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 번의 헛된 경배에서 벗어나라.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백화점에서 일천번제 헌금 봉투가 버젓이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면, 일천번제 헌금을 해 보라고들 말을 한다. 3년은 헌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무지하고 공부 안하는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일천번제 운동본부니 하는 것도 생겨나고 있고, 거기에 회장이니 위원장이니 하는 직함들도 무슨 자랑이라도 하듯이 버젓이 내밀고 다닌다. 일반 성도들이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 있다면 너무 분별없이 따른 무지의 잘못일 것이다. 정말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고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이용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학도 없을 뿐더러 기복신앙에 물든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일천번제 헌금을 유도하는 목회자의 기복신앙 내지는 세속화된 신앙을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천번제 헌금의 발생은 교회가 점점 돈을 좋아하는 기복신앙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요, 목회자들의 세속화된 목회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변질을 주도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버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바친 천일의 헌물이 내 기도 응답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배교다.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가장 좋은 헌물은 우리의 물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일3:20~22). 가장좋은 헌물은 신뢰하는 믿음 성경은 결코 돈이나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방종교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백만 원 헌금을 천 원씩 천 번을 하겠단다. 차라리 땡빚을 내서라도 한꺼번에 왕창 드리면서 하나님께 서원해 보라. 차라리 그게 본래 일천번제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듣기로는 한국에 일천번제를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 말만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 목사로 알고 있다. 무리하게 성전건축을 벌려놓고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만들어 낸 것이 소위 일천번제란다. 손해 볼게 없는 장사란다. 무지한 성도들이야 복받는 일이라는데, 그것도 솔로몬이 받은 유사한 복을 받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정작 번제를 드리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도 계속 번제를 드렸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약의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히브리인에게 희생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성전 제사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제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만약에 드려졌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드리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스스로 피를 쏟는 희생 제물이 되시므로 구약의 번제를 더는 필요 없게 만드셨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번제의 진정한 의미다. 영원한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돈으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의 희생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에 견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함 받게 하시며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신다. 우리의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라.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 10:19-22). 일천번의 헛된 경배에서 벗어나라 잘못된 일천번제 습관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돈을 착취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지한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번제를 희석시키게 하는 행습을 속히 중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번제를 계속 우리 시대에 끌어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갈보리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물질을 신뢰하게 하고, 물질을 걸고 기도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열왕기상 3:4(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공동번역(열왕기상 3:4)- "기브온에는 큰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번제물을 천 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 자 이것이ㅡ문제의 성경구절이다..어디에 매일 일천번 바치는 재물이라는 뜻이 있나? 성경 어디에 천일동안 드렸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가?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그 문제에 확실한 답변을 하고 있다. 당신은혹시 이런 것에 속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이 헛된 경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삼아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8~9). 성경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설교해야 한다.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교인들을 무지와 탐욕으로 이끄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글 위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7articleId=319533pageIndex=1searchKey=subjectNcontentsearchValue -------------------------------------------------------------------------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준 것이지 이를 율법의 십일조로 생각할 근거가 없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전승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준 것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종종 있어왔던 것이라고 한다. 즉 십분의 일을 준 것은 그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의 십일조의 효시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의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야곱은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 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닐뿐더러 이것이 어떻게 율법의 십일조 정신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주고 받기" 식의 거래일 뿐이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곱역시 그런 약속을 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한번도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연히 그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바친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고 십일조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절대 성경적이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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