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문가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이튼 스쿨. 2차 대전 당시 이튼스쿨의 한 학급출신 전원이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튼 스쿨의 권위는 바로 졸업생들이 보여준, 이런 사회적 책임에서 나온 것이다. 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 때에도 그랬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엑소제 미사일은 전파교란이 되지 않는 첨단무기라서 영국 군함에 치명적인 무기였다.
군함을 향해 날라 오는 엑소제 미사일의 방향을 교란시키기 위해서는 헬기 조종사가 직접 미사일의 앞 방향에 쇳가루를 뿌려 미사일이 군함으로 가지 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유인하는 방법뿐이었다. 이 위험한 일을 영국 왕실의 에드워드 왕자가 담당했다고 한다.
미사일이 헬기를 명중시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왕자가 직접 해군 헬기를 조종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영국이라는 사회이다. 오죽 하면 영국 신문에서 근심이 가득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여왕도 어머니이다’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을까. 영국 귀족의 권위는 이런 데에서 나온다.
우리에게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한 집안이 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이 바로 그렇다. 이회영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11세 후손이다. 이회영 집안이 한국을 대표하는 경반(京班:서울에 거주하던 양반)으로 알려진 이유는 이항복부터 시작해서 8대동안 계속해서 판서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판서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이다.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사례는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8명의 판서 가운데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이 집안에는 ‘상신록’(相臣錄)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문집이 있을 정도이다.
재상을 지낸 이들의 행장을 모아 놓은 문집이라는 뜻이다. 재상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집안은 화려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그 화려함은 치열함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그 많던 재산과 목숨을 바치면서 초개처럼 바쳤던 것이다.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에게는 6명의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 첫째 건영(健榮·1853~1940), 둘째 석영(石榮·1855~1934), 셋째 철영(哲榮·1863~1925), 넷째 회영(會榮·1867~1932), 다섯째 시영(始榮·1869~1953), 여섯째 호영(頀榮·1875~1933)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명망가 집안에서 자란 이들 6형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만주 벌판으로 망명을 결행한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이는 조선왕조에서 8대동안 판서를 지낸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방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넷째 아들 이회영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이었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한 집안 60명 전체가 집단 망명을 한 셈이다. 60명 가운데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됐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시영은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김홍집의 사위였던 그는 평안도 관찰사라는 고위 벼슬에 있었다. 그러나 형의 권유에 따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풍찬노숙의 망명길에 따라 나섰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장 답사결과 현재 의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명동성당 정면의 오른쪽 편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회영의 아버지인 이유승이 심어 놓은 나무라고 한다. 명동의 터줏대감이 바로 이회영 집안이었던 것이다. 만주로 망명할 때 이 집을 평소 친분이 있던 육당 최남선에게 싼값에 팔고 갔다. 집뿐만 아니라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통째로 망했는데 조상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 둘째였던 이석영의 재산까지 합해졌다. 그는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양자로 입양됐는데, 양아버지였던 이유원의 재산이 자그만치 2만석이었다. 2만석 재산을 상속받았던 이석영은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형제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현금이 40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6형제가 집안의 전 재산을 처분한 600억원을 가지고 만주로 가서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관 양성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1년에 만주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가 됐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 동안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만주 일대에서 이 학교에 몰려든 학생들의 수업료와 생활비는 일체 무료였다.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려는 청년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경비는 이회영 집안에서 가져간 돈에서 충당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핵심전투병력으로 참가했다.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받은 정신무장과 훈련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해방후에 이시영이 설립한 신흥대학으로 계승되었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이들 6형제는 만주는 물론이고, 베이징, 텐진, 상하이 일대를 오고가면서 수많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고국에서 가져온 자금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환갑이 넘은 나이로 텐진의 빈민가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이회영을 만난 한 친지는 이렇게 술회했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후손이 딸의 옷까지 팔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6형제 가운데 시영만 제외하고 5형제는 모두 중국에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6형제의 자식들인 규(圭)자 항렬들 대부분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성재는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1951년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불의를 보면 좌시하지 못하는 가문의 전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된 셈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형제는 물론 그 자제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그들 또한 이국땅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상당수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과 현 국회의원 이종걸(李鍾杰)이 우당의 직계손자들이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일화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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