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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20) 연재를 마치며
바야흐로 ‘글쟁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90년대말 이후 한국 출판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자기 브랜드를 가진 ‘글쟁이’, 곧 저술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를 전후해 등장한 이들 저술가들은 고정 독자들을 거느리면서 이제 출판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예전에도 언제나 분야별로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저술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등장한 저술가들은 앞 세대 저술가들과 분명 다르다. 그리고 훨씬 다양해졌다. 이들은 등장 초기 전문성과 대중성의 중간, 지식을 생산하는 최전선과 독자들의 사이에 존재하며 양쪽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중간필자’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저술가들은 그 숫자와 범위가 점점 넓어졌고, 이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책 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전업저술가, ‘문학 작가’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작가’로 부를 수 있는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한겨레> 시리즈 ‘한국의 글쟁이’는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가들을 차례로 만났다. 20회에 걸친 연재를 마치며 끝으로 우리 시대 저술가들은 어떤 이들이며 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짚어봤다.
현재 주요하게 활동하고 있는 저술가들은 출발점에 따라 해당 분야 학자 출신과 일반 전문가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학자 출신은 다시 교수들과 전업 저술가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자기 연구의 성과나 전공 분야의 최신 정보를 주기적으로 책으로 펴내고 있다.
이런 교수 출신 저술가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바로 국문학계다. 중국 고전이 아닌 우리 고전문학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그 속에 담긴 보편적인 정서들이 이들 국문과 교수 저술가들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 살아나고 있다. 정민(한양대) 교수를 비롯해 강명관(부산대), 김풍기(강원대), 안대회(명지대) 교수 등이 이런 주역들이다.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는 교수 저술가들이 아직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분야별로 대표급들이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역사에서는 서양사 책을 쓰는 주경철(서울대) 교수, 철학쪽에서는 김용석(영산대) 교수, 과학분야에서는 정재승(카이스트) 교수, 건축에서는 임석재(이화여대) 김정동(목원대)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학자·전문가이거나 전업 저술가
사회과학쪽에서는 그야말로 글쟁이의 전형이랄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을 생산하고 있는 강준만(전북대) 교수가 있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고 있는 박홍규(영남대) 교수가 책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글쓰기로 직접 대중들과 만나는 글쟁이도 있다. 80년대 일찌감치 ‘프로지식인’을 선언한 이래 프로 저술가의 모델이라고 평할 수 있을만큼 확실한 브랜드를 구축한 도올 김용옥씨가 여기 속한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욱 확실한 저술가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은 교수가 아닌 학자 출신 저술가들이다. 전문가이자 학자들인데, 자리가 제한적이고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억압 풍토가 강한 교수사회에 속하지 않고(또는 속하지 못하는 바람에) 프로 저술가로 방향을 설정한 이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역사의 이덕일, 민속학의 주강현, 미술사학의 노성두, 그리고 민속문화 전문저술가인 허균, 경영 및 자기계발저술가 공병호씨 등을 꼽을 수 있다. 박사학위 소지자이거나 유학파인 이들은 학문적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되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글쓰기로 자기 분야 대중화의 선두에 서있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저널리스트적 감각과 관점으로 일반인들을 위해 정보를 요약 정리하거나 새로운 흐름을 책으로 엮어내면서 저술가로 자리잡은 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대기업 엔지니어 출신으로 과학저술가로 처음 이름을 얻은 이인식씨, 대기업에서 변화경영을 담당하다가 자기계발 저술가로 변신한 구본형씨가 이런 ‘일반인 출신’ 저술가들의 대표격이다. 이밖에 번역가 출신으로 신화와 일본에 대한 책을 주로 쓰고 있는 이경덕씨, 편집기획자 감각으로 각종 교양서를 쓰는 남경태씨 등이 있다. 정보와 자료의 바다인 인터넷의 탄생이 이런 비공식 고수들에게 저술가가 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최근에는 저널리스트 출신 저술가들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 미술 담당 기자를 하다가 미술저술가로 나선 이주헌씨, 교양과 시사분야를 주로 쓰는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경우다. 최근 왕성하게 책을 쓰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기자 출신 글쟁이들로는 <한국의 부자들>에 이어 <배려>를 쓴 한상복씨, 경제·경영 분야의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직장인 자기관리 분야에서는 신현만 커리어케어 대표 등이 출판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출신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 새로운 저술가들은 글쓰기와 책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 거의 한결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전달력’을 중시하며 독자 지향적인 기획 마인드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으로 이들 저술가들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이어주는 매개자이자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다.
폭과 깊이 아직은 초기 단계
정보와 가치를 분석하고 다루는 글은 크게 두 가지다. 학자들이 전공을 연구해 주로 논문으로 펴내는 ‘아카데미즘’의 글쓰기, 그리고 언론에서 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쉽고 정확하게 쓰는 기사로 대표되는 ‘저널리즘’의 글쓰기가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종류의 글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도 각각의 영역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이제 저술가들이 ‘아카데미즘’의 영역인 학계의 연구성과를 ‘저널리즘’적인 소재 선택과 글쓰기 능력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두 영역이 소통하고 있다. 학자들로 대표되는 아카데미즘의 약점인 어렵고 딱딱한 글쓰기는 극복하되 아카데미즘의 강점인 전문성은 살리고, 언론으로 대표되는 저널리즘의 약점인 전문성 부족은 극복화면서 강점인 전달력을 추구하는 것이 저술가들의 차별점이자 무기다.
분명 저술가들이 많이 등장해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은 폭과 깊이 모두 초기 단계다. 실제 가장 대중적이고 누구나 좋아할 것 같은 역사 분야만해도 독자들이 ‘아, 그 필자’라고 그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떠올리는 저술가는 한두명 꼽기도 힘들다.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친숙한 분야와 장르의 책들만 반복 소비하고 있고, 그래서 저술가들이나 출판사 입장에서는 선뜻 책을 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저술가들이 쓰는 책의 유형도 아직까지는 지식이나 정보가공물 위주로 대동소이한 편이다. 논픽션이란 장르가 아직 국내에서 자리잡지 못해 미국의 트루먼 카포티나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논픽션을 쓰는 글쟁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시각의 ‘스토리텔러’ 역할
그러나 독자들은 분명 확실한 콘텐츠를 책에 담아내면 그동안 없었던 주제나 분야라도 독자들은 호응으로 화답하고 있다. 어느 분야나 그 시대의 ‘스토리 텔러’가 필요하며, 이제는 그동안 외국 필자들이 차지해온 그 자리를 한국 스토리 텔러들이 한국 시각으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변화다.
또한 새롭고 다양한 저술가들의 등장은 점점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출판시장에서 궁지로 몰리고 있는 작은 출판사들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다. 수십만부 팔리는 대형 저술가가 아니라 4천, 5천부 정도 규모를 유지해줄 수 있는 저술가들이야말로 출판사들이 가장 원하는 필자들이다. 속속 저술가로 합류하고 있는 분야별 글쟁이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넓은 문이 열려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학자들의 탁월한 논문과 저널리스트들의 훌륭한 특종들처럼 보이지만, 실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꿔 들려준 저술가들의 책일 수 있다. 세상을 점령한 살충제 디디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수많은 학자들의 논문과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디디티를 막아야한다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주인공은 논문처럼 어렵지 않고 기사보다 호흡이 긴 한 권의 책 <침묵의 봄>이었다. 이 책으로 세상을 바꾼 이는 학자도 언론인도 아니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저술가가 된 평범한 공무원 레이첼 카슨이었다. 세상은 그래서 저술가들을 필요로 한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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