혹은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하지 않고 묘사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신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창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창조된 자연은 일종의 기계이며, 기계적으로 변화하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을 가정할 필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DNA가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은 1/1040,000 이다[프레드 호일에 따르면, Evolution from Space,1981].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매우 잘못된 것이다.
DNA는 순전히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연과 물리학 법칙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 법칙이 없이는 지구상의 생명체는 60억 년 간의 짧은 시간으로는 진화할 수 없을 것이다.
핵력은 프로톤과 중성자가 원자의 핵안에서 결합하는데 필요하며, 전자기력은 원자와 분자를 서로 모으는데 필요하며,
중력은 생명에 필요한 구성 성분들이 지구 표면으로 모으는데 필요하다. --Victor J. Stenger*
... 드믈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그 어떠한 것의 증거도 될 수 없다.
13개 카드로 이루어진 브릿지 게임을 생각해 보면, 어떤 특정한 패가 나올 확률은 6천억분의 1 미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패가 나올 확률이 6000억분의 1이라고 해서, 그것을 계산하고, 손에 쥐어진 패가 나올 확률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손에 쥔 그 패가 나오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 될 것이다. --John Allen Paulos, Innumeracy: Mathematical Illiteracy and its Consequences
지적 설계는 값싼 턱시도를 차려 입은 창조론에 불과하다. --Dr. Leonard Krishtalka, director of the University of Kansas Natural History Museum and Biodiversity Research Center
지적 설계(ID)는 지성체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다양성의 원인이라는 이론이다.*
지적설계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이며, 신의 존재나 초지성적인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그들의 생활 시스템안의 설계를 경험적으로 검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지적 설계는 과학적인 자연 선택설에 대안이기 때문에 과학 교실에서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한다.
지적설계의논증은 창조론 논증의 재탕처럼 보이지만, 지적설계를 방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신들이 이해하는 성경과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선택이 설계 혹은 창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넌센스이다.
신이 자연 선택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창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단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전능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지적 설계를 방어하는 사람들의 한명인 UC 버클리 대학의 법학 교수인 필립 죤슨은
자연선택에 대한 다윈의 이론이 (1)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자연 선택은 오직 무작위적이고 우연히 일어날 뿐이다. (3) 무작위적이거나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신에 의한 설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완전히 잘못이해하고 있다.
위에 말한 3가지중에서 자연 선택에 필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믿는 것과 자연 선택설은 전혀 불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신에 의해서 설계될 수도 있다. 혹은 자연선택은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적설계의 옹호자들이 범하는 몇가지 오류의 첫 번째는 거짓 딜레마이다.
선택해야 할 것은 자연선택이냐 혹은 신이나 다른 초지성적인 생명체에 의한 설계이냐가 아니다.
신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무작위적인 사건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발생하도록 우주를 설계했을 수도 있다.
신은 초지성체적인 외계인을 창조하여 그들이 자연선택 실험을 했을 수도 있다. 초지성적인 외계인은 자연 선택에 의해서 진화되었을 수도 있고, 그 이후에 그 과정을 지구에 옮겨 놓았을 수도 있다.
자연 선택 (혹은 지적설계)보다 생명체와 생태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과학적인 이론이 있을 수도 있다. 가능성만 말하자면 끝이 없으며, 분명한 것은 지적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지 2가지 뿐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지적설계의 옹호자로 자주 인용되는 두명의 과학자는 다윈의 블랙박스(The Free Press, 1996)를 쓴 마이클 비히와 '지적설계"과학과 신학의 다리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를 쓴 윌리엄 뎀스키이다.
뎀스키와 비히는 시애틀에 있는 '디스커버리 연구소(Discovery Institute)'의 동료이며, 이 연구소는 주로 기독교 신자들이 자금을 지원한다.
그들의 논증이 흥미를 끄는 것은 논증이 과학적인 용어로 구성되었으며, 과학적인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증은 기능 면에서는 창조론자들과 동일하다.
즉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자연 선택의 약함을 발견하는데 주로 노력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의 논증이 자연 선택에 대해서 성공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지적설계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비히는 리하이 대학의 생화학 부교수이다.
비히의 논증은 기본적으로 진화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적 설계의 질문에 대한 실제 실험실 연구"를 보기 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망이 그를 과학/형이상학의 구분에 무관심이 거짓임을 보이고 있다.
세상에 신의 존재하는가를 결정하는 적절한 실험은 없다.
어쨌거나, 비히는 생화학은 세포 세계에서 드러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분자와 경이적인 복잡성은 점진적인 진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지적인설계자 즉 하느님을 가정해야만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부 시스템은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보다 앞선 시스템은 정의에 의해서 하나의 구성성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경우에 전혀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39)."
그는 예를들어, 환원 불가능할 만큼 복잡한 시스템으로 쥐덫을 들고 있다. 즉 쥐덫이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이 꼭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비히는 오래된 술을 새 부대에 넣은 것이다. 즉, 설계 논증을 생화학에 끼워 넣은 것 뿐이다.
그의 논증은 설계논증의 다른 변종보다 더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기독교 신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비히가 그만 우쭐 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증이 모두 그렇듯이, 비히도 새로운 질문을 하게 한다(역주 : 미증명 가정 근거의 오류).
즉, 그는 설계를 증명하기 위해서 설계를 가정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비히가 훌륭한 과학자이고 작가로 보이지만, 그는 2류 형이상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논증은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의 개념에 의지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만약 여러 부분중에서 한 부분만 없어도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은 ...다윈 방식으로 진화할 수 없으며, 이는 자연 선택이 오직 한 번에 한 구성요소에서의 작은 돌연변이만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지석 설계가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의 원인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한다.
기독교 신자이며 생물학 교수인 케네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생물학 시스템은 비히가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같이 진화한 것이며, 시스템 자체가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확대되고, 새로운 목적에 알맞게 적응한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눈먼 시계공"에서 성공적으로 논증했듯이 자연 선택은 그들의 형태가 변화하는 모든 단계의 진화에 작용할 수 있다.*
바르텔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우리가 비히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설계를 분리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엉터리 설계로 보이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우리는 항상 엉터리 살계를 한 회사를 고발한다.)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비히는 설계를 "목적을 가지고 각 부분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만약 각 부분들이 어떠한 표준적인 공학 기준에 합당한 목적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척추, 여성의 산도(産道, birth canal), 전립선, 목구멍의 뒷부분 등과 같은 "완전 주먹구구식 설계"에 마주친다면, 비히와 지적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으로 물러난다.* [즉, 신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거나, 혹은 우리는 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다는 등으로 변명할 수 있다.]
알렌 오르(H. Allen Orr)는 다음과 같이 썼다.
비히의 커다른 실수는 이러한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다위니즘적인 해결책은 더 이상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하나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은 처음에는 단지 이익이 되기 위해서 한 부분이 추가되고 이것이 나중에 변화되어 필수적으로 되었을 수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일부 부분(A)이 처음에는 같은 일을 맡는다(아마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다른 부분 (B)는 A를 돕기 위해서 추가된다. 새로이 추가되는 부분은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고 단지 개선한 것일 분이다. 그러나 나중에 A 혹은 다른 것이 B가 필수적인 것이 되도록 변화한 것일 수 있다. 이 과정은 다른 부분이 이 시스템안에 더 들어오면 계속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부분들이 꼭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히의 논증은 자연 선택은 현재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질문을 야기한다(역주 : 미증명 가정 근거의 오류). 사실, 비히나 다른 지적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연선택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들의 몇가지는 사실 자연 선택으로 설명이 된다.
뎀스키(Dembski)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 Intelligent Design: The Bridge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1998)은, 베일러 대학의 교수이다.
뎀스키는 그가 생명과 우주는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우연히 발생할 수 없으며, 이것은 신에 의한 지적 설계의 결과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과학 이론의 개념적인 건전성은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유지될 수 없다" 주장했으며(209), 이러한 주장은 그의 형이상학적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다.
"The Emperor's New Designer Clothes,를 쓴 물리학자인 빅 스텐져에 따르면 뎀스키는 자신이 정보 보존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도하기 위해서 수학과 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생명체의 구조에 포함된 정보는 우연과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발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뎀스키의 정보 보존의 법칙은 "엔트로피 보존"과 다를바 없는 것이며, 엔트로피 보존은 열역학 2법칙의 아주 특수한 사례로, 마찰과 같은 무산구조가 없을 때 적용된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자연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 의해서 매일 수천번이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마찰이 발생할 때마다, 정보는 소실된다."
(역주 : 엔트로피는 열역학과 정보 이론에서 약간 다르게 사용됩니다. 열역학에서는 특정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무질서도가 증가되지만, 정보이론에서는 엔트로피가 높아질수록 정보량이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보이론에서는 정보의 내용의 진실 여부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이비과학
지적설계는 과학이론이 아니며, 자연 선택이나 혹은 그 다른 과학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는 신이 설계했거나 아니거나 우리에게 똑 같이 나타나 보일 것이다.
경험적인 이론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는가에 대해서 다루지 "왜"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는가 혹은, 우연히 이러한 것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설계되었을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에서나 하는 것이다. 지적설계는 과학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론이다. 지적설계가 경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예를들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나 소위 창조과학보다 더 과학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적설계는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형이상학에 불과하므로 사이비과학이다.
지적설계는 몇가지 형이상학적인 혼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중의 중요한 것 하나는 '경험적인 것을 다루면 반드시 과학적이다'라는 개념이다.
만약 '경험적인 것'이라는 것이 단지 관찰이나 경험에 근거를 두었다는 의미라면, 이것은 거짓이다.
경험적인 이론이라는 말은 과학적일 수도 있고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융의 집단무의식은 경험적이자만 과학적이지 않다.
성경 창조론은 경험적이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시는 역시 경험적이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이와는 달리, 만약 '경험적'이라는 의미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다는 의미라면 지적 설계는 경험적이지 않다.
자연계나 각각의 생태계는 지적 혹은 비지적으로 설계되었는지 어떠한 관찰을 이용해서도 증명하거나 반증될 수 없다.
설계이론과 자연 법칙 이론은 모두 설계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자연계 전체와 각각의 생태계를 설명할 수 있다.
과학에 일부 형이상학적인 가정이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한가지 중요한 가정는 우주가 자연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이 설계되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은 열려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다. 우주 혹은 우주의 일부분이 설계되었다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우주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만약 "신[혹은 초지성적인 외계인, 그렇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그 어떠한 것]이 그러한 방법으로 만든거야"라고 말했다면 나는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믿음은 엄격한 과학적인 설명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과학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에게 똑 같이 열려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지적 설계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매우 그럴 듯하다고 인정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예를들어, 한 특정한 생태계가 지적인 설계자의 창조라고 가정해보자. 지적인 설계지가 우리 인간의 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것이나 비슷한 설계자의 창조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것이 지적설계의 결과라는 것을 알지만, 그 설계자가 우리와는 다른 질서의 한 부분이라면, 우리가 이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진척시킬 수 있겠는가? 시스템이 설계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그 어떠한 질문에도 우리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겠는가?
바로 "지적설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라고.
게다가, 우리가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설계한, 지적설계자인 신을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이것은 지적 설계를 나타내거나 혹은 지적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이론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나, 아무것도 밝히지 못할 것이다.
지적설계를 이미 17세기에 진 전쟁에서 다시 싸우고 있다.
그 당시에는 자연을 이해하는데 최종적 원인(final causes)과 동인(動因: efficient causes)둘로 나뉘어 싸웠다.
17세기 이전에는, 자연의 기계론적인 관점과 목적론적 관점 간의, 자연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과 초자연주의적인 관점간의 근본적인 갈등이 없었다.
라이프니츠와 그의 지성적인 후예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과학적인 설명이 신학적인 것을 포함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과학의 진보는 부분적으로는 과학자들이 자연 현상의 작용을 창조, 설계, 혹은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하지 않고 묘사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신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창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창조된 자연은 일종의 기계이며, 기계적으로 변화하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을 가정할 필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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