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 3> - 3선 개헌과 박정희
<김형욱 회고록 3권>은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고 있다. 김형욱은 중정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박정희를 돕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형욱은 혼신을 다해 박정희를 보필하고 있었을까?
김형욱은 박정희를 믿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박정희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자가 박정희를 믿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유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가 상대를 가장 잘 아는 법. 사람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 가차 없이 버리는 박정희의 행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마다 지켜보는 자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언젠가 자신도 그런 처지가 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걱정이 생기지 않을까? 토사구팽(兔死狗烹)이라고 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는 법. 그냥 놔둬야 식량만 축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가는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만다. 잊지 마라.
김형욱은 3권에서 박정희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다. 그는 박정희의 정권욕이 못마땅했다. 적당히 권력을 향유했으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박정희의 태도에 김형욱은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 정권 못 내놔. 절대로!”
“이거 봐. 우리 통일해야 해. 경제건설도 해야 해. 자주국방도 해야 해. 나 아니면 할 작자가 없단 말이야. 엉.” -3권 65쪽
나는 그때 결정적으로 박정희의 정권욕에 넌덜머리가 났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말 못할 갈등에 빠졌다. 결국 8년 전 내가 이 나라 구국의 지도자로 믿고 5·16혁명을 성취, 보필해오던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선 무엇이든 불사하겠다는 독재자이자 탐욕스런 정치 동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그는 애당초 권력 장악만을 목표로 한 야심가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 3권에서 101쪽
김형욱이 이 회고록을 쓴 것은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기 전이었다. 그 당시에 김형욱이 박정희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런 평가가 여럿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1979년, 박정희의 권력이 서슬 퍼렇게 휘둘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회고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반면 김형욱은 DJ에 대해서는 박정희와 아주 다른 평가를 해서 눈길을 끈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대중을 위한 선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에도 유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 선거를 계기로 김대중은 일약 전 국민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역설적이게도 김대중을 그런 국민적 지도자급으로 올려놓은 것은 김대중이라면 문자 그대로 ‘치를 떨던’ 박정희 자신이었다. - 3권 34쪽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DJ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 대통령 후보가 되어 출마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누구도 DJ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김형욱은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견, 박정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의 웅변과 조리 있는 말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의 비범한 조직 능력이었다. 그는 정치자금이 쪼들리면서도 열정적으로 대의원들을 만나 자신의 포부와 설득력으로 그들을 설복하고 조직했다. 나는 그 기간 중 김대중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으나 가끔 연락해오는 그의 참모 김상현을 통해 얘기를 들어가며 조언해주는 등 인간적으로 성원하면서 정치인 김대중의 활약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민당 대의원층에서는 김대중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치밀한 조직 관리로 중앙지도부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 3권 267쪽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김형욱은 돈과 조직이 없었다면 그리고 엄청난 선거개입이 없었다면 DJ가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선거가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DJ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당시의 상황에 비쳐본다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정권교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집권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박정희가 순순히 정권을 내놓았을 리 만무하니까.
김형욱은 회고록 3권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3대 부정사건을 고백하고 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동안 한국 중앙정보부가 저지를 엄청난 부정 사건들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을 주저해왔다. 그것은 중앙정보부라는 권부가 사실은 나에 의해서 본궤도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또 그곳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몸담아왔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부정에 대해서 공범의식과 공동책임을 느꼈다. 나는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 흡사 내가 저지른 것처럼 걱정과 고통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제 내가 오랜 주저와 갈등을 헤치고 그 사건들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박정희 독재체제 아래에서 자행되는 구조적 부정과 절대부패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또 그것을 빌미로 독재가 더욱 창궐하는 것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흡사 나의 뼈를 깎는 심정으로 아마도 지금까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3대 부정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고자 한다. - 3권 209쪽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뒤, 박정희는 김형욱을 중정부장에서 물러나게 한다.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진 김형욱. 그는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 견제하거나 멀리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김형욱은 그런 박정희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파국밖에 없는 것인가?
김형욱의 회고록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산파역할을 한 김경재는 1984년에 쓴 초판 발문을 통해 김형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선악과 정사(正邪)의 가치 기준을 떠나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의 인상과는 다르게 비범한 직관력과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박정희가 그를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장으로 중용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참고삼아 밝히자면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 재직한 기간은 6년3개월이다.

김형욱은 박정희를 믿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박정희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자가 박정희를 믿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유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가 상대를 가장 잘 아는 법. 사람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 가차 없이 버리는 박정희의 행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마다 지켜보는 자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언젠가 자신도 그런 처지가 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걱정이 생기지 않을까? 토사구팽(兔死狗烹)이라고 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는 법. 그냥 놔둬야 식량만 축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가는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만다. 잊지 마라.
김형욱은 3권에서 박정희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다. 그는 박정희의 정권욕이 못마땅했다. 적당히 권력을 향유했으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박정희의 태도에 김형욱은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 정권 못 내놔. 절대로!”
“이거 봐. 우리 통일해야 해. 경제건설도 해야 해. 자주국방도 해야 해. 나 아니면 할 작자가 없단 말이야. 엉.” -3권 65쪽
나는 그때 결정적으로 박정희의 정권욕에 넌덜머리가 났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말 못할 갈등에 빠졌다. 결국 8년 전 내가 이 나라 구국의 지도자로 믿고 5·16혁명을 성취, 보필해오던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선 무엇이든 불사하겠다는 독재자이자 탐욕스런 정치 동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그는 애당초 권력 장악만을 목표로 한 야심가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 3권에서 101쪽
김형욱이 이 회고록을 쓴 것은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기 전이었다. 그 당시에 김형욱이 박정희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런 평가가 여럿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1979년, 박정희의 권력이 서슬 퍼렇게 휘둘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회고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반면 김형욱은 DJ에 대해서는 박정희와 아주 다른 평가를 해서 눈길을 끈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대중을 위한 선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에도 유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 선거를 계기로 김대중은 일약 전 국민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역설적이게도 김대중을 그런 국민적 지도자급으로 올려놓은 것은 김대중이라면 문자 그대로 ‘치를 떨던’ 박정희 자신이었다. - 3권 34쪽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DJ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 대통령 후보가 되어 출마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누구도 DJ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김형욱은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견, 박정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의 웅변과 조리 있는 말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의 비범한 조직 능력이었다. 그는 정치자금이 쪼들리면서도 열정적으로 대의원들을 만나 자신의 포부와 설득력으로 그들을 설복하고 조직했다. 나는 그 기간 중 김대중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으나 가끔 연락해오는 그의 참모 김상현을 통해 얘기를 들어가며 조언해주는 등 인간적으로 성원하면서 정치인 김대중의 활약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민당 대의원층에서는 김대중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치밀한 조직 관리로 중앙지도부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 3권 267쪽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김형욱은 돈과 조직이 없었다면 그리고 엄청난 선거개입이 없었다면 DJ가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선거가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DJ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당시의 상황에 비쳐본다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정권교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집권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박정희가 순순히 정권을 내놓았을 리 만무하니까.
김형욱은 회고록 3권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3대 부정사건을 고백하고 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동안 한국 중앙정보부가 저지를 엄청난 부정 사건들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을 주저해왔다. 그것은 중앙정보부라는 권부가 사실은 나에 의해서 본궤도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또 그곳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몸담아왔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부정에 대해서 공범의식과 공동책임을 느꼈다. 나는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 흡사 내가 저지른 것처럼 걱정과 고통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제 내가 오랜 주저와 갈등을 헤치고 그 사건들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박정희 독재체제 아래에서 자행되는 구조적 부정과 절대부패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또 그것을 빌미로 독재가 더욱 창궐하는 것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흡사 나의 뼈를 깎는 심정으로 아마도 지금까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3대 부정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고자 한다. - 3권 209쪽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뒤, 박정희는 김형욱을 중정부장에서 물러나게 한다.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진 김형욱. 그는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 견제하거나 멀리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김형욱은 그런 박정희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파국밖에 없는 것인가?
김형욱의 회고록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산파역할을 한 김경재는 1984년에 쓴 초판 발문을 통해 김형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선악과 정사(正邪)의 가치 기준을 떠나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의 인상과는 다르게 비범한 직관력과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박정희가 그를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장으로 중용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참고삼아 밝히자면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 재직한 기간은 6년3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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