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으며 한국 근대의 민족, 민족담론을 음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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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를 읽으며 한국 근대의 민족, 민족담론을 음미하다. 백동현(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1. 프롤로그 2. 외부자의 시선과 내부자의 시선 3. 한국사의 근대 ‘민족’: 재구성인가 발명인가 4. 한국 근대 초기의 민족과 민족주의: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인가 전근대 보편문화로부터의 이탈인가? 5. 슈미드 저작에 보이는 몇 가지 오류 또는 아쉬움에 대해 6. 에필로그: 한국 근대초기 민족 그리고 민족담론의 내부구조에 대한 성찰
1. 프롤로그
한국 근대의 민족 내지 민족담론에 대해 관심 깊게 공부해 온 연구자 중 한 사람이어서 슈미드의 저작1)에 대한 서평청탁을 받고 선뜻 받아들이긴 했으나 막상 슈미드의 저작을 보면서 부러움과 한편으로 저자의 학문적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 밖에 없었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저서가 다루고 있는 한국 근대의 민족 내지 민족담론과 관련하여, ‘민족’ 용어의 등장, 동양주의(저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범아시아주의), 단군문제, 신채호의 민족담론과 국가관 등 몇몇 주제에 대해서는 필자도 이왕에 다루었던 관심사이기도 했기에 기존의 서양의 저작들과 달리 마치 국내의 연구자가 쓴 글과 같은 편안함과 더불어 많은 공감대를 지니며 글을 보았다. 또한 저자의 관심사와 학문적 영역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 다양하고도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산보하듯이 이루어지는 서술에 대해 늘 그러하듯이 서구 사회과학계의 글쓰기 방식에 부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성과물만 언급해보면 중화주의의 해체과정, 국혼에 대한 문제, 근대 역사교과서의 인식들, 강역인식, 신채호와 김교헌의 저작에 대한 비교고찰, 나아가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논쟁에 이르기까지 한국근대 민족담론 전반에 걸쳐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작은 실례로 필자도 하야시(林泰輔)의 『조선사(朝鮮史,1892)』와 현채의 『동국사략(東國史略,1908)』을 비교 검토한 적이 있는데, 당시 우연히 필요에 의해 본격적인 분석이 아니라 다만 목차와 서문을 비교해보고 언젠가 체계적 분석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구체적 작업을 하지는 못했었는데, 슈미드의 저작을 통해 굳이 분석 작업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두 저서가 지녔던 의미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서술이 되어 있다는 점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슈미드의 저서를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마치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된 잘 조율된 교향곡 한편을 감상한 느낌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읽기에 매우 편하기조차 한 저작이 이룬 성과에 대해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논의는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슈미드의 연구성과물에 힘입어 평소 논하기 어려웠던 주제들을 가볍게 성찰하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바친 학문적 열정에 대한 바람직한 서평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2. 외부자의 시선과 내부자의 시선 이 책이 지닌 가장 강점은 논의의 영역이 다양하다는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외부자의 시선으로 차분하게 한국 근대의 ‘민족’ 또는 민족주의를 다룬다는데 있을 것이다. 학문은 분석 내용이 주관을 배제한 채 그 자체로서 객관성을 담보할 때 가장 뛰어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한국민족 내지 한국민족주의를 대단히 중요하다는 전제 속에서 비로소 출발하는 내부자보다 더 차분하고 담담하게 한국민족 내지 한국민족주의의 기원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장점일 것이다. 그러한 거리두기의 장점이 잘 녹아있는 지점이 아마 한국사에서의 민족은 근대적 발명의 산물이라는 언명이라든가 근대 민족을 창출하려는 계몽운동가들의 민족프로젝트의 산물로 상대화시켜내고 있는 점이다. 슈미드는 이를 분석하는 자료로서 민족주의연구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새롭게 등장했던 『독립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의 매체에 대한 분석 작업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바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한국민족주의를 접근하면서 ‘독립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라기보다는, 급변하는 지역 정세 속에서 세계체제를 뒷받침하는 근대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점에 이들 집단이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고유 민족으로 나타내는 문화적 전략’2)에 흥미를 갖고 분석하고자 한 점에서도 민족주의운동사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하면서 한국근대민족을 다양한 층위에서 서술해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근대 민족을 민족주의운동 내지 정치운동과 분리시켜 민족 또는 민족주의를 있는 그대로 고찰하고자 했다는 저자의 고백은 내부자들의 시선이 민족주의운동 또는 정치적 독립운동을 고려하면서 파악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귀감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3. 한국사의 근대 ‘민족’: 재구성인가 발명인가 슈미드의 저작에 드러나는 한국 민족에 대한 논의 중 가장 논란의 대상은 바로 민족을 근대의 발명품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일 것이다. 슈미드의 기본시각은 계몽운동기 지식인들의 ‘민족프로젝트의 산물’3)로서 민족을 접근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저술가들이 민족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비전을 형성한 것이 민족주의의 전략과 강령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4) 분명한 사실은 근대 민족은 분명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이고, 근대 ‘민족’의 등장과정과 관련하여 왈러슈타인은 근대 자본주의의 확대된 생산력이 어떻게 중세의 폐쇄적 장원경제를 무너뜨리고 민족국가단위의 경제구역을 필요로 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5) 즉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국가단위가 민족국가틀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민족이 근대세계의 주인공으로 대두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경우 ‘민족’ 용어의 등장과 용어의 보편적 사용은 슈미드가 지적한 것처럼 1900년 1월 12일자『황성신문』에 보이는 기서(寄書)를 통해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6) 그리고 민족 용어가 한국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착하여 보편적 용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904년 후반기 이후였다.7) 이러한 한국 민족개념의 정착과정과 한국민족주의는 슈미드의 지적대로 계몽운동시기 지식인들의 ‘민족프로젝트의 결실’이기는 하지만 한국 근대의 민족은 서구적 근대에서 발명된 ‘민족(nation)’에 자극받은 ‘근대 민족’으로의 재구성으로 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8)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서 민족 논의를 하기에 앞서 발생사적으로 본다면 장기간 분립되어 지속되었던 왕조적 전통이라든가 중국 왕조에 대한 족적 차별의식과 분리의 지속성 등을 염두에 둔다면, 동아시아 민족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구에 비해 보다 견고한 민족의 원형질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했던 홈스붐의 평가는 정당한 것이라고 본다.9) 특히 한국에서 민족을 대하는 관점과 관련하여 논란이 가중되는 이유는 멀리 삼국통일기 중국과 한반도의 차별성을 의미하는 ‘일통삼한의식’이라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존재했다는 점과 조선초 이래 지속되는 ‘단군․기자계승의식’에서 보여주듯 주변국가와의 족적 차별의식이 존재하여 전근대 족의식(族意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민족은 근대적 ‘발명의 문제’로만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시대 이래 지속되었던 ‘단군․기자계승의식’은 일종의 자의식이기는 하나 그것이 종족적으로는 단군을 문화적으로는 중화문화를 의미하는 기자를 정체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 구조이고, 여기서 더욱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선시대 내내 단군보다는 기자를 중심으로 하는 정체성이 유림사회에 뿌리내렸다는 점에서 본다면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근대민족으로 전화할 원형질이 존재했고 전근대 민족의식으로 이해될 만큼의 질을 확보하고 있었던 점에서 발명이라는 표현보다는 서구의 ‘민족(nation)’에 자극받아 이루어진 근대 ‘민족’의 재구성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10) 4. 한국 근대 초기의 민족과 민족주의: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인가 전근대 보편문화로부터의 이탈인가? 슈미드의 저작에서는 국내 학계에서도 미약하지만 관심을 끌었던 동양담론(범아시아주의 또는 동양주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부여를 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는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11) 한국 근대에서의 민족 내지 민족담론의 등장은 슈미드가 지적한대로 초기에는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12) 중화체제는 조공-책봉체제로 설명되기도 하고,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는 속방문제로 첨예하게 정치적 논란거리로 대두한다. 중화체제는 문화적으로는 유학(성리학)이라는 공유되는 사상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일종의 중세적 보편문화로서 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중화주의적 질서의 파괴는 전근대국제질서의 와해와 만국공법적 체계(민족국가간의 질서)로의 전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한국민족주의의 진행에 따라 보편문화이자 조선의 전통문화로 자리 잡은 유교문화의 급격한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은 슈미드의 지적처럼 직접적으로는 한국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이미 조선화되었고 전통문화와 사유체계로 자리 잡았던 전통학문과 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필자가 보기에 거시적으로는 의도되지 않았던 결과도 낳았다고 본다.13) 계몽운동 말기 무렵에 이르면 이러한 후자의 의미에서의 철저한 단절은 전반서구화를 지향했던 인사들 뿐 아니라 점차 개신유학자의 범주에 머물렀던 인사들 또한 여기에 가담함으로써 지식사회에서 대세를 점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신유학자로 중화문화전반에 투철한 대결의식을 지녔던 대표적 사례는 신채호였음에 틀림없다. 슈미드의 지적처럼 중화문화를 포함한 중화체제에 대한 해체를 통해 민족주의를 고양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기는 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학문적 전통과 철학적 사유를 포함하는 전통문화와의 철저한 단절을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계몽운동기의 역사적 상황과는 다른 오늘의 시점에서 냉철한 재음미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5. 슈미드 저작에 보이는 몇 가지 오류 또는 아쉬움에 대해
슈미드의 저작이 드러내는 오류라기보다는 아쉬운 측면을 들라면 필자는 다음의 몇가지 측면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슈미드의 언론 논조분석은 상당히 예리한 분석으로 필자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기도 하다.14) 그럼에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국혼, 국수, 국성 논의에 대한 슈미드의 선입견적 견해를 들 수 있다. 슈미드는 국혼(國魂), 국수(國粹), 국성(國性) 논의를 다루면서, 우리도 흔히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른바 국혼 또는 국성 논의가 특수성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 것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당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1907년 무렵부터 불거진 국혼(國魂) 논의는 실제로는 다양한 경향이 혼재하고 그 방향성 또는 전망 역시도 매우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15) 크게 본다면 『공립신문』의 경우에는 양계초(梁棨超)의 중국혼에 대한 논의를 즉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크다면 국내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에는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전화하고 있고, 그 방향 역시도 전혀 새로운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16) 『대한매일신보』의 국수(國粹) 논의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중화문화의 유산과는 다른 고유한 전통에 대한 탐색을 지향하면서 한국민족주의의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특수성에 대한 침잠으로 나아가고자 했다면, 『황성신문』의 국성(國性) 논의는 유교가 지니는 보편문화의 상당부분을 한국 전통사회의 중요자산으로 여기면서 이의 근대사상으로의 변모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방향을 전혀 달리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 점에서 『황성신문』은 동도서기론적 견해의 적자다운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으며 유교철학이 지니는 보편문화적 요소를 보존하고 그것(국성)에 의해 한국사회의 미래상을 창출해야한다는 입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견해였다고 평가된다. 이는 근대사회로의 전환에서 보여주는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에서 나타나듯 전통적 사유로부터의 원만한 이행을 담보할 수도 있다고 평가되는 노선이었으나 이후 식민지화를 겪으면서 자율적 역사발전 또는 논의 전개의 기회를 상실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한 그 점에서 한국사회에서의 국혼논쟁을 특수성에만 매몰된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또 하나 국혼론의 등장 배경 또는 박은식의 이원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아쉬움을 느낀다. 박은식의 국혼논의가 이원론적 태도를 취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국가상실이라는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면서도 또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양명학적 기반에서 비롯된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결과론적 해석을 뛰어넘는 보다 풍부한 논의를 했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을 지닌다. 초기 ‘자국정신’(自國精神)이라는 용어로 나타나는 국혼론의 등장배경에 대해 슈미드는 ‘혈죽사건’과 ‘일본어 교과서채택 논쟁’ 두 사건을 그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17) 슈미드의 저작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자국정신’(自國精神 또는 大韓精神, 國魂)에 대해 처음 기술하는 글은 1905년 10월 1일자『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겸재생(謙齋生)’이라는 필명의 논자가 보낸 기서(寄書)에서였다.18) 그런데 이 기서를 보낸 ‘겸재생’은 다름 아닌 겸곡(謙谷) 등의 필명으로 각종 학회지에 글을 실었던 박은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9) 기서의 내용은 슈미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학부에서 일어로 초등용 교과서를 만들기로 논의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장차 자국정신이 소멸될 것을 우려하는 내용의 기서였다. 이러한 자국정신 또는 대한정신에 대한 논의는 1905년 10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서 재차 학부의 일본어교과서 편찬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기도 하며,20) 1906년 상반기를 거치면서 『대한매일신보』나 대한자강회의 활동시기에 대한정신 또는 한국혼(조선혼)등으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1907년 『공립신보』에 실린 국혼론이 국내에 유포되면서 본격적인 국혼 논의로 이어졌다.21) 한편 혈죽사건은 슈미드가 설명한 것처럼 1906년 7월 무렵 민영환이 자결했던 자리에서 혈죽이 자라나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각종 매체는 이에 대해 환호하는 글을 잇달아 게재하고 있었던 것이다.22)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혈죽사건 자체가 상황적으로는 극적 모습을 띄고는 있으나 논리적으로는 국혼론의 등장의 배경으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즉 1905년 10월 이후 등장하는 국혼(초기에는 자국정신 또는 대한정신) 논의의 등장배경은 상황적으로 본다면 학부에서의 일본문 초등교과서 편찬이 야기한 논쟁이고, 논리적 연원은 차라리 박은식의 사상적 경향성을 주목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당대 개신유학자라 칭해지는 박은식 등이 광범위하게 참조하고 인용했던 양계초가 1900년을 전후하여 중국정신(중국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던 점이 보다 주목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23) 마지막으로 저작의 전반적인 구조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루고자 하는 시기를 1895년부터 1919년까지를 서술대상으로 확정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근대성 논의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는 시점으로부터 근대민족형성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3.1운동까지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또한 한국 근대 민족논의를 다룸에 있어서 이러한 시기적 구획은 매우 유용한 것으로 공감하지만 한편에서 본다면 일제 식민지화 이후 10년간에 해당하는 1910년대에 대한 서술량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서술내용에서도 1910년대 관련 서술은 대종교 관련 서술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어서 저자의 의도를 모두 소화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되지만 굳이 유추하자면 1910년대 사회와 동향에 대한 국내의 연구성과물이 미약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이는 근원적으로 우리 연구자들의 몫이지 슈미드의 저작의 결점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6. 에필로그: 한국 근대초기 민족 그리고 민족담론의 내부구조에 대한 성찰 서평을 접으며 필자 역시도 한국 근대 민족 또는 민족담론에 대한 고찰에서 정치적 독립이라는 측면 즉 독립운동사나 민족운동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고찰해야 하고, 문화적 요소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는 슈미드의 기본적 입장에 공감한다. 특히 필자는 계몽운동기 민족담론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슈미드도 지적한 것처럼 현재 우리의 민족논의나 민족담론은 크게 본다면 계몽운동기 민족담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당대의 논의들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에는 와해되었지만 보편문화의 보존을 고민했던 국성론을 표방했던 민족담론의 궤적에 대해 궁금증을 지니게 된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내내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가졌던 생각이었는데 점점 뚜렷해지는 부분이 당대 국혼논쟁에서 야기된 크게 본다면 국수론과 국성론이 지니는 긴장관계와 함의에 대해 재음미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대에는 국수론이 현실적 힘을 갖게 되었고 민족담론의 주류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전통적 학문과 사유체계로서의 유학과의 단절은 단지 전통학문의 폐기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이룩한 철학적 사유의 단절을 야기한 것은 아니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만큼의 충분한 역사적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과거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지만 여타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기본적 태도와도 연관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고, 민족담론이 언제나 어느 수준에서든 그래왔을 거라 생각하지만 또 다른 보편문화와의 접맥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면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 미래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각주 - 1) 정여울 옮김, 2007,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휴머니스트(Andre Schmid, 2002, Korea Between Empires 1985-1919, Columbia University Press) 2) 앙드레 슈미드, 위의 책, 53쪽 3) 민족프로젝트란 슈미드의 저작의 기본 시각이기도 한 것으로, 이는 한국의 근대 민족 또는 민족담론은 바로 한국 계몽운동기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각종 매체를 통한 일련의 근대민족을 구성하려는 부단한 작용의 산물로서의 민족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으로 읽혀진다. 4) 앙드레 슈미드, 위의 책, 62쪽 5) 나종일 외 옮김, 1999,『근대세계체제』I, 까치(Immanuel Wallerstein, 1974, Modern World-System I, New York : Academic Press), 53〜60쪽 6) <寄書: 西勢東漸의 起因>, 『皇城新聞』, 1900. 1. 12 및 앙드레 슈미드, 위의 책, 404〜406쪽. 필자 또한 한국에서의 ‘민족’ 용어의 등장과 용례의 보편화과정에 대해서 졸고, 2001, 「러일전쟁 전후 ‘民族’ 용어의 등장과 민족인식」,『韓國史學報』제10호에서 이 기서(寄書)가 첫 용례라고 지적한 바 있으며, 대체로 슈미드와 동일한 논지로 용례분석과 보편화과정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7) 백동현, 2001, 위의 논문 8) 왈러슈타인이 세계체제론에 대한 설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발생이 불가역적 과정이자 발생과정 자체가 비반복적이었듯이, 서구사회에서 시작되기는 했으나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근대 민족 또는 민족국가의 생성은 불가역적이고 일회적인 과정이어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과정이 근원적 발생(발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역적이며 ‘발명’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고 본다. 9) 이러한 어려움을 의식한 탓인지 홉스붐은 민족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중국과 한국등 동아시아를 예외적인 경우로 평가하기도 했다[강명세 옮김, 1994,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창작과 비평사(Eric J. Hobsbawm, 1990,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94쪽].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사에서의 근대 민족과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10) 물론 ‘단군․기자계승의식’은 단지 왕조적 정당성의 보완물로 존재했고, 게다가 보편적 차별화원리(身分制)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 종족적 동질성이 확인되는 동질화 현상은 이민족과의 항쟁이라는 특수하고도 상대적 공간에서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근대 세계에서 민족이 지니는 주류적 현상과는 그 질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11) 우리학계의 근대초기 동양담론에 대한 관심은 주로 계몽운동시기 동양주의에 대한 다음의 글들에서 이에 대해 주목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李光麟, 1988, 「개화기 한국인의 아시아연대론」,『한국사연구』61․62 합본; 조재곤, 2000, 「한말 조선지식인의 동아시아 삼국제휴 인식과 논리」,『역사와현실』제37호; 金度亨, 2000, 「대한제국기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층의 ‘삼국제휴론’」,『한국근현대사연구』제13집; 백동현, 2001, 「대한제국기 언론에 나타난 동양주의 논리와 그 극복」,『韓國思想史學』제17집 12) 앙드레 슈미드, 앞의 책, 제2장(156〜253쪽). 슈미드는 제2장을 통해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주제하에 이러한 이탈과정이 범아시아주의라는 과도적 현상을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중화체제의 해체와 한국민족의 정체성 확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13) 슈미드의 표현을 빌자면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이 한자 문화권으로서 공유하던 초국가적 문화주의에서 결별할 필요가 있었고’(앙드레 슈미드, 앞의 책, 156쪽) 나아가 ‘유교철학의 성과에 관해서는 거의 역사적 재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앙드레 슈미드, 앞의 책, 225쪽)고 평가할만큼 철저한 파괴와 단절을 이루었다. 필자 또한 슈미드의 평가에 공감하며 전통적 철학적 사유와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거시적으로 불행스런 결과로 이해한다. 14) 이에 대해서는 이왕에 국내의 여러 논자들도 주목한 바 있으며, 필자 또한 그 차별성을 주목하고자 한 바 있다. 15) 이에 대해서는 졸고, 2004, 『大韓帝國期 民族認識과 國家構想』,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장에서 계몽운동기 국혼론을 공립협회 세력의 국혼론, 『대한매일신보』의 국수보전론, 『황성신문』의 국성론 등으로 분류하여 논한 바 있다. 16) 『大韓每日申報』와 『皇城新聞』 두 매체를 비교해 보면 초기에는 국혼(國魂, 自國精神, 大韓精神, 朝鮮魂)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국수(國粹)와 국성(國性)이라는 독자적 어휘를 구사하고 있는 바, 이처럼 『大韓每日申報』에서는 국수로, 『皇城新聞』에서는 국성이라는 용어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우연적 현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7) 앙드레 슈미드, 위의 책, 329〜340쪽. 슈미드의 저작에서는 위의 두 가지 사안 중 서술순서나 기술분량으로 본다면 ‘혈죽사건’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국혼론의 등장과정과 관련하여 ‘혈죽사건’을 중시하고 있는 듯하다. 18) 앙드레 슈미드, 위의 책, 337〜338쪽 19)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 기서가 ‘자국정신(自國精神)’을 표방하여 국혼(한국혼) 논의의 물꼬를 연 기사라고 지적한 바 있으며, 기서의 논자에 대해 『대한자강회월보』 창간호(1906. 7.)에 실린 ‘대한정신(大韓精神)’이라는 논설의 저자가 바로 박은식이었고 그가 훗날 겸곡(謙谷)을 필명으로 즐겨 썼던 점 등에서 박은식이 쓴 글로 보고 있다(백동현, 2004, 앞의 박사논문, 139쪽). 20) <論說: 論蒙學敎科>, 『大韓每日申報』, 1905.10.5. 21) 1907년 6월 28일자로 『共立新報』에 실렸던 <大呼國魂>이라는 논설은 <별보> 또는 <대호국혼>이라는 제목으로 『大韓每日申報』(1907.7.14.)와『皇城新聞』 (1907.7.31.)에 재차 실리면서 이후 본격적인 ‘국혼’논쟁을 야기했다. 22) <雜報: 大節爲竹>,『皇城新聞』, 1906.7.6., <論說: 血碧碧竹猗猗>,『皇城新聞』, 1906.7.7 및 <雜報: 緣竹自生>, 『大韓每日申報』, 1906.7.5., <文苑: 血竹記>,『大韓每日申報』, 1906.7.17. 23) 주지하듯이 양계초는 변법파로 분류되며 국내의 변법파 또는 변법적 서구수용론자들이 그의 글을 자주 인용하기도 했었던 인물이다. 양계초는 1896년 <論中國積弱由於防弊>라는 글을 쓴 이후 <國民十大元氣論>(1899), <中國積弱溯源論>(1900)등의 글을 통해 중국의 쇠약의 원인과 중국정신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梁棨超, 『飮氷室文集(上)』, 上海廣智書局印行版, 서문 및 191〜226쪽 참조). 양계초의 글들의 유포과정에 대해 좀 더 엄밀한 분석을 해야 하겠지만 당시 양계초의 저작물이 광범위하게 들어와 있었고 자주 인용되었던 점에서 본다면 사상적 측면에서는 양계초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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