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과거사위, 5.18 핵심부분 진상 비켜가

YOROKOBI 2007. 7. 24. 14:03
발포명령자ㆍ지휘권 문란 못 밝혀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국방부 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는 24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진압과정과 발포경위 등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그간 논란이 됐던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다.

진압군의 무차별 진압 사례 등은 증언과 군내 문서 등을 통해 확인했으나 발포명령권자와 공수부대가 광주지역 관할부대를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한 부분에서는 진상규명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 발포 명령권자 =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며 유혈진압을 이끌어낸 인물이 누구인지 실체를 규명하는데 실패했다.

과거사위는 "광범위한 조사에도 전남도청 앞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는 발견하지 못했으며 발포 명령계통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진술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말해 진상규명의 한계를 시인했다.

이와 관련, 과거사위 관계자는 "발포 명령자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실명을 명기하지 못했다"면서 "진상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이를 명기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만 당시 2군사령부가 작성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와 육군총장 비서실에서 만든 '증언 참고자료'(기무사 보존)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적시하고 있다.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있다.

회의 장소와 시간이 명기되지 않은 이 문서(수기.手記)에는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실에서 열린 이 회의에 주 장관과 이희성 육군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이 참석했다고 적혀있다.

과거사위의 일부 관계자들은 비록 발포를 명령한 문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발포를 명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실명을 보고서에 명기하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발포 언제 이뤄졌나 = 과거사위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앞서 5월19일과 20일에도 발포가 있었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선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M16 소총을 발사, 당시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군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1공수여단은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과거사위는 결론을 냈다.

5월20일 밤에도 광주역에서 경계중이던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모 중사가 시위대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최세창 당시 3공수여단장은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을 지시했다. 당시 3공수여단 소속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 면담에서 "지원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발포와 구타 등으로 인한 시위대의 사망을 폭도의 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로 왜곡했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 유탄발사기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고 적혀 있다.

21일에는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다.

당시 상황이 다급해지자 안부웅 61대대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한이 있어도 발포하자고 주장했고 이제원 62대대장은 반대했다고 과거사위는 검찰의 5.18 조사기록을 토대로 밝혔다.

이날 오후 1시께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계엄군은 도청광장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계엄군 가운데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같은 증언들은 주로 당시 군 관계자들에게서 청취한 증언을 바탕으로 해 자칫 군의 자위권 발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지휘권 혼란 = 5.18 당시 지휘권 문제는 5공 청문회 때도 논란이 됐다. 공수부대가 현지 지휘관인 정 웅 31사단장의 통제에서 벗어나 과격진압을 하거나 발포했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다.

즉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하면서 광주 현지의 소준열 전투교육사 사령관의 명령계통을 따르지 않도록 하고 자신이 서울과 광주를 왕래하면서 직접 별도의 명령을 내렸지 않느냐는 논란이다.

검찰은 이와 관련, 1995년 수사결과 보고서에서 정 사령관은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할 특공조를 선정하는 데 관여하고 현지 작전통제권자인 소 사령관의 지휘권에 간섭했으나, 이는 지휘권 이원화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과거사위는 "2군사령부가 실탄통제를 지시했지만 전남도청 앞에 주둔한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됐다"며 "이는 상급부대와 공수부대의 보고계통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지휘권 혼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 광주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 = 광주시 외곽봉쇄 지점에서 발생한 계엄군 총격은 여러 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광주시 동구 지원동 광주~화순 간 15번 국도에서 발생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제11공수 보안반은 '상기 버스에는 남성 15명, 여성 3명이 탑승. 이중 3명 생포(남2, 여1)외 전원 사살. 남성 2명은 중상으로 통합병원에 후송. 홍금숙은 11공수 정보참모 곽모로부터 보안반에 인계'라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1989년 청문회 당시 홍금숙씨의 진술서와 함께 보안사에 존안돼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외곽 봉쇄작전 도중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살상사건으로 판단하고 중점 조사과제로 선정해 조사활동을 벌였다"며 "그러나 핵심 증인들의 증언과 자료가 일치하지 않고 사후 시신이 수습된 과정에 대해서는 군 관련자들이 면담을 거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