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와 소공동체
-이제민(마산교구 창원 반송성당 주임)
한국교회의 미래는 예수님의 복음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있다." --이제민
우리나라에서 소공동체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소공동체 모임이 한국교회 또는 세계교회에 변화의 동기를 부여하는 사목적 흐름이며,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0월 1-2일 마산교구도 소공동체의 이런 취지를 사제들에게 인식시킬 목적으로 사제 연수회를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 또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소공동체와 관련하여 나의 소견을 밝혀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소공동체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한국형 소공동체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형 소공동체는 그 주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율적이지 않고, 공의회의 정신을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전의 성직자 중심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형 소공동체 모임에 나타난 신학적인 문제점을 짚어보고,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나름대로 간략하게 서술해보고자 한다.
나는 소공동체의 미래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이 글을 쓴다. 교회의 미래는 ‘한국형 소공동체’가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있다는 것을 한국의 교회가 깨닫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한국 교회가 사목의 교회, 복음의 교회로 탄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세 가지 관점에서 한국형 소공동체에 나타난 문제점을 짚어본다.
- 소공동체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소공동체와 평신도 (성직자 중심주의)
- 소공동체와 사목
소공동체의 긍정적인 면
2002년 9월, 대전 교구청 회의실에서 12개 교구의 주교 5명, 사제 52명, 수도자 23명, 평신도 139명이 “제2차 소공동체 전국모임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은 장차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소공동체라고 확신한다. 선언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공동체의 근원이시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친교의 삶을 살도록 초대받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다.....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을 현대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소공동체로 엮어진 교회 공동체를 지향한다.”
“소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양식을 얻고 부단히 자기쇄신과 변화의 힘을 얻는다.”
“소공동체는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자발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평신도 육성의 못자리이다. 또한 소공동체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새로운 역할과 지도력을 배우게 하는 「함께 하는 사목」의 장이다.”
소공동체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에 전념하는 초대 교회의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자 한다는 점을 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로부터 5년 후, 2007년 6월에 열린 소공동체 전국모임에서 강우일 주교는 소공동체를 이렇게 요약한다. “소공동체의 본질적 요소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소그룹으로 모인다(교회의 공동체적 성격 구현). 둘째,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다(하느님 말씀 재조명). 셋째, 복음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한다(교회의 사회적 사명 재조명).” 이리하여 강 주교는 “오늘날 소공동체가 출현한 것은 쇄신을 향한 가톨릭교회의 활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신자들은 소공동체에 참여하고 활동함으로써 더욱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성숙하고, 공의회가 제시한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소공동체는 초대교회처럼 믿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들로 살아가도록 신자들을 도와주고자 한다.”
강 주교를 비롯한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실현을 강조하고, 공의회 문헌을 인용하여 하느님 백성과 친교의 교회상을 내세우고, 피라미드식 제도 교회와 성직자 중심의 교회를 탈피하여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함께 사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하다. 실제로 남미와 북미 아프리카 소공동체의 모습에서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소공동체 운동을 무리하게 반구역에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소공동체가 본래 지향한 정신이 빛을 잃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다음 항에서 살펴본다.
뜨거운 얼음, 한국형 소공동체
반구역에 접목된 한국형 소공동체는 - 강우일 주교를 비롯한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 초기 교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형 소공동체는 남미나 다른 대륙에서 발생한 소공동체와도 그 양상이 다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남미나 북미 또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소공동체 운동은 평신도를 포함하는 온 하느님 백성이 중심인 자율적인 모임이지만 반구역에 접목된 한국형 소공동체는 강력한 교회 조직의 일부로 자발적이지도 사목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성직자 중심적이다. 무엇보다도 사목 협의회 조직의 한 부분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본당이 소공동체 중심 체제로 변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소공동체를 종전의 반모임과 차별화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소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본당은 거의 없다. 그들이 성공의 사례로 내세우는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도 종전의 반모임과 거의 다르지 않고, 소공동체장의 역할도 종전의 반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소공동체가 본당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를 사제와 신자들의 인식 부족에서 찾는다.4) 하지만 탓을 밖으로 미루기보다 그 이유를 안에서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공동체가 한국에서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소공동체 모임이 남미나 아프리카 또는 북미 교회 신자들의 심성에는 맞지만 한국 신자들의 심성에는 맞지 않고, 둘째, 소공동체를 무리하게 반모임에 접목시키는 무리수를 두고 있고, 셋째, 그러다보니 평신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라는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처음부터 강력한 성직자의 의지로 추진되고 있고, 넷째, - 가장 본질적인 이유인데 -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정신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9월9일자 평화신문에 소공동체에 대한 미국의 호세 마린스 신부의 강의 내용이 실렸다. 그는 말한다. 소공동체는 “교회 안에 있는 모임이나 운동, 프로그램이 아니며, 문화적, 지역적, 역사적, 심리적 차이와 경계를 넘어서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환경, 이주자, 인종차별, 전쟁, 폭력, 마약 등과 같은 문제에 공동 대처하며, 종교간 대화에 개방적 자세로 임하고, 교회가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은 행정이나 시설, 숫자가 아니라 교회 선교 사명에 대한 투신을 통해서라는 믿음을 가진다.”
미국의 소공동체는 커다란 지역을 작은 구역으로 나누어 의무적으로 신자들이 참여하게 하는 한국형 소공동체와는 다르다. 마린스 신부는 말한다. “소공동체는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연령에 따라 어린이와 청년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본당의 행정 구역에 접목시켜 ‘위’에서 탄생시킨 한국형 소공동체는 이런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연령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복음나누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본당의 청년들은 구역에서 열리는 소공동체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소공동체를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당에는 관심사별로 훌륭한 소공동체들(성모회, 요셉회, 레지오 마리애, 쿠르실료, ME, 복사단, 성가단, 전례단, 성서 읽기, 복음 나누기 등)이 많이 있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활동하는 이들을 다시 구역의 소공동체에서 복음나누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담을 줄 뿐이다. 교회는 평신도 개개인이 자기 성격에 맞게 활동할 수 있도록 기존의 소공동체들을 활성화할 의무가 있다.
발터 카스퍼가 밝힌 것처럼 남미의 기초공동체는 “평신도들의 활동과 책임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명시된” 공동체이지만, 한국형 소공동체는 성직자의 의지가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또 남미나 북미 또는 아프리카 등지의 소공동체 모임은 평신도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구성되었기에 평신도들의 자율적인 참여와 책임 있는 활동이 가능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위’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되기에 평신도들의 자발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톨릭 신문 서상덕 기자는 앞에 인용한 글에서 “소공동체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평신도의 자발성을 고양시켜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목의 비전으로, 보편 교회로부터 복음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받게”된다고 적으며 소공동체가 “성직자 중심에서 말씀과 평신도 중심으로 그 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지만, 본당신부로 일선에서 사목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 알 것이다.
‘위’로부터의 소공동체
한국형 소공동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위’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한 본당을 반구역으로 나눈 점조직식의 소공동체를 몰랐다. 초기 교회의 작은 모습은 비대해진 본당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위’에서 일방적으로 조직한 인위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초기 공동체는 자발적이었으며, 성직자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성직자 중심의 조직은 아니었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소공동체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교회 쇄신을 위한 모색과 노력의 산물이다.” 소공동체를 옹호하는 서상덕 기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를 장려하였다며 교황이 반포한 “현대 복음의 선교” 58항을 인용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생기게 되는 것은 교회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과 혹은 대도시에서의 교회 공동체 같은 곳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인간적인 상호 유대관계를 추구하는데서 생긴다고 본다. ... 교회적 기초공동체는 복음 선교의 못자리가 되고 더욱 큰 공동체 특히 지역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교회의 희망이 될 것이다.” 이어서 선교회칙 “교회의 선교사명”을 인용한다. “기초공동체란 소수의 가정이나 인근 신자들이 기도와 성경 독서와 교회 공부와 인간적, 교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고 공동 책임을 도출하는 소수 신자들의 집회를 말하는 것”(51항)이다.
하지만 여기서 교황이 말하는 소공동체는 ‘아래’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교구가 ‘위’로부터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공동체에서 성직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만 한국형 소공동체에서 성직자는 공동체의 일원이라기보다 공동체를 밖에서 원격조종하는 관리자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를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한 공의회의 교회와 배치된다. 한국형 소공동체가 강조하는 ‘작은 교회’의 ‘작은’은 성직자 중심 교회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작은’ 교회를 주장하면서도 관심은 ‘큰’ 교회에 있다. 한국형 소공동체의 주체는 변함없이 ‘위’ 교계제도이다.
가톨릭 신문은 한국형 소공동체가 “사목의 주체로서 (평신도와) 공동으로 책임을 분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평신도의 자발성을 고양시켜 교회의 복음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목 비전으로, 보편교회로부터 복음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2007년 4월 15일, 13면) 받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소공동체가 강력한 교회의 조직이 아니라 신심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을 때 여기서 말하는 평신도의 자율성도 보장될 것이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이렇게 강조한다. “‘소공동체를 통한 복음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새롭게 발견한 교회론에 근거해 친교의 가장 이상적이고 가시적인 모습으로 ‘기초공동체’를 구현해, 본당을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되도록 하여 친교의 교회 공동체를 지역 교회 안에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가톨릭 신문, 2007년 4월 15일, 13면). 소공동체가 단순히 ‘한 지역에 존재하는’ 작은 공동체를 넘어 ‘지역을 위한’, ‘지역의 가난한 자를 위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난한 이들은 그 시간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력도 시간도 없다. 그리하여 한국형 소공동체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된다.
언제까지 우유를 - 평신도의 자발성과 자율성
강우일 주교는 말한다. “다른 신심단체는 본부가 있다. 설립자가 있다. 위에서 관리한다. 그러나 소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본부가 없다. 시작한 사람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한국형 소공동체 본부는 누구나 다 아는 교구이며 본부장은 주교이고 본당의 신부들은 그들의 소대장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병졸이다. 한국형 소공동체는 이렇듯 ‘위’ 교구장의 강력한 사목 방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강요함이 없이 평신도들의 자율에 맡긴다고 하지만 이미 소공동체 모임을 본당의 행정구역에 접목을 시킨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 공동체는 자발적이지도 자연발생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않다. 평신도들에게 멍석을 깔아 주고, 그 위에서 나눠주는 우유를 마시고, 그 위에서 지시대로 행동하기를 유도하면서 자발적이라고 평하는 것은 모순이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이런 반론에 대해 한국의 평신도들은 아직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자율적일만큼 성숙하지 못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의 평신도들은 성직자와 함께 사목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그들이 자율적이 될 때까지 (성직자들이) 강제적으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평신도의 자율성을 키우기 위해 내놓는 교안이 성직 중심의 교회상이다. 결국 악순환의 고리만 양산해 내는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200년을 살아 왔고 또 2천년을 살아 왔다. 평신도를 교육시켜야겠다는 성직자들의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평신도는 영원히 우유만 받아먹는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성직자들은 그들의 평신도가 아직 젖을 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한번 젖떼기를 시도해 본적이 있는지, 우유 대신 밥을 주어본 적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평신도에게 우유만을 먹이려는 한국의 ‘위’가 이번에는 스스로 젖을 떼지 못한 아이가 되어 로마가 주는 우유만을 마시려 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쇄신을 강조하면서 지역 교회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전례도 각국 말로 봉헌하도록 하고 그곳의 문화를 수용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회는 로마의 우유에 길들여져 로마가 주는 우유만이 전통을 이어주는 생명인줄 안다. 이런 분위기에서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이 주던 우유를 중단할까 두렵고,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자신들과 한 식탁에서 동등한 위치에서 밥을 먹을까 두려워한다. 이리하여 우리의 교회는 영원히 우유만을 마시는 평신도와 성직자로 가득 차게 된다.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먹이기 쉬운 우유만을 제공하며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다루듯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성숙한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평신도에게 신학 공부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도 시급하다. 진정 평신도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자율적이길 바란다면 평신도에게도 신학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런 기회가 적다. 성직자와 더불어 평신도가 깨어나게 해야 한다. 한국형 소공동체는 이런 일에 방해가 된다. 가톨릭 신문은 소공동체가 “성직자 중심에서 말씀과 평신도 중심으로 그 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적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상반된 주장이다.
한국형 소공동체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한국형 소공동체가 한국 교회를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서게 한다는 나의 견해가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에게는 황당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과 내 주장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제3의 그룹이 생긴다. 나는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런 혼란에 빠져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충돌은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양쪽 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이 충돌은 우리에게 공의회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다시 공부하라는 명령도 된다. 이에 나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공의회의 교회론과 사목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언급해보고자 한다. 나는 모든 이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의 목소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목을 신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하고 신학을 사목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공의회 교회론(하느님 백성 개념)
2007년 4월 15일(13면) 가톨릭 신문은 소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보도한다. “소공동체의 타당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공의회의 문헌에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이후 교회는 공의회문헌들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주제인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과 ‘친교의 교회론’에 근거해 ‘친교’의 가장 이상적이고 가시적인 모습을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으로 소공동체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소공동체는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고 복음화 사명을 촉진할 수 있는 ‘대안 공동체’로서 여러 지역 교회에 다양한 형태로 확산됐다.”
한국형 소공동체가 공의회의 정신에서 자기의 타당성을 찾으려는 것은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 한국형 소공동체가 펼쳐지는 현장을 보면 공의회의 정신을 방해하는 요소로 가득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원천적인 교회의 의미에서 조명하였다.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함으로써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를 교회로 보았다. 이로써 종전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를 탈피하였다. 그러나 한국형 소공동체는 하느님 백성 개념을 즐겨 인용하지만 정작 이 개념으로 말하고자 한 공의회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성직자는 변함없이 하느님 백성 ‘안’이 아니라 그 ‘위’나 ‘밖’에 있다.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교계제도와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탈피하려고 한 공의회의 정신이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교회 쇄신을 위한 모색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강조하며 소공동체가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임을 실현시키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공동체가 ‘위’ 성직자의 강력한 ‘사목지침’에 따라 ‘아래’ 평신도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의 모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모임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느님 백성”이라는 신학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좋다고 느끼더라도, 아래도 좋아야 한다고, 또는 좋다고 느낄 것이라고 강요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 이 모임이 ‘위’에서부터 추진 될 때에는 ‘위’에 누가 있는가에 따라 이 모임은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결국 이 조직은 위-성직자, 아래-평신도의 구조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이런 성직자 중심의 구조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공동으로 지역을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사목을 기대할 수 없다.
소공동체와 사목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 공의회였다. 이것은 공의회가 사목을 강조하였음을 암시한다. 사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교회를 쇄신하는 원동력이었다. 놀랍게도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공의회가 말하는 사목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사목은 소공동체 모임에 대한 성직자의 관심 정도이다. 이런 식의 사목 이해는 공의회가 자신을 사목 공의회라고 칭한 그 사목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평신도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평신도를 여전히 성직자의 사목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공의회의 사목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형 소공동체가 공의회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평신도에게 소공동체 모임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사목적이지 않다.
소공동체와 복음
복음 나누기는 자발적이고 복음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형 소공동체에서 복음 나누기는 부담을 준다. 일정한 틀 속에서 복음 나누기를 고집하기 때문이다.(예컨대 7단계) 뿐만 아니라 복음나누기는 한국형 소공동체가 아닌 다른 소공동체에서도 능히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당은 복음 나누기를 위해 한국형 소공동체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본당의 특성에 맞게 성서반 등 다른 소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구역에 따라 복음나누기를 할 수도 있지만 모든 구역이 다 복음나누기를 할 의무는 없다.
멍석 위에서 춤추는 평신도
소공동체 모임이 평신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신뢰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협력하여야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지역을 위하여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도우면서 사목의 진정한 동반자로 대하여야 한다. 그런데 한국형 소공동체는 성직자 중심의 구조 때문에 사제와 신자들이 본당에서 ‘동반자로’ ‘공동’ 사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평신도들은 본당의 사제들이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사제가 지정해준 곡에 맞춰 춤추는 춤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성직자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그들이 마시라는 우유를 마시고, 그들이 입으라는 옷을 입고, 그들이 추라는 춤을 추면서, 춤을 잘 추는지 못 추는지 성직자의 관리를 받는 평신도는 결코 주체가 아니다. 그들이 춤추는 멍석에 ‘자율’, ‘자생’, ‘평신도 중심’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다 하더라도, 그 위에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공의회 정신이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다 하더라도, “보아라, 저기 평신도들이 신이 나서 ‘자율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고 감탄하더라도, 성직자가 깔아준 망석위에서(그것을 벗어나 춤을 추면 안 된다.) 성직자가 써준 글을 읽으며 성직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것을 자율적인 춤판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성직자의 말 한마디에 달리 춤을 추고, 오늘 추던 춤을 내일 추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임이 진정 평신도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면 성직자는 그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형 소공동체는 ‘위’가 ‘조직해주고’ ‘위’가 ‘관리하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굳히기로 이용되고 있다. 그것은 ‘조직’이며 ‘체계’다. 소공동체 모임이 ‘자발적’이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의무교육을 부과하는 것은 그만큼 이 모임이 자율적이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소공동체가 자율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뜨거운 얼음’이나 네모난 동그라미와도 같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위’에서 깔아준 멍석에서 지정곡으로 춤을 추는 한국형 공동체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교계제도에서 성령을 느끼게 해 주지만, 한국의 여러 교구가 억지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제도교회의 강한 의지만을 느낄 뿐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에게 “평신도 사도직이란 무엇인가? 성직자가 깔아준 멍석에서 봉사하고 활동하는 것도 ‘평신도’ 사도직인가?” 그리고 평신도에게 묻게 된다. “언제까지 여러분은 성직자가 주는 우유만을 마실 생각인가?” “밥은 언제 먹고 고기는 언제 씹어 먹을 것인가?” 평신도들에게 던졌던 이 질문의 화살은 그대로 성직자들에게 돌아온다. “그대들은 언제까지 신자들에게 우유만을 먹일 작정입니까? 언제까지 평신도들이 교회라고 가르치면서도 그들이 교회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사목의 주체라고 가르치면서도 주체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이중의 잣대를 지닐 것입니까?”
소공동체와 신심단체
1. 교회의 신심 운동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협조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신심 운동은 각자의 특색을 살리면서 서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여러 신심단체들은 한국형 소공동체 모임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다.1) 어떤 신부는 소공동체 하나만 잘 되면 다른 신심단체는 필요 없다고까지 생각하며 기존의 신심 운동을 소공동체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다른 여러 신심 단체와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레지오 마리애와의 마찰이다. 2002년 전국 소공동체 모임 후 강우일 주교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형 소공동체 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그동안 한국교회의 발전에 많이 기여한 레지오 마리애를 시대의 산물로 여기며 한국형 소공동체로 대체할 수 있음을 내비친다.
“소공동체와 레지오는 소그룹 모임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성격은 아주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양자택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신자들이 인식했으면 하는 생각은 레지오는 구체적으로 어느 한 시대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신심운동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성격이 제한적이고 특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공동체의 경우엔 이것이 어느 한 특수한 성격의 모임이 아니라 보편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교회의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구성돼야 할 모임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소공동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구성원이면 누구나 다 참여해야 하는 보편적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면, 레지오는 이런 가운데 개인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나도 레지오를 시대의 산물로 보는 강 주교의 견해에는 동감한다.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이 단체가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이 아니라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자신을 쇄신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신심단체에도 해당된다. 한국형 소공동체 또한 스스로를 쇄신하지 못할 때에는 역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본당을 오로지 한국형 소공동체 중심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소공동체 모임을 “보편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교회의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구성돼야 할 모임”으로 규정하면서 레지오 마리애를 시대의 산물로 폄하하는 것은 ‘교회적이지도’ ‘사목적이지도’ 않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다른 신심단체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마치 쌀이 몸에 좋지 않으니 건강을 유지하려면 밥 대신 밀가루로 만든 빵만 먹어야 한다고, 모든 식사를 빵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버터가 느끼해서 빵에 버터를 발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빵이 처음부터 입맛에 맞지 않아 빵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밥도 빵도 아닌 채소만으로 건강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은 그야말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밥이 더 좋은가 빵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지금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다. 교회는 소공동체 영성이든 다른 신심단체의 영성이든 다양한 신심운동들이 신자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하다면 필요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 신심을 북돋을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 가운데 일치를 강조한 공의회는 신심 운동의 다양성을 강조하였다. 소공동체도 이런 다양한 신심 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여러 교구가 한국형 소공동체만이 교회의 미래인 양 선전하는 것은 일치를 해치는 위험한 발상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여러 신심단체를 통합하는 어떤 대안이 아니라 공의회의 정신을 소화하여 자신을 쇄신시키는 일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국형 소공동체가 아니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공의회 정신의 바탕 위에서 자신을 쇄신하려는 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다.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쇄신이란 있을 수 없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레지오 마리애를 구역중심으로 헤쳐 모이게 하는가 하면 장기적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없애고자 하는 등 기존의 ‘소’공동체 죽이기는 교회를 다시 공의회 이전으로 돌리겠다는 발상이나 마찬가지다. 교회는 다양한 ‘소’공동체들이 스스로 쇄신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고 도와야 한다. 기존의 소공동체를 죽이면서까지 한국형 소공동체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는 사제와 신자, 신심단체와 소공동체 사이에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며 본당의 일치에 걸림돌로 작용할 뿐이다.
2. 본당의 신심단체는 다양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심단체가 있고 각 신심단체마다 특징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한 신앙에 대하여 다양한 표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본당의 여러 신심단체들은 소공동체로 운영되고 있다. 여성협의회의 여러 모임들, 성서읽기, 성서반, 성모회, 성심회, 제대회, 자모회, 연령회, 각종 후원회 등 본당의 여러 단체들은 다 본당의 다양한 소공동체의 모습이다.
다양성이 있기에 일치도 가능하다. 교회의 일치는 신자들의 다양한 영성과 다양한 신심운동을 인정하는 가운데 가능하다.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신심단체들은 모두 한분 하느님, 한분 그리스도, 하나의 교회에 고백한다. 한분, 하나에 대한 고백이 여러 신심단체들의 색깔마저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신심단체가 있는 것처럼 다양한 영성이 있다. 성령의 작용이 다양하다는 것이 이를 밑받침한다. 바오로는 고린토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적절하게 말한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1고린 12,6-11)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1 고린 12,12-30)
그런데 한국형 소공동체는 본당의 이런 다양한 ‘소’공동체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실제로 한국형 소공동체 중심으로 사목을 하는 본당에서는 다른 신심 단체가 마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사목하는 반송 성당의 경우 모든 활동을 소공동체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성 연합회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어 있다. 성서반은 운영할 수 없다. 소공동체가 이들 작은 공동체들이 할 일까지 다 맡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본당이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한국형 소공동체에 몸을 싣게 된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다른 신심단체를 포기하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신심단체에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은 한국형 소공동체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소’ 공동체들이 본당의 특색을 살리고 본당의 역사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다양한 사도직이 마비된 곳에서는 공의회의 교회는 그 모습을 잃게 된다. 한국형 소공동체가 정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근거하고 있다면 다른 신심단체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의회는 다양성을 강조하게 때문이다.
3. 신심단체를 비롯한 소공동체 운영을 위한 사목자의 관심은 물론 절대 필요하다. 하지만 본당신부가 여러 신심 단체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하도록 되어 있는 관습은 본당 신부의 관심도에 따라 어느 신심단체는 잘 되기도 하고 또 어느 신심단체는 기울기도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사제가 ‘자동적으로’ 본당의 모든 신심단체의 지도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3) 소공동체 모임이 자발적인 운동이라고 하면서도 교구 차원에서 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의무 교육까지 시키는 것도 이런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운동들은 교회의 제도를 다지는 조직의 역할을 하고 본당의 신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단체에서 신심을 얻기 위하여 참여하는 차원을 넘어 여러 단체에 한꺼번에 참여하도록 강요를 받게 된다. 신심단체는 신심을 길러주는 단체이어야 하고 본당의 신부는 이를 사목적으로 도와주는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데 단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더 많은 애를 쓰게 된다. 신심은 관리자가 아니라 사목자만이 키워줄 수 있다. 본당신부는 관리자가 아니라 사목자다. 그는 사목자이면서 사제다.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1118-1170년)의 편지는 오늘날 사목자들의 마음에도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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