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장기려 선생
아름다운 사람 2006/10/31 굴렁쇠

혼돈의 시간도 가고, 머리 속을 휘젓던 세상소식도 잠시 봉합수술을 마친 상태다. 살가운 가을햇살이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잘게 부서진다. 장기려 선생을 생각한 것은 몸을 앓고 난 후이다. 혼수상태일 때는 아무 것도 기억되지 않았다. 그저 악몽처럼 흐르는 시간의 꼬리표를 떼고 싶었을 뿐이다.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죽는날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부른다. 그의 삶을 짧게 압축하는 것은 쉽지만 그의 삶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한 평생을 가난한 환자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인술과 사랑을 실천한 그에게 이 사회가 드려야 할 명함이 있다면 바로 '성인(聖人) 장기려(張起呂)'이다.
어렵고 힘들수록, 몸이 아플수록 부끄러운 욕심을 품었던 '이기적인 나'를 꾸짖는 심경으로 장기려 선생의 거룩한 삶 속으로 들어가 그의 영혼을 오늘은 만나고 싶다. 세상을 겸손하게 바라보고 박애와 봉사, 무소유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과연 내게도 있는지 정밀검사를 받는 심정이기도 하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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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청년시절 선생이 의사가 되면서 품었던 다짐이 하나 있다.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는 소망이 그것이다. 그 다짐은 한평생을 살며 지켜졌고 실천됐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박애정신은 들꽃같은 삶 속에서도 바람에 꺾이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선생의 수제자로 경성의전 외과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맹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에 대한 논문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를 완성했고, 1940년에는 이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평양 연합기독(기흘)병원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났다.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씨만 데리고 우역곡절 끝에 월남하면서 그의 제2의 인생은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참의사의 길을 걷게 만든 동기가 됐다.
1950년 12월, 월남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일했다. 부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1년 6월에는 영도구 남항동의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를 모태로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전신)이 태어났다. 이것은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푸는 의사로서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1958년에는 부산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3년여 간 봉사하기도 했다.

평생을 박애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장기려 선생이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 남긴 업적도 만만치 않다.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에서 암세포를 잘라내는 수술과 이후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하는 쾌거를 올렸다. 대한간학회는 이 날을 기념해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정했다.
68년에는 정부보다 10년 앞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결성하여 우리나라 의료보험을 앞당기는데 선각자가 됐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취지로 시작한 민간 최초의 의료보험 기구였다. 가난한 환자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 받게 해주고 싶은 선생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1979년 동양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기려 선생은 복음병원장(1951~1976년), 청십자병원장(1975~1983년), 부산아동병원장(1976년), 부산백병원 명예원장(1983년) 등 병원장으로 40년, 서울의대 교수(1953~1956년), 부산의대 교수 및 의대학장(1956~1961년), 서울 가톨릭의대 교수(1965~1972년), 복음간호대학장(1968~1979년) 등 대학에서 20년을 일했다.
사랑의 인술 44년, 한평생 가난한 이웃들의 등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서민적이었다. 초라하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하나,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그의 인생에는 돈과 명예가 다 부질없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말년에는 고신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45년을 홀로 살았다.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 했다.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생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 얼마가 필요해'가 아니라 늘 '이것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바보의사가 아니라면 성자가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일까. 병원을 운영할 당시 돈 없는 환자들은 일부러 그의 출근길에 쓰러져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탓이었다. 때로는 돈이 있는 사람들도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이 마저도 모두 받아들였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 아니었으면 가능하기라도 했을까.
이런 그의 베품은 안타까운 가족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부인과 다섯 자녀를 북녘에 두고 온 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족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상봉을 이룬 후에 만나겠다"며 아내에게는 편지만 보냈다고 한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해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을 때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당시 정부에서 사회 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선생에게도 제안을 한 일이 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거절했다. 결국은 평생 그리던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욕심을 끝까지 버렸다. 개인적 기쁨과 행복조차도 혼자 독점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이루지 못한 소망은 둘째 아들이 대신 이뤘다. 지난 2000년 8월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환갑을 넘긴 아들이 50년만에 만났다.)
선생은 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좀처럼 표명하지 않았다. 1990년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기승을 부릴 때는 오히려 수많은 지식인들이 움츠려든 것과는 달리 "통일을 위한 용기있고 장한 쾌거"라고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희생한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 문규현 신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라고 과감히 속내를 털어놨다. 가족을 통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해온 그였기에 그분의 말은 가슴 뭉클하게 하는 호소력이 있었다.
우리곁에 머물다 간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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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선생이 남기고 떠난 말을 되새긴다. "우리 주위 어딘가에 병든 이웃과 가난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그분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분이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없고, 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지 존귀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대하였고, 환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을 가졌던 선한 의사였다. 평생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의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고, 그것을 실천했다.
장기려 선생은 슈바이처와 같이 비유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무엇이 있다. 슈바이처는 유럽 사람들, 특히 기독교가 저지른 죄를 씻기 위해. 자기 발로, 반은 자선사업 겸 아프리카로 갔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은 6.25라는 동족상잔, 이산가족의 비극을 앉은 자리에서 날벼락처럼 당하면서 그의 인생역정이 시작됐다. 슈바이처에게는 고난의 체험이 없으나 그는 온몸으로 시대의 고난을 체험했다. 인술 하나로 이땅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졌다.
1950년 6월, 한반도에 불어 닥친 전쟁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누더기가 된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던 부산. 그곳에서 천막 병원을 열고 무료로 가난한 이웃을 치료하며,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사람.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겸손해 했던 무사무욕의 삶을 실천한 사람.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집 한 채는커녕 통장에 달랑 천만 원을 남겨 놓았고,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줘 버리고 빈손으로 떠나갔던 사람, 장기려 선생.

그가 부산에 남긴 발자취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준다. 그의 삶은 은퇴가 없는 일생이었다. 만년에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며,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가난에 멍든 우리네 서글픈 이웃들에게 소금 같은 존재였다. 서러운 풀잎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안겨준 거룩한 영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인술과 생명, 평화의 정신은 장기려 선생의 전 생애를 엮어간 키워드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가르쳐준 그를 나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성자(聖者)'라 부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선생과 함께 살아온 우리로서는 큰 기쁨,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여야 할 것 같다.
벌써 10월의 달력은 마지막 한장을 남겨 놓고 있다. 아침 찬바람이 제법 옷깃을 여민다. 몸도 마음도 찬기운이 드는 요즘 그분의 삶이 더욱 그리워진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천막병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44년을 부산에서 사랑의 인술을 베풀다 1995년 12월 25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장기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눈부신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아름다움만 영원히 남긴채. /굴렁쇠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야?" ![]()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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