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떼어내라, 스포츠에 붙은 권력

YOROKOBI 2007. 6. 21. 15:58

 



박대통령배대회, 이기붕 대한체육회 회장… 정치와 스포츠의 얽히고설킨 역사

“왜 혼자서 9회나 던져. 9명이 1회씩 던지면 되잖아. 우리 팀 투수가 10명이 넘잖아.” “우리 선수들 스윙, 영 마음에 안 들어. 골프에선 말이야….”

높은 분 앞이니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야 하고 이따금 주억이기도 해야 했다. 요즘에야 이런 일이 없겠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프로야구단의 구단주 대행이나 사장으로 취임한 인사 가운데 일부는 야구로 30년 넘게 먹고산 ‘야구쟁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야구 명언’으로 남겨둘 만하다. “사장님, 골프는 죽은 공을 때리는 것이고 야구는 살아 있는 공을 치는 겁니다.” 이 정도 얘기할 수 있는 코칭 스태프가 있다면 그는 매우 용감한 축에 든다.

“전두환 생도, 골키퍼 했다면서”

광주를 딛고 일어선 신군부가 권력을 본격적으로 틀어쥐기 시작하고 있을 때인 1980년 여름 ㅈ일보와 ㅅ신문 등은 연일 ‘신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신용비어천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전두환 생도는 사관학교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주장을 맡아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했다.” 그때도 축구는 인기 종목이었다. “새 실력자가 축구를 좋아했다네.” “골키퍼를 했다면서.” “주장도 했다고 하던데. 카리스마가 대단했다는군.” 이런 이야기가 오고갈 것을 내다보고 만든 홍보자료를 서로 내가 더 잘 분다며 나팔을 불어댔으니, 스포츠를 정치에 끌어다 붙인 아주 나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2일 한국과 A매치에서 2-0으로 이긴 네덜란드가 세계적인 축구 강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건 1974년 서독월드컵이다. ‘21세기형 선수’로 불린 요한 크루이프가 이끈 네덜란드는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털 사커‘로 세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네덜란드의 경기를 보면 종심이 30~40m 정도 되는 한 무리의 선수들이 공격과 수비의 구분 없이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듯 그라운드를 누비고 다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는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도 준우승했다. 팀의 주축인 크루이프는 그때 31살로 선수생활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 무렵 아르헨티나는 군부독재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크루이프는 군사 독재자들이 차린 더러운 축구잔치에 들러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보다 앞선 1971년 한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성(姓)을 딴 축구대회가 열렸다. 그해 5월2일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주최국 한국을 비롯해 버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타이, 자유중국(대만), 베트남, 크메르(캄보디아) 등 8개 나라가 출전한 가운데 제1회 박대통령배(Park’s Cup) 쟁탈 아시아축구대회가 막을 올렸다. 어지간한 축구팬이면 이런 이름의 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의 죽음으로, 1980년 8월 열린 제10회 대회는 그냥 ‘대통령배‘가 됐다. 1978년 제8회 대회부터 아시아권을 벗어나 국제 규모로 몸집을 늘린 이 대회는 1981년 제11회 대회부터 개최 시기를 6월로 해 유럽의 유명 클럽을 초청했고, 1984년 제14회 대회부터는 상금제를 도입했다. 1995년에는 대통령배 대회에서 제1회 코리아컵국제축구대회로 거듭났다. 이런 변화가 이어졌기에 올드팬이나 신세대팬이나 대통령의 성을 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박대통령배대회에 앞서 ‘JP컵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축구팬은 많지 않다. 1966년 6월 열린 이 대회의 정식 이름은 제1회 JP컵쟁탈한중(자유중국)일 3개국축구대회였다. 서울 선발이 일본의 동양공업과 자유중국의 여광을 물리치고 우승컵을 안았다. JP는 알려져 있듯이 김종필을 이르는 영문 약자이고 그는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의장이었다. 5년 뒤인 1971년 박대통령배대회가 시작했으니 JP컵대회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영원한 2인자였던 JP의 정치 역정이 축구대회에도 나타나 있다.

정치 역정대로 움직인 JP컵대회

정치와 스포츠가 얽히고설킨 예는 수없이 많다. 한국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를 보자. 1945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뒤 처음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은 이는 여운형이다. 해방 공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1950년대 초까지 신익희, 조병옥 등의 이름이 보이더니 1952년 4월 이기붕이 제17대 회장에 취임했다. ‘소통령’ 이기붕은 1960년 4월28일까지 대한체육회 회장직에 있었다. 1970년대 김택수와 함께 최장수 회장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기붕의 퇴임일을 눈여겨볼 만하다. 1960년 4월28일은 4·19혁명으로 궁지에 몰린 이기붕이 이승만이 양자로 들인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날이다. 이철승이 이듬해인 1961년 1월28일 대한체육회 회장이 됐지만 4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5월15일 물러났다. 이튿날인 1961년 5월16일은 한국현대사가 크게 뒤틀린 5·16 쿠데타가 일어난 날이다. ‘혁명‘에 성공한 구 군부는 두 달 뒤 이른바 ‘혁명주체 세력’ 가운데 1명인 김동하를 제19대 회장 자리에 앉혔다. 1962년 1월 김동하의 뒤를 이은 이주일도 혁명주체였다. 그리고 1979년 제25대 회장으로 취임한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의 박종규가 박 대통령 시대의 마지막 대한체육회 회장이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둘 만하다.

경기인 출신의 단체장 볼 수 있다면

장관은 정무직이기도 하고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스포츠는 특별한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스포츠를 관장하는 문화관광부의 역대 장관과 국내의 대표적인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총괄기구인 한국야구위원회(KBO) 역대 총재(표 참조)의 면면을 보면 아직도 한국 사회가 스포츠와 정치를 완전히 떼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최근 정부가 대한체육회를 준정부단체로 지정해 인사권 행사 문제와 관련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스포츠가 정치로부터 독립해야 할 때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정부의 체육 관련 부처의 고위 관계자나 야구 축구 등 프로단체를 포함한 스포츠 관련 단체장이 관련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능력 있는 경기인 출신이라면 금상첨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