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획기적인 이론을 발표한다. 바로 ‘도전과 응전’ 이론이다. “문명이란, 생명에 대한 도전, 그리고 그 응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이론이다.
토인비는 “어느 시대건, 그 시대가 당면한 도전과 과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전이나 과제가 너무 극심하면 응전이 성공적일 수 없으며, 그 응전이 약해지면 문명은 쇠퇴한다는 이야기다.
지배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대개 현재의 성공에 만족해 자아도취에 빠진다. 그러면서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과제에 부실하게 대처하거나, 자신이 ‘성공’했을 때 구사했던 낡은 ‘응전’을 재활용하면서 문명이 혼란에 빠진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토인비는 이런 현상을 ‘휴브리스(Hubris,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오만’이라는 뜻으로써, 토인비는 ‘성찰과 반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와 오만’이라는 의미로 활용)'라고 불렀다.
‘휴브리스’에 빠져 구세대가 된 구체제는 과거의 업적을 이룩한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지나치게 믿어버리면서, 저항하는 대중을 무력이나 폭력 따위의 강압적인 수단으로 탄압하는 ‘지배적 소수(Dominant Minorities)'로 전락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응전 방식과 화두를 들고 나와 과제를 해결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 새로운 세력을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ies)'라고 명명한다.
시대에 맞는 응전 방식을 제안하면서 대중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의 출현, 지배적 소수 전락, 또다른 창조적 소수의 출현 등의 3단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도전과 응전’ 이론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진골의 전횡에 대항할 수 있던 이들은 재당유학파의 주를 이루던 6두품 출신들이었으며, 신라를 무너뜨린 것은 그 당시의 재야로 볼 수 있는,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송악, 평양 계열의 호족들이었다.
조선왕조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국공신 주축으로 구성돼 타락하던 훈구파들을 견제하면서 결국에는 그들을 몰아낸 이들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들이었다.
이제 우리 시대에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 다시 거론될 때가 온듯하다.
친일파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노무현’이라는 상징. 그 상징은 우리 시대의 ‘과제’에 새로운 방법으로 대처할 것을 기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아보인다.
‘지배적 소수’를 상징하던 개발독재세력들은, ‘노무현’의 혼란을 계기삼아 문명의 사이클을 거슬러오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는 ‘재집권’에 도전하고 나섰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 제대로 대처할 ‘창조적 소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문국현과 ‘창조적 소수’
'노무현'이라는 ‘창조적 소수’는, 이라크 파병, 한미 FTA 협상 추진, 비정규직 양산, 등 다양한 방면에서 그가 다시금 야권으로 몰아냈던 ‘지배적 소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지배적 소수’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대연정’을 제안하는 등의 행위에서도 그 스스로도 ‘지배적 소수’로 전락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한나라당은 이명박 예비후보와 박근혜 예비후보를 새로운 후보군으로 내세운다. 개발독재시대의 상징인 국가적 대형공사로 대중에게 어필하려 하거나, 개발독재시대의 몸통이었던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으로 유력 대통령 후보로 부각됐다는 점에서, 이들은 ‘창조적 소수’라고 볼 수 없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응전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표면적인 지지율은 1,2위를 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의 비리들이 노골적으로 터지는 등, 대중의 거부감도 비례한다.
그렇다고 ‘범여권’의 여러 후보들이 ‘창조적 소수’로 부각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손학규 예비후보는 ‘노무현’이라는 현 정권의 핵심으로부터도 견제받고 있으며, 이해찬 예비후보와 정동영 예비후보도 뚜렷한 비전이나 이미지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제각각 교육부 장관 시절의 정책 실패나 ‘노인 발언’ 등의, 상대방이 파고들면 위험해질 수 있는 약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문국현 대안론’이 부상하고 있으며, 8월초에 출마선언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지지율 1,2위를 양분하고 있는 ‘지배적 소수’에 대항할 수 있는 ‘창조적 소수’로서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지배적 소수’들이 내세우는 대통령 후보들은 저마다 “경제”를 내세운다. 그를 지지하는 보수적 대중들도 그들의 ‘경제부활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의 ‘경제부활 논리’는 ‘개발독재시대’의 이미 흘러간 이론들이다. ‘국토개발’을 명분으로 경제 부활을 시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대운하 건설’을 계기로 조장될 우려도 있는 건설업계의 숱한 비리, 반대진영에서 거론하는 ‘대운하의 비현실적인 오류와 구체적이지 않은 생산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문국현은 친환경업체 ‘유한킴벌리’의 CEO다. 유한킴벌리가 내세웠던 친환경적인 이미지와 기업운영방식도 그가 주도했다. 우리시대의 화두는 ‘환경’과 ‘화합’이다.
그는 유한킴벌리라는 유명기업에서 그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법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효과적인 대응’은 ‘지배적 소수’들이 내세웠던 경제논리와 큰 차이가 있다.
그는 ‘4조 2교대 평생학습체제를 바탕으로 지식근로자 양성’, ‘일자리 나누기’, ‘직원 삶의 질 향상’ 등의 방식으로 비정규직 양산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생산성은 더 컸다. 직원의 자발적 의지를 유도하면서, 순이익도 10배 정도 올랐고, 일자리도 늘어났다. 그는 오히려 “지금처럼 대학 갓 졸업한 사람 뽑아 써먹다가 일정한 시점에 몰아내면 가장 낭비적인 구조”라고 주장한다.
"국내에서 산업재해로만 한 해 12조 4000억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300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는 그렇게 언론에서 떠드는 노사분규로 인한 부담이 2조4000억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다.”
"연간 1500(유럽)~1800시간(미국, 일본) 가량 일하는 선진국과 연간 2400시간 가량 일하는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국내 평균 근로시간을 학습 시간까지 포함해 2000시간으로만 줄여도 최소 15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
"문화해설사, 심리도우미, 학습도우미 등 사회적 일자리를 선진국 수준으로 늘리고 변호사, 디자이너, 컨설턴트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인력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기업경영과 국가경영은 다를 수도 있지만, 국가경영을 경험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예비후보가 내세우는 경력 중 하나도 건설회사 CEO 출신이라는 것이며, 박근혜 예비후보는 아버지의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으며 한나라당의 총체적인 패배를 건져냈다는 것 외엔 없다.
범여권에서는 손학규 예비후보가 경기도지사 경력을 내세울만 하지만, 다른 후보들 역시 ‘경영’에 관해서는 크게 내세울 사항은 없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라는 것. 결국 과거의 경력으로부터 추리할 수 밖에 없다.
‘문국현’과 좌우구도 개편
‘지배적 소수’들은 ‘색깔론’을 연상시키려 하거나, 현 정부를 공격할 때 이념을 죄악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정당은 ‘이념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모임’이다. 특정정당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그 정당의 이념을 대중이 선택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정치개혁은 만연한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하고, 좌우날개가 순조롭게 날아갈 수 있는 체제 완성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우리 정치와 우리 사회의 혼란, ‘보수’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
문국현은 ‘보수’를 자처한다. “진정한 보수는 관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이다. 하지만 이 상식은 60년이 넘게 외면당했다. 문국현은 이 ‘상식’을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보수 우파가 될 가능성을 지녔다.
앞으로 문국현이 대선출마를 선언할 경우, 어떤 방식으로 현실적인 힘을 추구하며 대권에 종착할 수 있을지,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경력과 이미지는 젊은 유권자들에 대한 어필이 가능하다.
그 스스로가 말했던 ‘기본을 지킨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정도에 어긋나지 않게 현실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도 ‘대세론’을 탈 가능성이 있다.
‘문국현’으로 대표될 보수 우파와,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될 진보 좌파가 양립할 수 있는 정치구도가 완성된다면, 정치개혁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민주노동당에는 내부 정파 간의 오랜 갈등과 같은 약점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진보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며 의회에도 진출한 유일한 정당이다.
좌우구도 개편, 그리고 좌우의 합리적 경쟁과 연대. 우리 정치가 나아갈 이상적인 모델이다.
‘선거법 위반’을 각오하며
선거법 위반을 각오한 글이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민주시민은 후보자에 대해 꺼리낌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 유도’는 원래부터 할 생각이 없었다. 시민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문제니까.
다만, 나는 왜 문국현을 주목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자유마저 박탈하는 선거법이라면, 내가 할 말은 딱 하나밖에 없다. “나를 고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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