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이 1919년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처럼 3월은 해마다 찾아오는 봄의 시작처럼 우리 민족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89년 전 봄 제암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됐던 민간인 학살사건 현장은 오늘날 순국기념관으로 보존돼 조국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일본 순사들에 대한 보복을 위해 주민 학살 자행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은 3·1 운동 기간 중 일본 제국주의가 전 세상에 그 잔혹함을 드러낸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남아있다. 1919년 3월 말~4월 초에 걸쳐 당시 수원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수위가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해지자 일제는 그 기를 꺾기 위해 인간과 종교에 대한 그들만의 저급한 편견을 드러냈다. 독립만세운동의 양상이 격렬했던 1919년 3월 말 조선인이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2건의 사건이 발생했다. 3월 28일 송산면에서는 만세운동 현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주민에게 중상을 입힌 노구찌 순사를 처단했고, 6일 뒤인 4월3일에 화수리 주재소 소속 카와바따 순사가 총기를 난사해 군중들의 손에 의해 숨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가 4월13일 만세운동 진압을 위해 수원군 발안장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조선인 밀고자를 통해 삼괴지역 일대의 독입운동이 제암리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지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틀 뒤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으로 구성된 수비대와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던 일본인 사사카를 이끌고 발안장에서 제암리로 이동했다. 독립운동가 색출을 명목으로 왔지만 이들은 앞서 조선인들 손에 숨진 일본인 순사에 대한 보복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들은 연설이 있으니 초가로 된 제암리 감리교회(지금의 삼일운동순국기념탑 자리)로 15살 이상의 남자 주민을 모아 교회당에 가두고 출입구는 물론 창문을 모두 못을 박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다음 교회당을 포위한 수비대에 집중 사격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몇몇 주민들은 이러한 음모를 모르고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을 찾았다 죽게 되자 어린 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아이만은 살려 달라”며 애원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아이마저 군도로 내리쳐 살해했다. 일부 주민들은 교회당 흙벽을 뚫고 죽을 힘을 다해 건물을 빠져 나왔으나 밖을 포위하고 있던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숨졌고 총상을 입고 쓰러진 주민들은 쫓아온 수비대의 손에 숨을 거뒀다. 이같은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사람도 있었다. 일본군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던 부인 두 사람도 참살했다. 당시 감리교 한 전도사의 부인이 교회당에서 남편의 죽음을 전해듣고 통곡하자 일본군은 부인을 꿇어앉힌 뒤 살해하고 이불을 덮어 불태워버렸으며 의병장 출신의 홍원식 감리교 권사의 부인 김씨도 총을 쏴 숨지게 했다. 그들은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뒤에도 증거 인멸과 은닉자 색출을 위해 동네 곳곳을 뛰어다니며 제암리 33채 집 가운데 곡구래미의 외딴 집 2가구를 제외한 31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온 마을에는 가옥과 시체를 태우는 냄새가 30여리 마을 바깥까지 진동해 코를 막을 정도였다고 표현돼 있다. 제암리에서의 이같은 만행은 그 다음날 현장을 찾은 미국 영사 커티스 선교사 테일러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에 의해 서울에 알려졌고, 이를 뒤이어 방문한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사진과 함께 만든 보고서를 비밀리에 해외로 반출하면서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제암리 사건 현장 탈바꿈한 순국기념관 관광 중심지로 자리매김 이같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제암리 현장은 지난 1982년 사적 299호로 지정됐으며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3·1운동의 대표적인 성지로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화성시는 애국선열에 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의 현장학습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제암리 사건 현장인 향남읍 제암리 392-2 일대에 1천306㎡ 규모의 순국기념관을 건립해 2001년 문을 열었다. 두 곳의 전시관과 시청각실을 갖춘 기념관은 올해 초까지 10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는 지금껏 이어오던 독립만세 재현행사와 마당극 대신 화성지역 3.1운동의 의미를 고증하는 학술회의를 가졌다. 지난 1일 제암리 3·1운동정신교육관에서 열린 학술대회는 김진원 화성시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환 수원대 교수 등 학계 관계자가 참여해 지역 내 3·1운동 유적 및 유물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주제 발표를 가졌다. 한편 시는 3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올해 말까지 공원 및 진입로를 조성하는 등 3·1운동 유적지 정비사업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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