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단인가 ?

YOROKOBI 2007. 7. 24. 23:34
 신비주의 역사와 세계사
자료원 : 상담소자료집 4/사이비 이단에 대한 대책과 지침II(PP12-16)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결의 문 내용 요약  
              복음과 생명 홈페이지(http://www.gospelage.pe.kr)
 구   분 : 신학논문 1993. 6. 28일자
서론
신비주의적 사상
  신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고찰하는 신비성이 아닌, 성경 말씀을 오히려 혼선시키는 비 성경적 신비성을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적구원 방편과 언약의 완성과정을 혼란케하는 마귀의 미혹이라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통 기독교계가 신비주의를 잘못된 사상으로 보는 것은 이같은 견지에서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라 하겠다. 완전 언약의 말씀이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빠짐 없이 기록된 후에, 메시야 탄생에서부터 재림 시까지 성경적 에언과 언약의 구숸사적인 일련의 모든 완성과정이 철저히 성경의 입각해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 어떤 현상을 정립하고 설명함은 대단히 위험천만하고 잘못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속에 나타난 표적과 이적등의 사건을 통하여 그곳에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간과한체 그 어던 현상만을 강조한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한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는 오류와 왜곡된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신비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즉 기독교 역사적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난 이성적 논리와 판단. 그리고 체험적 현실을 강조한 신비주의적인 사상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환상, 입신, 영음을 듣는 일을 기준하여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한 대로 이루시는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빗겨간 체 자기 자신만의 신비적인 체험만을 중심으로 모든 신앙과 성경이 제 해석 된다면 이는 자동적으로 성경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입니다. 기적이 있고,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신비주의는 배격합니다.
신비주의란 신비한 종교체험 자체를 중시하는 신앙 성향을 말합니다. 신비한 체험이 아니면 도무지 믿지도 않고, 영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앙행태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깨덛게 되면 신비한 체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됩니다.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사건은 이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한가지 성경적 실례로 우리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이 변형되신 모습을 보고 깊은 황홀경에 빠지게 된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에 매료되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쉽게 이야기 해서 여기 삽시다. 이제 복잡한 세상 다 잊고 제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주님과 우리들만 멋있게 하번 사십시다. 그러나 주님은 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셔만 하는 자신의 인생 행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영광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십자가에 자신이 죽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라는 격려를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비주의란 신앙적 신비와 기독교적 신비성을 말함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그리고 성경적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시용하신 일련의 사건들이 주님의 목적 보다는 결코 앞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목적은 보다 분명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위한 간접적인 요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말해서 신비주의란 이런 기독교적 신비성을 말함이 아니고 종교적신비주의와 사상적 그리고 논리성을 갖춘 철학적 사고에서 신비주의는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1절. 기독교 신비주의 이단 기원
                 
뉴에이지들이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쿤달리니 영성을 먼저 전재로 하자.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적 영성과 신비사상을 추구했던 인물들의 진술 속에서도 양자간의 동일한 영성의 기반을 추적할 만한 단서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즉, 문헌을 통한 고찰은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근원에 관한 동ㆍ서양을 포괄하는 유사 진술들을 포착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 대한 통일적인 관념을 목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고피 크리슈나는 "모든 종교의식이나 예배법, 정신 수양법, 밀교의 체계들은 모두가 신성한 것, 초월적인 것과의 통신회로를 설정하여 존재의 비밀에 이르는 탐험로를 제공"하고 있으며, "같은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대 인도 철인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 속에 존재하는 특수 장치인 쿤달리니라는 아주 복잡한 기관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인도종교철학과 요가체계의 견지에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관하여 상당한 언급을 하였음으로 본 지면에서는 기독교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저서들에 나타난 유사 관념에 관하여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알려진 문헌들의 연원은 초대교회 역사까지 소급되고 있다. 즉, 사도적 신앙고백과 정통성을 계승하는 초대교회와 경쟁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위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를 공략하였던, 영지주의자들과 다양한 이단의 사상들 속에서 동방의 종교철학이 침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대표적인 이단은 그노시스였다. 그노시스는 "지식"이란 헬라어 Gnosis에서 유래하였으며,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그들의 사상은 헬라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교리를절충하여 하나의 혼합적 종교철학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이 중요시 하였던 문제들은 주로 우주의 기원 및 죄악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문제들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재된 신성에 대한 체계적 사상들은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내면을 지향하는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 근원적 신성에 대한 체계적 언급이 보다 발전적이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지면에서는 중ㆍ근세 신비주의자들의 사상 가운데 나타난 진술들을 쿤달리니 영성과의 상관적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신성의 씨(Divine seed)
역사와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모티브에 대한 언급은 기독교에 있어서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핵심주제`였을 뿐아니라, 헬라철학과 2세기 이단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로고스이다.
저스틴과 타티안은 물론 아테나고라서, 아리스티데스, 데오필루수 등 거의 모든 변증가들은 "헬라철학과 유대주의를 대립적인 관계로보지 않고, 오히려 로고스를 통해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이해는 변증가들과 속사들 사이에서 신학적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즉, 저스틴과 오리겐, 클레멘트는 헬라철학과 기독교진리를 연계시켜 기독교의 진리를 철학화 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던 반면에, 터튤리안은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못 밖았다. 거기에는 양자간에 `로고스`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방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터튤리안은 당대의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특별히 그가 당대의 철학 학파와 플라톤 주의를 강하게 거부하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기독교적`이고 "철학과 이단의 연계의혹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철학을 가르켜 `사탄의시녀`로 간주하였다.
반면에, 헬라철학과 유대인의 율법의 원천이 모두 로고스이기 때문에 둘의 조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던 저스틴은 다음과 같이기술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씨앗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뿌려짐으로써 인간은 진리에 대한 반응력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저스틴은, 이 로고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웠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라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들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이와 같은 저스틴의 견해 속에서 오늘날 다원주의 신학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칼 라너(Karl Rahner)가 주장한 `익명의 그리스도`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로마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회를 통해, "타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추구하고 그 은혜에 감동되고 양심을 통해 자신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서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교리를 포기하였다."  저스틴 계열의 변증가들과 현대의 다원주의자들 그리고 카톨릭의 신학적 경향은 로고스를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포함한 타종교 간의 신학적 연속성과 영성의 기반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이는 뉴에이지사상에서 범신론적 견지에서 모든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대한 주장과 동일한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J. H. 바빙크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를 보이신 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야기된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모호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지식은 죄로인해 부패하고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이성과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도저히 깨달아 알 수가 없는"상태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고찰한 바와 같이 초대교회의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와 칼빈이 언급한 `신성의 씨앗`에 대한 다각적인 견해들은 만물의 근본으로서,그리고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리고 스토이즘으로 대표되는 헬라철학과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속사도, 변증가들 뿐 아니라 기독교 이단들에게까지 모든 논쟁의 핵심이었던 `로고스`는 중세에 들어와서 신비주의자들을 통하여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영성의 근원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지면
에서는 중세에 등장하여 기독교권역에서 유행했던 신비주의자들의 사상과 영성을 뉴에이지영성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다루기로 한다.
제2절 중ㆍ근세 신비주의자들
1. 신비주의 정의
일상적인 용법에 있어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그 함축적인 의미가 매우 불명료한 단어이다.  "뮈스테리온(misterion)"이란 용어는 그것이 최초로 사용되면서부터 순수하게 종교적인 희랍어 어휘였던 것으로 신비한 의식들 또는 기구들을 의미하거나 그것들과 연관된 가르침을 의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용의 범위가 광범위해지고 일반화되어 반듯이 종교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종류의 비밀을 의미 하게 되었다. 최근 이 단어는 그 성격상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두개의 서로 다른 독일어 단어들의 동의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즉 `Mustizosmas`는 초자연 숭배나 신지학적 추구나 또흔 심령 연구의 강신술적 적용 등을 의미한다. 또한 "Mystik"는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이나 관계를 직접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첫째,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둘째, 절대적인 실체(Absolute Reality), 즉 하나님과 영혼의 가능한 연합에 대한 신학적-형이 상학적 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편, 신비주의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과 교통 할 수가 있는데 그와같은 교통에 있어서 하나님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의 내용이 된다고 한다.
신비주의자가 이와같은 주장을 함에 있어서 몇가지 내용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첫째로, 신비주의 주장하기를 심령은 최고의 실재에 대하여 이지적으로 이해 못하는 것을 직관적을 이해 할 수가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시적이며 은밀한 지식들을 수납하며 터득 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신비주의는 심령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심령에는 `신적인 불꽃`이 있어서 `영원한 불길`인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의 꼭대기에는 신령한 불꽃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주의는 심령은 자기 정화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인 지식을 소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끝으로 신비주의는 심령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순례길에 있어서 그 안내자는 사랑이라고 역설 한다.
신비주의자는 본성적으로 영지주의자로서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지식의 극치로서의 하나님의 지식을 소유하며 그와 같은 지식을 묵상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핵심은 외면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영성을 개발하는 일이며 그와 같은 일은 내면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길을 택해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신비주의 사상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를 거론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실재와 연합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비주의는 이단
궁극적인 실재와의 연합에 있어서 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비주의는 다른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와는 달리 궁극적인 실재를 인간과 우주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그 연합은 사랑과 의지력의 연합되어 사람이 궁극적인 실재 안에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연합으로 사료한다.
그러나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가운데에서는 인간안에 내재하는 `내면의 빛`, `영혼의 불꽃`이라 불리는 근원적 신성과의 합일을 지향하던 인물들이 발견된다. 그들의 사상과 영성은 당대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art. 1260-1327)
헤겔에 의해서 `독일 철학의 아버지`로, 중세학자 크루엘에 의해서는 `독일 강단 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은 설교가`로서 격찬되었던 에크르트는 이단성의 문제로 교황 22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인물이었다.
이단에 대한 혐의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추구가 범신론적 경향으로 탈선되었기 때문이다. 박아론은 그가 "인격적인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과 그 배후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된 신성과를 구별한다."고 한다. 즉 "후자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무명의 허무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자신(Gottheit)"과 연합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 본성`에 대하여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신도취자`라고 불렀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매개적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불꽃(Seelen Funkelein)으로서, 이 영혼의 불꽃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 참여 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은 이 영혼의 불꽃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의 모든 영광으로서 광채와 열기를 발휘하신다."고 하였다.
나. 요한타우렐(Johann Tauler, 1300-1361)
중세 독일 신비주의자 타우렐은 소위 "하나님의 벗들"(Gottes freunde)이라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에크하르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할 뿐 아니라, `단순한 신앙(einfaltiger Glaube)`신앙을 강조 하였다.
한편, 타우렐은 사람 내부에는 "내적 광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벗들"을 조명하여 하나님과의 신령한 연합을 경험하며 성취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부정의 길이었다.
다. 죠지폭스(George Fox ; 1624-1690)
죠지폭스는 초기 경건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퀘이커파(The Quakers)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형식적인 종교성과 멋대로 풀어진 방종과 맞서 그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즉 그는 찬송, 예배 순서, 설교, 성례, 신앙고백, 목회자 등은 모두 성령의 자유를 훼방하는 인간들의 발명품에 불과하였다고 보았다. 죠지 폭스가 이러한 생명력과 진정성이 결여된 기성종교를 대항하여 주장한 것은 `내면의 빛(inner light)`이었다. 이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는 씨앗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진정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을 견해를 거부하였다. 즉, "청교도들은 죄를 마음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죄 대신 하나님을 직접 찾는다고하였다." 나아가서 죠지폭스는, "아무리 희미할 지라도 모든 인간 들 속에는 내면의 빛이 존재하며, 이러한 빛의 덕분으로 기독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죠지폭스는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을 그 내부의 빛, 영, 은혜로 인도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들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아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그 성스러운 영께서는 내가 분명히 알거니와 아무도 속이지 않으신다.
라. 임마누엘 스웨덴보그 (Emmanuel Swedenborg ; 1688-1772)
스위든 볽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철학자요, 과학을 섭렵한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알려졌다. 후대에 영향을 미친 그의 가르침들은 55세때 영계를 체험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영계체험이후 영계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는데, 가장 잘알려진 저서로는 `영육간의 교제(The Intercourse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이 있다.  
그는 인간의 `원죄(전적타락)를 부인`하고 신성이 유입되는 `극내분(極內分 : immost)`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폭스의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스위든 볽은 "인간에게는 동물이 갖지 못한 극내분이라는 것이 있어 이 극내분에 신성이 흘러들어와 인간을 신격에 까지 앙양시키고 신격과 화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유입된 신성의 원리에 따라 살아갈 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스위든 볽에 따르면 믿음을 간직한 기독교인일 지라도 신적원리에 따라 살지 않았다면 천국의 문에 들어 갈 수없고,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는 이교도일지라도 신적원리에 따라 살아간 자는 천국에서 받아들여진다고 진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