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진실위가 파헤친 7대 사건 개요와 조사결과

YOROKOBI 2007. 10. 24. 22:44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3년 간의 활동기간에 파헤친 의혹은 ▲DJ납치 ▲KAL858기 폭파 ▲인혁당ㆍ민청학련 ▲ 동백림 간첩단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부일장학회 강제헌납ㆍ경향신문 강제매각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등 크게 7건이다.

각각의 사건 개요와 진실위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정리한다.

◇ 인혁당ㆍ민청학련 사건 = 인민혁명당 사건은 유신 치하에서 정치 권력에 예속된 사법부가 빚어낸 `사법 살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1973년 서울대 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 운동' 이 격화된 상황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돼 다음해 4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됐다.

긴급조치 4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1969년 이래 남한에서 지하조직으로 암약한 인혁당과 연계를 맺어왔고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다수 학생들을 구속했고 도예종씨 등 8명은 1975년 4월 사형이 선고된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자의적 요구로 수사방향이 미리 결정돼 집행됐으며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이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지는 등 사건의 실체가 매우 과장됐다'는 요지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특히 판결 하루만의 사형집행에 대해 "확정판결 즉시 처형한다는 방침은 이미 청와대 선에서 정해진 것으로 무리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 사형집행에도 박 전 대통령이 개입됐음을 시사했다.

◇ 동백림 사건 =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67년 예술가와 학자 등 주로 유럽에 있던 지식인과 유학생 등이 간첩단으로 몰린 공안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17일 7차례에 걸쳐 대학교수와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고 발표했다.

지금은 숨진 재독 음악가 윤이상씨 등이 1950년대 후반부터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하고 일부는 평양을 방문,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서울대 학생서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 등과 연계해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해왔다는 게 당시 중정의 발표였다.

국가보안법과 형법 등이 적용돼 정규명씨 등 2명에게 사형이, 강빈구.윤이상 씨 등에게 무기징역이 각각 선고되는 등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를 두고 박 정권이 당시 공안정국을 통해 3선개헌을 노린 1967년의 6.8 국회의원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 장기집권을 공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3선개헌이 완료된 70년대 말까지 이 사건의 관계자가 전원 석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위는 이 사건이 부정선거 이전인 1967년 5월에 박 대통령이 사건을 인지하면서 시작됐음이 조사결과 드러났다며 중앙정보부가 사전 기획.조작한 사건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다만 진실위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이 확대, 과장됐으니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 1979년 10월7일 김 전 중정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 전 부장의 회고록 집필 등으로 정권의 치부가 공개되는 것을 막기위해 납치, 살해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1973년 도미 후 1976년까지 은둔했던 김 전 부장은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 출석해 박 대통령 및 한국 정부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는 내용을 다수 증언하는 등 반정부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로 프랑스에 있던 중정 거점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에 의해 납치.살해됐으며 파리 근교에 유기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살해를 지시한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 조사로 중정이 계획적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점은 확인됐지만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진술에 의존했을 뿐 증거나 단서 등은 제시되지 못한 점은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 = 부일장학회 강제헌납사건은 1962년 5월 부산지역 유력경제인인 김지태가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 운영권과 10만여평의 토지를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헌납한 사건이다.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은 대 정부 비판논조를 유지하던 경향신문에 대해 1965년 4월 중정이 이준구 사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진을 반공법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은행들이 사전협의없이 경향신문 채무액의 일시상환을 통보한 사건이다.

결국 경향신문 사옥 및 대지 등은 1967년 경매에 부쳐져 박 전 대통령의 동향인 김철호가 대표로 있는 기아산업에 넘어갔다.

두 사례는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돼 왔다.

진실위는 두 사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실행된 것으로 결론짓고 정수장학회(부일장학회의 후신)의 사회환원과 경향신문에 대한 손실보전 필요성을 지적했다.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 국가안전기획부는 1992년 10월6일 남한조선노동당을 결성, 입체적 대남공작활동을 한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서열 22위인 거물급 간첩 이선실이 1966년 이후 3차에 걸쳐 남한에 잠입해 북한 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1990년 이후에는 3개의 간첩망을 운영하면서 400여명의 조직원을 규합해 남한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는 게 골자다.

수사발표 당시부터 불법 수사와 고문조작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1992년 대선 막바지인 10월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북풍(北風)'의 일환이었다는 의혹도 있었다.

진실위는 당시 정권이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간첩단과 정치인 관련설' 등 미확인 첩보를 공개해 결과적으로 정략적으로 활용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수사과정에서 구타와 잠 안재우기 등의 가혹행위도 있었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 KAL858기 폭파사건 = 1987년 11월29일 오후 2시 미얀마 안다만해 상공에서 바그다드발-아부다비, 방콕 경유-서울행 대한항공 항공기가 실종됐다.

범행 용의자인 김승일(하치야 신이치)과 김현희(하치야 마유미)가 조사받던 중 김승일은 음독, 사망했으며 김현희는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는데 수사발표 내용의 오류, 일부 해명 등이 사실과 다르다는 게 밝혀지면서 시민단체 등에서 지속적으로 재조사를 요구했다.

안기부는 사고 원인과 범행 경위에 대한 초동수사가 미흡했음에도 주로 김현희의 진술에 의존해 1988년 1월 15일 수사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수사결과 발표 직후부터 `안기부에 의해 기획된 자작극'이라거나 '북한의 테러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지속되기도 했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북한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며, 그동안 제기돼왔던 안기부의 `기획 조작'이나 `사전 인지' 의혹 등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당시 안기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이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음에도 김현희 진술에만 의존한 채 검증 없이 서둘러 발표함으로써 수사 결과에 일부 오류가 발생했고, 이것이 불필요한 의혹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진실위는 지적했다.

◇DJ 납치사건 = 1973년 8월 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고 정적이자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씨가 일본 도쿄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신원 미상의 남자들에게 납치돼 한국으로 연행됐던 사건이다.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씨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활동 벌였고 도쿄 한민통 결성을 5일 앞둔 사건 당일 통일당의 양일동 당수를 만나러 호텔에 갔다가 납치돼 129시간 만에 8월 13일에에 동교동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가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며 거부함으로써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됐으며 결국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사태를 수습했으나 그동안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의 지시여부에 대해 여러가지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그러나 여러 정황과 관련자들이 증언 등을 종합분석해 볼 때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과 더불어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이 납치공작의 `단순납치' 인지 아니면 `살해계획'이었는지에 대한 논란과 관련, "적어도 용금호(납치에 이용된 선박)가 오사카항에 도착한 이후나 호텔에서 납치한 이후에는 단순 납치계획으로 확정돼 실행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