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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장훈 | |
ⓒ2007 npb.or.jp |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을 한 1959년 장훈은 4월 11일 투수 아키모토를 상대로(한큐) 두 번째 타석에서 자신의 프로 첫 안타를 2루타로 기록했으며 세 번째 타석에서는 바뀐 투수 이시이에게 프로 첫 홈런을 때려냈다.
6번 타순에서 시즌을 시작한 장훈은 6월 23일 팀의 4번 타자를 맡게 된다. 이제 19살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팀의 4번 타자가 된 것이다. 당시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어린 4번 타자였다. 시즌이 끝났을 때 장훈은 .275위 타율과 13개의 홈런, 57타점을 기록했다. 팀 내 최다 홈런과 타점이었다. 장훈은 195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1960년, 프로 2년차를 맞았지만 장훈에게는 흔히 말하는 '2년차 징크스'가 없었다. 배트가 공기를 예리하게 가를 때 생겨난다는 혼의 소리, 그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매일 밤 배트를 휘둘렀던 장훈에게는 징크스조차 사치였다. 1960년 장훈은 .302의 타율을 기록하며 드디어 3할 타자에 이름을 올렸다. 리그에서 3할을 넘기는 선수가 세 명 내외였던 시절이었다.
1961년에는 .336의 타율을 올리며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으며 24개의 홈런과 95타점을 기록해 부쩍 좋아진 장타력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4번 타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해 장훈은 16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내 이 부문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조센진'에게 고의사구를 줄 수 없다며 오기로 승부를 걸어오는 투수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결과는 비참했다. 결국 장훈은 이후 4년 연속 고의사구를 가장 많이 얻어냈으며 투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타자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됐다.
1962년은 .333의 타율과 31개의 홈런, 99타점을 기록하는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만년 하위팀이었던 도에이를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려놓고 생애 처음으로 MVP에 뽑히는 등 장훈에게 최고의 시즌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현해탄을 건너온 후 일본 땅에서 온갖 차별과 냉대를 경험하며 자라면서도 야구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국인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장훈은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놀라운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장훈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기록한 기록들을 한 번 나열해 보자.(자료 도움: 박성호의 야구이야기)
장훈은 1967년부터 70년까지 4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했으며 통산 7번이나 타격왕에 올랐다. 특히 70년에 기록한 .383의 타율은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이었다.(현재는 통산 4위)
장훈은 16번의 시즌에서 3할 이상을 기록했으며(1위) 9년 연속 3할 타율(1위)을 기록했다. 또 20년 연속으로 100안타(왕정치와 공동 1위)를 넘겼으며 2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4위)을 기록했다. 16번의 시즌에서 20홈런을 넘게 기록했고(4위) 16년 연속 두 자리 수 도루를 기록했다.
통산 2752경기에 출장(3위)을 한 장훈은 3085개의 안타(1위)와 504개의 홈런(7위), 1676타점(4위) 을 기록하며 타격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일본 프로야구 최정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숨 막힌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자랑스럽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이다.
박수 받지 못했던 23년
선수생활 거의 마지막 시기였던 1976년부터 일본 야구의 심장이라 불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장훈은 전무후무 한 대기록 3000안타를 불과 30여개 남겨두고 롯데로 트레이드 된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
장훈이 있는 동안 요미우리는 두 번의 우승을 해냈다. 요미우리에서 뛰는 4년 동안 왕정치와 함께 'O.H 타선'을 이끌며 세 번이나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우승에 큰 공을 세웠고 팀을 위해 부상까지 참고 경기에 나섰던 장훈이었다.
그러나 장훈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팀에서 박수를 받으며 대기록을 세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가시마가 빠진 요미우리 타선을 살리기 위해 장훈에게 먼저 손을 내민 요미우리였지만 한국인 장훈이 일본의 심장에서 대기록을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요미우리가 장훈을 트레이드 시킨 곳은 한국인 구단주가 있었던 롯데였다.
" 그곳에서 대기록을 세우는 것이 자네에게도 그리고 모두에게도 좋네. "
하세가와 요미우리 대표의 말은 이미 노장이 되어버린 장훈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꽂혀왔다. 20년을 넘게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어왔지만 여전히 자신은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당해온 일인데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장훈은 나니와 상고 시절 자신의 고시엔 꿈을 빼앗아간 다케우치 선생을 떠올렸다. 조센진 장훈의 힘을 빌지 않아도 충분히 나니와는 우승을 할 수 있다며 소년 장훈의 일생의 꿈을 짓밟은 다케우치를 장훈은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 처음으로 사람을 미워해 봤습니다. 사람을 미워해 본 것은 처음이에요. 그 사람을 죽어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보통은 사람이 죽으면 모두 다 용서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이 사람만은 죽어도 절대로 용서 못해요. 지금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흥분해서 손이 떨려요. " -2000년 월간조선 12월호 인터뷰- 롯데로 트레이드 된 장훈은 1980년 5월 28일 대망의 3000안타를 기록했다. 23년간 박수만 받고 뛰어도 모자랄 것 같은 기록을 세운 장훈이 일본에서 받은 것은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질투와 야유였다.
그들이 안했다면 우리가 장훈에게 박수를 보내주자. 지난 수 십년 동안 자신의 한계에 도전을 하면서 수도 없이 찾아왔을 포기라는 그 달콤한 유혹을 억누르며 끝까지 달려준 장훈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주자.
수많은 길들 중에 가장 외로운 길을 선택했지만 자랑스러운 조국이 함께 달려줬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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