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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함석헌 선생님과 나 - 장기려 박사

YOROKOBI 2007. 7. 27. 21:28

함석헌 선생님과 나

장기려(부산 청십자가병원장)

1 샘 근원이 풍성한 샘
함선생님을 제가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1월 1일 서울시 정릉 김교신선생 댁에서 성서조선 독자들이 겨울모임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손정균군(당시 경선 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의 소개로 그 모임에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김교신선생은 함선생님의 성서 강해를 논평하기를'샘 근원이 풍성한 샘에서 표주박으로 생수를 퍼내어 마시게 해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3일간에 걸쳐서 계시록을 강의하셨는데, 그 박식의 역사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아세아 7교회에 보내신 편지에 대한 해설, 사도 요한 이 본 하늘보좌와 그 보좌를 받들고 있는 네 생물과 그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24장로, 그리고 역사를 완성시키는 어린양의 광경을 설명하고, 7인봉을 뗄 때 나타나는  심판의 의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새 예루살렘)가 하늘에서 준비된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을 그림 그리는 사람이 예수재림의 그림을 그린 것을 보는 같이 설명하셨고 또 하나님의 경륜의 실천을 그린 그림은 영원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설명하시던 것이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납니다.

그 후 함석헌 선생님의 글은 성서조선에 연재되었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탐독하여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와 같이 고난의 역사임을 밝히 알게 되었고, 그것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셔서 저는 비로소 역사의 의의를 조금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글 중에서 우리 민족에게 풍부히 주신 은사는 어진 마음(仁)이라고 지적하시고 당시 경상도에 살던 우리 동포들이 소망도 없이, '노조미' (희망)라고 이름한 기차를 타고 남부여대(男負女帶)해서 만주로 이민을 가고 있었는데, 가지고 가는 강낭떡을 옆에 있는 동포에게 먼저 잡숫도록 권하고야 먹는 광경을 쓰시면서, 우리 동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어진 마음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인류역사에 크게 공헌할 것은 이 어진(仁) 마음이라고, 강조하신 것이 지금 나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깊은 감명을 가지고 살면서 친구들에게 전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 후에 선생님을 내가 가까이에서 모시게 된 기회로서는 1942년 시내원충웅(矢內原忠雄) 선생이 평양에 오셨을 때 평양에서 뵌 듯하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나는 유치장에 12일간 들어갔다 나왔고, 선생님은 약 1년간 영어(囹圄)의 몸으로 계시다가 나오셨을 때 평양에서 만나서, 유치장 생활의 어려웠음을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평양 근교에 있는 송산 학원에서 농사짓는 학생들과 김두혁 선생과 같이 생활하시면서 교육하시던  때 일이 기억납니다.

*30리 길을 걸어다니심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선생님은 용천 군민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가 평안북도 문교부장으로 계실 때, 신의주 고등학교 학생들의 자유데모에 책임을 지시고, 쏘련 정보부에 가셔서 엄한 조사를 받고 수개월간 감옥에 계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에이취. 지. 웰스(H. G. Wells)의 글을 많이 읽으시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결함을 확인하시면서 세계연방정부의 장점을 인정하셨던 것으로 저는 듣고 있습니다.

1946년 신의주 감옥에서 나오셔서 이남으로 내려오실 때 평양에서 만나 뵈옵고 무사히 내려오실 것을 기도 드렸습니다.
저도 1950년 12월 평양을 떠나 1950년 12월 20일 부산에 도착하여 제3육군병원에 있으면서 주일에 초량교회(한상동 목사님 섬기던)에 나갔을 때, 선생님도 그 교회에 오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제3육군 병원에 있으면서 상이 병사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하여 선생님을 1주 1,2회 청빙(請聘)하여서 천막교회에서 말씀을 듣도록 했습니다.

선생님은 건강하셔서 버스와 도보로 약 30리(대저면에서 대청동에 잇는 제3육군병원까지)길을 왕래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지혜가 없어서 선생님에게 무례한 청을 했고, 또 선생님을 많이 괴롭혔다고 생각해서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만은 당시는 우리 나라가 위태로 와서 의인의 수고가 나라의 지주(지주)였다고 믿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 후 1957년 제가 부산의대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있을 때, 교실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주일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1개월에 1회 부산에 내려오셔서 성경말씀. 논어. 맹자. 노자. 장자의 말씀을 들어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되셨습니다. 선생님이 미국 필라델피아 펜들 힐에 가셔서 2년간 계셨고, 3차에 걸쳐 수개월씩 세계를 일주하시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기적으로 매월 제 2주일에 부산에 오셔서 성경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함선생님을 모시고 섬기며 따르는 많은 사람은 선생께서 진리(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이외에는 어떠한 이 세상의 권력자, 능력자, 부한자, 지혜자들의 인간에 대해서도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거나 하지 않는 그 점에 대하여 존경심을 품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온전히 독립적인 인격자로 자처하였습니다.  내촌감삼(內村鑑三) 선생이 독립을 예찬하였듯이 선생은 왕이나 여왕이나, 대통령이나 총독이나 교수 또는 목사들보다도 독립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내촌(內村)선생의 제자들과 더불어 무 교회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평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퀘이커인이 되셨습니다 만은 보다 더 진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극히 자유 하셨고 생명이 넘쳤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농사를 짓고 또 노동을 예찬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과 인류의 한 사람 즉 민초(民草)라고 불리 우는 매(每) 개인(個人)을 '씨알'이라고 불러 이들을 생명의 단위로 부를 것을 제창하셨습니다. 이들의 인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체이어서 이들의 조직체는 이상사회로 발전한다고 고조(高調)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사랑으로 영존 되며 또한 구원된다고 믿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민족의 결함은 쉬이 잊어버리고 잘못을 되풀이하는 점과 또한 진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진저(眞低)와 진수(眞髓)에 도취할 줄 모르는 점이라고 지적하고 탄식하는 것을 저는 종종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독신도들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 즉 진리를 자기들의 머리로 그 틀을 짜서 꽉 믿고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셨고 또 곁길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틀을 깨뜨리게 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말씀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함선생이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단이니 또는 적 그리스도라고 말하였지 만은 선생님은 그것을 듣고 알면서도 자기의 생각이 진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부산모임의 적은 무리들 앞에서는 자기는 진리를 말씀하신 여러 성현들을 찾아보았지만은 예수 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되  었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이제는 영의 사람이어야 되겠어'

선생님은 진리를 직관하셔서 하시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은 죽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생명이 왜 죽어 육체 의 생명은 죽지만은 영혼의 생명은 영생하는 것이라고, 누구든지 긍정할 수 있는 말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벌써 말했고 믿었던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받은 생명은 예수님과 같이 영생하는 것이므로 죽을까 염려하지 말고 의에 용감 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죄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죄는 없는 것이야'하고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죄가 현실에서는 너무도 큰 세력으로 느껴지는데, 없다고 하신 말의 듯을 모르겠다고 물었더니, 참 실존세계는 하늘나라인데 그 곳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즉 선생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공경하여 살으셨고 그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인에게는 죄 정함이 없다고 믿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빈 마음 곧 허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간절한 소원은 어떻게 하면 씨알들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빛을 스스로 깨닫고 그 빛을 발휘하게 할 수 있도록 할까하고 염원한 데 있다고 봅니다.  그 전에 '말씀'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신 것이든지 또'씨알의 소리'를 발행하신 것은 오로지 씨알들의 영혼에 생명을 불러 일으켜 보시겠다고 하는 염원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참 씨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라고 믿고 몸소 그 속에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우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 다만 이해하려고 했을 뿐. 도와드린 것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어디서든지, 자유의사를 존중하시고 아무 조직이나 단체에 속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장의와 진리를 믿으셨기 때문에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민권운동과 데모에 가담 하였지만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아니하셨다고 솔직히 시인하시고 '사랑으로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고, 최근에 오셔서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안 되고 영의 사람이야 되겠어.'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독립과 자유 하는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운명하실 때까지 주안에서 교제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꼼짝 할 수 없는 죄인'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늘 기억되고 있는 것을 한두 가지 추가하겠습니다.
 (1)'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자' 이다 고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시면서, 웬일인지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나' 라고 하는 찬송이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왔다고 하시더니, 아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죄인이 라고 하셨습니다.  그 체험담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천안에 있던 농장이 선생님의 명의로 되어 있어서 농휴지 에 대한 세금이 몇백 만원이 나왔는데, 선생님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꼼짝도 못하겠다고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 땅의 주인 되시는 정장로님이 수고하셔서 해결이 되었던 줄로 짐작되는 일 이였습니다.
 
둘째는 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의 일인데 하루는 강연하러 가셨다가 들어와서 곤하게 잠이 들었던 때입니다.  한 도둑이 부엌에서 칼을 들고 들어와 아랫방에서 자던 며느리를 위협하여 며느리가 이불을 둘러쓰고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사이에 윗방에 들어와 선생님 주머니에서 20만원 돈 전부를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때 주무시고 몰랐던 것이 다행이었지 깨어있었던들 꼼짝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성격이어서 아주 공감이 갔었습니다.

 (2) 함선생님은 성경 중에서도 요한 복음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많은 세 여자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신 예수 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신 일입니다.  가장 많이 탕감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많이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수가성의 창녀에게 친히 자기가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믿게 하여 주신 일이었으며 그 셋째는 음행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 '자도 너에게 죄를 주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사건 중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크고 넓은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좁은지' 하는데 저도 동감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시면서, 아마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자기를 팔았던 가롯유다도 데리고 오실 것이야 하시면서 자기를 가롯유다에 비해서 말씀하시듯이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은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 긍정이라고 생각할 때에 조금 이해가 됩니다 만은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므로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말밖에 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나와는 위와 같은 믿음에서 서로 이해하고 살았으며 앞으로도 주안에서 계속 살 것입니다.

함석헌선생 결별식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  이제는 우리들의 육체의 제한 때문에 아버지께서 1901년 3월 13일에 이 세상에 보내셨다가 1989년 2월 4일에 데려가신 함석헌 선생과 결별을 고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아버님. 할아버님. 선생님. 선배님. 동창생. 동지님. 씨알의 소리의 지도자라고 불렀던 함석헌선생님과 결별을 고하게 되는 것은 인정으로는 슬픔을 금할 수 없사오나 이것이 아버지께서 영생으로 주신 길이오니 우리들은 순종하오며 도리어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함선생은 일찍이 참을 찾다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붙들 이어, 발에 채이면서 다녔사오니, 죄 때문에 신음하다가 어렸을 때에 믿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되어, 예수님은 홀로 그리스도시며 자기의 구주 님이라고 증거케 하신 주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선생은 성경과 성현의 글과 역사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확신하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와 '씨알의 소리'를 써서 씨알들의 뜻과 생명을 깨우치게 하여 주심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다 진리이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온데 선생이 인격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발전에 힘썼고, 인생의 구원을 위하여 애썼던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함선생의 일생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믿고, 감사 드리오며 다만 우리들이 아버지께서 사용하셨던 함선생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대접하였다고 생각되면서 그 점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함선생을 통하여 보여 주신 아버지의 뜻과 정신을 더욱 분명히 해서 그와 같이 삶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4개월 전에 '앞으로의 시대는 영의 사람이어야 하겠어!' 하고 말씀하셨던 대로 지금은 영의 사람으로 되셨고, 두 달 전에 '평화는 금년까지나.....?'하고 말을 흐리고 말았던 대로, 음력으로 1988년 그믐 전날 운명케 하셔서 생활로서 예언을 하도록 하신 주님께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하늘나라를 이루어 가지고 다시 오실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아니 지금도 주안에서 살면, 함께 사는 생활이 되는 줄 믿고, 세상에서 힘 치게 살고자 하오니, 주여 선한 뜻대로 인도하소서.영원하신 주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1989년 4월
 장기려(부산 청십자가병원장)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출처 : 함석헌 선생님과 나 - 장기려 박사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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