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한국은 독극물·폐기물 처리장...?

YOROKOBI 2011. 5. 30. 16:31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군 캠프 캐럴 고엽제 불법매립 규탄 기자회견'에서 녹색연합 관계자가 방독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주한 미군기지는 여전히 접근불가 성역
환경단체, 진상조사·대책마련 한목소리
SOFA협정 사실상 미국 보상 규정 없어


경북 칠곡 미군기지의 고엽제 매립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해당 지역 주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또 경기도 부천과 의정부 미군기지에서도 화학물질이 매립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고엽제 파문이 일파만파 확대되는 분위기다.

특히 2003년 한·미 합의 이전에 반환된 미군기지나 캠프 캐럴처럼 반환대상이 아닌 기지는 우리 정부의 환경오염 평가를 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환경단체들은 고엽제 진상조사와 함께 대책 마련,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주한미군 고엽제 파문 확산
주한미군이 칠곡 미군기지 캠프 캐럴 내에서 고엽제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가운데 1979년부터 1980년 사이에 해당 캠프내의 오염된 흙 수십톤이 외부로 반출됐다는 사실이 23일 밝혀졌다.

미8군 존슨 사령관은 고엽제 매몰 의혹과 관련해 1992년 나온 미 육군 공병단의 연구보고서를 인용해 "우리는 캠프 캐럴에서 1978년에 특정 물질이 매몰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해당 보고서에는 캠프 캐럴 주변에 화학 물질, 살충제, 제초제와 솔벤트용액 등 유독물질이 담긴 많은 양의 드럼통을 매몰했다는 기록이 담겨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존슨 사령관은 연구보고서의 성격을 '일반적 환경평가서'라며 고엽제 포함여부를 확정짓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드러난 정황상 해당 특정물질 중 고엽제가 포함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날 발표된 보고서에서 드러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캠프 안은 물론 부대 밖으로도 이 독성 물질들이 옮겨졌다는 내용이다. 존슨 사령관은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이 물질들과 그 주변 40~60톤 가량의 흙이 이 지역에서 제거돼 다른 지역에서 처리됐다"고 설명했다.

외부로 반출돼 처리된 흙 40~60톤이 고엽제에 오염된 것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심각하다. 미군측이 이날 확인한 살충제, 제초제와 솔벤트용액만으로도 환경은 물론 인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슨 사령관의 발표만 놓고 보면 해당 보고서의 내용은 1978년 주한미군기지 캠프 캐럴에서 복무중 상관의 지시에 따라 고엽제를 매립했다고 최근 미 언론 등을 통해 폭로한 스티브 하우스 씨의 증언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하우스 씨는 이날 오전 방송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고엽제를 담은 205ℓ들이) 총합이 600여개는 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지난 24일에는 다른 주한 미군기지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다이옥신 제초제를 모두 폐기하라는 명령이 일제히 내려졌다는 퇴역 미군의 증언이 확인됐다. 1977~1978년 미 육군 2사단 사령부에서 복무한 래리 앤더슨 씨는 2009년 8월 퇴역 주한미군 인터넷 사이트인 '한국전 프로젝트(Korean War Project)'에 올린 글에서 "그 무렵 2사단 전체 창고에 남아있던 모든 다이옥신을 없애라는 명령이 우리 부대뿐 아니라 전 부대에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다이옥신 제초제 전량 폐기 명령은 스티브 하우스 씨가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매립했다는 1978년과 비슷한 시점에 내려졌다.

경기도 부천에 고엽제가 살포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4일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가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1963~1964년 미 공병단 44공병대대 547중대원으로 부천 캠프머서에 근무했다는 레이 바우스 씨는 근무 당시 불도저를 통해 구덩이를 파고 고무옷과 가스 마스크 및 모든 상상 가능한 화학물질 등 수백 갤런을 버렸다고 주장했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옆에서 열린 '주한미군 고엽제 매립 범죄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단체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환경단체 한·미 공동 조사, 재발방지 대책 촉구
녹색연합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23일 미군의 캠프 캐럴 고엽제 불법매립과 관련해 미국 정부에 공식 사과와 한·미 공동 전면조사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서울 세종로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식 사과 ▲주한미국대사의 유감 표명 ▲환경정화 비용과 피해보상 부담 ▲한·미 공동 전면조사 ▲재발방지를 위한 SOFA 개정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환경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이고 조직적인 중대범죄에 해당한다"며 "SOFA 환경조항에 근거한 공동조사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미군은 한국환경당국과 조사기관의 기지 내 모든 활동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협조해야 한다"며 "주한미군을 넘어 미국 정부가 책임지고 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주한미군은 관련 기록이 없다고 발뺌만 해서는 안된다"며 "고엽제 피해의 심각성을 고려해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환경운동연합도 이날 오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한미군과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와 시민사회가 참여한 고엽제 매립 범죄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후대책 마련에 즉각 나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미군의 조사가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전 과정을 감시할 것이며 국회와 함께 민간 합동 진상조사단을 꾸려 사건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환경운동연합은 또 "미국은 SOFA 규정을 내세워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포함한 유해물질을 우리 땅에 몰래 버린 행위에 대한 조사를 방해한 전력이 있다"며 "이번에도 또다시 방해한다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23일 경북 칠곡 캠프캐럴 기지에서 민관합동조사단 관계자들이 데이비드 팍스 미8군 기지관리사령관의 안내를 받아 고엽제 매립지로 추정되는 헬기장 인근 D구역을 둘러보고 있다.

오염 원인자 부담 원칙… SOFA 개정필요
이처럼 고엽제 매립 파문이 확산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미군의 마땅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환경오염 책임이 있는 당사자가 오염방지 및 복원 비용, 피해자의 구제 비용 등을 부담해야 한다는 '오염 원인자 부담 원칙'에 따라 주한미군이 환경 정화비용 등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국가들이 국내 환경규정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환경 관련 국제문서나 조약 등에서도 통용된다.

그러나 한미 사이에 체결된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를 들여다보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원래 1966년에 체결된 SOFA에는 환경보호에 대한 조항 자체가 없었다. 2000년 용산 미군기지에서 독극물인 포르말린을 한강으로 방류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2001년 2차 SOFA 개정 때 처음으로 환경 관련 조항이 신설됐다.

그러나 환경오염 사고 치유에 대해 '공지의,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KISE:Known, Imminent & Substantial Endangerment)'에 해당할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KISE에 해당하는 사안은 한미공동조사절차를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항은 미국이 원상회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 미군 기지의 오염 정도가 KISE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주한미군 사령관이 판단할 수 있게 한 점도 문제다. '환경정보 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A'에서는 '한국에 2002년 1월18일 이후 반환되는 기지 내 오염조사와 치유에 필요한 비용을 미군이 부담한다'는 규정을 마련했으나 이 역시 이전에 반환된 기지나 반환대상이 아닌 기지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불합리한 SOFA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명규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6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군기지 고엽제 매립 의혹과 관련 "한미 합동조사 결과를 보고 SOFA 개정문제까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 역시 2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미군이 매립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주한미군은 오염정화와 피해보상, 사과 등을 비롯한 법적·도의적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며 "SOFA 역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을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23일 논평을 통해 철저한 진상 규명과 조사 결과 공개, 조사결과에 따른 피해보상, SOFA 전면 개정, 미국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다.

뉴스룸 = 박형재 기자 news3456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