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 동백 - 조영남

YOROKOBI 2015. 1. 18. 09:14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 동백 - 조영남

 

                

                   조영남은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를'를 인용 편곡하여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에 조영남의 노래 '모란 동백'을

                   영랑의 시와 함께 띄웁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시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는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5>

 

강진북쪽으로는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영암이 있고, 동쪽 장흥에서부터 흘러온 탐진강은

강진땅으로 와서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이 강진만은 탐진강의 하구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많은 하천이 흘러들기 때문에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는 뜻으로 구강포라고도 불린다. 강진 땅 서쪽은 해남이다.

 

조선 태종 17년 이전까지 강진이라는 고을은 없었다.

강진은 그 전까지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친 후,두현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그때 도강현 소재지에는 전라도 병마 도절세사영이 설치되었고 바닷가 마량에는 수군만호진이 두어졌다.

육군과 수군이 주둔했던 당시의 흔적은 오늘날 옛 도강현이 있던 자리에 병영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구강포와 바다 거기에 늘 푸른 섬들과 갯벌 그리고 산과 하천, 평야를 고루 담은 강진의 풍광은

유쾌하고 즐겁게 춤추는 햇살을 담고 있다.

1930년대에 활동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서정도 그가운데서 익었다.

 

 

  

영랑생가 는 강진읍 남성리, 군청 옆길로 들어가면 그 영랑이 태어난 집이 나온다.

그가 떠난 후 몇 차례 집주인이 갈리면서 일부 원래 모습이 바뀌기도 했지만

1985년에 강진군이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튼튼한 시비가 하나

그리고 사랑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화단과 연못이 있다.

초여름이 되면 그를 상기시키듯 시비 주변과 마당 구석에서 모란도 피어난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대지주 집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그의 선배로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가 있었고 또 후배로는 정지용, 이태준 등이 있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용아 박용철 시인과 사귀었다.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이 나자 그만두고 귀국했다.

1930년에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그 지면에「모란이 피기까지는」「동백잎에 빛나는 마음」등 시를 발표하면서

영랑은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1935년에 『영랑시집』이 나왔다.

그후에도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영랑의 시 세계는 주로 1930년대의 작품들로 대변된다.

광복 후에는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강진의 자연처럼 따사로운 시를 통해서만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 서울로 이사했고 이듬해에는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9.28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날 돌아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순수’시의 대표주자였다는 말은 물론‘순수’한 찬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매끄러운 운율과 세련된 시어로써 개척한 시 세계가 독보적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이다.

영랑이 태어난 집 마루에 슬쩍 걸터앉아 그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과 더불어

그의 시 한편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영랑은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뛰어난 고수이기도 했다고 한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모란동백 /조영남 ♬

1.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꾹이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 속에 찾아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2.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녁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 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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