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기독교 신앙(Ludwig Wittgenstein and his Christian Faith)
- 박 종 균(부산장신대)
1. 들어가면서
일반적으로, 분석철학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비트겐슈타인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신학적 명제와 윤리적 명제를 부정했기 까닭에 그에게서 철학과 종교는 공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상당한 유관성을 갖는 초기의 분석철학인 논리실증주의와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윤리·종교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후기의 비트겐슈타인도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분석철학은 종교와 공존할 수 없으며 직접적인 모순관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음도 명백한 사실이다. 급기야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Wittgensteinian Fideism)라는 용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의 노트를 바레트(Cryil Barrett)가 정리한 『미학, 심리학과 종교적 신앙에 대한 강의와 좌담』(Lectures and Conversations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이 출판된 이후에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사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대가인 맬컴(Norman Malcolm)은 스승인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관련해 『회고록』(Memoir)과 『비트겐슈타인: 종교적 관점』(Wittgenstein: A Religious Point of View)을 저술했고, 거기서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기독교적인 헌신의 태도를 일관했다고 증언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 태도와 철학적 탐구의 태도 사이의 유비를 보여주는데 주력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어느 특정한 신조를 고백하지 않았고, 어떤 특정한 교회에 소속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그가 복음서를 묵상하고,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거듭났으며, 평생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점은 상당히 입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작품을 보다 통전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그를 철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아니면 적어도 맬컴의 말대로 그는 직접 기독교회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형식"(Lebensform)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깊은 관심과 신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본다.
본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의 기독교적인 신앙이 그의 철학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 신앙은 비인습적인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장에서는 삶의 공허감에서 오는 깊은 좌절감을 통해 신앙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3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적인 경험, 즉 세상의 존재에 대한 경이감이 기독교 신앙과의 연계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4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에 하나의 언어게임으로서 실존적 문법의 특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고찰할 것이다.
2. 비트겐슈타인의 신앙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였던 폰 리히트(G. H. von Wright)는 그가 스스로 매우 불운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전망에 대해 전형적인 침울함을 보였고, 그에게 현대적 상황은 운명 예정설과 같이 비관적이라고 여겨졌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인간적 고뇌는 그가 러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의 깊숙한 내면은 마치 간헐천의 밑바닥처럼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기를 줄곧 희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선생님에게 논리학에 관해서 어떤 것도 쓸 수 없습니다. 아마 선생님은 이렇게 제 자신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인간이 되기 전에 어떻게 논리학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자신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되는 것에 관해서 고심했으며, 인간이 되는 것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무서운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그런 길이 열려 있지 않다고 믿은 것 같다. 맥기네스가 전하는 바처럼 자신을 개선하고자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내면이 암울하다 싶을 만큼 어두웠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훨씬 암울한 종교, 구원의 희망의 어떤 근거도 없는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그 자신의 본성의 연약함과 어두운 곳을 인식하고 혐오하기 위해서 자신의 행실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기독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그 자신의 내면적 고뇌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읽고 이 작품을 상세하게 논의하고 난 뒤에 오토라인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셀은 『논고』의 신비주의적 논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책에서 신비주의의 정취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한 신비주의자가 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키에르케고어와 안겔루스 실레시우스 같은 사람을 읽고 진지하게 수도승이 되는 것을 숙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윌리암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서 시작되었고 그가 거의 미칠 지경이었던 전쟁 전에 노르웨이에서 홀로 보냈던 겨울 동안에 깊어졌습니다.비트겐슈타인에게 기독교의 역사적 이야기는 다른 역사적 이야기와는 달리 인생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의 종교적 관심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의 발로이거나 일시적인 흥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쓰레기라고 진실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일 수 있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나의 마음을 적실 수 있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미쳤거나 나 자신을 변화시켰을 것이다.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변화는 인간 내면의 자각적인 근본적인 변화이며, 아마도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신앙에 귀의하지 않는 한, 이 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완전히 다르게 사는 경우에만 그 말은 그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서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정열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로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죄의식은 실제 사건이다. 그래서 절망과 신앙을 통한 구원도 그렇다.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 누가 그것에 어떤 광택을 입히더라도, 단순히 그들에게 일어난 것을 기술하고 있다. …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병들었다고 믿는 그 만큼 종교적이다. 얼마간 올바른 생각을 갖고 이끈 사람은 자신을 아주 불완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은 자신을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멜컴의 회고록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 중 우연히 접하게 된 톨스토이의 사상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톨스토이의 『복음서』(Kurze Darlegung des Evangelium)는 그의 생애를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으며, 군대가 이동할때건 그 어디서건 그 책을 읽고 암기할 정도로 몰입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었으며, 그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몽크(Ray Monk)는 톨스토이의 복음을 접한 비트겐슈타인이 회심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살의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절친한 친구나 어떤 학자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기독교적인 회심때문이었고, 한동안은 자신이 신앙인일뿐 아니라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전도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존(Peter John)역시 비트겐슈타인의 회심이 차후 그의 삶과 종교에 대한 사고에서 규범적 역할을 한 "경이감"(Wunder)에 대한 의식을 촉발시킨 것으로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방대한 농토를 농노들에게 분배한 톨스토이의 도덕적 실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삶의 의미, 윤리적인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술의 언어, 실천적 삶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을 뿐이라는 『논고』의 쓰여지지 않은,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결론의 산 실천자가 바로 톨스토이로 보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톨스토이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했다. 막대한 유산의 3분의 1을 가난한 문인들을 위해 희사하였고, 나머지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형제 자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의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위대한 철학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하나였던 슈네베르그와 세메링 지역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그는 6년간 극도의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어린이 교육에 열정을 바쳤다. 거기서도 예수와 톨스토이의 사상을 실천했음이 틀림없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벗어나지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며,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진리의 삶으로부터 실족치 않게 해야 한다.
3.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적 경험, 즉 있는 것에 대한 경이감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비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신비적인 것은 사물들이 세계에 어떻게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논고』에서 우리가 세계의 존재를 언어, 즉 의미 있는 명제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여 주며, 따라서 신비적인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것은 세계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언어로 설명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림이론"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논고』의 전반부에서 그림이론을 거침없이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던 비트겐슈타인은 후반부에서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결론으로 이끌고 간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험적으로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태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전적으로 옳지만, 이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는 세계에 충만해 있다. 세계의 한계는 논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학에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세계 속에 이것은 있고 저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견상 우리가 어떤 가능성들을 배제함을 전제하는 데, 사실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다면, 논리학은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논리학이 이 한계를 다른 편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논리학의 명제들은 일종의 기술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들과는 달리 논리학의 명제들은 거짓일 수 없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명제들은 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동어반복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동어반복은 헛소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기호들이 동어반복을 구성하려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것이 헛소리는 아니지만, 그것은 모든 가능한 사태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아무 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구실을 하는가? 그것은 세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학은 초월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우연성의 세계와 필연성의 영역을 뚜렷하게 구별한다. 그가 양자를 구별하는 근거는 언어에 의한 표현가능성, 즉 언표가능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연성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인 반면에 필연성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필연적 가치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해 왔던 윤리학이나 미학 또는 종교의 명제들은 의미와 무관하다는 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이런 명제들은 언어가 궁극적이며 필연적인 가치의 세계를 다룰 수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어는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사실의 세계만을 표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사명과 역할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삶의 의미나 궁극적 가치를 다루는 전통 철학은 더 이상 의미 있는 명제로 체계화된 이론을 내세울 수 없다. 이론적 체계를 세울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자연과학에 한정된다.
이런 이유에서 철학은 자연과학의 하나일 수 없으며, 자연과학의 위에 있거나 아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 있는 명제, 의미 없는 명제, 의미와 무관한 명제들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미 없는 명제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것은 논리학의 명제들이다. 동어반복은 모든 진리조건에 대하여 참인 명제이며, 자기 모순은 모든 진리 조건에 대하여 거짓인 명제이다. 이런 점에서 동어반복은 기호만으로도 스스로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자기모순은 기호만으로도 스스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자기 모순은 명제 밖에서 사라지며 동어반복은 모든 명제들 안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자기모순은 명제들의 바깥 한계이며 동어반복은 명제들의 실체 없는 중심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분석을 다음과 같은 사태의 확실성, 가능성, 불가능성과 연계시킨다. "사태의 확실성, 가능성, 불가능성은 명제로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현이 동어반복, 의미명제, 자기모순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런 논점은 명제의 한계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동어반복과 모순명제라는 명제의 두 극단적 경우에 의해서 의미 있는 명제와 의미 없는 명제의 경계선이 그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있는 명제들은 의미 있는 명제들이며, 의미 있는 명제의 극단의 바깥 쪽은 자기모순이고 안 쪽은 동어반복이다. 즉 자기모순은 바깥쪽에서, 동어반복은 안 쪽에서 의미있는 언어의 한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들이 의미와 무관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0 이 대수(또는 산술)의 기호체계의 일부이듯이 우리의 기호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나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윤리학이나 종교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처럼 의미 있는 명제도 아니며, 논리학의 명제처럼 의미 없지만 세계의 한계를 보여 주는 명제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필연적 가치의 영역을 탐구하는 윤리학이나 종교의 명제들은 의미 있는 것도 아니며, 의미 없는 것도 아니고 의미와는 무관하다.
세계 속에 가치는 없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갖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가치를 갖는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렇게 있는 모든 것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렇게 있는 모든 것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연적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세계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의 밖에 있는 이런 영역은 우리에게 어떻게 와 닿는 것인가? 이것은 언표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으로서 다만 느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신비적인 것에 대한 느낌에는 강약이 있다. 신비적인 느낌이 강할수록, 세계의 경계선이 뚜렷해지며, 약할수록 경계선은 희미해진다. 즉 신비적인 것에 대한 느낌 여하에 따라서 세계는 하나의 한정된 전체로 느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신비적인 것에 대한 느낌에 따라서 의지의 선악이 갈리게 되며, 또 의지의 선악에 따라서 세계에 대한 해석, 즉 세계의 경계가 달라지게 된다. 즉, 세계는 차지거나 이지러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처럼 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개인의 세계가 어떠하냐에 의존한다.
의지의 선하거나 악한 행사가 세계를 바꾼다면, 세계의 경계를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세계는 그것에 의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차지거나 이지러지거나 해야 한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 다르다.
즉 신비에 대한 느낌은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전반적인 성향, 그리고 윤리학이라든가 종교를 말하거나 기술하려는 모든 사람의 성향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완전히 갇혀 있는 새장에 부딪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 윤리학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한 그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인 한, 그것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윤리학은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어떤 경향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며, 나는 나의 삶을 위해서 그것을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위의 인용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새장은 언어의 한계를 뜻한다. 이처럼 사고의 한계를 명확하게 그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사고의 한계를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보여 주고 그들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유도하기 위함이다. "윤리에 대한 강의"(A Lecture on Ethics)에서 윤리는 "선한 것에 대한 탐구"라는 종래의 좁은 정의 대신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혹은 올바르게 사는 방법에 대한 탐구"라고 넓게 정의하고, 모든 가치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윤리와 종교의 세계에서 언급되는 모든 가치는 절대적인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절대적 가치를 기술하는 가장 좋은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갖는 경이감이라고 말한다. 물론 존재에 대한 경이감이란 넌센스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의 남용이다.
여기서 내가 첫 번째로 말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경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넌센스라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나는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경탄한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언어를 남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언어의 오용이 모든 윤리적 및 종교적 표현에 나타나며, 그래서 종교언어는 비유로 사용된다. 물론 신앙인은 이런 특이한 감정과 그 감정의 표현을 일종의 기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경험은 단지 "내가 세상을 기적으로 보는 경험"일 뿐이며, 이런 절대적인 기적에 대한 인간의 언어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과 같이 "영원하고 중요한 것"에 대하여 무엇, 어떻게, 왜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한 우리는 그 실체를 영원히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침묵하는 일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신앙인들이 그냥 침묵하지 않고 침묵해야 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는 것인 바,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적어도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윤리에 대한 강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윤리는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정신의 한 성향의 기록이며, 나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비웃지 않겠다. 넌센스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인간정신의 한 성향의 기록"이기에 "나는 목숨을 걸고 비웃지 않겠다"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하고 중요한 것은 종종(often) 침투할 수 없는 장막(impenetrable veil)으로 인간에게 가려져 있다. 그는 거기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볼 수는 없다. 그 장막은 밝음을 반영한다.
여기에 대해 바레트(Cyril Barrett)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첫째,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항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종종"이라고 한 것은, "어떤 것"은 종종 예술, 윤리, 종교에 의해 인간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것이며, 둘째, 우리는 모든 인간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 바, 먼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종종 그 장막이 벗겨지는 사람들(종교적 신비주의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에 대한 경이감(경외심)과 종교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그 경이감 자체가 종교적 신앙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경험하는 자를 신앙으로 인도하고 자극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에 대한 강의"에서 기독교적인 신앙인들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표현한다고 언급했던 것이다.
4. "삶의 형식"으로서 기독교 신앙
모든 언어적 행위는 구체적인 삶의 틀, 즉 "삶의 형식"(Lebensform) 속에서 이루어진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그가 속한 문화로부터 받는다. 언어는 구체적 맥락에서, 구체적 목적을 위해서, 구체적 방법으로 그것이 쓰여짐으로써 의미있는 것이 된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언어가 쓰여지는 구체적인 맥락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language game)이라고 부른다. 그는 언어게임의 예로서 다음을 들고 있다. 미장이와 그의 조수의 세계가 벽돌, 흙, 구들장으로 구성된 원시적이지만 완전한 세계라고 가정했을 때, 이 세계에서 사람들의 삶의 유일한 목적은 구들장을 놓는 일이다. 따라서 미장이가 "벽돌"하고 소리치면 조수는 벽돌을 미장이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언어게임이 가능하려면 조수는 "벽돌"이라는 어휘가 쓰이는 용법을 알아야 한다. 즉 배워야 한다. 이와같이 언어게임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다.
미장이와 조수의 언어게임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들의 언어게임은 벽돌을 쌓고 집을 짓는다는 그들 행위의 총체, 즉 그들의 삶의 형식의 한 부분이다. 삶의 형식이야 말로 언어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행위와 그 행위의 배경을 이루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일련의 전제들의 총체, 즉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언어"에 반대하면서 언어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는 전제되어 있는 언어의 공통적 맥락, 즉 공통적 삶 자체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규칙을 준수하며, 보고를 수행하고, 명령을 내리거나 명령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관습, 관행, 제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언어의 맥락이 관습이나 관행이라는 것은 그것이 행동외적인 논리적 질서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 활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언어가 행동외적인 논리적 질서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열등한 언어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언어의 외적 논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의사소통에 장애가 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임무는 분석에 의한 사물의 본질탐구라는 개념에 오히려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논고』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논리는 요청이었을 뿐, 탐구의 결과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탐구의 결과는 무엇인가?
탐구의 결과는 언어의 쾌락, 즉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지적 행동의 총체적 복합성은 간단히 말해 물려받은 삶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탐구의 이와 같은 결과를 간과하고 만일 우리가 삶의 형식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메타적 근거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혼란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삽이 삶의 형식의 기반, 즉 암반에 부딪힐 때, 삽을 내려놓는 것뿐이다. 만일 우리가 탐구의 삽을 내려놓기를 거부하고 어떤 메타적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서 더 깊이 파들어가기를 고집한다면, 우리의 삽은 결국 휘어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나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 이것이 원인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면, 이것은 내가 행동하는 방식에서 규칙을 따르는 것에 대한 정당화에 관한 것이다. 만일 내가 정당화를 자세히 연구한다면, 나는 암반에 도달하며, 나의 삽은 휜다. 이것이 단순히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보여주는 이와 같은 견해의 단초를 『탐구』의 사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청색책』(The Blue Book)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언어의 원초적 형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되풀이해서 내가 언어게임이라고 부를 것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아주 복잡한 일상언어의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보다 더 단순한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언어게임의 연구는 언어의 원초적 형식이나 원초적 언어의 연구이다. 언어의 그와 같은 단순한 형식을 살펴볼 때, 우리의 언어의 일상적 사용을 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신적 안개가 사라진다. 우리는 점점 새로운 형식을 추가함으로써 원초적 형식으로부터 복잡한 형식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더 복잡한 형식과의 단절에 의해서 분리되지 않은 언어의 형식들을 이런 단순한 과정에서 인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대목에서 복잡한 언어의 원초적 형식은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게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하는 것은 비본질주의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즉 본질주의를 지향해 온 전통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당신은 인간의 합의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한다고 말하는가? 참이고 거짓인 것은 인간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일치한다. 이것은 견해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전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론적 탐구는 지식의 체계는 본질적으로 언어게임의 구조와 같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듯 언어게임의 기초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의 기초를 구성한다. 하이(Dallas High)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지식은 암묵적이며 생활화되어 있는 확신의 선행적 신용의 틀에 힘입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일 모든 인식적 주장에 들어맞는 신용의 근거가 있다면, 종교적 믿음의 어떤 승인이나 논의도, 우리가 지식은 틀릴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에 맞는 확실성의 모델을 고수하는 경우 실제와는 다른 특징을 띠게 된다.이 말은 신앙의 문법이 실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길들어 있으며, 생활화되어 있다. 따라서 "고백은 당신의 새로운 인생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런 논지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기독교가 일단의 이론이라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이론 신학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신앙의 발언 자체가 추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공식화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명백한 반발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런 신앙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강조는 서로 비례한다. "만일 당신과 내가 종교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단지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기독교 신앙이 지니는 실존적 특징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지니고 있는 이런 실존적 특징은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에서 전개되는 인식론적 고찰을 통해서 뚜렷하게 부각된다. 기독교 신앙의 언어적 표현은 그 원초적 기능, 즉 실존적 기능에 비춰 볼 때 전혀 추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확고한 신앙은 결코 말로 표현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그랬었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고 묻는 경우에, 그는 인과적 설명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의 물음의 요점은 어떤 갈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곧 그는 모든 설명에 대한 어떤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의 삶에서 표명되는가? …실제로 나는 이런 경우에도 당신이 말하는 단어들이나 당신이 그것들을 말할 때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이 당신의 인생에서 여러 가지로 만들어 내는 차이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인과적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대한 정당화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기독교 신앙을 신뢰와도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것이 오른 손이며 어느 것이 자신의 왼 손인지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나는 나의 판단이 다른 사람의 판단과 일치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어떻게 나는 이 색이 푸른색이라는 것을 아는가? 여기서 내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왜 내가 다른 사람의 판단을 신뢰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지점부터는 나는 신뢰해야 하지 않을까? 즉 나는 어떤 지점부터는 의심을 하지 않아야 한다 … 내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신뢰하고 있을 때에만 언어게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내가 무엇인가를 신뢰할 수 있을 때라고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적인 그림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그런고로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기독교의 이야기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일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신앙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어떤 사실에 대한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며, 이런 뜻에서 두 사람은 서로 모순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단지 삶과 죽음에 대한 각기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최후 심판을 믿는 사람의 신앙은 "추론이나 상식에 호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규제한다"는 뜻에서 그는 "움직일 수 없는 신앙"(an unshakable belief)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그림을 가지고 있는 비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앙이나 가르침에 맞추어 살 수 없다. 즉 기독교 신앙은 비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의 문법은 비그리스도인에게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삶의 종교적 형식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그것의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양적인 차이, 즉 그런 형식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하느냐 소극적으로 동의하느냐 하는 차이가 아니다. 그들의 차이는 세계상이나 인생에 대한 통찰의 근본적 불일치에 있다. 특수한 세계상이 삶의 온전한 규칙으로 기능하는 경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이처럼 질적 차이가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인의 세계상은 세계를 해석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 서있다는 점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끝으로, 비트겐슈타인이 구체적인 신앙의 체험으로 "죄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자. 죄의식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은 대단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타자들은 "나"의 죄의식의 체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죄의식은 결코 공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의식이 무한할수록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무한한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기독교가 이런 무한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무한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즉 무한한 고통을 체험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가 이렇게 무한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는 경우, "내"가 기독교로부터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를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내"가 받은 도움은 자기 반성적 개별자의 자기 중심적 성격을 띨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로부터 무한한 도움을 받으면서 "내"가 깨달은 기독교의 정당성은 본래 개인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며, 원천적으로 객관적 언어를 통해서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가 바로 기독교의 정당성에 관해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지점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 이 지점을 넘어서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신앙의 정당성에 관한 철학적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한계 개념, 즉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는 그의 신조가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의 인용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분명한 신조를 읽을 수 있다.
삶은 사람들을 가르쳐 신앙으로 이끌 수 있다. 그리고 경험 역시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신앙은 존재의 실존을 보여주는 시각이나 다른 감각 경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종류의 고통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감각 인상이 우리에게 대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관한 추측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고통을 당하는 개인이 무한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개인은 자신의 눈을 내면으로 돌리게 되며,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안식처를 찾게 된다. 왜냐하면 이 안식처는 고뇌하는 개인에게 편안함과 고요함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종교는 말하자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다의 고요한 심연 같은 것이라서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거칠더라도 늘 우리에게는 안식처가 된다." 이런 편안함과 고요함은 신앙의 바다 밑으로 내려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5. 나오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성과 계시를 혼동하지 않으면서 이 양자를 정확하게 구분하려던 냉철한 종교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는 노력이야말로 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으며, 신앙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동시에 그는 루터와 같이 인간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열광적인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신앙이 이해성이나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와 실재의 한 모습인 언어를 유기적으로 분석할 필요를 역설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이러한 중간적인 입장을 "삶의 형식"이란 독특한 개념으로 이해했으며, 그런 의미에는 그를 온건한 신앙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앙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에게 길들어 있으며, 생활화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내가 안다"는 말의 문법의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찾지 않으며 증명을 통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 방식에 따를 때, 우리는 삶의 형식 자체에 대한 비정합성, 반논리성, 비합리성, 반이지성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삶의 형식은 "자체의 개념적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삶의 형식을 직접 운영하면서 어떤 것은 의미가 있거나 혹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논리적이라거나 반논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장기의 비논리적인 움직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형식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반이지적이며 비정합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마치 장기 자체를 비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없듯이 말이다. 기독교를 하나의 삶의 형식으로 본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개인의 깨달음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어간다. 기독교로부터 무한한 도움을 받으면서 "내"가 깨달은 기독교의 정당성은 본래 공적 언어를 통해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기독교의 정당성에 관하여 우리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지점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분석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주어져 있는 세계상이라는 점에서 믿음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연속으로의 투신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의 핵심이라 사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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