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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序章, Prologue)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지난 두 주에 걸쳐 우리는 브레데와 슈바이처, 두 위대한 사상가의 역사적 예수의 삶에 관한 상반된 견해를 살펴보았다. 슈바이처의 논의는 매우 웅장하고 웅변적이다. 그리고 예수라는 실존했던 인간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매우 구체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 전체가 억지춘향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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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함마디 문서 발견으로 촉발된 초기 성서문헌의 연구 성과는 예수의 죽음 직후부터 이미 놀랍게 다양한 예수운동들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로마제국의 권력에 의하여 그 성격 규정이 획일화되는 4세기 초 이전까지는 방만하게 흩어져 있던 기독교도들의 가슴속에 그려진 예수의 심상은 매우 자유롭고 비권위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때로는 하나님은 진리로서만 규정되며, 예수는 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동무일 뿐이다. 그는 제자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진리의 방편(a provisional measure)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도달케 되면 예수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린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즉 예수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을 뛰어넘기 위한 것이다.(The purpose of accepting authority is to learn to outgrow it. Pagels, The Gnostic Gospels, p.138).
예수의 삶에는 묵시론적·종말론적 전제가 없었다. 그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2세기 교부 중에서 영지주의 이단을 격렬하게 배척한 최대의 로마 정통파 사상가로 알려진 이레나에우스(Irenaeus, AD 180/90년경 활동)는 예수가 50이 넘어서 노년에 죽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 중에서 쓰여진 연대가 가장 앞서는 문헌 중의 하나이며(AD48~55 사이), 바울의 서한임이 거의 확실한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십자가 사건으로 보고하지 않는다. 예수를 그냥 “나무에 목 매달린 자”로 보고할 뿐이다(갈 3:13).
사도행전에도 베드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보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예수를 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행 5:30)고 말한다. 베드로가 욥바로부터 가이사랴로 와서 이탈리아군단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기념비적인 강연을 행하였을 때도 이와 같이 말했다: “저희가 예수를 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도다.”(They put him to death by hanging him on a tree.)
우리는 여기서 백인들의 인종차별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 천재 가수 빌리 할러데이(Billy Holiday, 1915~1959)가 담담하게 부른 노래, ‘기묘한 과일’(Strange Fruit, 1939)을 연상케 된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흑인을 ‘기묘한 과일’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어느 마을 동구 밖 느티나무에 걸려 있는 ‘기묘한 과일’이었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인 사람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고 표시로 나무에 매달아 놓는 습관이 있었다(신명기 21:22). 십자가로 말한다면 오시리스도 디오니소스도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현재 성서신학자들의 대세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 운운하는 거창한 장면들은 모두 마가의 드라마 구성에서 연유된 픽션으로 간주한다. 예수의 실제적 삶에 대한 보고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기묘한 과일처럼 죽어간 예수,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위대했던 천국운동의 실천가 예수, 그는 젊은 나이에 한 무명인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의 말씀을 듣고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사모의 염이 깊어갔고, 그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운동은 눈덩이처럼 불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소박한 진실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참으로 위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 때 소박한 모습으로 남을 수가 없다. 진실은 곧 상징의 옷을 입고 신화의 치장을 하고 화려한 역사의 나들이를 떠난다. 진리는 발가벗지 않는다.
더구나 마가복음이 쓰인 AD 70년대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였다. 즉 복음서작가들의 붓길을 억압하는 모든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질곡이 붕괴된 후였다. 누가 어떤 ‘구라’를 쳐도 그 구라를 검증할 수 있는 권위가 부재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최후의 정신적 상징인 성전, 야훼가 임재하는 지성소까지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모든 종교적 권위가 힘을 잃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뻥칠 수 있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주어진 사상적 자유는 완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동원되고, 빌라도 총독까지 동원되는 화려한 픽션이 구성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시된 복음서 기자들의 책무였다.
그러나 마가복음 이전에 실존했던 도마복음서에는 이적도 없고, 구약적 예언의 성취도 없고, 세계질서를 파괴하는 묵시록적 천국도 없고, 타인의 죄를 위해 누가 죽을 일도 없다. 오직 살아 있는, 기묘한 과일의 전제조차 없는 한 인간의 말씀만 있을 뿐이다.
브레데와 슈바이처의 대결을 운운한다면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브레데에게 승리의 한 팔을 번쩍 치켜들게 만들었다. 21세기의 예수는 또다시 묵시론적 사상가에서 지혜론적 스승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크로상은 말한다.
“우리의 결론은 이러하다. 역사적 예수는 희랍의 도시 중심의 견유학파와는 다른 스타일의, 농촌 중심의 유대인 견유학파의 한 사람(a peasant Jewish Cynic)이었다. 그가 사역의 대상으로 삼은 갈릴리 농촌 마을들은 세포리스(Sepphoris)와 같은 그레코-로만 도시에 근접해 있었기에, 견유학파의 지식이나 그 방랑하는 카리스마들의 모습을 결코 낯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활동지는 주로 남부 갈릴리(Lower Galilee)의 농촌과 마을에 집중해 있었다. 예수의 전략은 자신의 경우는 물론,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더 명료하게, 공짜 치료(free healing)와 공동식사(common eating)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정치질서나 유대교의 종교적 위계나 후견질서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종교적·경제적 평등주의(a religious and economic egalitarianism)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새로운 브로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랑했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고 중개자도 아니었다. 신성과 인성 사이에, 혹은 인성과 예수의 집단 사이에 무엇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던, 매우 파라독시컬한 선포자였다.
이적과 비유, 병 고침과 나누어 먹음은 모두 참가자들 개개인이 하나님과 직접 매개 없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소통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참가자들이 모두 서로 매개 없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직접 소통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예수는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The Historical Jesus, pp.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