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광무 9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수상인 가쯔라와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특사 테프트(William Howad Taft 1857-1930) 육군장관 사이에 이루어진 밀약으로서 Taft는 필리핀 여행을 하는동안 일본에 들러 가쯔라와 회담하고, 비밀각서를 교환하였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략의도가 없다는 것을 다짐케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일본이 영.일동맹의 갱신으로 조선에서 얻은 지위를 미국으로 하여금 보장을 받으려는 것으로 "가쯔라"는 이 자리에서 조선이 노.일전쟁의 직접 원인이므로 만일 전후에 그대로 두면 조선이 마음대로 외국과 조약을 맺어 다시 국제분쟁이 일어날 것이니 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어떤 결정적 수단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태프트?가쯔라비밀각서(1905년 7월)에서, 영국은 제2차 영-일 동맹(동년 8월)에서 그리고 러시아는 포츠마스강화조약(동년 9월)에서 일본이 한국에서 「독점적 지배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만 아니라 영국도 일본과의 동맹과 제국주의적 실리를 위해 힘없고 관심없는 나라였던 "조선"에 대해 무시를 함으로써 일본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지요.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국제적인 정세, 정황때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쯔라(1849-1913)는 제1차 내각 때 영.일동맹을 맺고 노일전쟁을 강행해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한 장본인이며 제2차 내각때 한일합병을 강행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긴 글이지만 당시의 정황과 전개된 상황을 이해하는데 자세한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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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러시아-중국-일본이 한반도 분활을 세번씩이나 시도했다
1901년말 러시아의 "국경수비대"가 이른바 목재채벌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압록강 유역에 주둔하자 일본은 이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조선 주변에 위치해 있는 러시아는 대륙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국가에 계속적인 위협요소가 될것이며 조선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조선은 일본의 방위선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평화와 안보에 본질적인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 경제적, 상업적 이익과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안보적인 차원에서도 일본은 다른 세력에게 이를 양도하거나 배분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일본의 수상 가쯔라 다로(Katsura Taro)는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의 부동항 획득을 목적으로 만주에 이어 조선을 점령하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침략적인 대외정책의 주창자인 야마가다 아리도모(Yamagata Arimoto)원수는 결국엔 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할 것을 예견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의 체결과 같은 외교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가 시작했다.
영일동맹은 중국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유럽열강들의 침략에 대한 영국의 이해관계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일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체결된 것이었다. 영국의 자유무역과 투자에 대한 정책은 이미 러시아의 팽창주의 정책에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장벽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영일동맹은 중국에 대한 영국의 관심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의 소산이었다. 양국은 언제 어디서든지 어느 한 국가의 이익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영일동맹의 최우선 목적은 러시아를 조선에서 배제시키고 중국에서의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국은 서로 쌍방의 우선권과 영향력의 범위인정을 기초로 체결한 것이다. 영국과 일본은 다른 제국주의 세력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조정하고 양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공동대응해갔다. 양국은 중국과 조선 그리고 다른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와 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은 영국의 동남태평양에서의 세력균형정책에 대해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약속을 담고있었다. 일본에게 영일동맹의 심리적 효과는 매우 컸다. 그것은 일본이 서방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신호였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적대행위 가능성과 영일동맹의 발전을 감지한 러시아는 야마가다-로바노브(Yamagata-Lobanov)조약(1896)에서 제시한 조선을 38도선으로 분할하여 중립지대로 만들자는 제안을 다시 일본에 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발발 가능성에 겁을 먹은 조선정부는 1904년 1월 21일 조선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조선의 중립선언을 무시하였다. 조선은 힘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강대국들 틈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일본은 여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강행하여 1904년 초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반면 미국은 전쟁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실제적으로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이 취한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정신적으로는 일본의 동맹국이었다. 루즈벨트는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게 되면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상업적 기회가 제한당 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미국이 중국에 러시아의 독점적인 특권을 막고, 무역을 위해 만주에 위치한 도시(Tatungkow, Mukden, Harbin)에 대한 개방을 요구했을 때 러시아의 압력하에 있던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정책을 "문호개방"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공격행위에 대하여 미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루즈벨트는 일본이 태평양과 극동에서의 미국의 이권에 대한 침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했다.25) 그럼으로 미국은 일본의 만주지역에 대한 문호개방, 환원된 지역에 대한 중국의 주권 인정,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침략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보장을 받고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포츠마우스(Portsmouth)회담을 중제하였다. 루즈벨트는 "극동에서 문호개방정책의 수행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본의 승리가 아닌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균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동북아시아에 러시아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 선에서 평화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중재를 시도하였다." 사실 러시아와 일본을 화해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은 만주를 개방하고 필리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5년 9월 5일의 Portsmouth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조선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익에 대한 승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 대한 특권 및 랴오뚱반도의 러시아의 소유권(여순항과 대련항을 포함하여)을 이양받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일본의 많은 배상금요구에 대하여 사할린 남부의 반을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이 감소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조선문제에 대하여 주변국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역사의 새 장을 여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동양의 국가가 서양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남만주와 조선에서 세계열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는 어떠한 제3세력에 의해서도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앞의 논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물론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경쟁이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경쟁 강대국들이 그들의 영향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 분활을 세번씩이나 시도했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전 영국의 킴발리(Lord Kimberley) 경에 의하여 북 4도를 청의 영향권으로 남 4도를 일본의 영향권으로 하는 중재제의가 있었으나 청국이 거부했다, 두번째는 1896년 야마가다-로바노브 협정을 통하여 일본이 38도선을 중심으로 이북은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이남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한다는 제의이었으나 러시아아 거부했다. 세번째는 1903년 러시아의 세가 불리해지자 1896년의 일본이 제의한 것을 역제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일본은 경쟁국들을 패배시킨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정책을 다른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인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조선을 재빨리 합병할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와 독점적인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에 공동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주권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승인했다.
"제국주의 외교"(the diplomacy of imperialism)는 주요 세력들이 외교적 협상을 통하여 그들의 세력과 국가이익을 보존하고, 확장시키고, 또는 현상유지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약소국을 회생시켜 팽창해 가는 외교적 술책을 의미한다.
국제적 세력균형 정치의 관점에서 영국은 일본의 조선합병에 대하여 "독립능력의 결여와 그 취약성으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은 일본제국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지배와 감독을 받아야 한다." 더우기 영국은 1905년 8월 12일 영.일동맹의 재개 당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이 조선에서 우월한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영국은 일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적절하고 이익증진을 위한 정책, 즉 조선을 지도, 지배,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정책은 모든 국가의 산업과 통상에 대한 기회균등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2
한 영국의 외교역사가는 "영국은 일본이 러시아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장벽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이 지불한 댓가는 다만 조선의 희생이었는 데 그것은 최소한의 희생이었다"고 기술했다.
미국은 러일전쟁기간 동안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했는데, 이것은 1905년 6월 27일 카쯔라-태프트(the Taft-Katsura agreement)비밀조약에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침략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에 대한 보상이었다.
조선의 지배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한 일본은 1905년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07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관계를 통제했고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강압적으로 조선을 합병하였다.
조선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양국은 1882년에 처음으로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목적은 양국간의 통상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약에서 양국은 "만약 타국이 부당하게 간섭하는 일이 있게 되면 조선에 우호적으로 조정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32) 그러나 이 규정은 조선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다. 미국은 "우호"의 역할을 회피하였고 카쯔라-태프트조약(1905)과 루우트-다카히라(Root-Takahira)조약(1908)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일본이 조선에서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카쯔라-태프트조약에서의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그들의 식민지인 필리핀의 안전이었고, 루우트-다카히라조약에서는 태평양의 현상유지와 "문호개방"원칙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호개방정책의 원칙은 조선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은 미국에게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문호개방 원칙에서 조금의 후퇴는 미국이 중요한 이익을 갖지 않은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본과의 합의는 조그마한 회생에 지나지 않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긴요한 이해관계가 없는 지역에서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으로서는 단지 이상적인 이유로 해서 아시아의 전쟁을 지원할 필요가 없었다.33) 일본이 조선에 보호조약체결을 강요할 즈음 미전쟁성장관 윌리암 태프트(William H. Taft)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조약도 외국과 체결하지 못하게 일본이 조선에서 군사적 통치군을 확립하려는 것은 현재 진행중인 전쟁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보며, 이것은 동북아시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하여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사실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방해할 의사가 없었다. 미국에게는 조선의 독립보다는 아시아의 평화가 더 중요했고, 조선이 러시아에 의해 지배되는 것 보다는 일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믿었다.
"나는 현재의 전쟁이 종결되면 일본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조선 합병은 일본 제국주의가 서쪽으로의 확장되는 위대한 최종적인 것이 되리라고 본다. 이것은 조선인들과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보다 나은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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