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님은 우리 민족사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민족사회가 혼탁하고 파행에 흐를수록 함석헌님의 존재는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참 신앙인, 참 언론인, 참 스승, 참 사상가를 찾기 어려운 시대에 함석헌님은 참 신앙인이고, 참 언론인이고 참 스승이고 참 사상가였습니다. 함석헌님은 90 평생 민족과 민주를 위해, 양심과 정의를 위해 싸웠던 민주인사였고, 사랑과 평화의 넓은 품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변절과 굴종의 시대, 거짓과 불의의 시대에 양심과 진리와 정의를 위해 90 평생 시련과 고난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함석헌님의 삶이 오늘 더욱 빛나고 향기를 풍깁니다. 함석헌님은 투쟁하는 민주인사요, 민족의 얼과 정기를 지키는 민족혼의 화신이이요, 민중과 함께 정의와 양심을 지키면서도 평화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런 분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흐를 수록 함석헌님의 존재와 삶을 닦아내어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사회와 정치를 개혁하려는 마당에, 우리는 함석헌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철학과 도덕을 팽개쳐 버리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성장과 돈벌이만 추구하다가 이 나라의 경제는 파탄 났습니다.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건전한 철학과 윤리에 기초해서만 망가진 경제를 치유하고 재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논리만 가지고는 건전한 경제사회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건전한 믿음과 철학과 윤리를 가진 나라만이 건전하고 튼튼한 경제사회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의 민족사, 해방 후 50 여년의 민족사는 파행과 굴절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지난 100년의 굽은 역사 속에서, 불의와 거짓이 지배한 사회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민족의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100년의 민족사 속에서 정신과 사상의 깊이와 넓이에서, 양심과 정의를 위한 순수함에서 그리고 민족과 인류를 위한 사랑과 헌신에서 함석헌님은 민족의 사표가 될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사와 민족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개혁의 철학과 지침을 찾는 이들은 함석헌님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곧게 산 이
함석헌님은 한 마디로 곧게 산 이입니다. 90평생 마음과 생각만이 아니라 몸가짐과 자세도 곧게 지킨 이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석헌님의 구부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함석헌님은 죽을 때까지 꼿꼿하게 걷고 꼿꼿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민주와 민족의 바른 길을 갔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된 첫 해 평안북도 바닷가 사점 마을에서 씨 (민중)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조에서 천대받던 북한에서도 쌍사는 마을이라 일컫던 바닷가 사점 마을에서 양반-쌍놈의 구별 모르고 씨 로 자랐습니다. 씨 (민중)정신, 민주정신이 몸에 밴 그는 신분과 지위의 권위주의를 몰랐습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서구세력과 일제의 군사력이 침략해 오는 난세에 태어났습니다. 민족사의 격변기, 민족의 시련과 고통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민족의 고난을 짊어진 고난의 사람이요, 실패와 좌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평은 지는 놈의 소리요, 짜증은 종의 버릇"이라면서 떳떳이 곧게 살았습니다. 함석헌님은 일본제국주의, 자유당독재정권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90 평생 줄기차게 싸운 이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지고 의로운 싸움을 하면서도 꿋꿋이 푸르게 사신 분입니다. 지난 100년의 굽은 민족사 속에서 한결같이 곧은 길을 가신 함석헌님은 민족사와 민족사회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의 어둡고 초라한 모습이 드러나고 우리의 거짓과 불의가 드러나더라도 우리는 함석헌님의 의로운 삶과 곧은 생각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함석헌님은 나라가 망하고 외세의 지배 아래 살면서 민족의 얼과 혼을 살려 내려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글에 민족의 바른 기운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시들어 가는 민족혼을 살리고 민족의 바른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도 함석헌님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믿음의 사람
함석헌님은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적인 이성과 사고를 앞세우면서도 이성과 사고를 넘어서 신령한 세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과학주의, 기계주의, 물질주의에 빠져 신령한 세계를 잃은 것이 현대문명의 큰 병이라고 보았습니다. 함석헌님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의 행동과 말, 글과 삶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순수하고 철저한 믿음이 있기에 그의 삶과 생각과 행동은 순수하고 철저했습니다. 어려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일본 유학시절에 우찌무라 간조에게서 순수하고 철저한 무교회신앙을 배웠습니다. 유영모님에게서 '나'를 중심에 놓는 신앙자세를 배웠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고 스스로 깨닫고 영적인 체험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직접 체험하고 직접 깨닫는 분이지 남의 말만 듣고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체험하고 깨달은 믿음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비우는 신앙훈련을 통해 곧으면서 겸허한 삶을 살 수 있었고 모진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변절하지 않고 희망과 사랑을 지켰습니다. 굽힐 줄 모르고 줄기차게 싸우면서도 절대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을 지켰습니다. 일제의 군사지배와 해방 후의 군사정권에 맞서 평화주의를 내세우고 평화의 삶과 정신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은 그의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함석헌님의 말과 글이 사람의 혼을 움직이고 늘 생동한 것은 그분의 혼이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강한 힘과 겸허한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믿는 혼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혼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자신의 생명과 혼이 하나님과 통해 있음을 믿고 체험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모든 사람의 뒤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고 사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기에 군사정권의 폭력을 당하면서도 비폭력평화주의를 신봉했습니다. 아무리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씨 의 소리에 마지막으로 쓰신 글의 제목도 "씨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기에 더 깊이 보고 멀리 보고 진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재야인사로서 정치투쟁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에게서 문제의 뿌리를 보았습니다. '나'를 제쳐놓고 남의 탓만을 해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재권력과 맞서 싸웠고 불의하고 부정한 세력을 고발하고 비판했지만 '나'를 문제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모든 문제, 모든 죄의 뿌리는 '나'의 속에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문제입니다. '나'를 문제 삼는 데서 우리는 함석헌님의 믿음과 선생님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함석헌님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 분입니다. 나이가 들고 상황이 어려워서 마음과 몸이 무거워질 때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사람노릇해야지"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것은 속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창조적인 사상가
함석헌님은 봉건왕조가 망해 가고 근대적인 민주국가를 꿈꾸는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종교문화가 만나는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동양과 한국의 전통적인 정신과 문화를 이어받으면서 서구의 근대적인 정신과 문화, 기독교의 신앙과 정신을 충실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민족정신과 사상에 투철하면서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사상과 전망을 가졌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인류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세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영혼의 깊이를 추구하는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사상이면서도 인류와 우주의 삶의 공동체를 꿈꾸는 공동체적 사상입니다. 함석헌님은 참으로 큰 사상가입니다. 그는 동서가 뚫리고 옛과 오늘과 미래가 통하는 씨 의 생명사상을 펼쳤습니다. 한민족의 고유한 사상의 맥을 잇고 동양종교사상의 풍성한 세계를 끌어안고 성서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새 세상을 열어 간 분입니다. 참으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사상을 펼쳤습니다. 동양의 종교사상에서 넉넉하고 자유로운 무위자연 사상과 심오한 깊이와 하나로 꿰뚫린 사상을 얻고 서구의 사상에서 이성적 사고의 주체성과 민주정신, 기독교와 성서에서 예언자적 비판정신과 철저하고 순수한 신앙을 얻었습니다.함석헌님은 자신의 사상을 씨 사상으로 펼쳐냈습니다. 외세와 지배권력에 맞서 "스스로 함"의 주체철학으로서 씨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대자연의 생명을 "스스로 함"으로 갈파했습니다. 씨 은 스스로 하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고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스스로 함을 강조하는 씨 사상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사상입니다. 씨 이 역사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씨 속에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자연이 만납니다. 씨 의 생명활동 속에서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고, 햇빛과 물과 바람과 흙이 어우러지듯이 인간의 삶은 열린 존재요 함께 어우러지는 존재입니다. 씨 사상은 원융무애와 묘합(妙合)의 사상,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생명사상, 성속, 신인, 자연과 역사의 합일사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꿰뚫리고 만나는 통전적이고 유기체적인 사상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이웃을 하나님처럼 섬기라는 동학의 종교사상을 이었습니다. 씨 사상은 참으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사상입니다. 더 나아가 씨 사상은 생태학적 감수성과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사상을 닦아내지 못했습니다. 서세동점의 5백년 역사 속에서, 사대주의와 외래문화가 지배하는 풍토 속에서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밀려나거나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대주의와 외래문화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이끌어 왔으니, 우리의 사상과 철학을 닦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사회의 형성과 사상의 형성이 맞물려 있습니다. 사회의 주도층이 사상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진실하고 주체적인 사상을 추구한 사람들은 짓밟히고 밀려났습니다. 함석헌님은 외세와 외래문화의 지배로 사상과 문화의 주체를 잃은 한국사회에서 참으로 사상과 문화의 주체를 세운 분입니다. 사상과 문화의 주체는 외세와 외래문화의 벽을 뚫고, 거짓과 불의의 벽을 뚫을 때 비로소 생겨납니다. 함석헌님이 우리 철학과 사상을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은 굽은 민족사와 불의한 사회의 벽을 뚫고 민족정신의 알짬을 체득하고 불의한 권력의 억압을 이기고 민중의 삶의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저 불의한 외세와 부정한 권력의 두터운 벽을 깨뜨리지 않고는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하고 주체적인 사상은 곧게 생각하고 바르게 사는 이에게서 나옵니다. 민족주체적 사유, 민중의 삶에 통하는 사유는 민족주체와 민중정의에 투철한 삶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님에게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사상이 나온 것은 당연합니다. 함석헌님은 곧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면서 민족사의 중심에 섰고 민중의 삶의 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 삶에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씨 사상이 닦여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씨 사상이 더욱 돋보입니다. 함석헌님의 씨 사상은 완결되었다기 보다는 사상의 길을 닦고 사상의 토대를 다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흙에 묻힌 옥처럼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과 생각에는 지혜와 사상의 보화가 가득합니다. 그가 남긴 지혜와 생각을 갈고 닦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씨 사상-'스스로 하는 씨 의 생명'
박 재 순 박사
1. 씨 의 은유
씨 은 부와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보통 사람,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 가는 사람들, 民草들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이 은유는 다석 유 영모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함 석헌은 씨 의 은유에 기초하여 민중의 삶과 신앙을 밝히는 씨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씨 의 은유는 그 자체로서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의 깊은 영성을 드러 내고 풀뿌리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인간과 자연을 결합시켜 준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준다. 씨 은 스스로 사는 생명이다. 대자연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씨 은 자발성, 자연스러움 그리고 자유로움을 지닌 생명이다. 自然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있는 생명을 드러내고 自由란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는 생명을 나타낸다. 씨 은 자신 안에 생명의 능력을 품고 있으므로 스스로 싹을 내고 자라고 꽃을 피고 열매를 맺는다. 억지로 싹을 트게 할 수 없고 총칼로 위협해서 꽃을 피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함을 본질로 하는 씨 은 평화적이다.씨 은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수 십 억 년을 이어 온 생명이 씨 하나 속에 담겨 있다. 또한 이 생명은 이 씨 을 통해 수 천 수 만의 씨 들 안에서 펼쳐질 영원한 미래의 생명에로 이어진다. 씨 은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하나의 씨 안에 나무 전체가 들어 있다. 한 알의 씨 속에 수 많은 씨 들과 꽃들과 열매들 그리고 잎사귀와 가지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수 많은 씨 이 달려 있다. 이처럼 전체 속에 개체가 있고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 씨 은 평등하다. 남 위에서려고 하지 않는다. 금상자나 은상자에 담긴 씨 은 결코 생명을 꽃피울 수 없다. 바닥에 섬으로써 민주적으로 자기를 실현한다. 모두 땅 바닥에 흙 속에 묻혀야 생명 을 꽃 피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생명을 펼치는 씨 은 민주적, 민중적이다. 씨 은 더불어 산다. 흙과 물과 바람과 햋빛과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명을 창조하고 꽃 피운다. 씨 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조화를 이루며 다양하고 신명나는 삶을 산다.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한데 어우러져 신명을 내는 씨 은 다른 생명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이다.씨 은 죽음으로 사는 생명의 도리를 보여 준다. 자기를 깨뜨리고 죽임으로써 보다 풍성한 새 생명으로 태어 난다. 씨 은 어리숙해 보이나 알차다. 겉보기에 작고 초라해도 그 안에 참된 생명을 품고 있다. 얇은 껍질을 쓰고 있지만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나쁜 세력의 침투를 막아 내고 수 천년 동안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온갖 시련과 풍파를 이겨 내고 생명을 꽃피운다. 풀이나 나무의 씨 은 소나 말의 뱃 속을 통과해서도 새 생명을 피울 수 있다. 얇은 껍질 하나로 모든 추위와 시련을 이긴다. 얇은 껍질로 생명을 잘 지키지만, 자기의 생명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벗을 수 있다.
2. 사람: 역사와 사회의 씨
씨 의 은유에 기초해서 함석헌은 역사와 사회의 씨 인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스스로 애쓰는 미완의 존재.
역사와 사회의 씨 인 사람은 '스스로 하는' 신적 생명을 지닌 존재,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애쓰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생명의 씨 인 사람은 스스로 하는 생명이다. 사람은 기계적으로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애씀으로써만 사람이 되는 존재다. 씨 속에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듯이 사람 속에 무한, 거룩, 초월, 절대의 신적 생명이 있다. 그러나 씨 이 개체로서는 작고 유한하듯이 사람도 개체로서는 작고 유한하다. 씨 이 자신을 깨뜨리고 버림으로써 생명을 싹티우듯이, 사람도 자신을 깨뜨리고 버림으로써 신적 생명에 이를 수 있다.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잇닿은 미완성의 존재로서 끊임없이 되어 가는 존재이다. 자기 속에 있는 신적 생명을 깨닫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씨 은 '하는' 존재이면서 '되는' 존재이다.
2) 역사와 사회의 참된 씨 .
사람은 역사와 사회의 씨 이다. 씨 이 스스로 생명을 펼치듯이 사람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스스로 삶을 펼쳐 가는 자주적 존재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억압과 수탈과 소외의 역사와 사회의 그 밑바닥에서도 씨 들인 민중들은 자신들의 삶을 강인하게 살아 내고, 역사와 사회의 온갖 무거운 짐을 지탱하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지켜 왔다. 왕과 양반들은 사대주의에 빠지고 게으르고 부패하고 나약해지기 쉬웠으나 이 땅의 민초들은 민족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외적에 맞서 이 땅을 지키며 굳세게 살아 왔다. 참으로 한국적인 정신과 문화는 민중 속에 살아 있다. 민족사는 이 땅의 씨 들에 의해 유지되고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역사의 모순과 질곡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씨 이 역사변혁의 동력이다. 그러므로 씨 은 민족사의 담지자이고 창조적 주체이다.
3) 민주-민중-공동체적 존재.
씨 은 민주적이다. 맨 밑바닥에 서야 싹을 낸다. 민중들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자연의 씨 들이 땅바닥에서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듯이, 씨 은 밑바닥 존재이면서 자연, 세상, 역사에 대해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한다. 씨 은 소유하거나 독점하지 않고 청지기적 공동체적 책임을 진다. 지배 엘리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지만, 씨 들은 전쟁의 일차적 희생자이면서 폐허를 딛고 생명을 가꾸고 건설한다. 자연의 씨 들이 땅 바닥에 서고 땅 속에 묻혀야 새 생명이 싹트듯이, 이름없는 씨 들인 사람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초월적인 무한생명을 품고 새 역사, 새 세상을 창조하는 주체이다. 씨 이 금상자나 은쟁반 위에서 생명을 꽃피지 못하듯이, 사람도 남을 짓밟고 올라 서서는 참된 사람됨을 이룰 수 없다.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 설 때 신명나는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사람도 낮은 자리에서 서로 손잡고 어우러질 때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을 이룰 수 있다. 씨 은 다른 씨 위에 서서는 생명을 피울 수 없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고 다른 씨 들과 함께 세상을 다양하고 아름다운 생명동산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이며 땅바닥에 흙 속에 묻혀서 생명을 피운다는 점에서는 민중적이다. 씨 들의 스스로 하는 마음과 삶이 풀뿌리민주주의의 기초이다.
4) 역사적 존재.
씨 은 수 십 억년 동안 이어 오고 앞으로 수 억 만년을 이어 갈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매체이듯이 역사의 씨 인 사람은 오 천년 민족사를 지닌 존재이다. 민족사의 아픔과 설움, 기쁨과 바른 기운이 역사의 씨 인 사람 속에 담겨 있다. 씨 은 철저히 역사적 존재다. 역사의 모든 갈등과 모순, 더러움을 안고 있으면서 역사의 모든 위대한 전통과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씨 하나에서 이 오랜 생명의 역사가 판가름 난다. 씨 한 사람이 바로 되면 역사가 바로 되고 씨 한 사람이 잘못 되면 역사가 잘못된다. 씨 한 사람을 통해 역사는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씨 에게서 미래는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5) 개체 안에 담긴 전체.
사회의 씨 인 사람은 개체 안에 공동체 전체를 담고 있다. 사람은 결코 고립된 실체가 아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신 존재로서 남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존재면서, 사회 전체가 반영된 존재, 사회적 관계의 종합이다. 사람 안에 있는 신적 생명은 남이 대신할 수 없고 자기 자신만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영혼은 하나밖에 없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생명은 모든 씨 속에 살아서 모든 씨 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힘이고 띠이다. 사람에게 죄와 악은 공동체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고 사랑과 의, 선과 아름다움은 씨 사이에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신적 생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6) 죽음으로 사는 진리, 고통의 감수성.
고난과 시련 속에 사는 씨 은 십자가의 고난을 아는 능력이 있다. 죽음으로 사는 도리를 깨우치는 존재다. 자연의 씨 이 작은 자아의 죽음으로써 큰 자아의 생명으로 살아나듯이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적 삶, 사람다운 삶을 이룬다. 아픔은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아픔은 생명의 깊이를 드러낸다. 신체적 단련은 극기를 필요로 한다. 쾌락주의, 감각주의는 삶을 1차원적으로 천박하게 만든다. 동양과 한국은 종교적으로 신체적 단련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픔에 대한 감수성은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모든 고등종교의 핵심적 가르침에 속한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고 불교는 대자대비, 동체대비를 말하며 유교는 측은지심을 말한다. 모두 남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을 강조한다.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고통을 몸으로 겪는 민중은 고난과 恨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감수성은 깊은 종교적 영성을 드러 낸다. 남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공동체의 토대이다.
7) 알차고 굳센 생명.
씨 은 얇은 껍질 하나로 자신을 지키고 모든 추위와 시련을 이기듯이 참 생명의 씨 인 사람은 부와 권력, 지위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과 몸 하나만으로 생명을 지키고 모든 시련을 이긴다. 나쁜 균이나 영향으로부터 씨 을 보호하지만 생명을 위해서는 언제나 녹아지는 껍질이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 함부로 자기를 내놓지 않는 신중함이 있으나 진솔하다. 씨 은 굳세면서도 부드럽다. 수 십억 년 생명의 담지자인 씨 은 껍질만 온전하면 수 천만년을 지나도 살아 있다.
8) 씨 의 두 얼굴.
인간 씨 은 인간진화의 높은 생명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다. 수 십 억 년 생명 진화의 맨 끝에 인간이 서 있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 인간 생명은 실존적이다. 인간에게는 추락의 가능성과 상승의 가능성이 있다. 혼돈과 허무와 어둠의 나락에로 추락하면 악마의 얼굴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 정의와 아름다움의 생명에로 상승하면 신의 얼굴을 하고 신의 자녀가 된다.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크고 거룩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이런 가능성 앞에서 결단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위험한 결단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9) 인간실존의 깊은 자기중심성.
다른 짐승들은 종족적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아에 깊이 매여 있다. 생명의 깊은 데서 이루어지는 자기와의 싸움이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든다. 자기에게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도덕과 신앙이 요청된다. 신의 은총과 사랑으로 마음을 열 수 있다.
10) 창조적 삶.
씨 은 자기를 열고 물, 흙, 공기, 햇빛을 받아 들이는 생명의 창조자이다. 씨 이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을 받아 들이고 그것들과 한데 어울려 우주적 생명을 꽃피고 노래하듯이 우주적 생명의 씨 인 사람도 사람은 대자연의 생명, 우주적 삶과 합일하는 전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연과 어우러지고 자연에 감응하는 존재여야 한다. 창조적 삶을 사는 존재여야 한다. 역사와 사회,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삶을 이웃과 더불어 아름답게 창조하는 존재이다.
3. ㅅ -'스스로 하는 생명'
1) 삶과 사상의 원리
함 석헌의 삶과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스스로 함'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공산정권의 압제와 자유당 독재를 거쳐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90 평생을 '스스로 하는 정신'을 가지고 독재정권과 싸워 왔다. 그의 불굴의 투혼과 자유혼은 '스스로 함'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 함'의 원리는 모든 압제와 간섭을 거부하는 정신적 실천적 근거였다. 함 석헌의 ㅅ 사상의 원리도 '스스로 함'이다. '스스로 함'은 대자연의 생명의 원리일 뿐 아니라 인간과 역사의 근본원리이고 신앙과 종교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도 '스스로 하는 정신'으로 파악한다. '스스로 함'은 자연과 인간과 역사와 하나님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원리이고 삶과 사상을 통합하는 원리이기도 했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일제의 군국주의적 통치와 자유당과 군사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사상일 뿐 아니라 사대주의에 빠진 지배층의 나약한 민족정신을 쇄신하고 오랜 민족사의 시련 속에서 민족의 얼을 지켜 온 민중의 자주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사상이다.
2) 사상적 배경과 현대적 의미
(1) 사상적 배경
'스스로 함'을 기초로 한 씨 사상의 배경과 현대적 의미를 살펴 보자. 우선 '스스로 함'의 사상은 동양의 종교사상에 바탕을 둔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는 모두 스스로 함을 추구한다. 첫째 유교의 근본 가르침이 스스로 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도 수신(修身)에서 출발하는 데, 수신은 자신의 덕을 닦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세우고 스스로 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중용에서는 "성실한 것은 하늘의 道다. 성실하여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道다"고 함으로써 성(誠)을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통합하는 원리로 보았다. 성(誠)은 인간에게 주어 본래의 바탕을 갈고 닦아 그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하늘의 도와 인간의 도에 부합하자는 것이다. 성(誠)은 스스로 이룸이라 했다. 중용에 또 이런 말이 나온다. "오직 천하의 지극히 성실한 사람만이 자기의 성(性:본성)을 다 발휘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 발휘할 수 있으면 남의 성을 다 발휘시킬 수 있다. 남의 성을 다 발휘시킬 수 있으면 만물의 성을 다 발휘시킬 수 있다. 만물의 성을 다 발휘시킬 수 있으면 하늘과 땅이 변화시키고 육성시키는 일을 돕게 될 것이고 하늘과 땅이 변화시키고 육성시키는 일을 돕게 된다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대등하게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실한 인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대등하게 참여한다"는 말은 인간의 주체성을 우주적으로 강조한다. 유교에서 성실함은 하늘과 땅과 인간을 통합하는 원리이고 인간의 본성과 참된 사회적 관계를 실현하는 원리이다. 유교의 誠은 ㅅ 사상의 '스스로 함'과 거의 같은 말이다. 둘째 불교의 참선(參禪)도 마음의 자유를 추구한다. 해탈이란 덧없는 물질세계에 대한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 자유하는 마음, 스스로 하는 정신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의존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 마음은 생각과 행동의 참된 주체가 될 수 있다. 마음의 본질은 물질세계의 부림을 당하는데서 벗어나 물질세계의 주인노릇을 하는데 있다. 세째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 거짓된 인위적 삶과 강제와 간섭을 거부하고 대자연의 생명이나 인간존재의 근본바탕과 통하는 삶, 참된 의미에서 스스로 하는 삶을 뜻한다. 자연에 충실하게 노동하며 사는 ㅅ 들에게 인위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거나 그런 ㅅ 들을 압제하고 수탈하며 못 살게 구는 지배특권층에 대한 저항이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에 담겨 있다. 한 마디로 ㅅ 들의 스스로 하는 삶에 맡겨 두라는 것이다. 함 석헌의 스스로 함은 유교의 성(誠)을 받아들이나 군자보다는 ㅅ 에 초점을 두고 불교의 자유로운 마음을 받아들이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고 도교의 무위자연을 받아들이나 인간의 적극적 주체성과 저항을 강조한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서구의 계몽주의정신을 받아들인 사상이다. 서구문화사에서 중세봉건사회는 신분적 예속과 타율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나 계몽주의는 모든 예속과 타율을 거부하고 이성의 자주적 사용을 추구했다. 계몽주의의 이념은 성숙한 인간에 있고 성숙한 인간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인간이다. 모든 타율적 지배와 맹목적 신앙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계몽주의의 표어였다. 모든 전통과 초월적 신앙에 대한 이성적 비판과 거부,
인간의 주체성과
자주성확립이 서구계몽주의의 목표였다. 한국사회는 외형적으로는 급격히 산업화되어 시민사회적 모습을 갖추었으나 한국인의 의식은 여전히 봉건적인 권위주의와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감정, 신화적 세계관에 기초한 근본주의신앙에 사로 잡혀 있다. 따라서 계몽주의적인 이성의 비판정신이 요청된다.
동양종교사상의 근본가르침과 서구현대사상의 기본정신을 받아들여 '스스로 함'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2) 현대산업문명과 '스스로 함'의 의미
함 석헌은 이성의 자유를 신봉하고 인간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구계몽주의를 계승한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함께 발달한 기계기술문명, 산업사회는 양면성을 지닌다. 우선 현대산업문명의 적극적인 측면을 생각하자. 산업기술문명은 엄청난 물질적 부와 능력을 가져다 주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풍요와 힘을 주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영역이 획기적으로 확대되었다. 예전에는 자연을 따르거나 하나님께 맡기거나 전통적 권위와 규범, 전통적 관습에 의존하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그 영향이 작고 미미했다. 그러나 오늘에는 인간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의 결과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생명과 존재를 바꿔 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구와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파멸시킬 수 있다. 유전공학 분야에서 군사정치경제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영역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남성을 여성으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는 문제, 생명의 유전자정보내용을 바꾸는 문제, 핵무기의 제조와 사용에 관한 문제, 공해산업의 문제 등,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적으로 행동해야 할 문제가 갈 수록 늘어난다. 뇌사판정문제와 낙태문제도 당장 결정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이다. 전통적 윤리, 철학, 신앙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처할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철학과 윤리와 신앙이 요청된다. 이제 더 이상 자연과 본능, 전통적 규범과 관습, 신적 권위에 맡기고 살 수 없다. 오늘의 사회는 성숙한 사회, 주체적 사회, 책임적 사회다. 여기서 '스스로 함'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서구문명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서구의 산업기술문명은 기계에 의존하여 물질적 생산의 증대를 추구함으로써 물질과 기계에 예속될 위험에 빠졌다. 초월과 신앙, 영혼(마음)의 세계를 부정하는 세속주의, 인본적 자율주의에 빠진 것이다. 영혼과 마음의 세계를 무시하고 물질과 기계에 예속되는 것은 스스로 함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기계는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고 물질은 물질적인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다. 기계의 '저절로'와 물질적 법칙주의는 '스스로 함'과 대립된다. 그래서 함 석헌은 기계문명이 발달할 수록 마음은 얕아지고 황폐해진다고 보았다. 단순한 이성의 자주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자주, 하나님과 맞닿은 신앙적 자주를 추구하는 ㅅ 사상은 현대과학문명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3) 씨 사상의 핵심
앞에서 말했듯이 함 석헌은 대자연의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으로 본다. 自然이란 말 자체가 '스스로 함'을 나타낸다.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저급한 생명체에서 인간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원리는 스스로 함에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 자체가 '스스로 함'을 통해 발전되었다. 물고기의 유연한 몸놀림, 들꽃의 아름다움은 스스로 함의 표현이다. 들꽃이 푸른 잎과 아름다운 꽃봉우리를 피우기 위해서는 수 십 억 년 동안의 외로운 몸짓이 있었고 물고기 한 마리가 유연하고 날렵한 몸놀림을 하기 위해서는 수 억 년 동안의 서툰 몸부림이 있어야 했다. 함 석헌은 어느 가을날 메뚜기 한 마리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밟혀 망가진 밑구멍으로 혼신을 다해 알 낳는 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다른 메뚜기는 수 십, 수 백 마리의 새끼를 낳았지만 이 메뚜기는 수 천만, 수 억 마리의 새끼를 영원한 하늘에 낳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 아닌 다른 동물과 식물의 생명은 주어진 본성에 충실하다. 또한 생명 진화의 역사는 '스스로 함'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였다. 저급한 단계의 생명일 수록 물질적 법칙과 환경적 조건에 직접 지배된다. 고급한 단계의 생명일 수록 '스스로 함'의 영역이 확대되고 심화된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은 가장 순수하고 높은 형태의 '스스로 함'이다. 그러나 인간의 '스스로 함'은 '본능적인 스스로 함'이 아니다. 영혼과 마음의 본질은 모든 물질적 법칙과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데 있고 본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런 자유 때문에 인간은 절대와 무한과 초월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애써야' 한다.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 '스스로 하는 존재'이고 '스스로 해야 할 존재'이다. ㅅ 사상은 마음에 집중한다. 함 석헌은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렸다고 본다. 이것은 물질적 현실을 무시하는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와는 전혀 다르다. 마음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동양사상에서 마음은 물질적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인격적 결단과 실천의 주체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다. 함 석헌이 모든 사회정치적 문제의 뿌리를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내 마음을 가리킨다. 마음은 하나님과 닿아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의 깊은 바닥에 그리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다. 함 석헌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도 '스스로 하는 정신'이다. 하나님도 '되는 이, 될 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 석헌은 하나님도 미완성의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율적으로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는 정신'이 되게 하고 자유와 자주의 삶에로 해방하는 존재이다. 아니, '스스로 하는 정신'인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스스로 하는 주체'로 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주체'는 자명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를 일깨우고 채찍질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단순한 인본적 주체성, 인본적 자율성이 아니다. '스스로 함'은 자기해방을 전제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함으로써 자기해방에 이르고 이기적 자아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스스로 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 속한다. 이로써 '스스로 하는 인간적 노력'과 '자아의 집착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신적 은총'이 결합된다. 사람은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다. 사람은 되는 존재요 되어야 할 존재다. 함 석헌은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사람 되어야지" 하며 스스로를 일깨우고 스스로를 세웠던 분이다. 인간은 '스스로 함'으로써 인간이 될 뿐 아니라 절대와 무한과 초월의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존재이다. '스스로 함'의 삶은 자기집착을 끊고 자기안주를 떨쳐 버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세우며 자기를 해방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함'의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를 세우는 과정 속에 있다. '스스로 함'의 주체는 개인주의적 주체가 아니다. 함 석헌에게 있어서 모든 생각과 실천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그러나 그 '나'는 하나님과 연결된 '나'이다. 함 석헌은 하나님을 '전체'로 파악한다. '스스로 함'은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결합된 자아, 즉 공동체적, 전체적 자아로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있다고 보고 인간과 하나님의 본질을 스스로 함으로 파악함으로써 함 석헌은 인간에 대한 모든 물리적 강제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과 닿아 있으므로 자기 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열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폭력적 강요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닫게 한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그 악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役事)하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함 석헌은 절대적 평화사상에 이른다. 그러나 바로 같은 이유에서 '나 자신'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강요도 있을 수 없다. 나 속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나에 대한 물리적 지배와 강요는 하나님에 대한 지배와 강요가 된다. 따라서 함 석헌은 모든 독재와 강제에 대해 비타협적 저항에 이른다. 그에게 있어 삶의 원리는 스스로 함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모든 간섭과 억압에 대한 싸움이다. 철저한 평화주의와 비타협적 투쟁사상이 ㅅ 사상 안에 결합되어 있다. 마음을 '스스로 함'의 주체로 보았다면 마음의 일차적 기능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과 통하고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 함 석헌은 마음의 일차적 기능을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으로 본다. 마음은 물론 느낌의 주체이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적 기능은 생각하는데 있다. 함 석헌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것이 생각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숨쉬고 피가 도는 생리적 활동은 내 뜻과 무관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회정치적 활동은 외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참된 의미에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위이고 저절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함의 주체인 마음과 정신은 생각할 때 살아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죽는다.
여기서 생각은 사변적인 생각이 아니다. 물론 이성적 차원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으로 영적 차원을 포함한다. 감정이 본능과 결부되어 있다면 영은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 이성은 본능과 영 사이에 끼어 있다. 본능은 강력한 힘으로 이성을 사로 잡으려 한다. 그러나 이성의 본분은 본능의 힘에서 벗어나 영에게 봉사하는데 있다. 함 석헌에 따르면 이성이 제 능력과 자유를 온전히 발휘할 때 비로소 이은 영에게 봉사할 수 있다. 함 석헌은 이성과 영의 이런 관계를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으로 표현한다. '하는 생각'은 이성적 주체적 사고를 나타내고 '나는 생각'은 영감(靈感:inspiration)을 나타낸다. 생각을 철저히 해야 영감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함'의 이성적, 도덕적, 영적 주체가 확립된다.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ㅅ 은 스스로 함의 전형이다. 역사의 ㅅ 인 ㅅ 들을 민초라고 하는데 들풀은 스스로 살아가는 ㅅ 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10 여 년 전 교도소에서 시멘트 담벽의 틈새에 피어난 풀꽃들을 본 일이 있다. 바람에 날려 온 흙먼지 위에 바람에 날려 온 들꽃 씨앗이 싹을 내고 꽃과 푸른 잎을 피워 낸 것이다. 하수도 옆에 핀 무성한 잡초들은 자살이나 좌절을 모르고 굳세게 산다. 악조건 속에서 더러운 하수도 옆에서 성실하고 굳세게 사는 들꽃과 잡초는 역사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그리고 사회의 더러운 시궁창 속에서 힘 있게 사는 ㅅ 의 삶을 나타낸다. ㅅ 은 스스로 함으로 산다. 가진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마음 밖에 없다. 사랑하고 저항하고 연대하는 능력 밖에 없는 ㅅ 은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 ㅅ 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스스로 생산하고 건설함으로써 인류의 삶을 지탱해 온 역사의 참된 주체였다. 이에 반해 지배특권층은 물리적 힘 다시 말해 돈과 권력에 의지하는 자들이고 밑바닥 ㅅ 들의 삶에 기대어 사는 의존적 존재들이다. 역사발전의 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스스로 하는 ㅅ 이 유한계급, 지배계급의 압제와 타율적 지배를 깨뜨리고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역사다. 돈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구도적 자세이고 종교적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오 천년 역사의 시련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 온 민중적 삶의 모습이다. ㅅ 이 스스로를 구원해 간다는 것은 이미 종교적, 신앙적 차원을 지녔다. ㅅ 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차원을 가진다. 만일 돈과 권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서로를 받아 줄 마음과 서로를 잡아 줄 손 밖에 없는 ㅅ 들이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라면 세상에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다. 사랑과 정의를 믿는 마음밖에 가진 게 없는 ㅅ 들이 돈과 권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불의한 폭력을 이긴다는 믿음은 역사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ㅅ 이 스스로를 구원해 간다는 주장은 서구의 정통적 구원론에 대한 도전이며 수정이다. 정통신앙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이며 인간은 수동적 위치에 있다. 함 석헌은 <흰 손>이라는 詩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효력이 있으려면 내 손바닥에서도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함 석헌은 한국의 민족사에 적용한다. 세계인류의 죄짐을 지고 고난받는 한국민족, 강대국의 침략과 약탈과 압제로 신음하며 강대국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고통을 당하는 한국민족이 그 고난의 사슬을 끊고 스스로 일어서면 세계평화 세계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이것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결론이었다. 함 석헌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중구원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고난받는 ㅅ 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고난받는 한국ㅅ 들이 예수라는 아기를 잉태하고 그 아기를 낳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고난받는 ㅅ 들이 메시아 공동체를 낳는 주체라는 것이다. '스스로 함'의 원리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세상을 지향한다. 역사는 ㅅ 들의 스스로 하는 삶을 통해 지탱되고 스스로 하는 싸움을 통해 진전된다. 역사의 참된 주체인 ㅅ 은 스스로 사는 표본이다. 지배층은 의존해 사는 표본이다. 유한계급 다시 말해 스스로 하지 않는 계급은 불평등사회, 더불어 살지 않는 사회를 요구한다. 스스로 하는 삶은 더불어 삶의 전제이다. 착취와 억압없는 삶이다. 스스로 함은 개인적 주체성이 아니라 공동체 형성을 지향한다. 역사는 '스스로 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스스로 하는' ㅅ 들에 대한 압제와 수탈을 타파하고 스스로 함을 실현하는 역사다. 역사는 '스스로 함'을 실현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 넘치는 공동체 세상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이제까지 ㅅ 사상을 '스스로 함'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인간과 하나님을 직결시킨다는 점에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통한다. 그리고 ㅅ 을 역사적 구원의 주체로 본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구원론에로 이어진다. 또한 북한의 주체사상이 정치사회적 영역에 집중하고 있지만 주체사상과 '스스로 함'의 사상은 인간의 자주성을 사상적 원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하고 밑바닥 ㅅ 들을 하늘나라의 주인으로 선언한 예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가난하고 소외된 ㅅ 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불러 세우고, 병자들을 치유하여 '스스로 하는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민중자주화운동이었다. 함 석헌의 ㅅ 사상도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ㅅ 들의 자주적 주체성을 선언하고 추구한다. 이 점에서 '스스로 함'의 사상은 예수운동에 대한 한국적 해석이다.
4) '스스로 함'과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
오늘 인류사회의 한쪽에서는 생산기술의 발달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참담한 물질적 빈곤 속에서 굶어 죽고 있다. 이것은 현대문명의 도덕적 영적 수준을 극적으로 말해 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강요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물질의 결핍과 물질에의 예속은 현대사회의 도덕적 영적 빈곤을 드러낸다. 유흥가와 텔레비전이 뿜어내는 현란한 색채의 물질주의에 사로 잡힌 현대인의 마음은 무력하며 서로에게 닫혀 있고 흉폭하다. 다국적 기업과 재벌기업들이 주도하는 상업적 물질적 대중주의에 파묻힌 현대인은 도덕적 영적 자아를 상실했다. 현대인은 기계없는 물질적 빈곤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기계와 물질에의 예속에서 벗어나 기계와 물질의 참된 주인으로서 도덕적 영적 자아를 회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현대인이 기계와 물질의 주인으로서 도덕적 영적 자아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오늘의 상황에서 새로운 공동체적 전망을 줄 수 있다. 오늘의 사회주의사회와 자본주의사회는 모두 공동체 사회를 이루는데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가 모두 물질주의를 사회적 발전의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사회주의사회는 물질적 생산력을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사회는 자연과 동료인간을 착취하고 파괴함으로써 자연과 동료인간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사회주의사회는 인간의 깊은 내면적 동기를 무시하고 집단적으로 물질적 생산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적 활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사회 이상으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했다.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현대인의 절박한 과제이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가 오늘의 철학의 중심 문제라고 말한다. 생태학적 금욕을 통해서 우리는 자아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자연생태계와의 화해에 이를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사회와 자본주의사회는 모두 ㅅ 들의 자발적 주체성과 참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사회주의 사회의 실패는 법과 제도와 이념의 실패라기보다는 ㅅ 들의 자발적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ㅅ 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한데 있다. 또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도 ㅅ 들을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소외시킴으로써 부패와 타락에 빠지고 인간상실과 공동체적 기초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스스로 하는 ㅅ 들의 사회정치적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데 있다. 오늘의 세계사적 상황에서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전망은 사회주의사회와 자본주의사회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ㅅ 들의 주체성 확립과 주체적 참여가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ㅅ 들의 역사적 사회적 주체성은 정치사회적 노력만으로 확립될 수 없다.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ㅅ 들의 자발적 주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중국의 문화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북한의 주체사상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ㅅ 들의 주체성은 보다 깊은 자리에서, 도덕적 영적 자리에서 확립되어야 한다. '스스로 함'의 사상은 ㅅ 들의 주체성을 보다 깊은 자리에서 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함'의 사상은 물질적 욕망에 대한 마음의 자유를 추구하고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로 통하는, 조화롭고 온전한 삶에 이르는 길을 시사해 준다.
씨앗에 대한 민중신학적 성찰
박 재 순 박사
오랫동안 한국의 민중신학은 억압받고 수탈 당하고 소외된 민중의 사회 정치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힘썼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민중은 사회경제 문화적 고통 속에 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민중이 스스로 일어서서 운명을 쇄신해 가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과제가 중요해졌다. 민중의 내면과 주체적 영적 차원이 중요해진 것이다. 민중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 속에서의 집단이면서 구체적인 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서의 민중을 외면하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민중만을 말하면 민중을 추상화하고 관념화하게 된다. 민중의 주체적 영적 차원을 밝히는 일은 민중 한 사람의 삶이 집단적 사회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구체적인 한 사람의 내적, 영적 차원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비유했고 스스로 씨앗의 삶을 살았다. 땅에서 떨어져 죽어서 많은 결실을 맺는 밀알처럼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쳐서 인류상생의 길을 열었다. 예수는 자신을 비우고 버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열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 우주적 삶의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인 한 사람(잃은 양 한 마리)에 집중했다. 예수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빛 속에서 구체적인 한 사람을 치유하고 돌봄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쇄신하는 운동이었다. 예수운동을 오늘 펼치기 위해서 정치경제적 구조와 사회문화적 억압을 깨뜨릴 뿐 아니라 민중의 영성을 쇄신해야 한다. 오늘의 전지구적 생태학적 위기 앞에서 그리고 지구화되는 산업문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안과 밖, 개체와 전체가 구별 없이 서로 얽히고 통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미 내 속에 사회의 모순과 악이 침투해 있고 악마적인 사회문화의 원리와 힘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또한우리 각자의 자기중심적 욕망과 지배욕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악화시킨다. 씨앗은 민중의 개체성과 전체성을 드러내는 적절한 은유이다. 씨앗 한 알속에 수 십억 년 이어 온 생명이 응축되어 있고 씨앗 한 알속에 꽃과 열매, 잎과 줄기의 싹이 담겨 있다. 씨앗은 스스로 자라는 존재이고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의 어울림을 통해 우주적 생명을 펼친다. 씨앗은 민중의 영성적 깊이와 우주적 생명의 조화와 일치를 드러낸다. 씨앗은 민중의 자발성, 주체적 영성적 차원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민중적 삶의 생태학적 차원을 밝혀 준다. 씨앗의 은유를 통해 민중의 주체적 영성을 밝히고 서로 살림의 생태학적 차원을 강조할 수 있다. 또한 씨앗은 체제와 구조의 악마적 죄성을 고발하는 효과적인 은유이다. 어떤 기득권이나 체제와 제도의 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펼쳐 가는 민중의 자주적이고 고유한 삶의 힘과 지혜를 씨앗은 보여 준다. 그리하여 씨앗은 체제와 제도의 굴레에 매인 민중으로 하여금 체제와 제도를 넘어서 자유와 평등의 삶을 펼쳐 갈 힘과 지혜를 보여 준다..
씨앗과 꽃과 인간의 이야기
5억 년 전에 오존층이 완성되고 지상에 처음으로 겉씨 식물이 생겨나고 10m 넘는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었다. 3억년 전에 몸길이 60cm밖에 안 되는 공룡이 엄청난 식욕을 가지고 나뭇잎을 먹어대서 몸길이 50m까지 자랐다. 긴 목과 작은 머리와 엉성한 이빨을 지닌 거대한 공룡들은 겉씨 식물이 주종을 이루는 거대한 숲의 파괴자였다. 겉씨 식물인 침엽수림이 파괴되면서 꽃과 열매를 지닌 속씨 식물이 생겨났다. 꽃과 열매, 꽃가루와 꿀은 충과 포유류와의 공생관계를 위한 미끼이고 노력이다. 꽃가루와 열매와 꿀을 주고 아름다운 색깔과 자태를 지님으로써 속씨 식물들은 곤충들 특히 포유류를 끌어들이고 이 동물들에게 맛나고 좋은 먹거리를 주고 자신의 씨앗을 전파하게 했다. 곤충과 포유류를 통해 속씨식물들은 빠르고 다양하고 넓게 퍼졌다. 파괴자 공룡은 겉씨식물이 꽃과 열매를 지닌 속씨식물로 대체되자 적응 못하고 소멸해 갔다. 6,500만년 전에 지름 10km의 운석이 충돌해서 먼지 때문에 긴 겨울이 와서 공룡은 멸절했다. 포유류는 속씨 식물과 공생하면서 빠르게 진화하고 번식했고, 영양이 풍부한 열매를 먹고 지구적 재난의 긴 겨울을 이겨냈다. 꽃의 아름다움과 열매와 꿀은 공생하려는 생명의 의지에서 나왔다. 꽃의 아름다움, 열매와 꿀의 달콤함은 상생을 위한 것이다. 꽃의 아름다운 자태, 다채로운 빛깔, 다양한 모습은 상생에로의 부름이며 더불어 살려는 생명, 더불어 살려는 조물주의 아름다운 의지이다. 1 만 1천년 년 전에 북미대륙의 얼음물이 바다로 퍼져 다시 기온이 내려갔고, 숲과 초원이 줄자 식량위기를 맞은 인간들이 추위를 이기는 야생 밀을 발견하여 농사를 시작했다. 씨앗으로 농사를 지음으로써 인구는 급증하고 오늘의 문명사회를 이루었다.
2. 민중: 역사와 사회의 씨앗
1) 씨앗의 은유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온갖 설움과 恨(Han)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 온 민중을 함석헌은 씨앗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씨앗 속에 수십억 년의 생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씨앗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무한히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꽃씨 하나에 수십억 년 동안 피고 졌던 꽃나무들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이 꽃씨 하나를 통해 앞으로 수천 수만의 꽃나무들이 피고 질 수 있다. 따라서 씨앗은 영원무궁한 우주적 생명의 응축이다. 씨앗처럼 민중은 영원한 생명의 담지자다. 민중의 한많은 가슴 속에 오천 년 민족사의 설움과 염원이 쌓여 있고 앞으로도 민중의 삶을 통해 한민족의 삶이 무한히 전개될 것이다. 씨앗은 자신 안에 생명의 힘과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스스로 싹을 틔우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꽃과 열매를 맺는 자발적 생명의 표본이다. 생명활동의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씨앗은 언제 어디서나 생명을 꽃피울 수 있다. 물리적 힘과 법의 명령에 의해 씨앗의 생명활동을 강요할 수 없다. 총칼의 힘으로 꽃을 피울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중은 역사적 사회적 삶의 무한한 힘과 지혜를 지닌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다. 민중은 자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이다. 씨앗은 흙에 떨어져서만 다시 말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생명활동을 할 수 있다. 씨앗은 남을 딛고 서서는 싹을 틔울 수 없다. 금과 은으로 된 귀한 상자 속에서는 생명의 노래와 춤을 시작할 수 없다. 땅에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을 열고 아름다운 생명을 꽃피울 수 있다. 그리고 씨앗의 모습 자체가 둥근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한 점만 있으면 설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중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름도 지위도 없이 민족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의 삶을 꽃피우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민중이 높은 지위를 탐할 때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버리고 다른 민중을 배신하게 된다. 씨앗이 흙에 떨어져 대지의 주인이 되듯이, 민중은 스스로 바닥에 섬으로써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 된다. 씨앗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풍성한 생명을 꽃피운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하나의 씨앗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써 풍성한 삶을 사는 씨앗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위대한 삶이 약속된다는 삶의 원칙과 '나'를 희생함으로써 이웃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사회적 삶의 도리를 보여 준다. 민중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난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 왔다. 민중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한민족의 삶은 정화되고 풍성해졌다. 민중은 오천 년 민족사 속에서 "죽어서 사는 도리"를 체득한 셈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예수가 인류 전체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음으로써 인류의 메시아가 되었듯이 민중도 민족과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감으로써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 하나의 씨앗 속에 전체 생명이 담겨 있으며 전체 생명의 뿌리에서 하나 하나의 씨앗이 생겨난다. 씨앗은 전체와 개체의 상호동속성을 잘 보여 준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하나의 인간 속에 우주생명(인류생명)의 중심인 하나님이 내재해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직결시킴으로써 한 인간과 사회 전체가 직결된다. 한 인간의 선행이나 범죄는 단순히 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전체 사회가 관련된 행위이고, 전체 사회의 미래는 구체적인 개인의 생각과 실천에 달려 있다. 씨앗은 제 모습을 지키기만 하면 수 천년이 지난 후에도 싹을 틔울 수 있다. 씨앗이 오랜 세월의 추위와 바람을 참고 견디어 낸 후 생명을 꽃피우듯이, 민중은 오랜 역사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본연의 제 모습을 지켜 낸 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2) 민중은 역사와 사회의 씨앗
한국의 민중이 5천 년 험한 민족사 속에서 혹독한 고난과 시련, 죽음과 한을 이기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도의 달리트(Dalits)들이 수 천년 동안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종교신분적으로 비인간적 억압과 소외와 수탈을 겪고 생존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생명의 힘과 영성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씨앗 한 알 속에 무궁하고 풍성한 생명이 응축되어 있듯이, 민중 한 사람, 달리트 한 사람 속에 엄청난 영적 생명의 힘과 지혜가 들어 있다. 수 억년 전, 수 십 억년 전에 땅 속 깊은 바닥에 묻힌 울창한 삼림과 거대한 공룡, 맴머스들이 수 억년, 수 십억년 동안 거대한 산과 두터운 바위에 짓눌려 석유, 석탄, 개스와 같은 엄청난 에너지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아름답고 단단한 보석이 되었듯이, 수 천 년, 수 만년 동안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역사와 사회의 모든 짐을 지고 상처와 시련을 이겨 낸 민중의 삶 속에도 엄청난 영적 생명에너지,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영성이 담겨 있다. 한국의 지배층은 외래문화와 외세에 쉽게 굴복하고 동화되었으나 약한 것 같은 민중은 민족의 얼과 자존을 지켜 왔다. 인류와 민족의 참된 생명, 영과 얼이 민중 속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인위적인 제도와 이념으로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의 바탈-(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간직한 존재다. 씨앗인 민중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보존한 존재이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민중도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 그리고 지배문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칠 때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난다. 밟아도 밟아도 굳세고 무성하게 일어서는 잡초처럼 민중은 눌리고 뺏기고 밀려나도 억세게 활기차게 일어난다. 언 땅을 뚫고 푸른 풀이 돋아나듯이 풀씨가 소나 말의 뱃속을 지나서도 싹을 티우고 꽃을 피우듯이 민중도 모진 억압과 수탈을 뚫고 힘차고 아름답게 살아난다. 씨앗은 제가 제 몸으로 자라고 변화한다. 씨앗은 '스스로 함'의 상징이다. 스스로 함은 스스로 말미암음(自由), 스스로 됨(自然)과 통하는 말이다. 스스로 함은 생명의 기본원리다. 세상에서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다. 먹고 자고 싸고 낳고 자라는 모든 일을 남이 대신할 수 없다. 남이 대신 살 수도 없고 대신 죽어 줄 수도 없다. 민중은 스스로 사는 존재이다. 지배층은 남을 부리고 남에게 의존하지만 민중은 몸으로 직접 한다. 그러므로 민중이 생명 자체에 더 가깝다. 생명은 스스로 함이고 스스로 함은 스스로 자람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역사도 우주도 인간도 스스로 자라는 존재이다. 예수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라는 인격이고 하나님도 스스로 자라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나'도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 될 것을 믿는 존재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자람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나도 영원히 되지 못한 것이다. 되려는, 되자는 믿음이 나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사는 민중은 날마다 자기를 넘어선다. 자기초월은 스스로 자유로움이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밑바닥 민중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자유혼으로 사는 민중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별처럼 초연하고, 들풀처럼 무심하며 사자처럼 용맹하다. 살인적인 작업환경에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1970년에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은 오늘날 한국인의 가슴 속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씨앗은 아무리 나쁜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생명의 본성에 따라서 성실한 생명활동을 한다. 하수도구멍에서나 교도소 담벼락에서나 긴 줄기와 잎과 꽃을 성실히 피우는 들꽃의 성실한 아름다움, 이름없이,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일구는 들꽃의 생명력을 보라. 민중은 이름없이 자랑이나 과시하않고 아름답고 성실하게 산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들풀처럼 강인한 삶을 산다.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려 가 닿는 곳 어디서나 자기 생명을 꽃 피우듯이, 이주노동자, 장애인, 정신대 여성들 그리고 모든 민중은 있는 그 자리에서 시련과 좌절을 딛고 아름다운 삶을 꽃 피우고 생명을 불태운다. 들풀은 자살을 모른다. 밟혀도 밟혀도 짓푸르게 일어선다. 거짓 관념이나 인위적인 제도와 체제에 매이지 않고 몸으로 생명을 사는 민중도 무조건 산다. 억눌리고 짓밟히며 밀려난 민중은 거짓 관념이나 제도에 매이지 않고 삶의 본능과 의지에 충실하게 산다. 민중은 직접 삶에 몰두한다. 生命은 살라는 명령이다. 민중은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힘겹게 살아온 많은 민중들, 가난한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흔히 "자식 새끼 때문에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민중에게는 삶 자체가 삶의 목적이고 과제였다. 실제로 많은 민중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자식의 생존을 위해 끝까지 산다. 그리하여 끝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일군다. 씨앗으로 생명을 전하고 유지하는 식물들은 생태계 먹이사슬의 바탕을 이룬다. 사슴과 토끼는 풀을 먹고 여우와 늑대는 사슴과 토끼를 먹고 호랑이와 사자는 여우와 늑대를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와 사자는 죽어서 거름이 되어 풀의 먹이가 된다. 모든 생명체의 먹이가 되어 생명세계를 살리면서 자신도 사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사는 씨앗들처럼, 민중도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서 인류를 먹임으로써 상생과 공존의 삶을 지켜 왔다. 민중은 생명세계의 바탕이다. 씨앗이 뭇 생명을 먹이듯이, 민중은 농사를 지어 먹여 주고, 옷을 지어 입혀 준다. 민중은 온갖 상품을 만들고, 집을 짓고, 길을 닦고, 차를 만든다. 먹히면서도 남을 살리고 나도 사는 상생의 길을 연다. 민중은 사회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을 하지만 짓밟히고 밀려나 있다. 남을 먹이면서도 자신은 굶주리고 남을 입히면서도 헐벗고 남에게 좋은 집을 지어 주면서도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한다. 살림의 주체이면서 예속된 삶을 산다. 민중의 해방은 생명의 해방이며 노동의 해방이며 사회의 해방이다. 민중의 해방은 반공동체적인 지배엘리트를 공동체적 삶에로 해방하는 것이다. 풀이 고갈되면 다른 모든 생명이 고갈된다. 풀이 푸르고 풍성하면 다른 생명도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 민중의 삶이 고갈되면 사회 전체의 삶이 고갈된다. 생명의 원천, 활력은 민중을 통해 솟아난다. 삶의 재미와 활력은 민중에게 있다. 민중의 삶이 재미있고 신나고 생생하다. 인위적이고 화려한 상류층의 삶은 조화처럼 시들하고 맛이 없다. 씨앗이 작고 약하듯이 민중은 개인으로서는 무한히 작고 약하다. 오랜 세월 동안 눌려 지냈기 때문에 민중은 자신의 숨은 존재와 능력을 모를 수 있다. 수 천년, 수 만년 짓밟히고 모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받고 마음 깊은 곳에 한을 쌓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모나고 뒤틀리고 팍팍할 수 있다. 민중의 마음의 빗장이 굳게 닫혀 있다. 총칼로 씨앗을 싹트게 못하고 대포로 꽃망울을 피게 못하듯이, 의심과 강제력으로는 민중의 마음을 열 수 없다. 따뜻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으로만 꽃망울을 피우고, 보드라운 흙과 스며드는 물로 싹이 트듯이, 민중의 굳게 닫힌 마음은 신뢰와 사랑으로만 열 수 있다. 민중에게 머리 숙이고 먼저 민중에게 배우지 않고는 결코 민중을 가르치거나 일깨울 수 없다. 독재자나 영도자, 지식인 엘리트가 민중에게 구원과 해방을 안겨 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생명을 펼쳐가는 씨앗처럼, 민 중은 스스로 구원을 펼쳐간다. 스스로 사는 사람은 나의 자주성을 지킬 뿐 아니라 너의 자주성을 존중한다. 스스로 함의 원리에 충실하자면, 상대방의 생각과 뜻과 느낌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씨앗사상은 인간의 자주성을 짓밟는 물리적, 제도적 폭력에 저항한다. 주체성이 확립될 수록 폭력적 지배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 투쟁정신도 커진다. 이 투쟁은 스스로 하는 삶을 유린하는 폭력에 대한 투쟁이므로 평화를 위한 투쟁이다. 씨앗인 민중이 역사와 사회의 주체, 지구화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배권력의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국가주의는 민중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씨앗이고 민초인 민중은 지역자치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실현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치적인 동기나 목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는 보다 높은 가치와 목표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3) 나-민중-예수의 꿰뚫림
씨앗 하나 속에 우주생명의 신비와 숨결이 담겨 있듯이 민중의 삶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이, 거룩한 영의 숨결이 닿아 있다. 사회의 바닥에서 자연을 가지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민중은 하나님의 창조역사, 자연생명의 조화(造化)와 작용에 동참한다. 함석헌은 예수의 고난과 민족의 고난과 오늘의 '나'를 일치시킨다. 함석헌에게 민족의= 주체와 실체는 민중 곧 씨앗이었으므로 [예수-민중-나]가 하나로 꿰뚫린다. [나-예수(하나님)-씨앗(민중)]을 일치시킴으로써 오늘의 나(마음의 결단과 실천)를 강조하는 주체적 포용적 신앙이 형성되었다. 민중을 외면하고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 민중을 외면하고는 역사와 사회의 참된 쇄신은 없다. 역사와 사회의 참된 진전은 민중을 통해서, 민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을 제쳐 놓고 옳고 건전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역사와 사회의 해방과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은 민중과 함께 민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여신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나는 민중에게 가야 한다. 민중이 내게 참 하나 님, 참 예수를 보여 준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다. 민중과 유리된 예수는 죽은 예수다. 내 속에 살아 있는 예수는 나를 민중에게 이끈다. 예수와 나와 민중이 하나로 꿰뚫릴 때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3. 성서의 씨앗: 믿음과 영의 씨앗
1) 사람의 씨앗과 용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두 발로 곧게 서는 존재--책임과 자존과 자유를 지닌 창조자적 존재--로 지어졌다. 과학과 종교를 통해 인간에게 무한히 넓고 높은 세계가 열렸다. 직립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창조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자격과 능력이었다. 직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 존재로 전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동산을 떠나 서로 죽임의 세계에 빠졌다. 정복하고 지배하며 약탈하는 인간을 통해 서 씨앗과 푸른 잎, 다른 모든 피조물도 저주와 심판의 그늘--영원한 파멸의 위기-- 속에 있다. 죽임과 저주의 나락에서 벗어나 서로 살림의 공동체적 삶을 실현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고 구원의 성취이다. 공존과 상생의 공동체를 실현할 인류의 씨앗을 성서는 여성(하와:생명의 어머니)의 씨앗(후손)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업을 파괴할 죄와 저주와 죽음의 세력, 갈등과 서로 죽임의 세력을 뱀이나 용으로 나타낸다. 창세기 3장 15절은 악마의 상징인 뱀과 여성의 씨(후손) 사이의 적대를 말한다. 인류를 하나님없는 죄악과 죽음의 나락으로 유혹한 뱀(악마)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