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친일과 반일 넘나든 독립신문의 이중전략>

YOROKOBI 2007. 10. 12. 18:00

1896년 4월 창간한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전용신문이다. 독립신문은 모두 4면을 발간했는데 1-3면은 순한글로, 4면은 영문으로 기사를 보도했다.

조선말-대한제국 초기 독립신문의 영향력은 오늘날 주요 일간지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특히 영문판의 경우 조선 내 외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구독했다.

일본이나 상하이 지역의 신문은 독립신문 영문판 기사의 내용을 보도, 논평했으며 미국, 영국, 일본 공사관은 영문판의 사설을 인용해 한국 상황을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거의 독점적 대외 언론창구의 위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의 대외인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부정적 견해가 주를 이룬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문명화 혹은 독립의 기회로 인식했고 일본과 미국은 옹호한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감정적 적대에 가까운 편파성을 보였다는 것이 기존 학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고려대 박사과정의 김지형 씨는 13일 한국근현대사학회가 개최하는 학술발표회에서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독립신문이 한글판과 영문판에서 서로 상반된 보도태도를 보였음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 씨는 미리 공개한 논문 '독립신문의 대외인식과 이중적 여론조성'에서 아관파천기(1896년 4월-1987년 2월)와 대한제국 초기(1897년 8월-1898년 5월)의 독립신문 한글판과 영문판을 비교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정부의 단발령 강행은 각 지방에서 반일의병운동을 촉발하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계기가 됐다. 파천 직후 조선 사회의 반일 감정은 일시에 고조됐고 각지에서 일본인에 대한 투석과 구타, 살상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4월 일본 신임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특명전권공사로 승진했다.

독립신문 한글판은 고무라의 승진에 대해 "일본 관리공사 소촌 씨는 근일에 전권공사가 되었다니 우리가 듣기에 매우 즐겁고…일본서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조선 인민이 일본을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라는 논설을 실었다.

이 논설은 고무라 공사의 부임 당시 조선 정부와 사회에 퍼져있던 격심한 반일 감정을 전혀 담아내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독립신문 영문판은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설을 내보냈다.

"현재 조선의 어지러운 정세는 일본이 조선에 간섭한 결과이다. 이 혼란한 정세는 일본인의 교사로 중전이 시해된 1895년 10월8일의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이는 조선인들을 분노하게 하였으며, 일본인이 내지로 들어가는 것을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 논설은 일본 정부가 1896년 1월부터 4월까지 조선인에 의해 살해당한 일본인 62명의 배상금을 1인당 5천 달러씩 지급하라고 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독립신문이 한글판에서는 친일적 태도를, 영문판에서는 반일 논조를 보인 사례는 이외에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우리나라 개명하는 진보에 도와주니 참 개명한 나라 백성이더라"(한글판 1896년 11월12일)

"가난한 친구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노상강도"(영문판 1896년 6월16일), "일본 투기꾼이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장소를 훔치고 있다"(영문판 1896년 5월14일)

독립신문이 이중적 태도를 보인 까닭에 대해 김 씨는 "독립신문은 개혁론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개혁 성공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조선에 고조되고 있는 반일감정을 약화시켜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한글판을 읽는 국내 독자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일본 우호론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영문판에서는 아관파천으로 밀려난 일본의 세력 만회를 견제하고 러시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열강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판하고 반일 여론을 조성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단순히 일본의 침략주의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신문의 목적 달성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내부에서는 침략주의를 감추고 밖으로는 이를 부각시켰다'는 것이 김 씨의 결론이다.

100여 년 전에도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언론조작이 존재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