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의 사상과 그 영향
 
 ◀ 이숙종 교수(강남대, 2001년 유네스코-코메니우스메달
수상자)
   
 현대교육의 창시자인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는 지금부터 410년인
1594년 3월 28일 현재의 체코공화국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장소는 수도인 프라하에서 서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져
있는 뻬레로프(Prerov)시를 중심으로 약 5km 반경 내에 위치하고 있는 후헤르시키 브로드(Uhersky Brod), 
니브니쩨(Nivinice), 혹은 콤니아(Komnia) 등 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그가 태어난 정확한 장소는 세 마을 중에 한 곳임엔
틀림없으나, 필자가 2001년 9월에 그  지역을 방문했을 때, 현재 각 고장에서 자신의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념하고 있는 재미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미 4세기 전에 태어난 코메니우스의 사상과 영향이 한국의
일반교육계와 특히 기독교 교육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물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은 없지 않으나 매우 다행한 일로 생각된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에서 자연주의 교육학자인 스위스의 쟝 자크 루소(1712-1778)와 인본주의 및 이상주의 교육학자인 요한 하인리히
페스딸로찌(1746-111827년)의 사상이 소개되어 왔으나, 그들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코메니우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널라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교육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코메니우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게 회자되어 왔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의 교육심리학 교수였던 니콜라스 메레이 부틀러(Nicholas Murray
Butler) 박사는, "현대사에서 코메니우스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교육과 그와의 관계는 현대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그리고
현대철학에서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같은 동일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라고 언급하였다. 아프리카의 성자인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박사는, "코메니우스는 항상 평화의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을 깨달았던 최초의 철학자이며, 그와 더불어 철학은
정치의 국면에 과감하게 침투하고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교육철학자인 로버트 울리히(Robert Ulich)에 의하면, "우리들
자신이 인간성의 궁지를 통감하면 할수록, 코메니우스의 정신에서 나타난 역설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게 된다.
   스위스의
현대 심리학자인 쟝 피아제(Jean Piaget)는  코메니우스를 교육학을 우주적으로 인식한 최초의 사람일뿐만 아니라, 현대 사실주의
창시자로서 지식의 단계인 진보적인 감각적 지각력과 인식과정의 체계를 정립한 최초의 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의 이숙종 교수에 의하면,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분명한 목적으로 현세의 생활뿐만 아니라, 미래생활의 향상을 위한 그들의
욕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일을 의도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교육은 인간성의 재발견과 인류사회의 재건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확산하는 일에 두고
있다.
  실제로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육사상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인간성의 회복과 세계평화의 성취를 염원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고귀한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1957년 유엔 교육 과학 문화기구(UNESCO)가 창립하여 세계 인류의 복지와 번영을 목적으로 회원국가들의
교육의 향상과 과학의 발달, 그리고 다양한 문화의 상호교류를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새 인격체로 변화하며,
동시에 세계사회를 평화의 공동체로 형성하려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재를 통하여
코메니우스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글의 차례는 1. 시대적 상황과 생애, 2 영향받은 중요사상 및 사상가들,
3. 교육사상의 근간이 되는 신학사상,  4. 학교제도와 기능의 이해, 5. 지식의 내용, 6 지식의 형성과정, 7. 새 교수법, 8.
범지학 사상 , 9. 범교육 사상, 10. 교회일치사상, 11. 현대사회와 그의 영향 등으로 소개될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생애
 
    코메니우스는 1592년 3월 28에 모라비아 지방에서 철저한 형제단 교회의 신자였던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정확한 곳은 모라비아 지역의 뻬레로프를 중심으로 우헤르시키 브로드, 니브니쩨, 콤니아의 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배경으로 태어났으나, 1604년 카톨릭 합스부르크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군대가 모라비아 지역을 침범하여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개신교도들과 싸우고 있었을 때, 부모와 두 명의 누이를 잃게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세 살로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전쟁의 참화와 비극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코메니우스는 그의 친척의 보호를 받으며 니브니쩨에 위치한 형제단 공동체가 경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종교와 음악, 쓰기, 읽기, 산수 등의 기초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1608년에서 1611년 사이에 모라비아 지방에서 가장 우수한 뻬레로프 문법학교에 진학하여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과 그의 지성적 지평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라네키우스(Jan Lanecius)감독의 지도를 받는 동안, 그의 영특함을 인정받고 미래의 성직을 수행할 모든 준비를 단계적으로 연마하였다. 그의 재능을 인정한 스승은 그에게 “지식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모스”(Amos)라는 성서적 별칭을 부여하였다.
    코메니우스는 1611년부터 1613년까지 독일의 국경지방에 있었던 헤르본(Herborn)의 낫소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신학과 인문과학을 배우면서 모든 학문의 종합인 범지학(汎知學)사상과, 그리고 모든 사물들의 우주적 개혁의 근원이 되는 천년왕국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13년에 헤르본에서 그 당시 독일 영토에 속했던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을 처음 방문하였는데, 이곳이 곧 그의 마지막 생애를 보냈던 곳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대학에서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의 교파분열과 교리의 이질성을 통합하는 교회일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14년 독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가 다녔던 문법학교 뻬레로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경험했던 학교교육과 교수학습의 부정적인 문제들을 회상하면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좀더 즐거운’ 교수방법을 고안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교육현장에서 얻은 실제적 경험으로 효과적인 교수방법에 관한 저술에 착수하였다. 그가 신학을 전공한 후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기 전에 먼저 교사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 종사하게 된 것은 교육자로서 그의 생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코메니우스는 1616년 형제단 교회에서 성직자로 안수를 받은 후 모라비아 북쪽에 위치한 플네크(Fulnek)시의 아름다운 교회의 담임목회자로서 그리고 학교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 그는 이 고장의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단란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의 생활이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행복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주변국가와의 종교적 문제로 그의 개인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미  1609년에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루돌프(Rudolph)가 마침내 종교자유헌장에 서명하였다. 처음에는 형제단 교회와 같은 개신교도들이 합법적으로 종교자유와 예배의 보호를 받으며 안정된 신앙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그 당시 체코왕국의 국민들 중 십분의 일이 카톨릭 신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의 장래와 활동이 매우 안정되게 보장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곧 왕위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그가 통치하고 있었던 어디에서든지 개신교운동에 가담하였던 이단자들을 몰아내거나 처형할 것을 선언하였다.
  체코왕국을 둘러싸고 있었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내의 신․구교 사이에서 종교적 신앙의 차이들이 지나치게 심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을 반대하고 있었던 이단자들에 대한 위협적인 종교재판이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 도처에서 진행되어 개신교운동을 무력하게 하였다. 물론 스페인은 코메니우스가 탄생하기 4년 전에 스페인 함대가 영국에 패배하여 해상에서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해상권을 중심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카톨릭과 위그노 교도(Huguenot, 역주-16, 17세기 프랑스 신교도)의 분할에 의해 황폐되었으며, 독일은 카톨릭 지역과 개신교 지역사이에서 분할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유의 고장으로 알려졌던 영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종교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목숨을 잃어가면서 투쟁하였다.
   1618년 코메니우스가 중앙유럽에 위치한 그의 사랑스러운 고장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개신교 운동을 주도하였던 순례자들은 오랫동안 화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신세계의 개척자들을 따라서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 위치했던  제임스타운(Jamestown)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교도들을 따라서 자유의 세계로 이주하였다. 화란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종교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다. 화란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용감한 백성들의 투쟁으로 80년 동안 종교전쟁을 종식시킬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를 둘러싸고 있었던 보헤미아 지방에서 13세기에 종교개혁운동이 발생하여 그 후 2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운동은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1 세기 전에 시작되어 불과 같이 확산되어 갔다. 그 당시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존 후스(John Huss, 1347-1415))는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개신교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특히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문제들과 교리적 결점들을 비판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짙게 깔려있는 어두운 구름 속에 은빛 줄기가 드리워 있는 자연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개혁운동에도 어두움이 드리워 지기 시작하였다. 보헤미아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카톨릭 소수집단이 개신교 운동을 전개하였던 개신교 교회들을 폐쇄하고 파괴하면서 새로운 종교적 박해를 시작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위험성이 가중되고 있었을 때, 형제단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보헤미아에 있었던 개신교 귀족들은 이에 대항하여 강력하게 항거하였다. 개신교 후계자를 선출하였다. 그들의 군대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성벽에까지 침범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종교개혁과 개신교운동에 동참하였던 사람들이 그 당시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합스브르크 통치자들의 종교적 박해에 대항한 지역적 반란으로 유럽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일 중 하나였던 삼십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1618년에 발발하였다. 유럽에서 카톨릭교회가 통치하였던 지역과 개신교 지역사이에 일반화되었던 이러한 전쟁과 갈등은 마침내 황폐와 죽음, 그리고 가장 암담한 비극의 세대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삼십년 전쟁은 그 참상의 기간, 계속적으로 변천하는 참상의 장면과 동기, 그 참혹한 재난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특이한 사건으로 기억되어 왔다. 코메니우스가 외쳤던 것처럼, 이러한 “분노의 폭풍”으로 그 당시 평화로운 세상이 마침내 산산이 부서진 파도의 거품과 같이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그의 생의 여정에서 첫 번째로 처참한 고통과 재난을 경험하게 되는, 즉 그는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가장 귀중한 것들과, 그리고 그에게 가장 가깝고 친근했던 사람들을 잃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제국의 카톨릭 국가들과 위협적인 스페인 군으로부터 모집된
페르디난트 제국의 군대들이 1620년 후반인 보헤미아인들이 “낙엽의 달”로 부르고 있었던 11월에 화이트마운틴(White Mountain)의
전쟁에서 보헤미아인들을 몰아내었다. 곧 개신교사상의 근절이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공식적인 예로서 지도적인 개신교 귀족들이 경우에 따라서 잔인한
고문으로 고통 당하며 처형되었다.
   스페인 군인들이 플네크를 짓밟았다. 재난의 파도들이 코메니우스를 삼켜버렸다. 그는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그가 살았던 집을 잃었다. 그는 그의 학교, 교회, 그의 일을 잃었다. 그는 “그의 마음의 자식들”인 그의 서재와 원고들을 잃었다. 그는 그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가 장모(丈母)와 함께 페레로프로 살기 위해 갔으나 그는 몸을 숨겼다. 곧 아내는 다른 아이를 세상에 잉태하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아마도 페스트로 그들 중 세 사람을 잃었다.
  재난이 있은 후 일년 내에 코메니우스는 보헤미아의 천로역정으로 부를 그의 풍유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함께 지냈던 네 명 중 한 사람으로서 방황하는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들이 말했듯이, 봉사와 보다 원대한 명예를 위하여) 나와 더불어 살았던 사람들의 수였기 때문에, 나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때에 갑자기 번개와 천둥과 무서운 우박과 함께 폭풍이 우리를 휘몰아쳤다. 나와 함께 신속하게 흩어졌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족쇄를 채웠던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함께 서둘러서 안전하게 피난처를 발견했을 때, 사신(死神)의 화살들이 공포로 엄습하여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절망 속에 홀로 남았다.   
  “나는 결혼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내가 생각할 때 나의 경우와 같이) 결혼에 성공했을 때 그로 인하여 더 많은 기쁨이 있는지 혹은 더 많은 상이한 원인으로 발생한 슬픔이 더 많은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얻은 결론은 단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간에 슬픔이 있을 뿐이며,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해도 달콤한 것과 쓴맛이 함께 혼합하여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언급한대로 코메니우스의 개인적인 재난들은 다만 그의 교회와 그가 사랑했던 조국의 재난을 반영할 뿐이었다. 제국의 군대들에 의한 정복은 독립국가와 문명의 선도자로서의 보헤미아의 존재에 종식을 고했다. 삼 백년 동안 독립이란 다시 찾아 올 수 없었으며, 다만 붉은 독재자가 절망의 철의 장막을 드리우기 전 거의 한 세대동안 유지되었다. 
  인구가 집중되었던 국가로서 보헤미아의 존재가 종식되었다. 황제 피르디난트 2세는 40년 동안 폐허의 전쟁에 가담하여 개신교의 이교도들을 짓밟았던 광신주의자였던 그의 삼촌 스페인의 필립 2세와 닮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스페인 군대의 원조로 보헤미아에서 그의 젊었을 때의 서약인 그가 통치하는 어디에서든지 개신교사상을 파괴하는 일을 이행하였다. 그는 최소한 인간의 정신에 반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 일을 수행하였다. 개신교교회들과 개인의 소유재산이 몰수되었다. 지도자들의 무덤들이 파헤쳐지고 그들의 뼈들이 들판에 덮혀 있었다. 개신교의 출판물들, 특히 형제단교회의 출판물이 발각되어 보관하고 있었던 집과 함께 불에 타버렸다. 카톨릭교도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고, 결혼과 사업에 착수하여 정당한 권리와 병원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미사에 참석을 거부하는 것은 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고의적인 화페 가치의 하락은 국가에 고통을 가중시켜 극심한 경제적 파탄에 빠뜨렸다. 위원회와 병사들의 철수로 전국에 걸쳐 고문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온 나라가 피의 벌판이 되기까지 수 천명의 개신교도들이 채찍으로 맞으며, 불에 타버리고, 산산조각으로 잘려나갔다.              
  교회목회자로서 그리고 교구학교 교장으로 종사하던 중 같은 해에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체코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화이트 마운틴(White Mountain)전쟁에서 개신교군대가 패배하자 그는 모든 재산과, 심지어 그의 어린 부인과 두 자녀 마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이 전쟁에서 체코는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풍부하고 고유한 문화생활도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는 7 년 동안 그의 고국에서 깊은 동굴과 황량한 오두막집, 심지어 텅 빈 나무 등에서 피신하는 생활 전전하다가 1628년 초엽에 폴란드로 망명가서 살고 있었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합류하고 레즈노(Leszno)에 정착하였다. 그 이후 그는 그의 고국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었던 세계의 시민이 되었다.
   그는 레즈노에 수년동안 사는 동안 다시 한 번 적의 군대에 의하여 그의 집과 서재(書齋)가 소실(燒失)되어 그가 집필하였던 귀중한 저서들과 수많은 문서들을 잃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42년간의 긴 여생동안 조국을 잃은 망명객으로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면서 그의 교육사상을 발전시키는 교육학에 관한 많은 저서들의 집필과 그의 사상을 실제 교육현장에서 실천하며 접목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항상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 즈음에 그의 두 번째 아내를 잃게 되었다. 그는 망명지에서 모라비아 교단의 흩어진 교회와 교인들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에 힘쓰며 용기를 붓 돋아 주는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네델란드의 암스텔담(Amsterdam)으로 가서 1670년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생활환경과 조건에서 위대한 인물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와 같은 환경에서도 그는 주님을 섬기며 동족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교회생활과 예배에 관한 지침서나 문서뿐만 아니라, 교육에 관한 다양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그 중에서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평화 (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를 저술하였으며, 여기에서 혼탁한 세상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고 있는 한 순례자(a pilgrim)를 묘사하면서 마침내 세상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찾게 된다. 이 저서는 해외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던 다른 망명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위대한 자원이 되었다. 망명생활 중 코메니우스는 흩어진 그의 교단이 필요로 하는 많은 저서들을 저술하여 도왔으며, 충실하게 목회에 전념하였다. 목회를 위해 저술한 많은 신학적 저작들이 그가 목회에 다음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교육분야에 관한 저서들로 활용되었다.
 
 
소망스러운 신앙생활(A Life of Hopeful Faith)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생활-이야기를 돌이켜 보며  그의 소망스러운 신앙이 강조해 왔던 그 길을 따라 가기로 해 보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종교개혁의 실패이후에 코메니우스가 망명의 길을 따나자 처음에 폴란드로 갔다. 거기에는 1632년에 그는 그 교회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그 당시 형제단 교회의  일곱분의 감독이 있었으나, 1656-1662년에 코메니우스가 그가 사랑하는 교회의 최후의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레스노(Leszno)로부터 30년 전쟁의 관망자였다. 스웨덴 왕인 구스타프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가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코메니우스는 그가 개신교도들을 위해 세상을 안전하게 하거나 혹은 최소한 형제단교도들이 안전하게 고국으로 귀환하게 할 용사로 보았다. 그러나 1632년에 구스타프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소망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동안 코메니우스는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1641년에 영국의회의 초청을 받고 과학적 탐구를 체계화하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생애동안 관심을 두어 왔던 문제들, 즉, 학교개혁, 종교개혁(특히 다양한 개신교집단들의 화해와 교회일치운동) 그리고 우주적 평화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의 생의 말년에 이러한 노선들에 따라 인류의 재조직을 위한 청사진, 즉, “빛의 길”(Via Lucis)을 저술하여 이 저서를 영국과학아카데미에 헌정하였다.
    
고향이 없는 많은 집들
    영국에서 시민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코메니우스의 계획을 추종하였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장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는 프랑스와 홀란드에서 그의 범지학에 관한 저술을 계속할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스웨덴의 총독, 옥센세리나가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죽은 후에 체코의 문제를 평화롭게 처리해 줄 것과 체코 망명자들을 무사히 귀환하는 일을 도와줄 것을 희망하면서 스웨덴을 위해 일할 결심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1642-1648간 프러시아의 엘빙(Elbing)에 살면서 그의 결심을 촉구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웨스트폴리아 (Westphalia, 1648)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났을 때, 루터교파와 칼빈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이득을 주었으나, 형제단교단은 보다 소규모의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소망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레스노로 다시 돌아 갔다. 교단의 감독으로서 그의 직책과 의무는 형제단 교도들이 모여 있었던 슬로바키아와 항가리로 가는 일이었다. 코메니우스의 생애 중 이 기간동안 그는 그의 학우이자, 신비주의적 설교자인 니콜라스 드라빅(Nicholsa Drabik)과 접촉함으로써 실수로 가득 찬 한 장(章)을 장식하였다. 드라빅은 합스부르크를 굴복시키고 그들이 상실하였던 종교개혁교회에로 귀환하게 할 유럽에 있는 개신교통치자들과 협력할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드라빅의 전망들을 믿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계시들이라는 확신을 함께 공유하였다. 코메니우스가 드라빅을 정치적 조력자로 더욱 더 의존하고 있었을 때, 이것이 더 많은 어려움을(난관) 가중시켰다. 코메니우스의 생애에서 이러한 슬픈 장(章)은 그의 고국으로 되돌아 갈 그의 욕망으로부터 생겨났다.
   코메니우스는 고통으로 가득찬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암스텔담에서 보냈다. 그는 그 당시 부호이자 상인이었던 로오렌스 드 기어(Lawrence de Geer)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학자이자 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시의회는 그의 다양한 교육학에 관한 저서들(Opera didactica omina, 1657-8)의 출판을 목격하였다. 그는 그의 광범위한 범지학의 서론적인 책들, Panergesia and Panaugia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가 이 저서들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의 친근한 동료들에게 출판을 위탁하였으나, 결코 출판되지 못한채 상실되고 말았다. 그것은 마침내 1934년에 할레(Halle)에서 발견되어 1966년에 프라하의 과학아카데미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코메니우스는 1670년에 이 세상을 떠나 홀란드 나르덴(Naarden)에 안장되었다.
 
 
코메니우스와 형제단교회의 통합
                          
    보헤미아에서 죤 후스(John Hus, 1369-1415)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그가 화형에 처단되었을때도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후스파 사람들(the Hussites)로 모이기 시작한 많은 소규모 공동체들은 각기 그들의 방법으로 로마를 대항하여 항거하였다. 최초의 “형제단공동체”가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던 것과 같이 1457년에 쿤볼트(Kunvald)라고 불리우는 마을로 이동하여 함께 살기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고 있었다. 시작할 때부터 형제단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던 것과 같이, 12세기에 피터 왈도(Peter Waldo)의 교훈을 보존하여 왔던 영적 공동체인 왈도파사람들(the Waldensians)들과 접촉하면서 믿는 사람들의(성도)들의 평등성을 증진하며 교회의 교권주의를 반대하였다 (9). 또한 형제단교회의 창립을 위해 중요한 문제는 신앙의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투쟁과, 특히, 전쟁의 참여를 비난하였던 피터 첼시키(Peter Chelcicky)의 사상이었다. 첼시키는 그 당시 교황과 황제를 “참 신앙의 그물을 뚫어 버린 고래들” 이라고 과감하게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를 세속적인 제국(帝國)의 머리로서 설립했기 때문이다. 형제단교회는 물질적인 욕심을 부정하고 세속적인 세력을 거부하는 이와 같은 사상들을 받아들이면서 권력들과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형제단교단은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세력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있었으나, 오히려 믿는 자들이 점점 증가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계층을 불문하여 확대되어 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같이 가난하게 되기를 서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체코국민들에게 풍부한 영적 자원들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으며, 오늘날 교회에서 체코어로 부르고 있는 찬송가들을 작곡하였다. 그들은 루터가 찬사를 보냈던 신앙고백을 출판하였으며, 특히, 세계에서 최초로 교회일치 고백서인 “체코 고백서” Confessio Bohemia 에 확실하고 정확한 이정표를 남겨놓았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생애동안 형제단교회가 점점 쇠퇴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위치하고 있다. 1620년에 화이트 마운틴 전쟁에서 패배이후 죽음의 바람이 강타하여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이주하게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형제단교인들을 이끌고 산들을 넘어 폴란드로 인도하면서 “이러한 신앙의 숨은 씨앗이 자라서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형제단교인들이 전 유럽에 흩어지면서 그와같은 전망이 점점 흐려져 갔다.  어떤 사람들은 코메니우스와 함께 폴란드로 이주해 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항가리 영토인 트랜실배니아(Transylvania)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독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들이 흩어져 있는 곳마다 루터파 사람들과 칼빈주의자들과 가톨릭사람들들 사이에서 갖은 박해를 받고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죽어 가는 교회”가 남긴 유산에서 보헤미아교인들과 폴란드교인들과 “개신교 공통체의 사랑받는 자매들”과 그리고 비록 로마교회이지만, 우리들을 낳아 주신 어머니인 모 교회에서 개혁을 요청하였다. 오늘날의 교회일치언어와 같은 그러한 소리로서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나는 다양한 의견의 일치와 그들 사이에서 화해와 그리고 신앙 안에서 연합하고 성령의 통합의 사랑을 위해서 생생한 열망을 전달합니다.”
 
 
교사의 교사(스승)
                    
    코메니우스가 크게 환호하고 있었던 교육이론의 발전은 그가 형제단교회와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형제단교회는 매우 수준이 높고 발전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교인들간의 상호 보살핌과 봉사로 인한 생산적인 사랑으로 함께 연결되어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에서부터  교육에서 심리학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을 때에 심리학에 대한 코메니우스의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매우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교리문답식으로 진행하는가에 대한 그의 교훈이 그가 아동의 개체발생을 어떻게 민감하게 고려하고 있었가와 그리고 그가 정신적 발달단계를 어떻게 일치시키고 있었는가를 잘 제시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을 위해 학습, 특히, 중세기에 학생들에게 매우 무거운 짐이 되었던 언어학습을 더욱 쉽게 하기 위한 코메니우스의 시도와 일치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인상, 즉, 사실적인 대상이 학습을 용이하게 한다는 심리적 원리를 발견하여 전 세계에 알려진 그의 저서, Orbis pictus에서 고안하였던 새 언어교수법을 창조하였다. 그는 자연의 관찰을 통하여 자연의 사물들은 강제로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발생한다는 원리를 통하여 교육원리들을 추론하였으며, 이 원리들은 아동의 능력들을 비인위적이며 자발적인 발달을 유도하며 따라서 학습이 즐거움과 께임 혹은 놀이로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 세계를 통하여 교육원리에 대한 반응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지대하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는 현대교육의 창시자로 찬사를 받고 있다.
 교회는 교육계가 코메니우스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큼 신소하게 그의 유산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쟝 피아제(Jean Piaget)는 코메니우스를 “교육학을 광범위하게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극찬하면서 “그는 오늘날에 와서 그의 사상을 교정시키거나, 실제로, 전달하는데 모순이 있을 수 없지만, 다만 새롭게 해석하고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는 저자들 중 한 사람이다.” 코메니우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하고 있는 한 인물임엔 틀림없다. 그 역시 이와 같은 그의 명성을 수용하려고 할 것이다. (3)그는 특별한 교단의 배경과 충성에 개의치 않고 매우 가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만약 오늘날 코메니우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컴퓨터 와  시청각교재 및 시설, 지식의 개척자들, 그리고 학문의 상호교류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에 지대한 관심과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인용하면서 각 나라의 정부에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것보다 백 배 이상 교육에 관심과 투자할 것을 촉구했다.
   기독교의 분열과 분파의 고통과 그로 인한 손실과 그리고 국제적인 분쟁과 전쟁은 코메니우스와 그의 교회에 직접적이고 처참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줄기찬 교육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세계와 교회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방법을 변화시키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교육과 교육자
                                              코메니우스는 어떻게 교육의 권위자가 되었는가? 그는 그 당시 놀라운 신학적 명성을 얻고 있었던 형제단 교회 (Unitas Fratrum)로 알려졌던 교단의 목회자였으며 후에 그의 교단의 감독이 되었다. 형제단 교회는 30년 전쟁이 이후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대한 성취와 업적을 이루고 있었던 개신교교단이었다. 그 교단은 수적으로 소규모 교단이었으나, 체코의 전 국가에 지대한 종교적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던 형제단 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체코의 영적인 유산과 보고(寶庫)의 보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그날을 소망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과 사회를 재건할 위대한 과업을 위해 부단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육이 곧 조국의 재건과 민족의 정신적 결집에 지대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코메니우스가 교육학의 명저(名著)인 대교수학(Didactica Magna)을 저술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이미 이와 같은 민족적 과업을 마음에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저서를 처음에 체코어로 저술하였으나, 조국에 귀환할 때까지 그것을 출판하는 것을 연장하고 있었다 (8).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시 라틴어로 재 저술하여 유럽전역에서 읽혀지게 하였다.
 
 
코메니우스의 신학사상
 
 그리스도교의 통합사상은 형제단교회 신학의 종요한 핵심이 되었다. 종교적 열광주의의 시대에 교회들이 그들 스스로 참된 유일한 교회라고 선언하였던 교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형제단교회는 다음과 같이 공식적인 선언을 천명하였다:
거룩한 교회에서 성경에 따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들만이 영적인 우주적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구성하고 있거나 혹은 구원이 다만 우리들 가운데서 얻어 지거나 또한 우리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목회의 시작할 때부터 그의 교회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교회상호간의 협조와 그의 모든 생활을 이해하는 선교와 전도를 수행하였다. 그의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그는 신학보다 더욱 생활의 청(성)결를 강조하였고, 그리고 그 당시 개신교교회에서 주요한 두 가지 신학적 논쟁에 대한 광범위한 그의 이론을 제시하였다.(8) 그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통합에 관하여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일치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교회통합을 위하여 유럽전역을 여행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Edinburgh)의 장로교 목회자의 아들인 죤 듀리(John Dury)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듀리는 그의 노력의 좋은 결과를 위해 모든 교단에서 공동기도문을 명하였던 통합운동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나, 다른 교단들의 관심의 부족으로 결국 그의 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코메니우스는 또한 헬렘스테트(Helmstedt) 대학의 교의학 교수였으며, 다양한 개신교교단과 가톨릭교단의 대표들 사이에서 대화를 위해 1645년에 교회일치회의를 소집하였던 그레그 칼리스투스(Greog Calixtus)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리스도교의 통합을 위한 코메니우스의 감동적인 여망(輿望)이 소책자인, The Bequest of the Dying Mother, the Unity of Brethren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 책을 30년 전쟁이 끝난후, 웨스트팔리아 조약(The Treaty of Westphalia)의 체결로 조국으로 귀환하여 흩어진 교회를 재건할 소망이 거의 없게 되었을 때 저술하였다. 그는 형제단교회를 “만약 주님께서 인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인정해야 한다면,” 교회의 마지막 안식(잠)을 위해 준비해야 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부여한(위임한) 보고(寶庫)들을 다양한 국가들과 교회들과 집단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죽어 가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형제단교회를 기꺼이 수용했던 독읽과 폴란드와 그밖에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들에게 그 보고들(유산들)의 대부분을 제공해 왔던 그 교회는 다음과 같이 유산을 남기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이 함께 하기 위하여 나는 다양한 의견의 일치를 위해서 그들 사이에서 화해를 위해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연합하기를 바라는 생생한 열망을 남긴다. 처음부터 영들의 아버지에 의해 나에게 주어졌던 성령이 여러분 모두에게 비쳐지기를 바라며, 따라서 여러분들도 내가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연합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열망하도록 할 것이다(8)
   코메니우스가 그의 교회를 죽어 가는 어머니로 생각하고(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남은 여생동안 교회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산을 영어로 번역한 스핑카(Matthew Spinka)는 그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의 조국을 잃어 버린 그는 세계의 시민이 되었다. 미래를 위한 그의 용기와 쉬임없는
       소망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정의의 힘이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1660년에 코메니우스는 형제단교회의 역사와 그들의 신앙의 본질들을 내용으로 하는 라틴어 저서인 Ratio Disciplinae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저서를 영국교회에 헌정하면서 그 공동체에 그가 사랑했던 형제단 교회를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만약 인간으로부터 도움이 없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소망하면서 교회의 신앙이 보존되어야 할 것을 기록하였다.
   1722년에 몇몇 모라비아 방랑자들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을 넘어서 독일의 실레시아(Silesia)에 있는 진센돌프(Zinzendorf)의 영지(領地)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루터교파의 귀족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았으며 용기와 격려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정착지를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불렀다. 이들 새로운 형제단교인들은 진센톨프의 경건주의를 받아들였으나, 그들 가운데서 여전히 옛 형제단교회의 유산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1727년 8월 13일에 헤른후트에서 선교적 열정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영적 폭발을 가져 왔던 부흥회(revival)가 있었다. 헤른후트 마을은 이미 미국사람들에게,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에 선교사들을 보내었다. 같은 해 8월 13일 부흥회가 영주(領主)인 진센돌프가 코메니우스의 Ratio Disciplinaef를 지타우(Zittau) 도서관에서 먼저 읽은 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진센돌프에게 모라비아 교회의 신앙의 깊이와 망명자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교회를 회복하게 하도록 우리들을 여기에 인도하셨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진센돌프는 본 저서를 신앙과 헤른후트 공동체 생활의 기준으로서 발전시켰던 새로운 “형제적 우애의 일치”를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이 문서 (여러차례 번안되었던)는 오늘날 모라비아 교회를 위한 “형제적 우애의일치“ 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계약”이 되어 오고 있다.
    코메니우스와 새로운 교회와의 사이에는 개인적인 관계가   1662년1월 5일에 피터 자블론스키(Peter Jablonsky, 코메니우의 사위)는형제단교회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다니엘  E. 자블론스키(Daniel Ernest Jablonsky)도 감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때에 새로운 모라비아 교회는 최초의 감독인 데이비드 닛츠만(David Nitschmann)의 유업을 계승하여 왔다.
 
 
훈육(Discipline)
 
모라비아교회에 유산으로 남긴 감독 코메니우스의 훈육의 부분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알게 되어야 한다는 기동와 소망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모든 생애를 모든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의 저서 열려진 언어의 문 (Janua Linguarum)으로 그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탐독하도록 언어들을 개방하였다. 그는 모든 나라들에 “평화가 도래할” 그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그는 유일한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게 될 때부터 도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저서, 세상의 미로(labyrinth of the World)에서 그의 방랑생활이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알도록 가르치는 일에 두고 있었다. 헤른후트에 이주해온 형제단교인들의 유대관계에서 진센돌프는 그 공동체가 “구세주를 섬기며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한가지 유일한 개념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씨앗이 헤른후트에서 자라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새롭게 되었던 교회의 힘은 그것이 조그마한 실레시안 공동체에서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와 함께 전 세계로 미치게 되었을 때 생겨나게 되었다. 데이비드 닛츠만(David Nitschmann)과 레오나르드 도버(Leonard Dober)가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린랜드, 아프리카, 아시아, 북아메리카에 파송되었다. 그 “숨겨진씨앗“이 생며을 가지고 자라서 전 세계에 구세주를 위해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격동기에 살았던 희망의 사람
  코메니우스가 그의 성인생활을 보냈던 17세기는 유럽의 정치 문화생활에서 급변했던 전환기였다. 종교개혁에 의하여 심각하게 터전이 흔들리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열을 재형성하는 일을 서두르고 있었다. 트렌트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교회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시 번안한 후에 가톨릭교회는 교회재건의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예수회교단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었던 분명한 외교전략을 채택하였던 가톨릭사상(신학)은 유럽의 궁중을 다시 독점하는 일을 추진하여 종교개혁을 따돌리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신앙고백을 선언하는 전쟁들을 불러 일으켜 유럽사람들을  거의 30년 동안 심각하게 억압하게 되었던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전까지 배후에서 거론되었던 신앙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전면으로 부상하여 세력(힘)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로마교회와 종교개혁과의 전면전쟁은 코메니우스가 살았던 중앙유럽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위치하고 있었던 개신교교회들은 화이트 마운틴 전쟁(1620)에서 격렬하게 패배를 당했다. 합스부르그(Hapsburg)왕조 하에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유일한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다. 개신교 교회에 속해 있었던 귀족들은 망명의 길을 떠났으며 그리고 백성(보통사람)들은 로마교회로 다시 귀속되었다. 종교개혁의 한 교회인 형제단교회의 목회자(사제, 목사)였던 코메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신앙의 심연에서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경험하였다. 그는 1623년에 저술한 그의 저서, 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에서 그리스도안에서 평화를 발견하기 위하여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도피하며 이 문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재난의 와중에서 그는 결코 세상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을 탐독한 것이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부르심을 알수 있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회개로부터 꺼지지 않는 줄기찬 소망이 점점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소망은 일련의 비극이 계속되었던 그의 망명생활과 급작스러운 그의 교회의 소멸, 두 아내와의 사별, 그리고 그의 주요한 연구저서들의 상당부분의 소실을 입혔던 화재 중에서도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역사적 사건들을 초월하여 폭력과 죄가 극복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것은 성경으로부터 싹트게 되었던 소망이었다.
 
 
범교육: 평화로운 왕국
 
 코메니우스는 최근의 코메니우스학(Comeniology)에 의해 발견된 것과 같이 위대한 범지학의
사상가였다. 마찬가지로 이 작업을 위하여 그는 형제단교회로부터 기본적인 영감을 얻었다, 후스파가 활동하게 된 이후에 체코의 종교개혁에서 교회와
전 세계의 종말론적 부흥과 갱생을 추구하는 생생한 견해들이 팽배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 사상을 15세기에 유럽전역에 파급되었던 변화 등에
적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이 인류의 급진적인 갱생을 주도하게 될 것을 믿고 있었다. 코메니우스가 소원하였던 그리고 다른 유럽의 정치인들과
연합하기를 시도하였던 그 때에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패망한 후에 그는 온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상호협력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교회와 국가와
학문들(과학들)의 관계성을 정립할 가능성을 기대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가 영국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리고 심지어 형제단교단의 그의 동료들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그는 이미 이러한 사상들에 전심전력하고 있었다. 코메니우스는 급변할 상황에서 모든 교회들과 국가들과 과학자들의
대표자들이 모인 평화회의가 정치와 학문과 교회의 영역에서 평화가 보존될 것을 고양할 새로운국제적 상황을 창조하기 위해 모일 것을 믿고 있었다.
특별하게 평회의 문제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Angelius pacis, 166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러한 인상적인 환상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고 죄를 극복하셨으며, 그리고 역사속에서 그의 왕국이 계속하여 다가오고 있다는
확고한 소망이 있었다. 빛이 어두움보다 더욱 강하고, 평화와 정의가 폭력보다 더욱 강하다. 코메니우스는 이와같은 그의 생각과 사상을 그의 저서
인간개선에 관한 일반 담론,
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에
묘사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들이 사무엘 말세유(Samuel Maresius)와 같은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스웨덴의 수상인
옥센세르나(Oxenstierna)와 같은 정치가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 죙와 악을 과소평가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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