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32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한번 리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토색한 물건,,,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엑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 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제170호> 말라기書가 익명으로 기록된 이유 2002년 09월 15일
또 다른 신학 박사님이시자 교수목사님이신 분의 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의 저자가 ‘말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LXX 역에서 1:1은, “Oracle; the word of Yahweh unto Israel, by the hand of his messeng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입니다. ‘말라기’는 ‘말라비’ (Malabi)에서 온 말로 아비(abi = 아버지, 왕하 18:12)로서 “여호와의 사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몇몇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익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편집자에 의해서) '말라기'가 인명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3:1 가운데서 예언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 데서 온 것입니다.
탈굼(Targum)역은 말라기를 “서기관 에스라라고 불리워지는 나의 사자” (my messenger whose name is called Ezra the Scribe)로 이해 하고, 제롬도 에스라가 썼다고 주장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페카(Pehah)라고 불리는 총독이 다스리는 나라(말 1:8; 느 5:15) 이었음을 보아서 포로기 이후인 450년을 전후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를 갹출할 때 말라기서를 인용하지만, 사실 말라기서는 그 당시 십일조를 거두어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한 글입니다.
이런 글을 실명으로 발표하게 되면 권자에 앉아 있는 그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감춘 것은 (다른 선지서 저자들처럼) 생명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십일조제도 폐지운동을 전개한적이 있었습니다. 원고를 기독교신문사마다 발송하였으나 한곳도 글을 실어주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인터넷을 이용하였습니다.
적지 않는 목사님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총받이가 되고 싶지 않거든 그 일을 즉시 중단하라.” 러시아에서 선교한다는 어느 목사님은, “너를 수소문해서 총으로 싸 죽이고 말겠다"는 등의 이메일을 매일 보내 오기도 했습니다.
십일조가 없어지면 어떻게 목회하며, 무엇으로 선교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목회나 선교가 필요한 것이지만, 성도들을 속이는 그릇된 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
역사상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이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잡아 죽이거나 처형시켜 왔습니다.
양들이 보지 못하는 야수들의 세계,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의 세계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말라기서를 포함한 몇몇 선지서들이 익명으로 쓰여진 이유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의인도 배가 고프면 도적질할 가능성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압니다. 반복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다시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실수일지라도 그것을 시인하지 못하는 자는 사악한 인간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서에서,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 나지만, 악인은 한번 넘어져도 일어서지 못한다” 고 기록합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의인과 죄인의 공통점은 다같이 죄를 짓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의인은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 인줄 알지만, 죄인은 그것이 죄 인줄 모릅니다. 의인과 죄인의 차이점은 잘못을 범하거나 범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범한 후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불쌍한 영웅 모세는 실수를 범하고도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아요. 실수와 죄는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완전함에 가깝도록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아는 자세입니다.
파스칼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인 (義人)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만약에 당신이 실수하는 죄인이라면 자기 실수나 잘못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실수하는 의인이라면 그것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한번 리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토색한 물건,,,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엑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 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제170호> 말라기書가 익명으로 기록된 이유 2002년 09월 15일
또 다른 신학 박사님이시자 교수목사님이신 분의 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의 저자가 ‘말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LXX 역에서 1:1은, “Oracle; the word of Yahweh unto Israel, by the hand of his messeng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입니다. ‘말라기’는 ‘말라비’ (Malabi)에서 온 말로 아비(abi = 아버지, 왕하 18:12)로서 “여호와의 사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몇몇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익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편집자에 의해서) '말라기'가 인명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3:1 가운데서 예언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 데서 온 것입니다.
탈굼(Targum)역은 말라기를 “서기관 에스라라고 불리워지는 나의 사자” (my messenger whose name is called Ezra the Scribe)로 이해 하고, 제롬도 에스라가 썼다고 주장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페카(Pehah)라고 불리는 총독이 다스리는 나라(말 1:8; 느 5:15) 이었음을 보아서 포로기 이후인 450년을 전후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를 갹출할 때 말라기서를 인용하지만, 사실 말라기서는 그 당시 십일조를 거두어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한 글입니다.
이런 글을 실명으로 발표하게 되면 권자에 앉아 있는 그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감춘 것은 (다른 선지서 저자들처럼) 생명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십일조제도 폐지운동을 전개한적이 있었습니다. 원고를 기독교신문사마다 발송하였으나 한곳도 글을 실어주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인터넷을 이용하였습니다.
적지 않는 목사님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총받이가 되고 싶지 않거든 그 일을 즉시 중단하라.” 러시아에서 선교한다는 어느 목사님은, “너를 수소문해서 총으로 싸 죽이고 말겠다"는 등의 이메일을 매일 보내 오기도 했습니다.
십일조가 없어지면 어떻게 목회하며, 무엇으로 선교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목회나 선교가 필요한 것이지만, 성도들을 속이는 그릇된 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
역사상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이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잡아 죽이거나 처형시켜 왔습니다.
양들이 보지 못하는 야수들의 세계,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의 세계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말라기서를 포함한 몇몇 선지서들이 익명으로 쓰여진 이유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의인도 배가 고프면 도적질할 가능성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압니다. 반복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다시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실수일지라도 그것을 시인하지 못하는 자는 사악한 인간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서에서,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 나지만, 악인은 한번 넘어져도 일어서지 못한다” 고 기록합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의인과 죄인의 공통점은 다같이 죄를 짓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의인은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 인줄 알지만, 죄인은 그것이 죄 인줄 모릅니다. 의인과 죄인의 차이점은 잘못을 범하거나 범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범한 후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불쌍한 영웅 모세는 실수를 범하고도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아요. 실수와 죄는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완전함에 가깝도록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아는 자세입니다.
파스칼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인 (義人)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만약에 당신이 실수하는 죄인이라면 자기 실수나 잘못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실수하는 의인이라면 그것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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