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YOROKOBI 2007. 6. 10. 14:42

 



지난달 30일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현대마르크스 경제학’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강의실. 21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지만, 빈 자리가 많아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손제민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