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중기, 중부 라인의 여성 예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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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데가르트가 우리 시대에 선사한 8 가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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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르트가 남긴 저서의 "원(原) 자필본(自筆本)"은 없다. 현재 전해오는 저서들은 모두 필사본(筆寫本)이다. 이 중 일부는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의 필사실(筆寫室: Scriptorium)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전해져오는 필사본들에서 "원본일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비판적인 편집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막 이루어졌다. 1956년 마리안네 쉬라더(Marianne Schrader)와 아델군디스 휘어쾨터(Adelgundis F hrk tter)의 공저 "성녀 빙엔의 힐데가르트 저서의 신빙성(Echtheit)"이 첫 번째 비판적인 연구였다.) Marianne Schrader, Adelgundis F?rk?ter, Die Echtheit des Schrifttums der heiligen Hildegard von Bingen. Quellenkritische Untersuchungen. B?lau, K?n/Graz 1956 (Archiv f? Kulturgeschichte, Beih. 6)
이들은 필적비교방식을 통해서 "루페르츠베르크 채색 스키비아스 코덱스(인쇄하거나 복사한 책이 아니라 손으로 옮겨 쓴 책으로 고사본(古寫本), 필사본(筆寫本)이라는 뜻. 이 글에서는 이 필사본을 원본으로 해서 다시 필사한 책들과 구분하기 위해 '코덱스'라고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 Rupertsberger illuminierte Scivias- Codex) Scivias : 독일어로는 길의 조명(照明: Wisse die Wege)으로 번역되어 있다.)가 12세기 후반(2/3 시기, 곧 1166년 이후)에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 필사실에서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힐데가르트가 필사하는 이에게 세부사항을 직접 알려주고 지시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코덱스에는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을 금색, 은색 및 불투명한 초벌 안료로 그려 표현하는 35개의 그림들이 들어 있다. 1632년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이 파괴될 때까지 루페르츠베르크 채색 코덱스도 "대형 코덱스(소위 "대형 코덱스: Riesencodex"라고 일컫는 이 필사본에는 힐데가르트의 신학적인 저술들과 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와 같이 이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다가 다행히 손실되지 않고 아이빙엔으로 옮겨졌다. 1802년 아이빙엔 수녀원이 세속화로 해체될 때 후에 나사우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 곳 도서관에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 책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 특히 괴테가 이 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라인, 마인 지역의 예술과 유물에 대하여 (?er Kunst und Altertum in den Rhein- und Main-Gegend, Altertum und Kunst 1, Cotta 1816) 참조 .
힐데가르트 폰 빙엔, 이는 지난 10년 간 그 어떤 이름보다 세인의 주목을 강렬하게 끌었던 이름이다. 그녀의 웅장했던 삶이 이제야 비로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힐데가르트의 정신적 유산들을 많이 그리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빙엔(Eibingen)의 성 힐데가르트 수녀원의 수녀님들이지만, 의학사가인 Heinrich Schipperges에 의해서도 그녀의 많은 (신학적, 의학적) 저서들은 번역,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에 관한 의학서들을 실행에 옮기는 의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치유와 건강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가치로 되고 있는 만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는 특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늘 날 의료 수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대 미문의 높이까지 도달해 있다: 〔현대의〕 의학과 약학은 병을 탐구, 진단, 치료하는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을 획득하여 과거의 여러 잔혹한 전염병을 이겨내고 또 여러 훌륭한 약품들을 많이 계발시켰다. 우리는 그들의 이 빛나는 공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훌륭한 현대 의학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는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일까? 현대 의학은 병의 외적 징후들만을 기계적으로 다루고 의사와 환자간의 인격적, 개인적, 직접적 만남을 점점 더 의료 장치를 매개로 한 간접적, 익명적 만남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고도로 효율적인 약조차 바람직하지 않는, 심지어는 심각한 부작용까지 유발시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편에서는 자연 치료법에 대한 호감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극동 아시아의 지혜에 근거한 여러 가지 자연 치료법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알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대체 치료법이 조롱거리로 취급되고 비 과학적이라고 무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식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치유력에 관해 탐구하고 있는 과학도 있다. 그것은 식물 안에 치유력이 있는지 실험실에서 탐구하고 때로는 참으로 치유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 치료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의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힐데가르트와 만나면서 이 여러 다른 입장들이 팽팽하게 대립해 있는 긴장의 장, 그 핵심 속으로 뛰어 들게 된다. 그리고 나는 힐데가르트에 의해 좋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면 소위 "힐데가르트 바람"은 이미 오래 전에 잠잠해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성 힐데가르트의 치유법은 여러 가지 자연 치료 요법들 중의 하나로 간단히 자리 매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전체의 치유이다. 그런데 이 "전체적 치유" 란 오늘 날은 거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 전체적 치유라는 말을 들으면 유사 치료(Homoeopathie)에서 행하는 자연 〔재료들〕에 의한 치유 방법이나 정신 신체 의학의 이해 방식 같은 것을 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전체적 인간이 문제된다: 자연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신체-영혼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채, 생명의 근원인 신에 의존해 있는 인간 전체.〔즉 전체적 맥락에서 조명된 인간.〕또 힐데가르트의 치유론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적 구원론, 치유론이다. 따라서 그녀의 치유론에 입각한 세계및 인간 이해는 다른 문화권의 전통적 치유 방식과도, 순수 자연과학에 근거한 의학과도 다르다.
지난 세기동안 우리의 사회와 삶의 방식에 막중한 영향을 끼친 것은 소위 정밀한 자연 과학 들 이였다. 물질적 세계는 아주 발전되었고 또 전문화되었다. 우리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놀랄만한 업적을 낳을 수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양한 방식의 삶이, 그럼으로써 인간 자체가 심각한 위험에 빠져들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지해야 했다. 이 위험 현상은 특히 환경과 의학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근거 지워진 영양에 관한 여러 이론들이 쏙쏙 쏟아져 나오고, 위생 관념 및 대비책이 널리 유포되며, 기막히게 효과적인 약품들이 계속해서 소비되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알레르기와 문명병들은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이 시스템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의료 행위 배후에는 대체 어떤 인간 이해가 도사리고 있는가? 〔인간에 관한 어떤 이해 방식이 이런 의료 행위를 배태해 낸 것일까?〕인간은 과연 개개 부분들의 합에, 즉 임의적으로 교환•대체 가능한, 한 유기적 생명체 전부를 함께 고려하지 않고도 그것만 따로 떼어서 취급할 수 있는 〔독립된〕개개 부분들의 총체에 불과한가?
전체성에 대한 요구가, 즉 개개 부분들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치유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때 어려운 점은 인간의 본질적 핵심이란 유물론적 사유 방식이나 그 사유 방식에 근거한 (오늘 날 통용되고 있는) 방법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생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이 본질적 핵심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영혼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세기 Virchow 교수가 "그리도 많은 사체를 해부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영혼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 후, 오늘 날 더 더욱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이다.
현대 자연 과학의 자식인 심리학조차 그의 방법으로는 지성, 감정, 충동, 태도 등의 영혼의 외적 현상만을 기술하고 시험할 수 있을 뿐이지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한다. Max Thuerkauf 라는 유명한 물리학 교수의 말처럼 정밀한 자연 과학은 자연 중에서 측정 가능한 것만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측정 가능한 것, 그것은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유물론적 일면적 고찰 방식에 인간 삶의 본질적 측면에 속하는 영적인 것이 아주 결핍해 있음을 느낀다.
이제 힐데가르트의 통찰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그녀에 있어서 치유란 단순히 병적 증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치유함이다. 즉 하느님이 생각하신, 〔 원하신〕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바라면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 세계의 요소들로 빚어졌기에 자연에 의존적이면서도 정신의 숨결로 살고 있기에 이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 인간은 이처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건강하게 살면서 자기 자신을 활발하게 실현시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이 근원적 모습으로부터〕추락하고 분리되어 약해진 존재이기에(destitutio) 하느님의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만 또는 영혼만 건강하거나 병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즉 〕인격으로서 건강하거나 또는 병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격으로서 즉 육체와 영혼의 생명체적 통일성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또 〔그런 통일체적 존재로서〕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로서 하나의 완결된 세계상(像)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의 커다란 연관 관계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날 우리들이 전문화, 세분화작업에 점점 몰두함에 따라 잊어 가고 있는 것이다.
초기 중세에 살았던 이 여인이 현대인의 마음을 끄는 점이 바로 이 점에 있으리라. 그녀의 메시지는 그때 그때마다의 사회 구조와 정신적 조류들을 넘어 서는 〔보편적이고〕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보는 자였고 예언자였으며 신비가였다. 그녀를 일컫는 그 밖의 다른 지칭들은 - 독일 최초의 여의사, 자연 치료가. 신학자, 정치가, 시인, 음악가 등 - 오직 이 배경에서만 올바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
비전, 너무도 아주 독특하여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조차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는 그 비전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생명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그림과 상징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아니, 알려 주어야 하는〕"하느님의 나팔"이라 지칭하였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의 - 생명체나 무생명체나 - "내적 본질"을 보았다. 돌 속에서도 보았고, 동식물 속에서도 보았으며, 인간 속에서도 보았다. 그들 모두는 하나 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힐데가르트 사유가 왜 그토록 현대인의 마음을, 생명의 모든 영역이 점점 세분화•전문화되어감에 따라 생의 방향과 중심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을 강렬히 매혹하고 있는지 여기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으리라.
그녀는 어떠한 인간학적, 신학적 이론 체계도 확립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인간은 항상 구체적 인간 이였다. 즉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장엄한 능력을 가진 동시에 고통과 어려움을 또한 겪고 있는 인간 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 특유의 강점으로 보이는 하나의 관조 방식에 주목할 수 있다: 여성은 생명을 계속 전승해주고 있기에 생명에 특히 가까이 있다. 그녀의 관심의 핵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에로, 인격에로 향한다. 또 그녀에게는 정신적•육체적 모성이 살고 있기에 생명은 아주 친숙하다. 반면에 남성에게는 사물적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회의의 폐회식때 여성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공표되었다: "이제 때가 오고 있다. 아니, 때는 이미 왔다. 여성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가, 여성이 사회 속에서 지금껏 소유할 수 없었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며 힘을 획득해야 할 때가. 그러므로 복음의 정신으로 충만한 여성들은 이 순간, 인류가 전대 미문의 깊은 변화를 의식하고 있는 이 순간, 인류가 그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도 힐데가르트가 오늘 우리에게 막 행사하기 시작한 영향력을 보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들에게도 이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가질 것을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권유했다: 그녀는 Matthaeus von Lothringen 공작에게 "그대의 할 일은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것이지 노예를 훈육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 어떤 남성에게는 "어디서거나 한 생명을 만나게 되거든, 그 생명을 보살피시요"라고 말한적도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경종을 울려주는 사람으로서 힐데가르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생명이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다. 삶이 - 인간다운 삶, 신이 원하는 삶 - 다시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모성과 인간성에 대한 성찰이 아주 불가피하다. 힐데가르트는 생명과 인간을 섬긴다. 그녀는 그녀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충심 어린 충고를 주었고 정신적•육체적 질환을 치유해 주었으며 또 양심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권력층 남성들에게조차 따끔한 경고의 말을 자주 주면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힐데가르트의 웅장한 업적을 볼 때 그녀의 몸이 허약했다는 것, 그래서 자주 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는 몸과 영혼이 얼마나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병고를 통해〕몸소 자주 체험하였다: 정신적, 영혼적 어려움이 어떻게 육체를 병들게 할 수 있으며, 거꾸로 약한 몸이 어떻게 영혼을 방해하는지를. 그럼에도 이 여성은 대체 어디로부터 힘을 얻어 그 엄청난 작품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 안에서 살았다. 그녀가 빛으로 그리고 불같은 사랑으로 경험한 하느님, 모든 "녹색의 생명력"을, 우리 인간을 노쇠해서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주는 "녹색의 생명력"을 샘솟게 하는 근원적 생명인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나는 이 책에서 성 힐데가르트의 사유를 이해해 보려 한다.
그녀는 "병이란 생명력의 결핍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생명력과 건강함 그리고 치유가 주어지는 여러 차원을 조명해 보고 싶다. 그 차원이란 첫번째로는 순수 생물학적 자연적 차원을, 두번째로는 인간 속의 신체적-영혼적 상호 관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 즉 신 자체를 의미한다.
나의 이 비범한 탐구 여행에 독자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초대하면서...
보물을 들어올리거나 파도치는 물살들을 평화로이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보물들을 찾아 깊이 파야한다. 하지만 인간애보다 더 심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Profunditas est homo et cor eius abyssus"- 찬미가 시인인 Nova Vulgata는 깊이를 알수 없는 것은 인간이고 그의 마음은 끝이 없고 심원하다고 말했다.
위대한 성인의 심혼도 그러할까요?
힐데가르트는 여러면에서 타고난 성품을 가진 성녀였다. 물론 사람들은 그녀를 수십년전에 “지식과 신성을 지닌 12세기의 기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서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까지 정신적 삶의 지혜로운 스승, 자애로운 대수도원장, 예언자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영원한 생명으로의 안내자로서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열적인 자연연구가로서, 치료술에 정통한 의사로서그리고 치료사로서의 그녀의 지식들은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예언자는 모든 인간들의 자비를 확신했고, 동시에 하느님의 신비를 찬양했다. 하느님이 주신자연과 기적의 선물은 항상 보물을 에워싸고 심원하게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의 첫 번째 작품인 “Scivias"는 말하자면 그림으로 보는 교리교육으로 제시되고 있다. ”생활공덕의 서적“은 -Liber Vitae Meritorum"- 성인의 도덕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3개의 위대한 신학 작품에는 - ”Lieber Divinorum Operum", " - 말하자면 자연철학이 담겨져 있다.
나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포괄하는 힐데가르트의 세 개의 위대한 비전작품들속에 “생명빛의 그림자”의 비전을 기록할 때 그녀의 심장과 펜으로부터 솟아나왔던 진실로 순수하고 감성적이며 정직한 성인의 기도문을 모아보았다.
이 전집들의 보완으로 나는 힐데가르트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힘으로 형성된 각각의 주제영역이 절정점인 기도문으로 정리된 “성령의 거문고‘의 “노래하는 기도”를 첨가했다. 또한 가극(오페레타)과 축제극은 - 특별한 기회와 그녀의 유명한 발신편지의 기도문에서 자주 저작했다 - 이러한 아주 가치있는 기도문들의 주옥을 담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수호자의 기도가 들어 있는 이 책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상속에서 용기와 격려를 주고, 모든 위치에서 진심으로 하느님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며, 열애와 찬미, 청원하고 감사안에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Philippa Rath 수녀님의 글을 번역•편집 한 글 입니다.)
마리온 그래핀 된호프(Marion Graefin Doenhoff, 1909-2002,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저항가, 차이트 주간지의 편집자)는 "차이트(Zeit)"지에 다음과 같은 아주 주목할 만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초월적•종교적 세계로부터〕현세적 세계로의 해방, 새로운 진보와 새로운 기대의 충족 그리고 권력 증대에 대한 쉼 없는 노력은 〔결국에는 삶의〕의미의 빈곤•고독• 소외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이제야 점점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 세속화, 즉 인간을 형이상학적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오직 세속의 일에만 온 마음을 쓰게 하는 철저한 세속성은 ...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치로서 그리 오래 우리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즉 그리 오래 유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참으로 경청할만한데, 이는 "성장의 한계"나 (포스트) 모던적•세속적 사회의 그늘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악의 뿌리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그의 삶•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는 일견 모든 전통에서 해방된 듯 보이나 실은 어디로 가야할 지, 어디 발붙여야 할 지 모르는 체 이리 저리 공허하게 떠돌고 있을 뿐이다. 부초처럼. - 삶의 의미를 목마르게 찾아서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만의 골방에서 한 걸음도 내 딛으려 하지 않으면서.
현대에 관한 마리온 된호프의 분석은 냉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한 번 둘러보면 이 분석은 우리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힐데가르트는 900년 전에 "하느님의 창조 작업"이라는 대작에서 동시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그대 인간이여, 옛날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그 분, 시간의 저편에 계시는 그 분의 말씀에 귀를 잘 기울어라. 자기의 창조주를 향해 마음을 열고‘당신이야말로 저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는 사랑의 불씨를 당기는 사람이다. 일체의 생명과 일체의 선을 분만하는 사랑의 불씨를. ... 우리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므로〔어느 주인을 섬길지 끊임없이 새롭게〕선택해야 한다.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을 섬기는 자는 자기 자신만을 볼 수 있을 뿐이어서, ... 다른 존재자를 섬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과 그 분의 의지를 알아채고 그 분을 섬기는 자는 태양처럼 빛나서 진리의 빛 속을 걷게 되리라."
힐데가르트의 말은 마리온 된호프의 말과 다르나 마리온 된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힐데가르트가 살던 시기로부터 다시 한 번 6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600년경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오랜 체험을 거쳐 수도자를 위한 삶의 계율을 집필한, 서양 수도자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 성인인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그는 계명의 서언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간곡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하느님의 빛을 잘 주시하면서 이 경고의 음성이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려 하는지 귀를 잘 기울여 보자: 그대들이 오늘 〔하느님의〕말씀을 들으면 부디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 말아라 ... 그대들이여, 아직 생명의 빛이 그대를 품고 있는 한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힘껏〕달려라."
성 베네딕도의 말은 또 다시 아주 다르나 내용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서로 다른 시기에 살았던 이 세 사람의 예언자적 경고의 말속에는 모종의 공통성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사회적 변혁의 시기, 종교적 전환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가치관, 전통적 삶의 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시기. 어떤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 할 지, 아니, 무엇이, 어떤 삶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시기. 정말이지 삶의 방향도, 지반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시기.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영원한 것을, 신뢰할만한 지반을 더 더욱 갈급하게 찾게 되는 시기.
또 다른 하나는 그들 모두 초월자를 가리킬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그의 광증에 (이 광증은 아마 모든 시기의 인간에게 공통된 점이리라.)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돌아서서 회개할 것을 간곡히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타협도 불허하는 아주 분명한 음성으로. 그리고 마침내 가치와 길을 밝혀주는 다른 대안을, 충만한 삶으로 이끌어줄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떤 시기이던 그 시기만의 예언자를, 즉 지금 울리고 있는 이 시간의 종소리가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해 주어야 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떤 예언자들의 말은 그들만의 시대를 넘어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기도 한다. 누르시아의 베네딕도와 힐데가르트가 바로 그런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말과 모범적 삶의 방식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길을 밝혀 주고 있다. 그들 둘 다 시대의 거대한 조류를 거슬릴 수 있고 또 세계를 참된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베네딕도는 삶의 계율을 보여 줌으로써 서양 문명 전체에 핵심적 가치들을 전수해 주었고, 힐데가르트는 이 베네딕트의 정신 안에서 살면서 그 정신을 독특한 방법으로 새로 조명하여 전수하였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이 베네딕도 정신이 어떤 정신인지,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공부해 볼만한 하겠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어쩌면 마리온 된호프가 앞에서 제기한 우리 시대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우리 인간의 본성이 품고 있는 것들, 그것들은 유감스럽게도 서로 일치와 조화가 아니라 부조화와 모순 관계 속에 있다. 서로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순 덩어리, 거대한 활화산 같은 카오스, 청각을 잃게 할 만큼 큰 소란. 그러나 이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그 소음에 묻히지 않는, 결코 묻힐 수 없는 소음보다 ‘큰’음성이 하나 있다. 귀를 막아도 들려 올만큼 또렷하고 단호한 음성. 그것은 어떤 경우에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경우에든 선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준엄한 명령이다. 기적!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매 순간 새로이 탄생되고 있는 것인가?
중세의 한 수녀이자 신학자인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책『삶의 공덕에 관한 책』(Liber Vitae Meritorum)에서 이 문제를 곰곰이 묻고 대답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내면에서 팽팽한 긴장•적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을 즉 선과 악을 35개의 항목으로 각각 나누고, 그것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를 인상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 살고 있는, 그래서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서로 대립되는 성향들에 관한 그림. 힐데가르트는 우리의 개개 성향•행위들을 고결함과 비루함으로,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고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그녀가 얼마나 잘, 정성껏 보고 있었는지 커다란 놀라움으로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비겁함이라는 악과 신의 승리라는 선에 대해 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비겁한 사람, 그는 토끼 귀가 달려 있는 인간의 머리를 한 겁에 완전히 질려 있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게 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나 다 들고자 작정한 사람이다. 늘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읊조리는 사람. 그렇지 않다면 끝에 가서는 손해볼 것이 틀림없기에 말이다. 비겁한 사람은 말한다: "차라리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에게 아첨할 것이야. 성인이나 가난한 사람 따위에는 관심 가질 필요 없어. 그들은 어차피 내게 아무 이득도 줄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그들이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나는 못본척 할 것이야 ... 내게는 어쨌거나 살 집이 있어. 〔내가 살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을 어떤 경우에든 지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야〕." 이 비겁한 사람의 말에 '하느님의 승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더러운 잿더미안에서 뒹굴고 있는 삶을 좋아하지 않아."
또 다른 예로 힐데가르트는 냉담함이라는 악과 자비라는 선을 대립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냉담한 마음의 말이다: "내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런데 왜 내가 그 무엇을 위해, 그 누구를 위해 걱정을 하고 또 애를 써야 하지? ...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 그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해. ... 나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겠지만 선행도 베풀지 않겠어. 〔슬퍼하는 자를 보고〕늘 동정해야 한다면 ... 〔맙소사,〕 모든 기쁜 음성에, 모든 슬픈 음성에 일일이 답해야 한다면 도대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지?"
냉담한 사람,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일에만, 자기의 평화로움에만 관심 있을 뿐 타자에 대해서는 얼음장같이 무관심하다. 힐데가르트는 이 무관심한 사람의 일견 정당한 인생관을 지극히 아름다운 시적 비유로써 단호하게 거부한다. 자비로움의 입을 빌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뜨거운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를 기꺼이 치유해주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자비로운 사람의 입을 빌려서 말이다: "풀들도 꽃을 피워 서로 향기를 나누어주고 있지 않으냐? 돌 한 덩어리조차 그의 광채를 다른 존재자에게 비추어 주고 있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이처럼 다른 존재자를〕 사랑하면서 포옹하려는 근원적 충동을 갖고 있단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고, 하느님에 의해 살고 있으며, 하느님의 힘으로 호흡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고 매 순간 매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 삶의 영양분과 생명수를 받고 있다. 어린애들을 보라! 그들은 전적으로 부모에 의존해 있는 그들의 삶을 축복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부모를 보고 기뻐하고, 그들에게 의존하고, 또 그들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성숙한 사람 또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란 혼자의 힘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행복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처럼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이 아름다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종교에서보다 친구들간의 관계에서나 또 다른 인간 관계에서 먼저 경험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귀한 선물이 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도 환희로와 마음을 활짝 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영혼은 이때 하느님이 어떻게 자신을 창조하셨는지를, 그래서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 영혼은 그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그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그것은 완벽하게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아래를 굽어 보셨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그래서 강한 호의감으로 서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께서 당신의 형상에 따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으신 인간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 단, 우리 인간이 자유롭고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근원을,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도, 아니면 거부하고 냉담할 수도 있는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셨다. 이러한 자유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어떤 의지력도 없는 꼭두각시, 모조품뿐일 것이다 - 그러나 누가 자동 인형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어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노예 소유자가 아니시므로 노예를 창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자유롭기를, 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사람 자신으로 머물러 있기를 소망한다 - 물론 사랑은 이러한 이유로 항상 상처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력으로써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또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빈 공간, 하느님께서 손 댈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겨나게 된다: 하느님의 근원적 사랑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 사랑 받음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사랑에 냉담할 가능성. 그대와 나를 말하는 대신 끊임없이 나, 나, 나만을 말할 수 있는 자유. 왜 나는 나의 일 아닌, 나의 안락한 삶과 관계되어 있는 일이 아닌 다른 무엇에 마음을 써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눈물 따위를 왜 씻어 주어야 하는가?
굳이 종교적 의미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 냉담한 사람의 호언장담 속에서 근원 망각증을, 인색하고 초라하게 자기 자신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근원 상실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이 그 힘을 주신 분에게로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분으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빛 속에서 깨어났을 때 나를 잊어 버렸다." 자기의 빛(지성)과 힘에 도취됨, 그것은 곧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림이다. 하느님을 떠나 오로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존재하려는 시도는 그러나 모두 끝없는 어둠으로,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인간은, 인간의 삶은, 오로지 내적으로 지탱 받고 있기에 지탱되고 있다. 진정한 지탱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받침대, 그것은 지탱되어 지고 있음에, 떠 받혀지고 있음에, 곧 사랑 받고 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강하고 그리고 따스하게 안겨져 있는 것이다. 즉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 포옹. 달리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근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근원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느님에로 향하는 길, 그것은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만 염려하는 삶을 떠나, 근원으로, 근원적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힐데가르트 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삶의 공덕에 관한 책』(Liber Vitae Meritorum)의 핵심이기도 하다. 선(덕)의 인도를 받는 사람,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근원으로부터의 음성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영상이다. 반면에 모든 악은 하느님 (근원)에 대해 전연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자족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에 귀를 막는 사람의 태도,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태도에서 연유된다. 여기에서 책임져야 할 일로부터의 도피, 선행을 선택•결행함에 있어서의 우유부단함, 근원을 늘 새롭게 의식하면서 인내심 있게 생을 구축•영위해나가야 할 과제로부터의 도피라는 죄가 발생되는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선악의 영향력이 단순한 개인적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우주적 영역으로까지 미친다고 본다. 즉 한 개인의 선행 또는 악행은 그 개인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우주적으로도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로 향할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맑아질 때, 그때 바싹 말라 있던 모든 것들은 다시 푸르게 되리라. 모든 낱알과 포도 알은 바로 이 비밀스러운 힘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계의, 이 생태계의 생명을 우리 인간에게 맡겨셨다. 이 생태계의 생명줄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존재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표현을 빌면 "인간은 이 세계의 신이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 자연 법칙에 묶여져 있고, 모든 동물들은 본능에 묶여 있지만, 인간만은 오로지 인간만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선과 악에 관해 알기 때문이다."
비전과 비저너리, 이것은 원래 종교적 영역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영상을 통해 초감각적 계시의 세계를 관람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비저너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비전 곧 은폐된 무엇(진리)이 드러나는 일은 그런데 대개 꿈이나 망아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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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주론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거창하다고 생각하고 과학자나 물리학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로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우주론은 주로 종교에서 다루어왔고 신화로써 우리에게 해명되었다. 창조신화라든가, 단군신화, 인디언 호피 신화 등이 마치 황당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보통 우주론은 창조와 우주진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이다. 지금까지 창조에 대한 지식은 주로 신화나 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신화가 성서에 등장하는 창조이야기이다. (구약 창세기 1: 1-31) 이 신화는 피라미드나 삼각형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중심, 신중심의 신화이다. 주로 서양의 구 우주론이었다. 갈릴레오 이전의 우주론이다. 이 우주론은 하느님은 초월하고 인간은 자연 위에 분리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지구를 정복하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은 물질 덩어리이고, 그것도 계층적인 사다리였다. 생명중심이 아닌 인간중심, 결국 이 우주론은 공해와 지구의 파괴, 생태계의 위기를 낳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구 우주론은 건강과 우주론을 분리하였다. 토마스 베리는 이런 우주론을 병리적인 우주론- 진보의 패러다임에 대한 중독성과 그로 인해 파생된 문화적인 자폐성-을 비판했다.
신우주론은 우주발생이다.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중이다. 유기적이면서 영적이고 과학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이 우주는 단일한 에너지 사건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는 하느님의 중요한 계시이며,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정의했다. 신비주의와 과학의 만남이다. 우주론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의 탄생, 발달 그리고 운명에 대한 연구이다. 현대 칼 세이건, 중세의 단테 그리고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우주론자 이다. 16세기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 사건에서 보듯이 종교는 과학을 추방해 버렸고, 과학은 종교를 기피해 버렸다. 이 둘 다 병들어 버린 것이다. 과학은 빅뱅이론을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지만 이 기원은 누가? 왜? 이 설명은 과학이 할 수가 없다. 우주론은 과학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우리의 신우주론은 우주의 근원과 역사를 진화, 발전적, 회귀될 수 없는 우주 진화적인 과정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다시 우리가 색다르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건강과 우주론을 연계하고 있다.
최근에 일반인의 우주여행과 화성탐사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인식들은 우리가 태양계의 일부로 존재함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드디어 우주론에 대한 연구는 우선적으로 사색을 통해 탐구하는 데서 이제 경험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다. 우주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우리의 믿음을 생생하게 하고 우주 안에 인간의 위치와 우주의 파노라마 안에 하느님의 위치를 신선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서구의 문제는 구 우주론의 믿음을 살면서 새로운 우주론의 지식과 인식과 동양의 우주론과 영성을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교는 우주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토마스 베리의 우주신학을 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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