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아침에도 내린다. 좀 가늘어지고 간간이 쉬기도 하지만 그는 알래스카가 비(눈)의 땅이라는 것을 각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배의 갑판에, 바다의 얕은 파도위에, 날아가는 새의 잔등에 하염없이 내린다. 멀리 보이는 산들도 눈 외투를 둘러쓴 채 비를 맞으며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빗속에서 프린세스 호는 알래스카 만을 거쳐 글레시어 베이(Glacier Bay) 국립공원으로 진입하고 있다. 글레시어(Glacier). 우리 말로 빙하.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눈이 오랫동안 쌓여 다져져 육지의 일부를 덮고 있는 얼음층' 그리고 설명은 이어진다.
'겨울철에 내린 눈의 양이 여름에 녹는 양보다 많다면 눈은 계속하여 누적적으로 엄청난 두께로 쌓이게 되며 이로 인해 쌓인 눈의 아랫부분은 압력을 받아 얼음으로의 재결정작용을 받게 된다.
보통 이러한 현상은 고산지대나 극지방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쌓인 거대한 얼음 덩어리는 중력에 의해 낮은 곳으로 또는 바깥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빙하의 흐름 속도는 빠른 경우 1년에 4km 느린 경우 2m 정도로 그 흐름을 인지하기 어렵지만 빙하에 의한 침식 및 운반작용은 매우 강력하다.
빙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민물을 저장하고 있으며 이는 바다 다음으로 많다. 빙하가 저장하고 있는 담수는 전체 민물의 75%를 차지하고 있으며 만약 지구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해수면이 약 60m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다와 직접 면해 있는 7층 갑판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어떤 넙데데한 젊은이가 긴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무얼 찾느냐고 물었더니 고래라 한다. 어, 고래, 고래가 나타난다고? 그는 고래뿐만 아니라 물범 물개 수달 같은 동물도 나타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생김새와는 달리 아는 것도 많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이래서 사람은 겉모양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는가 보다.
한 2, 30분 같이 바다를 주시하고 있는데 뭐가 물 위에서 쪼르르 뛰어간다. 새 종류가 분명한데 날지는 못하고 뛰는 것, 나는 갑자기 그것이 농병아리임에 틀림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었다. 물 위를 날지 못하고 뛰기만 하는 놈은 그것밖에 없어. 나는 단정지어 생각을 마무리해버렸다. 왜 갑자기 농병아리였을까.
조금 있자 물속에서 시커먼 게 튀어나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래다. 고래가 나타났다."
반신반의하며 물속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는 자기가 고래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여주려는 듯 등에서 물을 내뿜었다. 정말 고래였다. 글레시어 만에 산다는
혹등고래(Humpback Whale)였다. 그것도 한마리가 아니고 서너마리는 되었다. 그들은 물장구를치며 놀다가 유유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선내 마이크에서 글레시어가 가까워지니 나와서 구경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인 마져리(Margerie) 글레시어에 다 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사방이 전부 트인 15층 갑판이 전망에 유리할 것 같아 그곳으로 올라갔다. 사람들 이미 운집하여 목 좋은 곳에 포진하고 있어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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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져리 글레시어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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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천천히 글레시어 앞으로 다가가서 글레시어 앞 한 1km쯤에서 멈추어 섰다.(사실은 그보다 가깝거나 더 멀었는지도 모른다. 바다에서의 거리는 눈대중하기가 정말 어렵다) 알래스카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다는 유명한 마져리 글레시어는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검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검은 바위산에 흰 눈이 덮인 오래된 흑백 사진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칠칠치 못한 여자의 흘러내린 치마 말처럼 그곳에 흘려져 있었다. 치마의 아랫단은 이미 바다에 잠겨 보이지 않고 남은 치마 말마저 하루에 수십번씩 그 일부가 스스로 떨어져 바다속으로 자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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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져리 글레시어 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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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북반구 만년빙(萬年氷)의 면적을 수중 음파 탐지기로 추정한 결과, 지난 30년 동안 빙하의 두께가 15%에서 40% 정도 얇아졌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녹으면 2070년경에는 북반구의 빙하가 모두 없어질 것이다. 미국의 관광지로 유명한 글레시어(Glacier) 국립 빙하공원에 있는 빙하 150개가 이제는 30개만 남았으며 그나마 남은 빙하도 2030년이면 모두 녹아버릴 것이다.' 가로가 1.6km 세로가 8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얼음덩이의 결집체가 앞으로 3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인가. 햇빛을 받으면 찬란한 에메랄드빛 푸른빛을 발하는 이 아름다운 빙하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멸종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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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어 글레시어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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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한 방향에서 30분씩 무려 1시간 30분을 마져리에서 보내었다. 배가 방향을 트는 순간 천둥이 울리는 듯한 굉음을 발하며 빙하의 일부가 쪼개지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바다는 커다란 물방울을 튀겨 올리며 그를 싸 안았고 그는 작은 유빙이 되어 바다를 떠갔다. 그것은 그들의 멸종(?) 과정을 시연해 보이는 일종의 시위 같았다. 문명이랑 미명하에 인간들이 지구를 달달 볶는 것에 대한 시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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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어 글레시어 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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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져리 글레시어를 빠져나온 배는 뮤어(Muir) 글레시어를 찾아들었다. 마져리 글레시어가 산등성이에서 밀려나온 빙하라면 뮤어 글레시어는 산에 둘러싸인 평지에서 쫒겨나온 빙하였다. 크기는 마져리에 못지않았고 생김새도 좌우 대칭으로 더 아름답게 보였다. 한 2, 30분 머물다가 배는 다시 방향을 틀어 남행을 계속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극장에 가 보았다. 극장에서는 코미디 쇼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코미디언이 입을 열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댔다. 나는 그들의 웃는 얼굴만 쳐다보다가 하품만 내뿜었다. 날지를 못하고 바다 위를 뛰어서만 위치를 옮겨야 하는 농병아리(?), 알고 보니 그는 나였다. 나는 어두워지는 밤 바다 위를 분간도 없이 뛰면서 허둥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