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하는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나오는 곳, 곧 중심인 가슴에서 나옵니다."
매튜 폭스
Creation Spirituality / Matthew Fox
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에서 태어나 여섯 명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나는 1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축구를 하는 것이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분과 함께 그 꿈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죽음에 대해서 어른들 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그때 체험이 그랬습니다. 그 체험은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걷게 되고 축구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때부터 감사의 마음이 내 영성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은 다리를 갖고 있다는 놀라움, 또는 그밖에 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놀라움이나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놀라움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가톨릭 사제가 되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사제가 되려고 마음 먹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위스콘신의 아름다운 호수와 들판과 숲 속에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미사 특히 토요일 미사에서는 신부님들이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낭독하곤 했습니다. 지혜문학은 어머니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나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나는 남자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해 하느님의 여성성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1950년대의 문화적 흐름과도 어울리는 일이었습니다.
음악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토벤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 들었는데, 그의 음악은 내 영혼을 약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작품, 특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의 기도 체험은 신비롭기도 하고 예언자적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신비로운 측면이고, 공정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의 고난에 의지하여 똑바로 선다는 것이 예언자적인 측면입니다. 나의 영성과 하느님 체험은 이렇게 신비로운 측면의 기쁨과 예언자적인 측면의 투쟁이 결합하여 변증법적으로 창조됩니다.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많습니다. 나는 특히 그 중에서 내가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 신성을 체험합니다.
첫 번째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은총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13세기에 활동한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현존(is-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풀잎 하나를 뜯어 들고 그 색깔과 모양과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20억년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예술가라면 풀잎 하나를 그리면서 그 속에 담긴 신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면서, 강아지를 보면서, 또는 친구를 보면서 경외심에 사로 잡힐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 속에 깃들이어 있으며, 그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입니다. 만물 속에 현존하는 신성을 체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비움, 무(無), 공(空)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자신이 고통 속에 있을 때 또는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그럴 때 이 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낮추고 가라 앉아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까지 가라 앉아야 끝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끝까지 낮추었던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앉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적인 체험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강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어둠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의 계시입니다. 어둠은 궁극적으로 신성의 침묵입니다. 그 침묵을 통해 하느님과의 결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입니다. 이 길은 폭발을 통해 가는 길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표현하기 위해 ’돌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어둠의 밑바닥에서 탈출하여 또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빛으로 나오는 체험입니다. 수난(부정을 통한 길)을 체험한 예수께서는 부활(창조를 통한 길)의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가 굴려지고 무덤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가라 앉는 과정에서 껍질을 벗고 자기를 비웁니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 번째 길, 곧 창조를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나는 작가로서 글쓰는 작업을 할 때, 내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영의 도구로써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자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다른 예술가들도 아마 비슷한 체험을 할 것입니다. 나를 통해 진실된 그 무엇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내가 ’부정의 길’을 통해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외적인 사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길’을 통해 거대한 신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어떤 차원에 창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함께 창조해 나갑니다. 당신은 창조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변형의 길(Via Transforma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성과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사회를 향해 발산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평화의 복음을 함께 나누는 예언자가 가는 길이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대의 명상의 열매를 나누라"는 말로 표현한 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명상의 열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태의 사회제도나 문화에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투쟁의 길이고, 자비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 새 생명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이 길은 가는 사람을 모든 것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풀잎의 순진무구함을 볼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만들어 줍니다.
이 길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구조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이나 니카라구아의 혁명 같은 것이 창조의 길을 사회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를 읽습니까? 당신은 어떤 음악에 감동을 받습니까? 어떤 사회 문제가 당신의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까? 당신은 어떤 일을 가장 좋아합니까? 에크하르트는 "참된 일을 할 때 황홀해진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황홀해집니까? 언제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까? 무엇에서 기쁨을 느낍니까? 당신은 어둠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아무 것도 없음’을 느껴 보셨나요? 어둠의 하느님에 대한 느낌은 어떻든가요?
나는 여러분의 체험을 존중합니다. 환경의 영향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의 어릴적 경험이 하느님이나 세상에 대한 체험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 보라고 권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10살 때, 20살 때, 30살 때 당신이 생각한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보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서, 그 세 가지 체험 사이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8살 때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성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숙할 가능성이 있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말로만이 아니라 이미지 차원에서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인간 중심적인 말이 아닌가 해서이지죠. "인격적"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을 우리처럼 두 발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상상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말도 해야 하지만 듣기도 해야 합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하느님 체험이 아인쉬타인이 체험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 잡혔으며, 우주가 우리의 집이며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 보다는,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는 신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인격적인 우주"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발 가진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온 우주 만물이 포합됩니다. 우리는 만물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인격적"이라는 말에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 사람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 위험은 내가 좋아하는가만으로 친구를 결정하는 청소년기의 특성에 고착되어 있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종교에까지 투사되어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성숙한 어른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주 속에서 기쁘게 뛰노는 우주의 시민입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 인격적인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주는 친구나 동료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하는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나오는 곳, 곧 중심인 가슴에서 나옵니다. 모든 일이 가슴의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일은 가슴에서 나와서 가슴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도록 하는 노력이 진정한 일입니다. 이런 일 속에는 음악도 포함되고 건전한 종교도 포함되고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파는 모든 행위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일은 어른들이 자신이 받은 은총을 다음 세대로 물려 주는 길입니다. 일은 관계입니다. 나는 친구와의 우정이나 이성간의 사랑이나 일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 같은 모든 인간 관계가 중심인 가슴에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중심과 만날 수 있을까요? 앞서 얘기한 네 길 중에서 첫 번째 길과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 특히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이 만나는 지점을 통해 중심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어둠 속에 침잠하는 ’부정의 길’과 빛의 세계로 다시 나오는 ’창조의 길’ 사이에는 고요한 정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중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요한 정지 속으로 빛과 은총이 놵아져 들어오고, 우리는 그 빛과 은총을 우리의 관계를 향해 발산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드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내가 드렸던 어떤 기도 보다도 근본적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수천 년 동안 이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끝낼 때는 언제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아 호 미타키 외친’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게"라는 뜻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늘 자기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대지, 바위. 새, 나무, 구름, 모든 종족과 모든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들과 영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문화에 길들어 있는 우리는 "관계"라는 말을 가족이나 친척 또는 다른 두 발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인 전통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자궁에서 태어났으며, 우리의 관계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자궁은 우주적인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편안한 안식처이며, 어둡고 비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궁의 어둠과 비어 있음을 체험한 사람은 다시 창조적인 빛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인격적인 우주를 체험하려면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만 관계를 맺으려는 청소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며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고 있다고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믿으십시오.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무아의식(unself-consciousness)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고를 넘어선 그런 의식에 도달하십시오. 자기를 잊고 기뻐하며 즐겁게 뛰노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여행에서 그리고 이 우주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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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폭스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는 홀리 네임스 대학(Holy Names College)에 ’문화와 창조적인 영성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연구소에서는 새로운 우주관을 도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거기에는 물리학자,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적인 지도자, 신학자, 사회 사업가, 성서 신학자, 여권 주장자, 심리학자, 수피 무용가,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폭스는 문화와 영성에 관련된 책을 열 두 권 펴냈다. 그 중에 <최초의 축복(Original Blessing)>, <빙겐의 힐데가르트의 깨달음(Illuminations of Hildegard of Bingen)>,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강림(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 등이 최근에 나온 책이다. 그는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영성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성공회 신부이다
서구 영성 의식의 뿌리와 길 매튜 폭스
뿌리에 관하여
영성이란 무엇이나 뿌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영성이라 하면 모두가 피상적이지 않은 삶, 즉 깊이가 있고 뿌리가 있는 삶, 근본적인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뿌리는 집단적이다.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 뿌리와 교류하는 일은 '우리의 뿌리와 접촉하기 위해 나의 뿌리를 찾아 홀로 떠나는 것'이다. 지구의 내부 어딘가에 뿌리가 자라고 강하게 되는 곳에서 만물이 화합하고 힘의 집단성이 공유된다. 옹골차게 개인적인 뿌리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지구 내부에 있는 뿌리는 그 몸이 서로 비틀리고 굽어져서 같은 유기물을 먹고 산다. 이런 뿌리의 집단성을 의미하는 실체는 전통이다.
전통은 우리의 뿌리를 함께 양육하고 찾고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의지하듯 우리에겐 전통이 필요하다. 고 랍비 헤셸은 영혼의 환생을 믿었는데 이것이 '(영혼이) 심오한 종교적 진실을 담고 있는 근거라고 한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와 전통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어떤 전통을 배경으로 태어났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과거를 가지고 태어난다.' (바이런 셔윈 (Byron L. Sherwin)의 '영혼의 여로: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자기이해를 찾아서'(Journey of a Soul: Abraham Joshua Heschel's Quest for Self-Understanding), 종교 생활(Religion in Life) 1976년 가을호, 270쪽.)
서구인들은 많은 과거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책의 목적은 과거의 뿌리를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서구인들은 우리의 뿌리와 얼마나 많은 접촉을 갖고 있는가? 땅 아래의 힘인 뿌리는 쉽게 묻히고 은폐될 수 있다. 잊혀지기도 하고 심지어 격렬하게 억눌릴 수도 있다. 뿌리가 우리의 삶을 교차하지 않고 메마르게 되고, 뿌리가 죽어 가는 곳에서는 우상화가 생긴다. 수세기 동안 뿌리가 잊혀지고 알지 못하는 상태로 오래 머무르기도 한다. 오직 지구의 내부, 하루의 빛과 낮이라는 자아분리에서 집단적으로 묻혀진 무의식의 동굴이 있는 그 곳으로 탐험을 하는 사람만이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서구 전통, 특히 그리스도 전통은 지금 뿌리를 상실하고 잊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스도 영성의 역사에서 비성서적 철학의 막대한 영향을 받은 데에 그 원인이 있는데, 스토아 철학과 그노시스 철학,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과 같은 학풍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 신앙과 제국의 정치, 성과 경제적 지배 역시 그 영향에 한 몫을 했다.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정치 지배적인 목적에 그리스도 신앙이 이용되어 성서적 영성의 실제성이 왜곡되기도 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영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이 종교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으로 바뀌었다. 또한 삶을 축복으로 간주하는 창조 영성으로부터 구원이 삶의 동기가 되는 변화를 겪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혈통이라는,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를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구의 신비주의적 역사에서 남성 중심의 건강하지 못하고 불균형스런 성적 지배(예: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형상)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구 영성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다. 죄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타락 내지는 구원의 영성으로 발전하는 전통과, 삶의 경험을 축복으로 시작하여 창조 중심의 영성을 발전시키는 전통이다. 서구인들에게 그 동안 무시되어 왔던 전통, 이름하여 축복 영성을 다시 한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전통은 인류의 타락보다는 신성화를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어느 교수가 강의시간에 창조영성이 구원적 전통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비록 추상적이고 진정 옳은 이야기이지만 그리스도 영성의 역사에 관한 의견으로서는 핵심을 완전히 빗나간 말이다. 사실인즉 창조적 전통을 계속해서 억압하는 조류를 부추기는 의견이다. 그리스도 역사에서 '타락/구원'이라는 동기가 현재까지 지나친 영향력을 지녀왔다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타락/구원 동기를 지지한 사람들로는 아우구스티노와 보수에(Bossuet)와 같은 이원론자가 있다. 펠라지오(Pelagius)와 스코터스 에리오지나(Scotus Eriugena),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비난하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플라톤식으로 논해 중립화한 점, 여성을 영성지도에서 삭제했고 아빌라의 데레사나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같은 눈에 띄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여성을 구속했다는 점 등이 그 증거이다. 자연의 역사와 사회, 창의력에 관하여 구원 역사와 침묵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세계 교회 운동은 말 할 것도 없고, 풍성하고 반드시 필요한 성서적 발전과 역사적 영성의 발전도 간과해 왔다. 몸을 비하하고 이 행위를 거룩한 억압이라 칭했다. 베르다예프(Berdayev)가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고 일컫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적 개종과 감상적 성스러움을 부추겨 성사와 의식을 사소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성서적 정의를 개인적인 고결함으로 대치했고 신성함에 대한 인간의 능력보다는 죄에 대한 인식을 가르쳤다. 축복보다는 저주를 조장했고 고립을 꾀했다. 인간 내면에서 자신을 고립시켰다. 예컨대, 자기 자신의 정열을 고립시켰다. 인간 사이에서 개인을 고립시켰다. 그래서 나라와 교회에서는 남에게 세도를 부리는 사람들을 신성시하고 정당화하는 분열과 정복의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생명을 바친 궁극적인 삶의 방식-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급기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영성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켰을 때는 하느님을 위한 성서적 이름으로 감상화 시켰다. 사실인즉 이는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줌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docetism과 예수의 신격화에 저항하지 못했고 부활을 인간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그것은 구원의 역사를 역사에, 초자연을 자연에, 영혼을 육체에, 구원을 창조에, 예술가를 지식인에, 천국(과 지옥)을 지구에, 관능적임을 영성에, 남성을 여성에, 개인을 사회에 대항시키고, 창조는 곧 우주적이라는 우주적 비전을 지닌 이 모든 것을 범신론으로 비난했다. 이 편파적인 영적 신학은 범신론자(역주: 여기서는 정확히 말하자면 만유내재신론을 의미한다)라는 말의 기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간단히 말해 창조 영성이 융통성을 가지고 구원적 전통을 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전통은 구원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원영성이 지배력을 잠시나마 포기하고 늘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초월해서 창조 중심의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창조영성은 결코 구원의 주제를 무시하지 않는다. 사실인즉 구원의 의미를 다른 문화적 역사적 기간에서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를 갖고 있다. 이는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신학의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흔히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을 해방 신학이라 일컫지만 창조영성의 한 종류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창조영성은 헬렌 케닉이 그의 수필에서 보여주듯 정의에 몰두하는데 정의는 창조를 보존하는 행위요,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서구 사상을 끊임없이 지배하는,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에서는 창조영성에 반대하는 구원영성의 지배력에 의해, 자연을 억압하고 신의 은총의 지배력에 의해, 마치 자연 자체는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처럼 강화되었다. 더우기 타락/구원의 전통은 창조력과 창조의 은총을 무시하는 정도까지 왜곡되었다. 창조 중심의 영성론자들이 구원적 동기를 무시하지 않는 것과 같이 구원론자들 역시 창조를 의식 깊이 포용해야 한다. 창조를 포용함으로써 서구에서 구원의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바른 맥락이 제시될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서 현재는 두 전통의 „화해“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없다. 크라이스터 스땅달이 지적한 바와 같이, 너무 이른 화해는 힘없는 이가 힘있는 이에게 쉽게 항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등하지 못한 사람들이 화해할 때 얻는 것은 포기양도이지 화해가 아니다. 화해는 대등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힘이 있고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영성은 서구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원하지 않는 의붓자식이다. 서구 그리스도 신앙의 주류가 아우구스티노의 원죄와 구원 동기에 지나치게 오랫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창조영성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학자로서의 면모와 창조영성을 실천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이다. 실천만이 잃어버린 전통을 되찾고 되살릴 수 있다. ‚서구영성’이란 제목을 언뜻 보면 교회를 다루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창조의식을 되찾고자 하는 싸움에서 위험에 처해 있는 실체는 영성에 중요한 만큼 사회에도 중요한 일이다. 웬들 베리의 책 '미국의 불안: 문화와 농업'(The Unsettling of America: Culture and Agriculture)에서 그는 종교적 신앙이 창조를 간과할 경우 사회에 어떤 위험이 있을 수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도종교의 한결같은 실패는 신앙과 의구심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키고 신앙을 하나의 지식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나타나 있는데 이로써 인간은 신비와 신성함에서 격리된다. 예언자들이 야생의 자연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금할 때 (종교는) 소생의 가능성을 잃는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경향, 현재 과학적 산업적 야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은 야생 혹은 창조와 우리를 연결하는 탯줄을 끊어버리고 만 인간의 질서로 모든 것을 요약하려는 움직임이다.'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심층적인 자기 이해나 집단이해가 있을 수 없다. 간과되고 무시되고 억눌린 우리 뿌리의 영적 길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계시는 우리의 숨겨진 뿌리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말의 속성은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숨겨진 것을 계시하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환영한다. 무의식이었던 것을 의식하게 하고 잊혀진 것을 기억하게 하고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꿈을 현실로 만들고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고 아마도 쉽게 익숙하고 알려진 것을 덜 명시적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분으로 환영한다. 진실은 문화적 변화와 게으름과 인위성과 죄책감으로 숨겨지고 은폐된다. 말씀의 목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 역시 똑같이 은폐됨을 벗어나 밝혀져야 한다. 우리 시대에 '은폐'는 익숙한 경험이다. 은폐는 우리 사회가 기능하는 하나의 방식이어서 신성치 못한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영성으로서 자격이 있을 만하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큰 산업체의 하나인 맥도날드사의 텔레비전 광고 '맥도날드는 여러분을 위해 모든 일을 합니다.'라는 것을 들을 때면 우리의 언어가 오염된다는 의식을 하게 된다. 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이 은폐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음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중이다.
서구의 집단적 영성을 의식화하도록 하여 영성을 덜 잊게 하고 영성이 매일의 삶의 한 부분, 삶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서구사회는 제 영적 뿌리와 접촉하고 있는가? 과거 수세기 동안 우리가 종교없이 살 수 있는 지를 시험해 왔다면 그런 실험을 한 우리 자신과 실험 자체가 실패였다고 슈마허는 언급한다. 새로운 영적 비전으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영성을 제조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뿌리와 마찬가지로 영성도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이를 발전시킬 뿐이다. 토마스 머톤은 서구의 영적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다시금 감상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역사에 골몰하듯 역사에 열중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에 대한 열쇠는 역사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생각이 또한 성서의 근본적 생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잊고 있다. 우리는 종교적 사고를 정지된 본질로 생각하고 추상적 도덕의 가치로 만들었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계시한다는 역동적 감각을 우리는 잊었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정적인 추상화로 대치한 것에 대해 머톤이 애도를 표함은, 성서적 영성과 그리이스 영성의 차이에 관심을 표명하는 랍비 헤셸의 그것에 필적한다. 유태인의 성서적 영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느님에 비추어 스스로 생각하는 것으로 사려된 '그리이스와 독일의 철학적 사상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랍비 헤셸은 성서적 하느님과 그리이스의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하느님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과도한 근심으로 특징지워 진다. 철학가들의 하느님은 자기를 반영하는 관심을 표명하는데 이는 단지 자기 자신에만 개입해 있다는 의미이다. 예언자들의 하느님은 인간 문제에 단호히 개입되어 있다. 헤셸이 주장하듯, 철학가들의 이상적 인간은 하느님과 같이 됨이다. 이는 빈약하고 정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성서에 나오는 이상적 인간 역시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이지만 이는 인간의 한계에 관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관심이다.' (셔윈(Sherwin), '영혼의 여로'(Journey of a Soul), 274쪽. 아브라함 헤셸(Abraham Heschel)의 '예언가'(The Prophets) 참조. Harper & Row 출판, 1963년. CC. 12-16, 18쪽)
서구에서 깊은 그리스도 전통과 유태인 영성에 대해 권위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토마스 머튼과 랍비 헤셸에게 공통된 의견은 우리 시대의 영성은 신플라톤주의도 헬레니즘도 아니고 성서적이고 유태적인 영성이라는 점이다. 그 영성은 역사의 영혼을 지니고 무엇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관심이 그 특징이다.'
영적 뿌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인간한계에 대해 어떤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관심을 보였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하지만 유태인의 그리스도 성문집에서는 이런 물음이 제기되지 않았고 기적과 교리적 순응 혹은 자극적인 초자연주의가 인간 동료의 고통을 더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비추어졌다. 그래서 인간의 개입을 주제로 삼아 히브리 성서의 기간을 창조영성의 근원으로 검토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진정 서구세계가 깊고 풍성한 영적 뿌리와 다시 접촉할 수 있으려면 성서적 시각이 아닌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성인집과 영성은 이제 멈추어져야 한다.
서구세계는 제 영적 전통과 얼마나 많이 동떨어져 있는가? 로버트 올스테인(Robert Ornstein)과 찰스 타트(Charles Tart), 클라우디오 나란조(Claudio Naranjo)의 연구팀과 같은 미국 의식 심리학자들은 서구 영성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신비주의와 심리학에 관한 모든 실용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방향을 모두 동양으로 돌리고 있다. 마치 서구세계는 신비주의와 심리학에 기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서구세계의 주류 종교계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있어서 이 얼마나 혹독한 판결문인가. 이성주의적이고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독실함으로 특징지워졌던 지난 삼 세기 동안 종교계가 신비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인지하던 이상으로 예언을 멀리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영성과 정치, 영성과 경제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나는 종종 듣는다. 이 사실은 산상설교가 서구의식에 어떠한 방식으로 스며들었는지 의문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가톨릭계에서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정치적 의식까지 포함하는 신비적 팽창이 다시 흥미진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좋은 한 예가, 루터교 신학자인 벵트 호프만(Bengt Hoffman)이다. 그는 신비가이며 예언자인 루터가 라인 지방의 신비주의 전통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루터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에크하르트의 제자인 존 타울러(Jone Tauler)이다. 그러나 도미니크 수도회의 일원인 존 타울러는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의 현세적 영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세적 견해에 관해서는 루터가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서구인들이 아우구스티노의 구원 중심의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난 영적 뿌리를 탐험하기 시작하면 히브리 성서의 창조적 전통을 더욱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성을 탐험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새로운 창조를 이야기함은 창조영성을 전제로 한다. 창조영성은 인간의 창조력을 사회개발의 출발점인 '하느님의 형상'의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지나치게 내성적인 탐험에 얽매이지 않는다. 랍비 헤셸이 '번뇌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 영적 계발의 적절한 주제이다. 아우구스티노의 기여로 그리스도 영성에 덧붙여진 플라톤주의식 이원론에 따른 죄책감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아우구스티노를 초월하여 성서적 선택과 역사적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요구된다. 서구의 영적 전통에는 서구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적으로 개입하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축하의 의미가 훨씬 더 많이 담겨 있다. 과거에는 역사와 몸이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있었던 전통이 있었다. 체누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하느님이 창조하심을 인정하는 것은 곧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어 선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서구인들을 위한 영적 자양물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고 미지의 보물을 담고 있는 것이 창조 중심의 영성이다. 클로드 트레몽땅(Claude Tresmontant)은 다음과 같이 창조 중심의 영성을 설명한다. '하느님의 방식, 하느님 당신의 사랑이 허락하는 유일한 그 방식은 진정으로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또 하나의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창조영성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창조자와 예술가로서의 잠재력을 일깨운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 무의식을 의식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다. 이 과정은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미국인 역사가 캐롤 쿠위글리(Carroll Quigley)는 아우구스티노의 유물인 구원 영성과 성서적 전통의 뿌리를 가진 창조영성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상과 몸의 필요성에 호소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에 기초하는 '좌익' 영성과, 영혼과 하느님의 은총과 완전한 이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에 근거를 두는 '우익' 영성을 구별했다.
'궁극적으로 보아 사상의 역사에서 좌익 영성은 히브리인들과 이오니아 원자론자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우익 영성이란 다른 극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인과 피타고라스파의 이성주의자 특히 플라톤에서 기원한다. 종합적이고 온건한 중도의 길을 찾는 것에 대한 위협이 우익의 극단, 이원론적 이성주의에서 생겨났는데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 영향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를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우구스티노는 철학적으로 플라톤주의자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캐롤 쿠위글리(Carroll Quigley)의 '문명의 진화'(The Evolution of Civilization) (Macmillan 출판, 218쪽))
그리스도 영성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와 시간과 몸과 물질과 사회를 포함한다. 영은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성분이며 바로 삶 안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창조영성에서는 곧 경제학, 예술, 언어, 정치, 교육, 성이 모두 똑같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고 기쁨이다. 기념을 축하하며 황홀의 기쁨을 함께 나눔이다. 이는 엘리트적인 영성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다. 세상 사람들에 관한, 세상 사람들에 의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다. 사람 중심의 영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원론에서 벗어나 서구 영성의 뿌리를 성서적 전통에서 다시 보는 연구에는 '서구 그노시스주의의 죽음과 신플라톤주의의 죽음'이라 부제를 붙일 법도 하다. 성서적 영성이 그노시스적인 영적 분파의 정수인 이원론을 없애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 신비주의와 예언, 예술과 삶, 현세와 내세, 영과 물질, 몸과 영혼 등의 이원론은 성서적 영적 비전에 비추어 보면 아무런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원론은 죽은 이론이요 또 죽어 소멸되는 것이 마땅하다. 성서적 영성은 다음의 이유로 신플라톤주의를 배제한다. 우선, 창조는 신플라톤주의적 우주론이 아니다. 창조는 선형적이고 평면적 것 이상의 굴곡을 포함하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것이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상관없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주관에 따라 영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질의 진화와 지구의 굴곡, 우주의 굴곡에 관한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은 신플라톤주의가 기약하는 천동설적 우주를 무너뜨린다. 둘째, 창조의 전통에서 기인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아닌 세상의 구원이다. 물질은 통제하고 구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류가 물질과 조화를 이루고 옳은 방식으로 함께 기념할 필요는 있다.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 영성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즉 신플라톤주의 대 성서의 문제이다. 신플라톤주의와 이혼하고 성서적 유태인의 사고의 전통인 창조영성과 재혼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 영성의 소생은 있을 수 없다.
길에 관하여
뿌리를 조사함은 길을 조사함과 같다. 뿌리는 더듬어 뻗쳐 나가고 다른 뿌리와 상호작용하면서 지구 깊숙이 영양분을 주고 성장한다. 뿌리는 정적이지도 자기만족적이지도 않다. 뿌리는 성장한다. 움직인다. 새로운 영토와 오래된 영토를 탐험한다.
그래서 세계 교회 운동의 뿌리와 함께 한다. 세계 교회 운동의 뿌리가 좀 더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때는 사람의 영성이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고 인위성으로부터 탈피할 때이다. 다른 문화권 혹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여정을 어떻게 하는가? 땅속 성장을 위해 어떤 통찰력을 빌려 올 수 있는가? 어떠한 다른 점이 있는가? 우리의 여정이 좀 더 뿌리깊고 풍성하게 되기 위해 어떤 비평을 빌려 올 수 있는가? 다양한 영적 전통에서 통찰력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가 미 대륙 원주민에게 가져다 준 축복을 배우고. 땅과 죽은 사람, 먹는 일, 자연,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미 원주민들의 공경심을 배울 수 있다. 하시디즘의 정수가 보통 사람들을 위한 축하이고 또 보통의 구원을 말할 때 이는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의미함을 배울 수 있다. 비움과 채움을 이야기하는 러시아의 영성에서 통찰력을 배우고 러시아 영적 의식의 계발에서 농부가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배울 수도 있다. 요가 전통에서 오는 긍적적 역할에서 우리는 몸이 영성에서 참여할 수 있고 그리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신비적 역사 안에서 문화적 비평이라는 '개신교의 원리'와 씨름하는 윌리암 호킹의 노력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신비에 연원하는 한 나라의 종교적 경험을 민주화하려는 미국 초월주의자들이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모든 뿌리의 상대성이다. 뿌리와 길을 구별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어떤 사람이 어느 입장에 서 있는가'이다. 로마 가톨릭인 나는 하시디즘과 초월주의가 길에 속한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유태인이었다면 하시디즘은 역사적 뿌리에 속했을 것이고, 개신교인이었다면 초월주의가 이에 속했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 교훈이 있다. 뿌리와 길, 우리의 전통과 남의 전통을 구분하는 선은 정교한 선이다. 어떤 이는 투명한 선이라고까지 말할 것이다. 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도 안되겠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외부의 전통이 제 풍성함을 내보이기 전에 우리의 전통을 발견해야 한다. 이는 분명 현재 세계 교회 운동에 있어 중대한 축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뿌리를 더 깊이 인식하고 감상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교회 운동의 또 다른 차원은 뿌리와의 전지구적 성격이고 또 이에 대한 절박함이다. 왜 인구폭발이 있을 때마다 신비주의에 대한 흥미가 변함없이 매번 일어나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학자 필립 돌린저(Philipe Dollinger)는 인구의 영향은 14세기 라인 지방에서 일어났던 신비주의 폭발에 열쇠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증명했다. 이는 기본적인 문화적 영적 법칙으로서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물리적 한계가 다가오는 것을 인식할 때 의식이나 영성의 전선을 탐험하게끔 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깨어있는 지구촌이 받는 압력은 그것이 인구나 식량, 에너지 자원 혹은 고용의 압력일지라도 전대미문한 역사적인 영적 깨어남이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참된 세계 교회 운동의 깨어남이 될 것이다. 영이 제 문화의 길 이상을 여행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인류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특정한 길을 여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혼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없다.)
전세계 종교를 포함하는 세계 교회 운동에 관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세기의 종교적 대결 상태에 막을 내려야 한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고대이래 지금까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주위를 맴도는 숨겨진 힘에 대한 인식이 다양한 민족 가운데서 있어왔다... 다른 종교 역시 끊임없이 다양하게 인간의 마음을 찾고자 노력함을 알 수 있다. . . 가톨릭 교회는 참되고 거룩한 타종교의 가르침을 배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진리의 빛을 가진 삶의 방식과 행동의 방식에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창조(바다의 주변을 맴도는 영혼,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종교의 노력)와 창조영성 (종교는 '삶과 행동의 방식'이라고 일컬어진다)에 관해 언급하며 이것이 그리스도 신학을 다른 영적 신학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목한 것은 중요한 일이다. 창조영성은 전세계적으로 벌일 세계 교회운동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조건이다. 모든 민족과 신앙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존재의 선물이며 그 공존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 중심의 영성 없이는 세계 교회 운동이 있을 수 없다. 세계 교회 운동은 신성한 임무나 부가된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과 가지는 관계의 넘침이다.
랍비 헤셸은 '심층 신학'(depth theology)이 모든 종교적 전통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공동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교리의 신학이라기보다는 사건의 신학에 가까울 것이다. 신비가 발견되는 모든 곳을 존중하고 교리보다는 신비를 앞세우는 신학이다. 우리 뿌리의 한계가 있음을 존중하고 한계를 인정하기에 우리 앞에 길을 열어 놓는다.
'심층 신학은 사람이 전체성에 관여되는 순간과, 생각과 감정과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는 순간에 그 사람을 온전히 만날 수 있게 한다. 심층 신학은 궁극적 현실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한다. . . 심층 신학은 지적 자기 정당성과 자기 확신, 자만심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신앙의 부적합성과 교리의 모순성과 신비를 강조한다.' (아브라함 헤셸의 '자유의 불안정'(The Insecurity of Freedom) (Farra, Stratus & Giroux 출판, 1966년), 119쪽 참조)
나는 헤셸의 '심층 신학' 개념을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 신학이 무엇인가를 제공하고 다른 전통에서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때는 교리보다 더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을 때이다(비록 교리가 그런 뿌리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있어 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종교적 실천 혹은 영성이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는 지구촌 미래의 세계 교회 운동에 있어 위험에 처해 있다. 오늘날 '인간의 한계에 대해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관심'을 가지는 일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은 우리의 뿌리가 어느 방향으로 자랄 수 있는 지를 말해주는 길을 제시하는 일이고 우리의 영성을 전지구적으로 의식하는 일일 것이다.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세계 교회 운동을 언급하지 않는 영성은 제 이름 값을 할 수 없다. 길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깊은 뿌리가 있을 수 없다.
또한 뿌리가 없이 길이 있을 수 없다. 예전에 하와이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던 어느 승려의 말이 기억이 나는데 그 승려는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서구인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하였다. '당신의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없는 것은 불교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에 무엇이 있는 지를 다 아는 걸까? 서구 종교는 과연 그 깊이를 사람들이 탐험하도록 도움을 주었는가? 의식적으로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구 종교가 뿌리를 은폐하고 억압하는 소위 세속화라는 문화적 과정의 일부가 되어오지는 않았는가?
- 매튜 폭스(편집), 서구영성, 역사적 뿌리, 세계 교회 운동의 길, 서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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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 - 매튜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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