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바로알기

이것이 박정희의 신화의 허구다!

YOROKOBI 2009. 4. 12. 06:32
박정희가 경제를 잘했는가? 

 
 
SBS 세븐데이즈|2006-12-15 박정희 따라잡기. 그 현상과 진실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이 꼭 1년 남았다. 몇몇 대선 주자들은 일찍부터 1년후의 승리를 위해 달려 나가고 있다. 지지율의 변동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저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본받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서는 것이다.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물론이고 그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묘소를 참배하는가 하면 외형까지 흉내내고 있다. 딸인 박근혜 의원은 물론이고 이명박, 손학규, 고건 씨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박정희와 같은 ‘경제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데...
 
과연 박정희 끌어안기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박정희는 과연 성공한 경제대통령이었는지 세븐데이즈에서 짚어본다.

 
 
 
 
 
1969년 외환위기가 왔다. (국내 상장기업 45%가 부실기업)
1974년 국가부도를 맞았다.
1979년 외환위기가 왔다.
1980년 외환위기는 계속됬다.
 
전두환이 일본에게 60억 달러 구걸해와 빚으로 빚의 이자나마 간신히 갚는 상황이었지만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박정희·전두환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이라 신격화만 했다.
 
1979년 박정희는 180억 달러, 세계4위 채무국, GDP 대비 55%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고,
1985년 전두환은 550억 달러, 세계1위 채무국, GDP 대비 250%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다.
 
언론은 이때 역시 국가부도 위기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에 1974년 이후 두번째 국가부도를 맞았다. 민주화 시대에도 언론은 외환 보유고가 38억 달러로 고갈되었지만 국가부도 하루 전날에도 국민들에게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고 장담했다.

이랬던 언론이..
 
2000년 2/4분기 건국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에 입성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2년말 1200억 달러로 세계 4위 외환보유국에 입성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하고,
2006년 대외 국가채무가 GDP 대비 30%로 건실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6년말 대외 순채권이 900억 달러를 돌파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언론과 국민은 박정희·전두환 시절이 좋았단다. 이들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단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빚더미 부도열차에 마지막에 탑승해 역시 무능과 부패 속에 국가부도 시킨 김영삼...
 
저들에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착취 당하고 세뇌 당한 50년 세월이 원통하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역사의 진실 앞에 입다물고, 지역주의와 부패의 늪에 빠져있는 한국경제학자들은 반드시 단죄 받아야 한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랭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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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을 조작하여 학급에서 1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언론이 만든 허구에 근거하여 정희 경제가 1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5명이 주장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박정희 경제신화는 수구.보수세력들이 조작해 낸 허구일 뿐이다.

-
다음의 글은 강준만의《현대사 산책》, 경상대 장상환교수, 제주대 강기춘교수, 최용식 21세기 경제연구소 소장,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등의 글을 참고 했습니다.

***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절(1961-80)에 년 평균 8.5%의 경제성장을 기록, 국민총생산은 4배로 커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962 87달러에서 1981 791달러로 거의 열 배가 늘었다.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약 210억 달러로 늘었다.
(
경상대 장상환교수의 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 24.3%, 1975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
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30%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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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노무현.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 사는 나라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 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 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
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
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 압구정동이 25,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
민노당 김혜경대표의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해산을 했으나 너무나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기를 삶았다고 한다)

[
서민들이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임금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 74.9%, 1978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

    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60
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1. 1970
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300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1.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 1, 박정희 2, 노태우 3, 김대중 4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 2위이다.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 전두환 2, 노태우 3, 박정희 4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 전두환 2, 노태우 3,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
제주대 강기춘 교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
1
: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 김영삼정권:10, 박정희: 6점의 점수를 주었다.

[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말은 박정희란 슈퍼스타가 나와 하루아침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말이고 (박정희 숭배자들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가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세계 약 300개국 중에서 11위에 등극 한 것도
박정희가 한국경제를 탄탄하게 다진 덕분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의 80%는 거짓이다.

(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이승만시절)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성장률이 57년에 7.6%, 58 5.5%, 59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
박정희가 등장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이 아니다.(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가 50%를 넘었다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 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한국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초기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박정희초기에는 별로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이승만 시절인 50년대 후반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둘째, 박정희정권의 말기에는 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
다음은 강준만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40억 달러를 빌려 수습을 합니다. MBC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다. 박정희 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으면 김대중. 노무현은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만주의 친왜파

 


박정희가 권력을 잡고 바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게 아닙니다. 박정희가 1961년에 5.16으로 권력을 잡았죠. 그리고 나서 1965년까지 5년간 우리나라 경제 발전한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박정희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데 왜 5년동안은 아무 것도 한게 없을까요? 5년이면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인데 그 긴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과연 박정희가 경제적인 면에서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그리고 박정희의 대단한 업적으로 알려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사실은 장면 정부에서 만든거였고 박정희가 그걸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후 정상적으로 장면 정권이 임기를 마쳤을 시기(1961년~1965년) 정도까지는 경제적으로 한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면보다 박정희가 낫다고 말할 근거가 없지요. 반대로 장면정부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저시기에 박정희보다 못했을거라고 말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1차 중점이 철강,시멘트 등을 비롯한 건설자재, 전력, 비료 등의 분야를 통항 불균형성장이론이었습니다. 막 그 계획들을 실행하려 하다가 박정희의 쿠데타로 무산됐죠. 그 후 박정희 정권에서 그것을 기안으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게 되는 거죠.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계획의 수립은 외국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네이산(Nathan)협회에 용역을 주었는데, 네이산협회에서는 1953년 3월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보고서」)을 발표했다. 한국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1958년 3월 송인상 부흥부 장관의 발의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수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었으며,  朱源 정위원이 위원장 서리를 맡아 실무작업 책임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기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을 완성한 것이 1959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계획’ 의미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의미로 오해하여 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인 1960년이 4개월이 지난 4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4.19혁명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장면 정권은 출범 직후인 1960년 9월부터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미국측의 재정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0월4일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이라는 외교문서를 미국에 수교했다.  장면 정권 하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은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의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은 주요한, 김우평, 태완선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차균희 박사는 1959년부터 부흥부 지역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 1960년 부흥부 기획국장 등을 역임한 뒤 장면 정권이 성립하면서 부흥부 차관이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실무를 담당했던 산업개발위원회 책임자는 주원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종대로 바뀌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새롭게 추가된 사람은 임원택과 홍성유 등이었다.

 

 1960년 12월 장면 정부는 국회 답변을 통하여 ‘자유당 정부가 수립해 놓은 3개년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연장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는 일방 장기개발계획의 입안과 집행․감독을 전담할 部의 신설을 고려 중에 있다.’고 했다.  이와같이 장면 정부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을 교체하면서 이승만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 작업결과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계획을 토대로 1961년 3월 내한한 찰스 울프 박사 일행에 대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설명했다. 이 때의 브리핑은 김입삼이 맡았다고 한다. 찰스 울프 박사는 전체적인 찬의를 표하고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지다는 점에서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장면 정부는 울프 박사의 견해를 듣고 참작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을 가다듬었다. 이 작업은 4월말쯤에는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  이것은 4월 중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으며, 그것의 성공 가능성을 장면 국무총리가 확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4월말에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때 제출한 계획안은 2월의 「요강」보다 진일보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 보고되었고, 동일자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원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1961년 7월 발표된 군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의 구체적 비교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광호는 1961년 2월 민주당 정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수립요강이 지니는 큰 의의는 3개년 계획서의 약점을 찾아 이를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고, 그 후 군사정부의 경제발전5개년계획의 수립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수립요강에서는 계획의 목적과 전략, 그리고 계획의 추진 방식 등에서 자유당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차별화를 보이면서 그 후에 등장하는 군사정부의 계획안과 유사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정부의 계획적 유도’ 등이 강조되면서 과거 ‘균형성장’ 전략에서 점차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에 대한 유광호의 견해는 타당하고 적절한 평가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유사성에만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의의는 군사정권의 그것과 차이에 주목할 때 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광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자유경제의 원칙과 정부 역할의 강조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정부 역할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장면 정부는 경제계획의 초점을 ‘정부 자체가 직접적인 정책 수단을 보유하는 부문’에 중점을 두고 ‘민간부문의 자발적 활동을 기대하며 이것에 필요한 유도정책’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군사정권에서는 자유기업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추진방식을 채택하였다. ‘유도’와 ‘지도’는 의미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계획의 추진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도 확인된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면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 그리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사업의 시행은 민관협조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전문 관료 집단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 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질서와 발전’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특권적 경제체제 하에서 잠복해 있던 각계의 경제정책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이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이 이후 시대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경제적 질서’, 즉 절차와 과정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함에 따라 경제정책의 시행과 집행에 있어서 시간적 지체의 문제를 부득이한 한계로 감수하였다. 

ps.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2월 9일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실업자의 가동과 농촌 소득의 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사회자본의 증대를 연결하는 국토건설계획이 또한 그 조속한 실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미잉여농산물을 주로 한 400억환의 재원으로 연인원 약 4천 500만명을 동원하여 치산, 치수 등 공공사업을 하는 것이며, 한편 소양강 댐, 춘천강댐, 남강댐 등을 건설하는 것도 동 계획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 60-70년대는 누가 대통령 해도 고도 성장

"박정희 역대 집권자 중 내용상 4위"
1위 : 박정희 4,285명(28%)  
2위 : 광개토대왕 2,257명(14%)  
3위 : 세종대왕 1,93명 (11%)  
4위 : 이순신 1,303명 (8%)  
5위 : 김대중 807명 (5%)

위의 통계는 월간조선(3월호) 실린 한국 역사상 최고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이다.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보다 3배 이상 더 존경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아예 명함도 못비치고 있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일본군 장교가 됐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하여 일본에 충성하였다. 이런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보다 몇 십 배 더 존경받는 나라. 이 참담하고 비극적인 현실 앞에 나 역시도 이러한 나라의 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박정희의 경제적 기여가 너무 커 친일, 남로당 가입,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 온갖 죄악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경제적 기여를 가지고 존경여부를 따진다면 건설, 자동자, 조선산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이 더 존경받아야 함) 도대체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를 했길래 박정희가 지은 죄악을 덮고도 남는지 한 번 조사를 해 보았다.

먼저 역대 우리나라 집권자들의 경제분야 종합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을 분석해 보았다. 객관성을 높이기 기위해 경제성장률은 집권기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을 기준으로 했다. 통계청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실질성장률이 한 나라의 실제 성장정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라고 한다.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김대중 6.8%, 노태우 7.0%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그러나 각 집권자별 연평균성장률과 우리와 여건이 비슷하고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여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대만은 10.0%, 주요국은 5.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주요국의 성장률이 5.2%였다. 일반적으로 한나라의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리면 성장률이 일정수준까지는 급상승하나,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로 선진국으로 인 주요국 성장률 5.2%는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이 10%였다는 것은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8.5%의 성장에 그쳐 10.0%의 대만에 못 미쳤고 주요국보다 3.3% 높았다.

전두환은 집권기간(7년) 동안 연평균 9.3%의 성장률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두환의 성장률은 대만의 성장률 8.5%보다 약간 높았고 주요국보다 5.7%나 높았다.

노태우도 연평균 7.0%의 성장률은 기록 수치상으로는 전두환에 약간 못 미쳤으나 주변국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 전두환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대중의 집권시기는 대만이 연평균 3.1%, 주요국이 2.0%에 불과해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극심한 불황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기간동안 연평균 6.8%의 성장률은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1위의 전두환에  뒤졌으나 대만보다 3.7% 그리고 주요국보다 4.8% 앞서는 내용면에서 매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경제통계를 근거로 분석한 역대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단순수치상으로 전두환 1위, 박정희 2위, 김대중 3위 순이다.

그러나 대외 여건을 감안한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한 결과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이다. 박정희가 “박정희가 대한민국 경제를 세우고 경제기적를 창조했다”라는 칭송을 듣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적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내세우는 논리가 박정희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때부터 급성장했다고 한다. 이승만 때의 4.1%의 성장률이 낮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종전 후 잿더미 속에서 맨 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나아가 4.1%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역대 집권자의 재임기간 동안의 여건을 보면 이승만은 상상하기 힘든 전쟁피해 속에서 출발해야 했다.
  
전두환은 2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안았고, DJ도 IMF 환란을 극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태우와 YS 시절도 민주화의 과도기여서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했나. 우선 박정희는 이 전 정권의 전후복구와 빈약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국가기간산업의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또 박정희 집권 초 우리 조상들의 흘린 피의 댓 가인 월남 파병으로 또 70년대에는 우리건설회사의 중동진출로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 듯이 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도 유례없는 장기간의 호황이 이어졌다. 또 박정희는 60-70년대 우리 군인들의 목숨의 댓가인 월남특수, 또 우리근로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 중동특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우리 군인들의 목숨과 우리 근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고스란히 박정희의 치적에 스며들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오로지 박정희의 공으로 둔갑되었다.

그리고 당시 군부, 관계, 언론계 등에 포진해 있던 과거 친일분자들이 박정희를 우상으로 모시다시피하여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좋은 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박정희 추정자건 비판자건 경제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가 독보적인 존재로 알아왔다. 나 역시도 통계치를 분석하기 전에는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계치에 의한 분석결과를 볼 때 지금까지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하나의 허상임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 추종자들에게 이와 같은 통계분석 결과를 들이 대면 이 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통계치에 논리가 궁색하면 박정희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도 박정희 덕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이승만 정권이 잿더미 속에서 거의 맨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열악한 여건 속에서 발전소, 시멘트공장, 비료공장을 짓는 등 최소한의 기간산업을 육성하여 훗날 경제개발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포스터 등을 이용해 늘 국산품을 애용하는 마음을 고양시켰고 또 당시 이승만 박사는 늘 소비재 원조에 치중하는 미국에게 생산재를 원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이승만과 장면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장시키고 우리를 세뇌시켰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써먹었던“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 속에는 상당한 과장과 왜곡이 있다. 마치 국민소득 80불은 지금 생각하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빈곤국을 연상시키고 이만큼 산다는 것은 지금의 국민소득 만 불을 연상시킨다. 보통 일반일은 경제학자나 전문가와는 달리 통계수치를 훤히 꿰차고 있지 않다.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늘상 박정희가 일으킨 경제를 YS와 DJ, 노무현이 말아먹었다는 것을 사실여부를 떠나 아예 기정사실화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가 죽은 79년 당시 국민소득은 지금의 1/8 정도인 1,600불 수준이었다. 또 박정희가 집권하던 61년 당시의 국민소득 82불은 당시 일본의 국민소득이 500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절대빈곤의 최빈국 수준이 아니었다. 이토록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실제보다 많이 과정되었다.

집권자별 실질경제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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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국내총생산(GDP)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시/퇴임시   성장률(%)   대만  주요국   성장률(%)   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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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53-"61     19,763/ 27,179        4.1       -3.2     -0.4         7.3             4.5
    박정희    "61-"79     27,179/117,435       8.5       -1.5      3.3        10.0           5.2
    최규하    "79-"81    122,412/122,412      2.1        -4.6      0.1          6.7             2.0
    전두환    "81-"88    122,412/227,864      9.3          0.8      5.7          8.5             3.6
    노태우    "88-"93    227,864/320,044      7.0        -0.1      4.3          7.1             2.7
    김영삼    "93-"98    320,044/394,710      4.3        -1.9      1.3          6.2             3.0
    김대중    "98-"03    394,710/547,839      6.8        3.7      4.8          3.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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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http://kosis.nso.go.kr/ 에서, "KOSIS > 자료출처별 검색(국제통계) > 국제금융통계,IMF > 국민계정" 순으로 선택한 후, 각종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항목 중, 기준년도 불변가격 국내총생산으로 나라별, 기간별 경제성장률을 계산
2) 출처)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3) 국가선택-> 주요국 : 미국,카나다,독일,영국,프랑스,이태리,일본, 대만
4) 국내총생산(GDP)은 "95년도 불변가격임
5) 연평균성장율 = (집권년도불변가격수/퇴임년도불변가격)의 (1/집권기간(년))승

흔히들 달라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한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우리정부와 언론은 늘 국민들에게 그렇게 주지시켜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환율 변동 때마다 그 폭이 너무 커 실제 소득수준과 경제성장 정도를 나타내는데 문제가 있다. 김영삼 재임기간 중 집권당시인 9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7,811불이었는데 퇴임시기인 98년에는 7,355불로 오히려 400불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한 실질성장률은 연평균 4% 이상을 기록하여 재임기간 중 실제로 23%의 성장을 하였다.
  
박정희는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올랐다. 또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이었는데 74년부터 6년간 지속되어온 이 환율이 두 달 후인 80년 1월에는 20% 상승한 580원이었고 연말에는 700원에 육박하였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 된 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에 죽는 바람에(485원의 환율이 6년간 유지됨) 고평가된 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죽었다. 즉 박정희는 집권과 종료시 환율변동을 잘 타는 바람에 외형상 성장률이 엄청나게 증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질성장율은 이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8.5%에 그치고 주변국들과 비교할 때 내용상으로는 김대중, 전두환, 노태우보다 뒤지게 된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늘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로 상징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유신독재시절 박정희를 우상화시키는 일이 성공의 지름길이었고 박정희에 불리한 비판은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박정희가 죽은 후도 조선, 중앙, 매일신문 등에 의해(박정희 전기 연재를 통해) 박정희의 우상화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집권자별 명목국민소득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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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1인당국민소득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퇴임                       증가률(%)   대만/주요국   증가률(%)   증가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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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67/     82       2.6           3.8    -2.1         -1.2            4.7
     박정희     "61-"79         82/ 1,636      18.1          3.0      6.1   &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