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바로알기

정권 말 ‘낙하산’의 교묘한 진화

YOROKOBI 2011. 9. 28. 16:40

ㆍ금융권 인사 소리소문 없는 '스텔스 낙하산', 올드보이 귀환이 특징

"에이, 전 별다른 줄이 없잖아. 그렇다고 (소망)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이도 60도 안 넘고. 나는 자격이 안 되지."
저녁 식사자리. 1급 고위관료인 ㄱ씨에게 '이제 한 자리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크게 손사래를 쳤다.

"제가 봐도 요즘은 좀 너무하다 싶어요. 저희는 누군지도 모르겠더라구요"
동석한 과장급 관료도 쓴웃음을 지었다. 또다른 과장급 관료는 "(정치적) 줄을 서지 않으면 한 자리를 못한다는 선례를 남긴 선배들이 원망스럽긴 합니다. 실력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요즘 정가의 화젯거리는 단연 정권말 인사다. 정치로 나가려는 수요와 막차라도 타려는 공급이 맞물리면서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와 감사, 이사 자리가 잇달아 바뀌고 있다. 이번 인사의 특징은 '스텔스 낙하산' '올드보이 귀환'이다. 스텔스 낙하산이란 소리소문 없이 공기업 임원으로 내려앉는 것을 말한다. 올드보이 귀환이란 60세 이상 OB들이 깜짝 기용되는 현상을 말한다.

두 인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 정권에 기여했든가 현 정권의 인사 실세들과 연이 깊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공정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정권 말기면 으레 자기 사람 챙기기가 있다지만 이번에는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반면 관료들은 승진인사를 꺼리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권 말기 어눌하게 승진했다가 다음 정권에서 '팽'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9월 6일 예금보험공사는 "이상목 전 청와대 국민권익비서관이 신임 감사로 취임했다"고 밝혔다.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소리소문 없는' 취임이었다. 불과 3개월 전에 이 감사는 기업은행 감사로 내정됐지만 금융권 경력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물러섰다. 이 감사는 노동전문가다. '화려한 귀환'을 한 이면에는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선거 외곽조직인 국민승리연합의 기획위원장을 지내는 등 개국공신으로서의 탄탄한 배경이 뒷받침됐다는 후문이다. 이 감사 앞에 한 이는 또다른 청와대 비서관 출신인 손교명 감사였다. 인권전문가인 그는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중도사퇴했다.

금융 공기업 임원, 급여 높고 여의도 가까워 인기
예보 관계자는 "이번 인사와 관련해 외부에 공개를 꺼리는 분위기라 인사 자료 등을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본인이 공개를 원치 않았다"고도 했다.

하루 전날인 9월 5일에는 박흥신 전 청와대 정책홍보비서관이 주택금융공사 감사로 취임했다.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의 고교 후배지만 역시 금융 관련 경력은 없다. 앞서 주택금융공사는 이해돈씨를 이사로 선임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서대문구청장 후보로 나섰다 낙선한 인물이다.

지난 8월 기업은행이 출자한 IBK 신용정보 부사장으로 선임된 류명열씨도 눈에 띈다. 영남대 출신으로 한나라당 경남도당 사무처장, 중앙당 인사부장, 조직국장 등을 거쳤다.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 후보였다. 당내 정치경력은 화려하지만 신용정보나 금융과는 무관하다.
한 증권사 임원은 "요즘 금융공기업에 임명되는 인물은 모두 정치적·지역적 배경이 있다고 봐야 한다"며 "금융경력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다보니 민간 금융권과 접촉도 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권 인사들이 특히 금융권을 탐내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급료가 상대적으로 많다. 여의도와 가깝다는 것도 이점이다. 국회와 근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 정치판 돌아가는 흐름을 따라가기도 좋다. 한나라당 의원의 한 보좌관은 "공공기관 임원 자리라는 게 어차피 용돈 받아서 후배들에게 밥 잘 사라는 의미에서 마련해준 것 아니겠느냐"며 "간만에 인심도 쓰면서, 다음 기회를 엿보기에는 금융권 임원 자리가 딱이다"라고 말했다.

'올드보이'의 귀환은 관료사회에서 더 시끄러웠다. '공공기관장은 예순부터'라는 자조 섞인 말도 들린다.

9월 2일 한국조폐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윤영대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65)은 8년 만에 공공기관에 복귀했다. 행시 12회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윤진식 의원과는 행시 및 고려대 동기다. 윤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 상임 특별보좌역과 한나라당 경북도당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정치경력도 있다.

다음 정권 '팽' 당할까 승진 꺼리는 관료들
같은 날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에 취임한 진영욱 사장(60)은 행시 16회다.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과장으로 외환위기의 유탄을 맞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차관이던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이 각별히 아끼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는 직전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때 메릴린치에 투자해 막대한 손실을 봤지만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되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9월 1일 취임한 기술보증기금 김정국 이사장(64)은 행시 9회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1차관보였으나 "후배들을 위해 용퇴한다"며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가 정권을 잡은 2008년 한국전력공사 비상임이사가 됐고 퇴임 14년 만에 공공기관 수장이 됐다. 예산실장 당시 부하직원으로 두었던 임태희 현 대통령실장과 가깝다.

60대 선배의 깜짝 복귀를 바라보는 후배들의 시각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뒤를 확실히 봐줄 '보스'를 잘 둬야 한다는 것만 재각인시켰다.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 임태희 대통령실장, 윤진식 의원 등은 현 정권에서 '인사과장'이라 불린다.



스텔스 인사와 올드보이 귀환은 정권말을 맞아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빚어진 백태다. 민간과 달리 관료사회에서는 승진 기피 현상이 엿보인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1차관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온 지 5개월 만에 자리를 옮겼다. 초고속 영전이다. 하지만 관료사회에서는 그다지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남은 임기를 고려해볼 때 다음 자리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정서가 생긴 것은 그간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참여정부 당시 마지막 차관이었던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대표적인 사례. 김 위원장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올 초까지 야인으로 떠돌았다. 김 위원장에 대한 추천이 많았지만 청와대 일각에서는 "전 정권에 부역한 인물"이라며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뿐 아니라 참여정부 막판에 장·차관을 맡았던 인물들의 끝은 비슷비슷했다. 검찰의 표적수사를 받은 이도 수두룩했다.

재정부 고위 관료는 "과거 사례를 볼 때 정권 말기에 중요 직책을 맡으면 다음 정권에서 재기용되기 힘들다"며 "앞으로 1년은 느리지만 천천히 가는 것이 향후 5년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