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스크랩]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다양한 관점들...

YOROKOBI 2007. 5. 28. 16:32


[활용자료]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다양한 관점들
독서클리닉 카페에서 김현애 님이 쓰신 것입니다.


1. 심리분석의 관점

프로이트는 작중인물 스스로도 모르는 그 자신의 어떤 속성을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지적하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무의식 속에 파묻은 재료들이 꿈과 문학의 서술적 사건들과 이미지를 통해 표출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의 관점에 있는 브루노 베텔하임이나 자크 라캉의 이론을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중 상당수가 프로이트 학파의 '무의식'이나 라캉의 사고력 너머에 있는 '실재'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받아들이고 있다. 즉, 우리가 무의식을 가지고 있고, 직시할 수 없는 기억들을 억누르고 있으며, 꿈은 종종 우리 마음 상태를 드러낸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남성 문화가 여성을 지배해 온 수단을 명백히 밝히는 이론으로 읽는다. 특히 그의 생물학적 결정주의 -여성의 심리적 구조는 해부학적 특성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생각- 와 거세 콤플렉스, 남근 동경 같은 생각은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라캉식 심리 분석의 방향을 돌려, 그 시대 안에 있는 억압적 권력 구조의 여백에서 정해진 여성에 대한 규정이 어떻게 반전의 기회를 가져다 주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브루노 베텔하임

<옛 이야기의 매력2>에서 브루노 베텔하임은 <신데렐라>는 오이디푸스적 질투와 형제간의 경쟁심을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스토리의 사건이 이 심리적인 문제에서 나아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베텔하임은 이야기 속의 신이 "여자아이들에게는 거세 콤플렉스가 있는데 이는 모든 아이들이 원래 남근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아이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아마도 잘못한 행위에 대한 벌로) 상상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맞추어 '거세 불안'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신데렐라>의 여러 판본에서 나타나는 발의 일부를 절단하는 행위에서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또한 신발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작고 아름다운 신은 <신데렐라>의 핵심적 소재이며, <신데렐라>를 가장 사랑받는 이야기로 만든 상징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신데렐라의 작고 예쁜 발은, 아늑하게 들어가는 아름다우면서도 소중한 신과 결합되어, 무의식적인 성적 매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왕자가 신데렐라의 신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은 처녀막의 상징에 의해 표현된 신데렐라의 여성성을 사랑하고 있음을 상징적인 형태로 말한 것이라고 한다.

자크 라캉

프로이트를 이어 받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캉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새로운 무기로 가지고 정신 분석에 임하고자 했다. 라캉은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욕망이론을 개인의 성격과 인성 분석에서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넓혀 나갔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은 직접적으로 성욕과 연결되어 있으며, 억압은 직접적인 가족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환자 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다른 연관고리들은 고려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러나 라캉은 언어학을 도입함으로써 욕망, 억압 등의 의미를 사회적 상징체계들이나 문화, 제도 등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의학적 혹은 개인 심리학적 욕망이론을 라캉은 언어학과 결합시켜 사회철학적인 의미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 비해 유난히 시각적인 효과에 집착하는 서양 문화에서는 거울이 그만큼 중요하며 신화적인 역할을 한다. 백설공주의 불행은 거울에서 시작하며, 옛 이야기 속의 마녀의 주무기도 빗자루라는 운송 수단과 수정 구슬이라는 시각 장치이다.
라캉은 거울을 깨는 재수 없는 일을 성장의 첫 단계로 본다. 갓난아기는 거울의 단계에 속한다. 라캉은 거울단계의 세 과정을 통해 갓난아기가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며 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준다.

1단계, 처음에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실재적 존재라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거울 속의 존재를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2단계, 거울 속의 존재가 하나의 영상이라고 깨닫는다. 그래서 아기는 거울을 밀치거나 그 뒤쪽으로 가서 진짜 실물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거울 뒤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3단계, 마침내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이 실재가 아니라 영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아기는 주체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이 시기에 아기가 가지는 자아의식은 거울 속에 박힌, 즉 주체의 바깥에 있는 객관화된 자기 몸의 통일적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 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주체의 기능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기 이전의 상태이다. 그래서, 거울의 단계는 비록 자신의 신체의 통일성을 지각하며 자기 동일성을 이해하는 단계이지만 그 자기 동일성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므로 나르시즘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때의 아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며, 자신이나 자기 영상 또는 자기 어머니와의 동일성의 관계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자 관계'이자 '상상적 단계'가 된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해야한다. 이자 관계를 지배했던 상상은 삼자 관계의 상징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한다. 사회적인 인간 개체의 성장은 상징 질서 속에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타인과의 삼자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이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 질서란 언어로 이루어지는 질서를 말한다.
거울 단계를 벗어나 언어를 배우게 되면, 그 이전 거울과 싸우면서 만들었던 자신의 주체를 언어 세계 속에서 또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아기는 '누구의 아들(딸)'이라는 관계,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을 통하여 상징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아기는 일차적으로 가정과 사회가 포괄하고 있는 문화적 기표가 만든 존재이다. 아기는 그 기표를 거부할 수 없다. 거울을 깬 뒤부터 아기는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세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언어의 질서가 인간을 인간으로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라캉을 생각하는 주체의 자명성에서 출발하는 근대 인간관과 확실하게 결별하게 한다.
언어가 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우선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아기는 자기 자신을 3인칭 고유명사와 대명사로 객관화하고 주위의 타인들이 자기를 '아무개의 아들(딸), 동생, 친구' 등의 자격으로 부르는데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언표하는 주체(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주체)'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앞의 것은 스스로의 상상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뒤의 것은 타인이 붙여준 상징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라캉은 모든 도덕의 기본이 바로 이 '틈'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도덕적 주체는 그에게 '언표된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바꿔 말하면 타인들이 이름지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의 분배이다. 만약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결정하는 원인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유란 환상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도덕은 주체가 타인과의 상징적 관계 때문에 자아를 억압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억압은 '원억압'이며 근원적인 '자기 소외'다. 당연히 도덕과 상징이 있는 곳에 욕구불만은 숙명적으로 생긴다. 이렇게 해서 도덕-원억압-자기 소외-욕구불만-부정 등과 같은 하나의 진술적 연쇄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맨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삼자 관계를 가능케 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이때의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일 뿐만이 아니라 법, 제도, 규범의 총체를 가리킨다.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아버지, 제도, 규범, 언표된 자신의 정체성 등)'에서 자신의 성욕과 리비도를 어떤 규범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이 의무는 인간화의 첫 걸음이지만 동시에 억압과 욕구불만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니기 전의 아기는 어머니와의 이자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모든 것이기를 원한다. 아기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결핍'을 보충하는 존재이고자 한다. 어머니의 결핍은 바로 남근이며 동시에 남근은 어머니의 욕망이다. 이때의 남근이란 생물학적인 남자 성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남자의 기표나 상징을 말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스스로 이 욕망의 대상인 남근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아기는 자신을 타인(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하나의 독립적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인의 욕망의 연장으로 존재하기를 바라게 된다. 다시 말해 '나의 욕망은 내가 동일화하고 싶은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라캉은 "언어활동에서 우리가 전해듣는 내용은 타자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허상이다. 무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나의 진술은 타자의 진술로써 구성된다. 나는 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언어구조(이를테면 문법체계)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이야기하며, 나의 욕망 역시 타자의 욕망으로 구성된다. 태양아래 내 것이란 없는 셈이다.
라캉은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며, 욕망은 욕망의 욕망이고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한다. 이 욕망(desire)은 갈증이나 배고픔과 같은 '욕구(need)'와 구별되며 욕망에 대한 의식작용의 표현인 '요구(demand)'와도 다르다. 욕구는 억압의 관계 바깥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구는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적응된 표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욕망과는 다르다. 욕망은 존재의 결핍과 관계하면서 무의식의 밑바닥에 침잠하며 주체의 '상상적인 것' 속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프로이트이래 무의식과 욕망은 흔히 직접적으로 성욕이자 맹목적인 충동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라캉은 무의식이 인간의 언어 활동처럼 법칙과 구조를 가지고 형성된다고 보았다. 인간 주체는 운명적으로 분열을 겪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고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분열의 동력이 곧 상징과 상징적 관계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된 틈이 곧 욕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라캉식으로 <신데렐라>를 읽으면 외적인 의미가 뒤집혀 드러날 수 있다. '해피' 엔딩은 신데렐라를 생존의 기본적인 요소(불과 재와 집 안의 먼지)와의 친밀하고 직관적인 만남 안에 있는 다면적인 존재에서, 고정되고 제한된 틀 속에 안락하게 자리잡은 고정되고 제한된 존재로 변형시켜 놓는다. 그녀는 왕비로서의 권력을 얻은 동시에 군주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구조 안에 자신을 바친다. 남근이 있는 존재(왕자)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자신의 변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된다. 거울 단계라는 라캉의 개념으로 보면, 그녀는 거울에 비치는 것,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본다고 상상하는 것만큼 자신의 전체적인 자아를 한정시킨다.
라캉식으로 <신데렐라>를 해석한다면, 인간이 뭔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발달시키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불가피하게 전체성을 상실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2. 원형이론

꿈이나 신화 등의 원시적 형태에 내재되어 있는 행위나 사상을 인류의 원형적 패턴으로 보고 이를 문학작품에서 찾으려는 비평인데, 신화비평(myth criticism)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화적 패턴 또는 원형(archetype)을 문학작품이 구체화한다는 주장이다.
이 용어는 문학비평에서 많이 사용되어 온 것으로 모드 보드킨(Maud Bodkin)의『시의 원형적 패턴 Archetypal Patterns in Poetry』(1934)이 출판된 이후로 널리 사용되었다. 문학의 원형이론은 제임스 G. 프레이저(James G. Frazer:1854∼1941)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1915)와 인류학적 저작과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1875∼1961)의 심층심리학에서 비롯되었다.『황금가지』에서는 대부분의 다양한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전설이나 의식들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신화 및 제의(祭儀)의 기본적인 형태들이 내재해 있음을 주장하고, 또 그것을 추적하고 있다. 특히 융은‘원형’이란 용어를 원초적 심상(primordial images)에 적용시켰는데, 이는 옛 선조들의 생활에서 반복되던 경험 형태들의 심리적 잔존물로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통하여 전해 내려오고,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신화·종교·꿈 그리고 개인적 환상에도 표현된다고 보았다. 문학비평에서‘원형’은 신화와 꿈, 심지어는 사회적 행동인 제의양식에서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문학작품 속에서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서술구조, 인물유형, 또는 심상(이미지)에 적용된다. 이처럼 다양한 현상들에 내재해 있는 유사성들은 일련의 보편적이고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구조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문학작품 속에서 효과적으로 형상화되면 독자들에게 심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다양한 형태의 원형비평을 실제에 적용한 비평가로는 모드 보드킨 외에 조지 R. 윌슨 나이트(George R. Wilson Knight),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 필립 휠라이트(Philip Wheelright), 리처드 체이스(Richard Chase),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 등이 있다. 특히 프라이의 저서《비평의 해부 The Anatomy of Criticism》(1957)는 영향력 있는 비평서이다. 원형비평은 역사주의와 형식주의 비평가로부터 문학작품에 특유한 형식상의 전제를 한다는 점과 문학작품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라고 공격을 받기도 했다. 즉, 문학작품 속에서 원형을 찾아내는 것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삶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반면 문화와 역사의 차이를 경시하는 데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http://kangbook.com/korean/kkkk/rnrdj/원형비판txt)

칼 융과 집단 무의식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무의식의 내용이 개별 인간의 개인적 체험 안으로 전이된다고 본 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융은 집단 무의식을 상정한다. 우리가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그 표현은 어떤 외형적인 심상을 포함하며 원형적 이미지에 덧붙여진 보편적 의미를 표현한다고 본다.
가장 중심이 되는 원형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설명한 그림자이다. 그림자 원형은 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자아(나)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식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격,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 성격이다. -- 이부영 (융학파의 분석심리학자, 의사)
그림자와의 대결은 언제나 나와 그림자, 나와 타인에게 비추어진 무엇간의 대결이고 이것은 자아와 그림자의 대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대결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경우들에 당신이 접하고 있는 것은 실재의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와 융합된 투사의 문제, 타인에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원형일 확률이 높다. 이 투사는 또한 마음의 나침반에서 반대되는 성향에 대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높다. 이성이 감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과, 감성이 이성에 대해서 너무나 차갑고 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등은, 그림자 원형의 문제가 나타나기 더 쉽게 만든다. 심혼은 균형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림자 원형는 자아에 대한 대극, 보완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림자 속에는 자아가 지니지 못한 부분들, 약한 부분들이 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내향적인 자아에 대한 외향적인 그림자, 논리적인 자아에 대한 감성적인 그림자 등은 일상적인 것이다.

<단순한 생물들>에서 엘리엇 고즈는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괴물들은 어린 맥스의 반 사회적인 성향, 즉 그의 그림자로 본다. 괴물들은 또한 무정부적 충동의 힘을 나타내는 모사꾼이기도 하다. 모사꾼은 세계 각국의 신화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고즈는 샌닥의 그림책을 인간이 통합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흡수하는가 하는 융 학파적 스토리를 재화한 것으로 보았다.

노스럽 프라이의 원형

캐나다의 문학 이론가인 노스럽 프라이는 원형을 고대의 제례 의식에 있어서의 죽음과 재생,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낙원 등의 관념에서 찾았다. 그리고 낙원의 행복이란 자기와 외계와의 조화, 즉 자기동일성의 성취를 의미하고, 낙원 상실이란 자기 동일성의 상실이라고 보았다. 자기 동일성의 성취와 상실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주인공이 밟는 운명의 온갖 과정에 따라 네 계절의 순환에 대응하는 희극(봄), 로만스(여름), 비극(가 을), 아이러니(겨울)의 네 이야기(mythos)로 대별하였다.
<비평의 해부>에서 프라이는 원형적 패턴을 사용하여 문학을 분류하는 체계를 고안해 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캐릭터와 그들의 환경 사이의 연관관계인 모드mode이다 모드는 네 종류가 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연대기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각 모드는 역사적으로 그전 세대에 존재했던 모드의 대체이다. 즉, 각 모드는 같은 스토리를 이전 모드보다 덜 이상적이며 더 자연스럽게 변형시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최초의 모드이자 가장 순수한 모드는 신화이다. 신화는 다른 인간과 그들의 환경에 대해 근원적으로 우월한 영웅인 신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 모드는 로맨스로, 주인공은 다른 인간과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 우월하다. 그들은 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상화된 여성들과 남성들이다. 세 번째 모드는 모사로 두 타입이 있다. 상위 모사(다른 인간에 대해서는 우월하지만 환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주인공)와 하위모사(다른 인간이나 환경에 대해 우월하지 못한 주인공). 마지막으로 가장 많이 대체되는 모드가 풍자로, 힘이나 지성이 다른 사람에 비해 열등한 캐릭터를 다룬다.
평론가인 버지니아 울프에 따르면, 어린이 소설을 더 많이 대체될수록 더 세련된 독자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신화로부터 로맨스, 모사, 풍자 모드에 이르는 문학 사이클은 갈수록 정교한 독자를 요구한다는 프라이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울프의 결론은 가장 덜 대체된 문학에서 가장 많이 대체된 문학으로 옮겨감으로써 이전 독서는 다음 독서에 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어린이 문학 체험의 논리적인 체계화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프라이의 분류에는 한계가 있다. 페리 노들먼은 그것을 스키마로 보충할 수 있다고 본다. 많은 문학 작품에는 한 가지 이상의 모드가, 로맨스와 풍자, 신화와 모사 등으로 뒤섞여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독자들에게 문학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프라이의 모드 같은 분류체계는 무엇이 개별 작품들의 차별성을 만들어 내는가를 인식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특성화되지 않은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해준다.

3. 구조적 패턴들

구조 내지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원래 소쉬르에 의해 언어학적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그는 음운 체계에 무의식적으로 내재해 있는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언어 구조를 체계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를 기표(記表)로서의 '시니피앙'과 기의(記意)인 '시니피에'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는 무의식의 질서를 체계화한 사람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이다. 그는 구조의 기본을 인간(인간성)에다 두었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이후 종교, 주술, 신화, 문학 등에게까지 확산되어 질서의 모델로 확대된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란 무엇보다도 전체성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성이란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예컨대 언어란 구조를 가진 전체이고, 낱말들은 상호 연관에 의해 정의된다는 보는 것처럼 모든 전체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조는 변형의 관념을 내포한다. 법칙에 의해 구조는 스스로 바뀔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는 다른 구조와 구별되는 폐쇄성과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지속되는 보존성도 지닌다.
구조주의는 체계를 분류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을 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역사를 무시한다. 왜냐하면 역사란 기본적으로 변화와 혁신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작품의 역사적 맥락이나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 창작 동기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해석에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문학 구조의 일반적인 원칙 같은 것을 파헤치기 위해 비평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설화(說話)학 같은 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기본 단위들을 설정하고 그 단위가 담당하는 기능 등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피아노로 <고요한 밤>이라는 곡을 연주한다고 할 때 왼 손으로는 도 미 솔 이라는 화음을 치고 오른손으로는 솔라솔미......라는 멜로디를 친다. 그러나 <고요한 밤>을 떠올릴 때 우리는 멜로디는 쉽게 기억하지만 화음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로 노래로만 불러서 우리의 귀가 멜로디에만 익숙해져 있는 탓이며 또한 잘 변하지 않는 화음보다는 자주 변하는 멜로디가 귀에 잘 들어오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표층에 있는 것이라면 화음은 심층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층에 있는 것이면서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요소,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이다.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의식보다 훨씬 중요한 비중과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의하며 구조를 일종의 무의식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구조는 사회구조이므로 개인의 무의식과는 다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사회적 무의식으로 부른다. 기존의 사회학과 인류학이 눈에 보이는 것, 확실히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면, 레비스트로스는 눈에 보이는 것의 심층에 놓여있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연구 과제로 삼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심층 구조는 누구든 볼 수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당연시하기에 오히려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구조는 그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이를테면 사회, 체계 등)이 존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현존하는 수많은 인간 사회를 분석한 결과,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를 추출한다. 그것이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어떠한 사회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 사회인 이상 근친상간을 용인하는 곳은 없다. 근친상간의 허용과 금지 여부는 자연과 인간 사회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주목한 것은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사회적 무의식의 바탕에서 결혼이라는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사회의 주제곡이라는 것이며, 각각의 사회마다 그 교환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는 것은 변주곡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취하고 있는 인식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구조 언어학에서 끌어낸 교훈이다. 구조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이다. 예를 들어 구조 언어학에서는 음소들 각각이 그 자체로 실체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ㄱ은 이를테면 ㅁ이나 ㅅ과 다르다는 점에서 자신의 음가를 유지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음소들과의 차이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차이의 관점을 구조 인류학으로 확대 적용한다. 하나의 사회는 수많은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체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학과 인류학에서는 그 요소들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 사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지니는 가치가 아니라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관계를 중시한다. 각 요소들은 전체 체계, 구조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을 자명한 주체로, 인식의 중심에 놓는 근대적 관점 대신 인간을 탈 중심화하고 구조를 중심에 놓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정립했다. 그래서 그렇게 발견한 구조를 토대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론과 법칙을 추구하고자 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백설 공주>를 분석한다면 캐릭터들은 가치 재현 요소들로 간주할 수 있다. 계모는 공격성, 백설 공주는 수동성이다. <백설 공주>의 스토리는 공격성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수동성이 주도권을 잡는 상태로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스토리는 자기 방식을 가진 독립적인 여자가 모든 것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여자에게 패배한다는, 보수적인 태도를 옹호하는 이야기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위의 분석은 인물들이 서로 머리 싸움을 하는 경쟁 관계에 있다는 중심 생각이 스토리에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선과 악, 외양과 진실, 공격성과 수동성, 희망과 절망, 차가움과 따뜻함, 부드러움과 딱딱함 같은 좀 더 근본적인 대립항들이 바로 문학의 요소이다. 각 스토리들은 이 대립항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하고 연관된 것을 묘사한다.
<백설 공주>는 부드러움, 수동성과 동일시되는 선이 딱딱함, 공격성과 동일시되는 악을 이기는 이야기가 된다. 스토리 안의 이미지들도 이와 같은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여왕의 자기 도취, 즉 마술 거울은 백설 공주의 친엄마가 처음으로 눈을 보며 소원을 빌던 때의 열린 창문과 대조를 보인다. 그 소원은 아름다움을 바라는 이기심이 아니라 새 생명을 바라는 자비심이다. 이 관계는 왕자가 유리관을 통해서 백설 공주를 바라볼 때 새로운 패턴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기본 요소와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두 가지를 수행한다. 첫째, 전체 구조에 각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혀 스토리의 조화로움을 지적한다. 둘째,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2> 8장에서 지적하듯이 똑같은 기본 요소 사이의 서로 다른 관계를 설명해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어떻게 다른 문학 작품에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블라디미르 프로프와 기능

다른 구조주의 이론은 이항적 대립항보다는 플롯의 성분에 초점을 맞춘다. 러시아의 민속학자 프로프는 러시아의 전래 동화를 대상으로 민담에 대한 구조적 연구를 하였다. 프로프는 러시아 민담에서 지속적인 요소와 가변적인 요소를 구별하면서, 이야기의 인물은 변할 수 있어도 이야기 안에서 그들의 기능은 지속적이며 제한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민담의 기능 31개를 제시하였다.

1.부재 2..금지 3.위반 4.정찰 5.정보전달 6.책략 7.연루 8.가해·결핍 9.중재·연결된 사건 10.대항행동 개시 11.출발 12증여자의 첫 기능 13.주인공의 반응 14.주술적 작용물의 준비나 수령 15.이동이나 안내 16.투쟁 17.표식 18.승리 19.불행·결핍의 해소 20.귀환 21.추적 22.구조 23.몰래 도착 24.근거 없는 요구 25.어려운 과제 26.해결 27.인지 28.폭로 29.변신 30.처벌 31.결혼

위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핍의 기능이고, 이런 기능을 잘 나타내 주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지하국대적퇴치설화〉로 널리 알려진 〈용 퇴치자dragon slayer〉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기능들은 이를 수행하는 인물들과 대응되는데, 이것이 행동영역이다. 행동영역을 이루는 인물들은 1)악한 2)증여자 3)원조자 4)공주와 부왕 5)파견자 6)주인공 7)가짜 주인공 등이다. 결국 신화는 7 종류의 등장인물과 위에서 말한 31개의 기능이 결합되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프의 연구는 설화 자체가 고도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신화라는 개념으로 고대의 신화가 아니라 현대의 신화, 더 구체적으로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의 신화를 분석하고자 했다. 현대의 신화는 '누구나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것' 즉, 너무나 자명한 일이라서 아무도 의문 부호를 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또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고대의 신화나 현대의 신화는 마찬가지이지만, 현대의 신화는 무언가를 배후에 숨기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롤랑 바르트가 신화를 분석하는 목적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명성이라는 형태 뒤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드러내려는 데 있다.
롤랑 바르트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변형하여 신화의 기호학적 체계를 보여 줌으로써 신화의 가면을 벗기려하였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 두 개념만을 다루고, 기호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별개의 개념으로 여겼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세 가지 개념을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존의 기표와 기의, 그리고 이것들의 총체인 기호가 그것이다. 예를 들면, 장미 한 다발이 기표이고 열정이 기의라면, 기호는 열정이 담긴 장미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신화 체계에서는 언어 체계에서의 기호가 단순한 기표가 되는 2차 기호학적 체계가 형성된다.
신화 체계 속에는 언어와 신화라는 두 개의 체계가 있다. 신화의 기표는 언어의 기호라는 점에서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신화의 형태라는 점에서는 텅비어 있다. 이 새로운 기표는 개념(이것은 역사적이며 의도적이다)이라는 신화 체계의 기의를 만나 전혀 새로운 기호로 의미 작용을 하게 된다. 프랑스 제복을 입고 경례하는 한 흑인의 사진을 예로 들 때 언어 체계에서는 기표는 사진이고 기의 제복을 입고 경례하는 흑인이다. 그리고 기호는 '경례하는 흑인 사진이 있다'이다. 그런데 이것의 사회적인 의미를 해석하여, 이 사진이 프랑스 제국주의의 깃발을 보고 차별 없는 충성을 맹세하는 제국주의 옹호의 상징이라고 해보자. 이때 '경례하는 흑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는 신화 체계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표가 된다. 이것이 제국주의라는 기의를 만나게 되고, 그 사진은 신화체계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작용으로서 기호가 되는 것이다.
신화에서 신화라는 기호는 형태와 개념이 결합된 의미작용이며 신화 그 자체다. 바르트는 신화의 기표를 기의가 충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후 그 속의 의미와 형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신화의 의미 현상을 굴절시켜 그것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신화학자의 태도로 신화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신화 학자로서 현대의 신화를 분석하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회는 그레이엄 목사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기다림, 그 기다림을 강화시켜 주는 찬송가, 기도,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식의 유치한 동어 반복적 설교 등의 기표와, 파리의 무신론자를 일깨운다는 기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작용은 다른 데 있다. 프랑스의 무신론은 미국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공산주의의 전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에서 프랑스를 깨운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작용이다."

규약 code

모든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나 언어 행위는 그러한 행위를 수행하고 이해하는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고 잇는 공통의 약속에 의해 가능해지며 그것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상호의사소통의 전제를 이루는 이러한 약속을 규악 code 라고 한다. 현대의 문학 연구가들은 텍스트의 생산과 해석을 지배하는 이런 규약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특히 기호학자들은 이것을 주요한 연구의 영역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 문학사적 맥락에서 규약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최초로 제기되었다. 롤랑바르트는 규약의 다섯가지 체계를 밝힌 바 있다. 행위의 규약 proairetic code 해석학적 규약 (수수께끼의 규약) 문화적 규약 함축적, 내포적 규약 상징적 규약 등이 바로 그것이다. 텍스트가 지닌 문학적 가치의 면과 규약을 관련시킬 때, 자기 시대의 다양한 규약을 풍성하게 수록함과 아울러 텍스트 수신자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규약, 혹은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규약을 전달해 주는 텍스트가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4. 통일성과 해체

지금까지의 문학 이론들은 모두 문학 텍스트는 통일성 혹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동일한 전제 위에 있다. 텍스트 속의 모든 요소들은 각자를 받쳐주고, 조리 있고 완전하며, 세상에 대한 질서정연한 비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문학이론가들은 통일성이 가능한가, 그리고 바람직한가 하는 면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자크 데리다는 책은 저자와 독자가 대화하는 의사 소통의 통로가 아니며 책은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매체가 아닐뿐더러 독자가 수동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매체도 아니라고 전통적인 책읽기를 해체한다.

자크 데리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완전한 창작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문법, 개념, 어휘들을 이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제약을 받고 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저자라 해도 그것들로부터 탈피할 수는 없다. 전통적인 책읽기에서는 독자가 책을 통해 저자의 의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책의 내용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꿰뚫고 있는 일관된 내용, 진리, 전체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독자는 단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읽음으로써 스스로 뭔가를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끝없는 해석만이 존재한다."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같은 필름을 가지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듯이, 한 권의 책은 독자의 머리 속에서 수많은 책들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인가?
저자도 독자도 없는 책의 저자는 바로 차연differance(프), 差延이다. 책은 차연의 흔적이며, 차연이 짜나가는 차이의 그물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책의 바깥에 그 책이 지시하는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음성을 담지 않듯이, 기표가 기의를 담지 않듯이, 책은 어떤 기의나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책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책은 근대 형이상학처럼 자기 완결적이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는 책과 음성과 기의와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데 성공한다.
오늘날 새롭게 개척된 인문학적 주제나 이론치고 데리다의 해체론 덕을 보지 않은 것은 드물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문화 연구 등 실로 다양한 사조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해체론이라는 저수지에서 물줄기를 끌어오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플라톤 이후 로고스에 얽매인 서양 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니체와 하이데거에 맥이 닿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뒤에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뭔가가 있다는 식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니체는 인간을 떠받치고 있던 '배후의 실체'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진리 대신에 '지금 여기 있는' 인간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데리다 역시 구조주의에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잔재를 비판했던 것이다.
데리다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철학자로서 군림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볼 수 있다. 하나는 거시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적 측면이다. 해체론은 2000년 전통의 서양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사상사적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방대한 계획을 고전적 문헌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실천해나가고 있다. 미시적 엄밀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데리다의 장인적 글읽기와 글쓰기는 문학에서 건축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문헌 해석의 새로운 경지를 일깨우기에 족했다.
해체론은 종종 터무니없이 파괴와 부정의 취미로서 평가 절하된다. 그러나 파괴하지 않는 사상, 부정 없는 해방은 없다. 가령 로고스 중심주의의 창시자 플라톤은 신화적 사유와 시적 사유의 파괴자였다. 근대의 출발점인 데카르트는 절대적 확실성을 구하기 위해서 회의 가능한 모든 것을 부정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미래적 구상의 출발점으로 해체 불가능한 것을 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해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체한다. 데카르트의 회의 불가능자가 자아의 존재였다면, 데리다의 해체 불가능자는 차연, 흔적, 보충, 유령, 선물 등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자의 도(道)처럼 고정된 의미가 없고 개념적으로 표상할 수 없다. 이는 그것이 과도한 실재성을 띠어서가 아니라 무에 가까운 과소한 실재성을 띠기 때문이다.

페리 노들먼은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을 문학 텍스트 읽기에 적용하여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르며(?), 그런 종류의 읽기를 해체라고 한다. 여기서 해체란 문학 고조의 인공적인 성격의 정도, 즉 그것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자신의 인공성을 위장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한 텍스트를 '해체'하는 과정은 의식을 일깨우고, 상상과 논리, 허구와 실재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일이다.
예를 들어, <피터 래빗>을 표면적인 메시지에 반해서 움직이는 방식에 의해 '해체'할 수 있다. 이 스토리의 표면적인 메시지는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어떻게 벌을 받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빠의 죽음을 들먹이며 한 경고는 오히려 피터의 호기심, 모험심을 부추기는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피터는 살아 남았고 엄마는 무의식중에 피터가 가족을 돌 볼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본 건 아닐까? 이 스토리가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얌전히 말 잘 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쳐주는 외면의 통일성은 허상에 불과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모순을 발견하는 일은 무척 즐겁지만 누구나 아무 의미를 갖다 붙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든 찾아내고 그것을 설명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고려할 만하다.

5. 문학 안의 가치 : 규범

문학 작품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문학과 그렇지 못한 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는 문학 텍스트를 고전으로 만드는 것이 "끝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살아 남게 만드는 열린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즉, 좋은 문학 작품이란 그것의 진실이 교묘하고 포착하기 어려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살아남게 만들고 위대하다고 평가받게 만드는 것은, 그 작품을 끝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독자의 능력이다. 그 작품 안에 있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 말이다.
오랜 기간 가치 있다고 믿어 왔던 텍스트들-문학적 규범들-의 권위는 옛날과 같지 않다.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페미니스트들과 소수 민족들은 이런 텍스트들이 특정 피부색과 계급을 가진 남성의권위를 지지하고, 그들의 가치관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어떤 책들이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낫다는 통념을 재고하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규범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규범적인 텍스트를 알면 다른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독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그것은 상호텍스트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도와 준다.

<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 중에서 요약 정리하였습니다.>


출처 :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다양한 관점들...
글쓴이 : 흑진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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