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노래를 하는 것이 꾀꼬리의 본성이듯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인간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막연하기는 하지만 절대적 힘을 가진 그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하게 된다. 많은 교부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느님께 대한 청원으로, 우리 마음의 영을 들어 높이는 행위로,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한다.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동방과 서방의 기도가 추구하는 궁극은 모두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일치한다는 관상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 목적에 도달함에 있어서 지성의
사용이 특히 두드러지는 서방의 영성과는 달리 동방의 영성은 마음의 측면을 특별히 강조한다. 따라서 동방 영성 안에서의 기도를 "마음의 기도"로
대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비록 서방의 영성적 흐름 안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서 상당부분 동방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서방의 지적인 측면과 동방의 마음의 측면 그리고 서방의 분석적 측면과 동방의 통합적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고찰함에 있어, 먼저 그 형성 배경과 구성 및 내용을 살펴보고, "이냐시오
영신수련" 안에서의 기도 방법과 그 특징들을 동방 영성 안에 나타나는 "마음의 기도"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1.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형성 배경
이냐시오는 1491년 가스띨랴 왕국의 기뿌즈코아지방에 있는 바스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세
남매 중 막내였다. 14살에 바야돌리드에 있는 가스띠유 궁정에서 왕실 재무로서 봉사를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나헤라의 공작인 나바레의 태수에게
시종으로 봉직하였다. 불란서 군이 1521년에 나바레 왕을 위해서 나바레를 재탈환하려고 했을 때, 태수의 관리였던 이냐시오는 나바레의 수도인
빰쁠로냐를 사수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다. 빰쁠로냐는 순식간에 불란서군에 함락되었으나, 성벽 요새에 자리잡은 소수의 스페인 수비대가
한사코 항복을 거부하였다. 수비군의 선봉에 서서 싸우던 이냐시오는 1521년 5월 20일 불란서군의 성채 포격에서 중상를 입고 고향인
로욜라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상처가 차츰 나아지자, 그는 무료한 성 안에서의 생활을 달래기 위해 심심풀이로 기사소설과 같은
책들을 구하던 중에 우연히 <성인들의 꽃>과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들추어보게 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이냐시오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제시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다가서는 첫 계기가 되었다. 이 책들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이냐시오의 회심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현세에 대한 봉사 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길을 선택하여, 1522년에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옛 성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기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카탈로니아의 몬세라트의 성당에 나아가, 총고백을 하고 속세의 생활을
청산하고서,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여 예정된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만레사시 가까이에 있는 한 동굴에서 일년 동안 마물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병사로서 용감한 무사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성숙해갔다. 이것은 차라리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의 스승이 되시어 사랑하는 제자를 한 걸음 한걸음 이끌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은 물론 밤중에 일어나고 단식도 하며 또 자신에게 엄한 고행의 채찍질을 해가면서 영신을
수련하였고, 묵상 중에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배워가며 쓸쓸함과 흐뭇함, 그리고 슬픔과 기쁨, 또는 불안과 평화 등을 번갈아서 깊이 체험하였다.
마침내 이냐시오는, 로욜라 성에서 병상에 누워있을 때 그리고 몬세라트와 만레사에서 수련하고 투쟁하는 동안, 내면적으로 겪은 깊은 체험을 통해서
먼저 자신을 위하고, 그리고 또 열렬히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을 위하여 만레사에서 영신수련의 기본원리와 요점을 기술하였고, 일년 후에 몇 가지
부칙을 덧붙여 애긍 시사에 관한 규범들, 교회의 정신과 일치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적 사적 등을 합해서 엮은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 된 것이다.
이냐시오에 의하면, <영신수련>은 영신수련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될 뿐만
아니라, 지력과 의지를 써서 생활을 정리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도 한결같이 영신생활의 풍부한 실용적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장엄한 인가와 찬양을 받은 이후로, 역대 교황과 많은 수덕신학자들 및 성덕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상찬을 받아왔다. 특히 비오 11세는, 1922년 7월 22일자의 회칙 Summorum Pontificum으로 성 이냐시오를
‘모든 영신수련의 천상적 주보’로 선정하였고, 또 1929년 12월 20일자의 회칙 Mens Nostra를 통해서 "감탄할 만한 영신수련"은
"구령과 완덕의 길에서 영혼 지도상 가장 현명하고 보편적 법전인 동시에, 가장 깊고도 견고한 경건심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서 생활 개선의 길을
가르쳐주며, 영신생활의 높은 수준에 달하는 지름길을 밝혀주는 엄중한 각성의 소리로서 대단히 정확한 지도서가 되었다."고 거듭 천명함으로써, 과거
4백년동안 사목자와 평신도가 이구동성으로 찬양해오던 것을 교황의 권위로써 재확인하였다.
2. <영신수련>의 구성과 내용
<영신수련>의 주요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그리스도적 인생관을 파악하게 하여,
죄악을 인식하고 통회하며 자기를 극복한 다음,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자기를 성화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적극 협력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리스도교적 주요 원리를 총괄한, 실천적 수덕신비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영신수련>은 머리말, 본론 및 여러 가지 부칙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은 영신수련의
지도자와 그 수행자들이 영혼의 더욱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인데, 해설, 권고 및 암시 등 20개 조목을 포함하고 있다. 그
다음은 본론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대략 네 주간으로 나눠서 행하기로 되어있는 묵상 자료를 매일의 순서에 따라 논술하고 있다.
2.1. 첫째 주간
첫째 주간의 서두에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인생관에 대한 고찰과
묵상이 제시되어있다. 이에 의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자기의 창조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함으로써, 자기의 영혼을 구하는
데에, 즉 인간적 완성을 이룩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은 전부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만물을 사용할 때, 자기의 영신적 완성을 이룩해나가는 데 알맞은 중용을 지녀야
한다.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하여 묵상하게 하는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사람의 본질에 대한 구성적 원리이고, 우주의 질서이며,
하느님의 의향이요 사랑이요 계명인, 인생 원리에 어긋나는 자기 죄를 묵상함으로써, 죄의 크기와 나쁘기와 징그러움을 인식하고 아파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를 묵상하는 사이에, 양심성찰의 방법과 총고백의 유익성을 제시하여 영신수련을 수행하는 영혼이 죄에서 정화되어서 쾌활하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준다.
2.2. 둘째 주간
첫째 주간에 진행되는 묵상에서, 죄스러움에 대한 깊은 내적 체험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논리적이거나 지성적인 결과가 아니라 영혼의 자발적인 움직임에서 흘러나오는 열정을 표현해
준다. 이 열정이 피정자로 하여금 둘째 단계의 영신수련에 진입하게 해 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데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투신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 준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열정을 지니고 따를 수 없다. 즉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다. 따라서 둘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삶의 이상을 제시하면서 그에 비추어 자신의 소명을 고찰하고 수용하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즉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충실히 따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둘째 주간의 목표이다.
그런데, 첫째
주간에서 그리스도께 응답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망은 깨어지기 쉽고 때로는 영적인 움직임마저도 부서져 버릴 위험성도 지닌다.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응답하기 위해서는 식별의 지혜가 중요하고 따라서 둘째 주간에서 식별에 대한 수련들이 제시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둘째
주간은 식별의 체험이 중심이 된다.
묵상의 순서로서는, 우선 둘째 주간 처음에,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이에게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협력을 호소하는 그리스도 왕을 어떤 유능하고 거룩한 현세의 왕에 비교해서 묵상하게 하고, 이어서 천주 성자의
강생에서부터 나자렛 생활 및 열두 제자들의 간택 장면 등을 묵상해가면서, 협력의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평신도 사도직을 초월하는, 복음적
완덕으로의 생활양식을 묵상하고 선택할 기회, 즉 자신의 성소를 식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때에, 자기의 생활양식, 즉 신분을 올바르게 잘
선택하기 위한 참고 묵상으로서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및 겸손의 세 가지 단계 등에 대한 묵상이 제시된다.
2.3. 셋째, 넷째 주간
첫째, 둘째 주간을 거치면서 피정자의 마음에는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 완전한 불편심(不偏心)이 자라면서, 인간적인 애착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애착이 증가되고 깊어진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애착은 셋째, 넷째 주간의 묵상들을 통해서 더욱 깊은 차원으로 심화되어 간다. 즉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순명의 태도를 지닌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피정자는 구원과 성화의 절정에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체험은 관대한 마음의 불편심으로 부터 시작되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더 큰 애착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의 절대적 파스카 신비에 몰입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를 항해 내어 주는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이 된다. 특히 넷째 주간의 부활 체험은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에 초점을 두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죄에서부터 자유스러워진 인류에게 그분 자신의 영광과 영적 위안 뿐 아니라 그분의 기쁨을 전달하시는 것을 기대하는, 제자들의 부활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2.4. 사랑을 알기 위한 관상
이제 피정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부활을 풍부하게 나누면서,
모든 창조물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께로 안내된다. 이것이 바로 영신수련의 마지막 과정인 ‘사랑을 알기 위한 관상’이다. 사랑을 알기 위한 관상은
넷째 주간과 연결되어, 영신수련의 절정의 단계에서 영신수련의 모든 과정을 통합하면서, 활동 중에 관상하는 삶으로, 예컨데,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도록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제시하는 중요한 관점은 모든 창조물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내재는 바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라는 점이다. 이렇게 만물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면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피정자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감사의 마음으로 불타게 되고, 이러한 감동은 피정자로 하여금 창조된 만물의 목적에 합당한 봉사를 드리도록 제약됨이 없이 자신을
투신하는 삶에로 이끌어 준다. 이러한 사랑의 응답이야말로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시작에서 볼 수 있었던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영신수련 전체를 통합하는 하나의 결정체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랑의 체험을 겪은 피정자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변화된 눈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삶을 보면서 삶 안으로 그리스도의 지평을 가지고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3. 영신수련을 위한 기도 방법
3.1. 기도를 위한 준비
3.1.1. 바른 자세
기도에 있어서 몸의 자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몸의 경건한 태도는 내적 주의를 촉진하며 내적 사고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외부에 나타낸다." 헤시카스트의 정신신체 상관의
기술은 몸을 깊은 관상에 가담하게 했다고 한다.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몸의 바른 자세는 기도의 등급에 있어서 첫째 등급(몸과 말로 하는
기도)을 차지할 만큼 기도에 있어서 기본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냐시오 묵상에서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몸의
자세 및 형태를 여러 가지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편안하지만 나태한 자세가 아닌 바른 자세로 기도를 한다.
왜냐하면 몸의 움직임은 정적인 기도, 환시와 정신의 상태들을 통한 기도들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육체의 완전한 정지상태, 곧 평화를 키워주고 분심을 쫓아주는 정지상태이다. 이러한 정지상태, 즉 몸의 정적 상태는
기도하기에 아주 좋은 터가 되어주고, 바로 이 상태에서 이제 기도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정지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실제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는데, 요가를 이용한 방법이나, 눈을 반쯤 뜬 채로 1미터 정도 떨어진 한 점을 응시하는 방법이나 등을 똑바로 펴는 방법
등이다. 이렇게 하여 기도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면 머지않아 자신에게 꼭 맞는 자세를 찾아내게 되는데, 가능한 그 자세를 쉽사리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3.1.2. 기도의 장소
몸의 자세만큼이나 기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도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도 기도를 위한 장소를 따로 선택하셨음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첫째 주간에서
찾는 선익, 다시 말해서 회개와 뉘우침의 은혜와 자신이 죄인이라는 개달음을 더 쉽게 얻기 위해서는 방문을 닫고 주위를 어둡게 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장소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은 우리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에 도움이 되는 장소를 선정하거나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거기서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영신수련에서는 일정한 형태의 "거룩한" 장소(성당,
경당…)에서 기도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머물면서 기도함으로써 성화된 장소, 특히 성체가 모셔진 장소는 그 신성한 특성
때문에 기도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건물들과 그 장식들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여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3.1.3. 기도의 시간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스턴트 관계란 없듯이 또한
인스턴트 기도란 없다. 어떤 사람과 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면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할 각오를 해야 하듯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요 대화인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의 기도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는 시간 부족이라고 느끼는 강박관념이라고 볼 때 기도에 있어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 기간 중에 기도는 한차례에 60-90분의 기도를 하루에 4-5번 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기도를 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는 기도하고 싶은 때에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기도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기도를 위해 정해놓은 시간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둘째, 기도 시간표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는다. 셋째, 정해진 기도시간보다 조금 더 오래 기도한다. 이냐시오식 묵상에서는 마지막 10분을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만일 기도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듯이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의 투쟁과 충실함에 대한 상으로서 기도 끝에 주시기로 마련해 놓으신 많은 은총들을
놓쳐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기도에 대해 거의 습관적인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3.1.4. 기도를 위한 갈망
원의, 바람, 욕구, 갈망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러한
갈망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망은 더욱이 이냐시오에게는 그가 기도를 시작할 때 ‘갈망을 위한 갈망(마음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의지적으로라도 갈망을 갖고자 하는 것)’으로도 만족할 만큼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기도할 때마다 정확히 두 번의 청원 기도를
통해서 갈망의 열정을 고무시켰다.
한편, 갈망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갈망은 살아있는 우리
인간이고,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갈망을, 즉 우리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탄식하고 계시는 성령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갈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1.5. 성령께 대한 신뢰와 의탁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 성부께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동방교회에서는 기도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중요시 한다. 성령은 기도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들여 높이시어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과 일치를 가능케 하시고, 인간에게 필요한 은총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그러나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기도하고 계시기에 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깊이 신뢰하는 동방인들이 성령청원기도인
에피클레시스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서도 성령의 이러한 역할은 상당히 강조되고
중시된다. 영신수련 피정의 첫날부터 성령께 대한 성서묵상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함께 하시면서 이끄시는 성령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분을 느끼고 알아듣는 훈련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노력은 피정의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결국 영신수련 전체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영신수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의 기도, 관상의 기도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령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2. 영신수련의 기도
3.2.1. 묵상
동방영성 안에서 Theophane the Recluses는 기도를, ‘몸과 말로
하는 기도’, ‘정신적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 ‘영적 또는 관상적 기도’의 네 가지 등급으로 나눈다. ‘몸과 말로 하는 기도’는
성서를 비롯한 어떤 텍스트를 읽고 낭송하고 머리를 숙이는 것 등을 말하며 주로 기도를 위한 준비단계의 차원이라 할 수 있고, ‘정신적 기도’는
지적인 사고를 활용하는 것으로서 서방에서 말하는 명상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고, ‘마음의 기도’는 이해가 아닌 깨달음의 단계로서 인간의 전존재적
차원의 기도라고 할 수 있고, ‘영적 또는 관상적 기도’는 영적 요소가 육적인 것, 즉 인간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능가하여 영의 깊이 안에서,
인간적인 것의 침묵 속에서, 황홀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차원을 말한다.
그런데, 이냐시오의 묵상 안에는 이 네 가지 차원이,
명확하게는 구별되지 않지만,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냐시오 묵상 안에 나타나는 위와 같은 기도의 차원들을 단계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냐시오식 묵상기도는 준비기도, 본기도, 기도 성찰이라는 세부분으로 구분이 된다.
3.2.1.1. 준비기도
준비기도는, 약 10-15분의 시간동안, 성서나
<영신수련>의 내용을 읽거나, 미리 읽어두었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본기도 때 해야 할 묵상요점을, 즉 전체 기도의 주제를
정리하고, 기도를 통해서 청할 은총을 정하는 부분이다. 동방영성에서 일컫는 ‘몸과 말로 하는 기도’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몸과 말로 하는
기도’의 영적독서 중에서 성서는 대단히 중요시 되는데, 이는 영신수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보면 성서 텍스트에
맞춰 매우 충실하게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책인 성서의 의미는 영적인 사람 그리고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찾아가는 사람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며, 실제로 매일 매일의 성서기도는 삶의 순간순간들의 필요에 일치하여 점차로 그 사람의 마음을
신적인 생각으로 충만케 하기 때문이다.
3.2.1.2. 본기도
본기도는 이냐시오 묵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본래적
의미의 이냐시오 묵상이란 이 본기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략 40-6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준비기 때 요약했던 묵상요점을 중심으로 기도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본기도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기도에 몰입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고 마음을
가다듬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여 준비기도 때 마련한 묵상요점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초점을 맞추는 단계이며, 세 번째는
이렇게 맞추어진 초점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어맡겨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마음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단계이다. 첫 단계가 전술한 바 있는, 기도를 위한 준비로서의 ‘바른 자세’라고 한다면, 둘째 단계는 ‘정신적 기도’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첫째, 둘째 단계는 모두 셋째 단계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본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 세 번째 단계에서 동방 영성에서 말하는 마음의 기도, 관상의 기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2.1.2.1. 마음의 기도
교부들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의 완전한 상태이며
일체성이고, 모든 인간 선택에 대한 공동 협력이며, 인격에 대한 확고한 성향과 상태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이냐시오 영신수련에서는
‘본디자리의 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이면 누구나가 소유하고 있는, 하느님을 닮은 아름답고 원만구족하고
통합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이 모습이 바로 원죄 이전의 아담의 모습인 것이다. 이 모습은 인간이면 누구나가 무의식 세계 안에 간직하고 있는데,
실제 삶 안에서 이러한 ‘본디자리의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유는 원죄나 원죄적 성향으로 인하여, 즉 하느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의식세계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 세계가 통합되지 못하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세계를 뛰어 넘어 저 무의식
세계에 존재하는 ‘본디자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전존재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특별한 노력은 넓게는 영신수련의 전 과정을 통해서, 좁게는 한차례의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영신수련의 전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첫째·둘째 주간의 죄의 묵상과 영적식별 작업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고 자신의 전 존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식별함으로써 본디자리의 인간을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한차례의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본기도에 이르러 ‘바른 자세’와
‘정신적 기도’의 단계를 거쳐, 온갖 분심에서 벗어난 청정심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령께 자신을 내어맡기고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과
일치하는 마음의 기도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외부로부터 혼란케 되지 않은 마음은 안에서부터 오는 신적 영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방에서 말하는 ‘마음의 기도를 위한 수행’으로서 ‘마음의 정화’와 ‘신적 영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전 과정은 한마디로 마음의 정화와 신적 영감을 통해서 ‘본디자리의 인간’으로 향해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3.2.1.2.2. 관상 기도
동방 교부들의 영성에서 관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방식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것, 즉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지속적인 집중을 말한다. 이는 모든 기도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고,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있어서도 ‘본디자리의 인간’이 드리는 기도가 된다. 즉 낙원에 있는 아담이 완벽한 관상 생활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상을 위해서는 마음을 정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전술한 바 있는 ‘마음의 기도를 위한 수행’에 있어서
‘마음의 정화’와 같다. 이러한 마음의 정화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관상에는, 창조된 모든 것 안에서 신적인 것들의 표징과 상징을 바라보게
되는 것, 선과 악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는 것,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관상 기도는 마음의 기도에 있어서 ‘마음의 정화’와 ‘신적 영감’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관상의 기도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기도의 궁극이다. 이냐시오 영신묵상의 본기도 부분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기도의 상태가 바로 관상의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상의 기도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바로 애덕실천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랑 실천 없이
그리스도교적인 면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사랑이신 하느님은 오직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계시되기 때문이다. :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5) 따라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은 전 과정에 걸쳐서 애덕의
실천을 강조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폭시키기를 강조하며 그 마지막도 ‘사랑을 위한 관상’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점에서
관상의 기도는 단지 특정 기도의 시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이 된다. 즉 ‘본디자리의 인간’, ‘원죄
이전의 아담’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이제 기도는 이냐시오식 묵상기도의 본기도 안에서 생활 안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언급할
‘끊임없는 기도’의 토대가 된다.
3.2.1.3. 기도 성찰
기도 성찰은, 약 10-15분 동안, 본기도 부분을 반성하고 그
내용을 노트에 적는 부분이다. 주로 본기도 때의 전체적 분위기나, 특별한 깨달음, 마음의 움직임, 청한 은총을 받았는지의 여부, 기도가 잘
되었거나 혹은 잘 되지 못한 점에 대한 원인 등을 성찰한다.
3.2.2. 미사
30일간의 영신수련 중에 미사는 그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동체적 기도는 우리 마음들 사이 그리고 교회와 하느님 사이를 결합하는 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 중에 봉헌되는 미사는 하루 4-5차례의 개인 기도를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연결하여 하느님께 봉헌된다.
3.3. 끊임없는 기도
이냐시오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기도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과 더불어 하느님에 의해 매료되어 있음이요,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냐시오식 기도의 특징은 긴 기도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적으로 하느님과 접촉을 시도하는 데에 있다.
기도가 하느님과 통교하는 최상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하루 24시간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매순간의 기도는 당연히 너무 짧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도의 시간이나 횟수만을 늘린다면 곧 지침과 분심으로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정화되고, 풍요로운
마음의 좋은 상태는 그 자체로 기도라 할 수 있고, 삶은 상태요, 마음의 습관적 성향이요, 자세라고 할 때, 정화되고 풍요로운 마음의 좋은
상태를 가진 사람의 삶은 항상 기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동방 영성 작가들은 마음의 이러한 습관적 상태를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두는 것을 또한
‘마음의 기도’라고 불렀다. 이냐시오식 ‘끊임없는 기도’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다.
더 나아가 이냐시오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한다.’는 관상의 차원에서 이 ‘끊임없는 기도’를 ‘현실화’한다. 이냐시오에 의하면, 말할 때나, 걸을 때나, 보고
맛보고 듣고 생각할 때나, 행동하는 그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러한 훈련은 단지 짧은 기도 가운데서도 주님의
위대한 은총의 방문을 수반하거나 또는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고 한다(이냐시오 서한 206). 이렇게 하여 관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의 삶이 기도가 될 수 있다.
4. 평신도를 위한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방향성(맺음말을 대신하여)
4.1.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의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냐시오 영신수련"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의 일치, 즉 관상을 향한 깨달음의 여정으로서 마음과 성령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동방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냐시오식 영신 묵상 안에 요가나 참선 등의 동양적 기도 방법들이, 비록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게
도입되고 있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오늘의 세상은 대부분 서구적 사고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과학문명의 발달과 산업화는
사람의 인식을 무의식적·영적인 세계보다는 의식적·감각적 세계 안에만 가두어 놓는다. 그리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목말라
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난다. 양적으로는 많은 시간동안 기도를 하지만 오히려 머리만 아프거나 마음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동방 영성의 "마음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에 있어서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마음의 기도"의 단계로 옮겨가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마치 수십 년 수도를 해야 깨달음을 얻는 참선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애매모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마치 "마음의 기도"를 자세히 풀이해 놓은 교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늘날 서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더욱 유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구성이 철저하게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기도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고, 오류의 위험성이 없이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4.2.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한계성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위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영신수련 안에 포함되어 있는 기도의
내용과 양이 무척 방대한데, 한 달간의 여정 안에서 그것이 빈틈없이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다. 그래서 언뜻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성령께 대한 의탁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탁마저도 인간적인 갈망 안에 포함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인간적인 갈망, 인간적인 이성의
사용 등과 같은 인간적인 노력이 상당히 요구된다. 그래서 묵상이라는 정적(靜的)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전진 또 전진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주며 그것이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은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성소
지망자들에게는 - 위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 유용하게 적용될지언정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엄두도 못 낼 무지막지한 피정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4.3. 평신도를 위한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방향
위에서 제시했던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한계성은
평신도에게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받아왔던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까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평신도를 위한 영신수련을 마련한다는 취지를 넘어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자칫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특성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또 다른 영신수련을 하나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상당한 주의와 통찰을 요하는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대안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평신도들에게 조차도 쉽게 다가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묵상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4.3.1. 정적(靜的)인 기도와 동적(動的)인 기도
인간의 심성 안에는 정적(靜的)인
요소와 동적(動的)인 요소가 모두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도 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나 기도모임의 형태들을 분류해 보면 정적인 형태의 기도와 동적인 형태의 기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 비움의
기도, 성체조배, 예수기도, 예수마음 호칭기도 등과 같이 주로 개인적인 묵상의 형태를 띤 것은 정적인 형태의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성령
쇄신 운동, 레지오 마리애 등과 같이 공동체적 모임의 특성을 지닌 것은 동적인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성령
쇄신 운동이나 레지오 마리애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정적인 형태의 기도 보다는 동적인 형태의 기도에 더 쉽게
친화됨을 알 수가 있다. 성령 쇄신 운동의 7주간의 프로그램 및 묵상 방법들을 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 비교해 보면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상당부분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냐시오식 영신수련보다는 성령 쇄신 운동에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성령
세미나의 동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 신자들의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기도 모임의 노래와 박수, 안수, 치유행위, 고조된 분위기
등은 이러한 동적인 성격을 한층 더 돋구는 형태라 하겠다.
그러나 이처럼 신자들이 동적인 형태의 기도에 더욱 쉽게 다가가고
친해진다고 하는 것이 정적인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신자들은 정적인 형태의 기도에 더욱 목말라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단학선원이나 참선, 요가 등에 대한 신자들의 적지 않은 관심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정적인
형태의 기도에 쉽게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동적인 형태의 기도에 비해서 방법이 너무나 모호하고 어렵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4.3.2. 기도의 단순화
이미 전술한바 있듯이 이냐시오 영신수련은 그 특성상 상당히
정적이다. 그리고 일반 신자들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어렵고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기도 방법이다. 따라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모든
신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기도의 형태 중에 예수마음 호칭기도라는
것이 있다. 이 기도의 형식이나 내용은 이냐시오 영신수련과 거의 흡사하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30일간의 피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이 다시
4주간의 단계로 구분되어 있듯이, 예수마음 호칭기도에서도 40일간의 영성수련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시 3단계의 영적여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묵상기도의 방법 및 형태에 있어서도 이냐시오 묵상과 거의 흡사하다. 그런데, 이냐시오식 묵상과 영신수련에 비해서 예수마음
호칭기도와 영성수련은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도 많이 행해지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이 기도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냐시오 영신수련과 묵상에 비해서 예수마음 호칭기도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장시간의 묵상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그 시간에 마음을 한 데 모으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냐시오 묵상기도에서는 자신의 의지로(실제로는 성령께서 해주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안정된 기도에로 들어선다. 이러한 방법은 일반 신자들이 하기에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마음 호칭기도에서는 기도문의
반복을 통해서 끊임없이 마음을 한 데로 모으면서 묵상기도에 진입할 수 있다. 기도문을 단순히 반복하는 이러한 방법은 신자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마음 호칭기도를 통한 묵상기도에의 접근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냐시오식 묵상기도에 비해 더욱 용이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적인 형태의 기도 특히 묵상기도의 형태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쉬워야 한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전체 영신수련 프로그램이나 개별적인
묵상기도의 차원 모두에 해당된다. 특히 개별적인 묵상기도의 차원에 있어서는, 기도 형태가 매우 단순해서 하기 쉬우면서도 마음을 한 데 모아주어
기도에 깊이 들어가도록 해주는 "예수기도"를 활용하는 것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관상의 기도는 어쩌면 무위(無爲)의 기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에도 걸맞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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