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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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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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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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I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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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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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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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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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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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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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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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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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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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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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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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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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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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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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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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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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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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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