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참패했다. 이탈한 지지표가 민주노동당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결과를 “정권을 내 놓아야 할 정도”의 참패라고 평가하고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더 이상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 1987년 정통성에 역사적 정서적 뿌리를 둔 정치는 이제 더 이상 다수형성 능력이 없다는 선언이다. 이에 우파 매체들은 앞을 다투어 ‘민주화 세력 퇴출, 산업화 세력 등장’이라고 환영한다. 한국정치의 미래가 과연 그들의 평가대로 구조화될 것인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소위 ‘민주화 세력’이 국민 대다수로부터 불신임되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1987년 정통성의 종식은 선거결과와 무관하게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작년의 대연정론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5.31 지방선거는 그저 1987년 정통성의 종식을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1987년 정통성의 종식이 과업 완수를 통하여 발전적으로 성취된 것인가라는 점이고, 진행된 사태가 그와 정반대라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또한 한국사회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물음이 해명될 때, 1987년 체제의 미완결성은 과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 역시 좀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혁의제 추진방식의 무능
그 동안 노무현 정부는 개혁의제를 ‘시민혁명의 완성’이라 표현해 왔다. 그렇다면 1987년 정통성의 종식은 시민혁명의 미완성을 의미한다. 왜 그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었을까?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1987년 정통성에 뿌리를 둔 정치는 무능했다. 그런데 무능했다는 대답이 지시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개혁의제를 제기하고 관철하는 방식에서의 무능함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중첩되어 있다. 그 하나는 개혁의제를 국민들에게 보편의제로 인식시키지 못한 무능이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제를 한국사회의 총체적 미래 전망과 연관시키지 못한 무능이다.
첫 번째 측면부터 살펴보자. 개혁의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공공선이 추구되는 사회, 민주공화국에서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가치에 근거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개혁의제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많은 국민들은 개혁의제를 소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샅바 싸움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원내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지 못한 점, 즉 개혁의 실종은 적극적 지지층을 이탈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치명적인 실패는 개혁의제가 대다수 국민들에게 보편의제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혁의제는 당연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접근방식을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인권의 정치, 공공성의 정치로서 개혁의제는 투입과 산출의 경제적 효율성이나 합리적 선택이 요구되는 조건명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주공화국의 근본규범의 실현, 곧 대한민국 헌법의 실질화의 문제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위 ‘민주화 세력’의 무능은 민주공화국적 질서의 전제인 ‘시민혁명’조차 미완의 상태에 머물게 했으며, 자유주의를 다시금 경제적 자유주의의 좁은 범위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두 번째 측면, 개혁의제와 미래전망의 연관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따져보자. 우리 사회처럼 압축발전의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는 <x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삼는 사회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방식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x의 실현은 우리 사회의 발전된 미래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방식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첫 번째 방식에서는 x의 정당성이 x 이외의 어떤 외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반면에, 두 번째 방식에서 x의 정당성은 x 이외의 어떤 외적 요소인 y에 x가 기여한다는 구조에 의하여 확보된다. 첫 번째 방식을 의무론적 또는 원칙론적 정당화라 한다면, 두 번째 방식은 목적론적 혹은 결과론적 정당화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가지 정당화 방식은 실제 정치에서 충분히 보완적인 관계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개혁의제 추진에 있어서의 무능은 이중적인 무능이라 말할 수 있다. 소위 ‘민주화 세력’은 개혁의제(x)를 당연히 실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들지도 못했고, 한국사회의 미래전망(y)을 열어 가는데 도움이 되는 필수적 수단으로서 인식시키지도 못했다. 선진화 담론이나 작년부터 부쩍 사용되기 시작한 ‘미래 세력’이라는 개념은 개혁의제와 별개의 담론이거나, 또는 아예 개혁의제를 억제하는 담론으로 기능했을 따름이다.
빈곤화의 심판
개혁의제 추진에 있어서 집권세력은 무능했다. 그리고 국민의식이 못 따라와서 잘 안 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무능은 응징해야 할 오만으로 바뀌는 법이다. 그렇지만 개혁의제 추진에서의 무능만이 선거결과를 다 설명해 줄까? 당연히 다른 요인들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서민의 삶이 지금처럼 팍팍하지만 않았다면 이번 지방선거와 같은 총체적 불신임으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무능하다는 것은 아직 미완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전체 사회가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짊어진 정치세력은 아무리 무능해도 연속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최소한 해당 과제의 중요도에 걸맞게 존속한다.
그래서 “정권을 내 놓아야 할 정도”의 참패라면, 거기에는 개혁의제 추진에 있어서의 무능 이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무엇이 원인일까? 여론 조사에 의하면, 많은 유권자들은 집권세력이 경제의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집권세력이 산업이나 성장의제를 소홀히 했는지, 또는 보수야당이 대안을 내놓은 바가 있는지는 달리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 국민여론이 말하고 있는 바는 경제성장이 아니고 성장의제에 가려진 또 다른 진실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빈곤화의 문제이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모두 서민의 삶을 더 곤궁하게 했을 따름이다. 이 사회에서 왜 빈곤화가 진행되는지, 과연 이 사회의 성장 동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고용창출 없는 경제성장과 양적 유연화가 빈곤으로 이어진 것인지 등의 문제는 일단 접어 두자. 또는 이러한 질문과는 성격이 다른 질문이겠지만, 과연 국민 대다수가 보수야당을 성장과 탈빈곤 의제를 짊어질 적임자로 선택한 것인지도 더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과 무관하게 일단 선거결과는 ‘빈곤화에 대한 심판’이라 말해도 충분하다. 빈곤층의 확대와 서민층의 경제적 불안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성장 포퓰리즘
그래서 지방선거 후 김근태 의장의 수습책은 '제민지산'(制民之産)을 운위하며 경제의제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가성장론을 펼치며 한국형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나섰다. 잠재성장률을 적어도 1% 포인트 이상 끌어올릴 수 있도록 48조~80조원에 이르는 여유자금을 투자부문으로 끌어낼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방안이 과연 무엇일까? 언론에 떠도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출자총액제한제와 수도권공장총량제의 폐지, 부동산 세제의 재검토, 서비스와 건설업 부양 등이다. 출자총액제한제의 폐지는 재벌의 순환출자 폐해를 낳을 것이고, 수도권공장총량제의 폐지는 국토균형개발 계획의 포기를 의미할 것이다. 서비스와 건설업 부양을 위한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에 시장이 호응할 것인지도 의심스러우며, 부동산 정책의 재검토 및 감세 정책은 정부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김근태 의장의 이와 같은 방안을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모색하는 “한국식 신자유주의”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그런 방안의 실효성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과연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해법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의 대응은 숙고되지 않은 방안들을 성급하게 들고 나오는 성장 포퓰리즘이라 불러 마땅하다. 그리고 모든 종류 포퓰리즘이 진행되는 방향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다. 적어도 OECD 국가의 최근사에서 좌파 포퓰리즘은 언제나 우파 포퓰리즘을 낳았을 뿐이다. 예컨대 독도 문제를 보편의제로 대응하지 않고 영토권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을 동원할 때 정치적 수혜는 우파에게 돌아갈 뿐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적 매체들은 이에 대하여 실용주의 강화 또는 우향우라는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 지점에서 되물어봐야 할 것은 무엇이 과연 ‘실용’인가라는 점이다. 그간 ‘실용’이란 한국사회의 미래 의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아니라 단지 무능한 ‘개혁’에 대한 무능한 발목잡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대응이 ‘우향우’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우향우’인가? 과거의 입장으로부터의 ‘우향우’? 김근태 의장이 자신을 성장론자로 표현하고 한미FTA를 찬성하며 ‘고도성장과 사회적 대타협’에 찬성한다고 발언한 것은 이미 5월 초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열린우리당이 ‘좌’에 기울어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엇이 ‘좌’인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추구하면 ‘좌’인가? 아니면 이러한 선순환에서 성장에 시간적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우향우’인가? 이와 같은 모든 질문은 사태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사태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 한편으로 선거 참패의 원인을 ‘무능’에 두면서 다른 한 편으로 대응책을 ‘우향우’라 말한다면 우파는 ‘유능’하고 좌파는 ‘무능’하며, 유능해지기 위해서는 ‘우향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 나라의 우파는 유능한가 되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우파는 한국사회의 미래전망을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가?
미래의제
현재 김근태 의장의 노선은 분명 ‘우향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무현 정부의 기존 시책과 대비할 때 ‘우향우’라는 이야기이다. 갈등은 이미 부동산 정책과 조세 정책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대북경제협력 등의 분야까지 점점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우향우’인가 아닌가가 전혀 아니다. 김근태 의장의 처방이 한국사회의 미래전망과 연관된 처방인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열린우리당보다 더 먼저 자신의 과제를 ‘개혁의제’라고 묶어 부르는 일에서 발을 뺐다. 그 대신에 정부 정책을 ‘미래’라는 표현으로 판매하고자 했다. 양극화 해소, 사회적 대타협, 저출산 고령화 사회 극복,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동북아 경제허브 구축, 한미 FTA 등은 노무현 정부가 미래의제로 제시한 것들이다. 정부가 명확한 정책목표를 제시하고 있는가, 또는 정책 수단이 효과적인가 등의 문제를 접어두고, ‘건국세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거나 민주화 운동에만 기대는 정치가 주를 이뤘던 시기에 노무현 정부가 미래의제를 선점한 것만은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의제의 선점과 해법의 제출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점은 열린우리당의 선거 후 변화는 참패 사태에 대한 즉각적 대응일 뿐이지 미래의제의 제출과는 내용에서는 물론이고 정치수사법의 문제에서도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 그것은 국민에게 성장 포퓰리즘으로 이해될 뿐이라는 점이다.
진보정당의 미래
노무현 정부가 선점한 의제들의 미래의제로서의 가치나 또는 노무현 정부의 의제 수행방법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노무현 정부가 국정과제를 ‘개혁의제’로 표현하지 않고 ‘미래의제’로 제시했나는 점은 1987년 정통성의 종식과 긴밀히 연관된 문제이다. 또한 이는 향후 정치적 대립의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1987년에서 출원하는 힘으로써 개혁과제를 완성하는 경로를 이미 일년 전에 포기했으며,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정치를 움직이고자 했다. ‘개혁의제’가 미래시점으로부터의 가치 평가에서 여전히 중요하다면 ‘미래의제’로 수행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유보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미래의제’라는 담론은 정치투쟁 방식의 변경을 강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노무현 정부의 미래전망에 동의하는가의 여부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보수야당은 집권세력보다도 훨씬 더 불분명한 형태의 이미지, 개발독재 시대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적 혼합물로 한국사회의 미래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산업화 시대’의 성장 메커니즘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경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산업화 시대’의 향수와 ‘민주화 세력’의 무능에 힘입어 보수정치인들은 왠지 ‘유능’할 것 같은 가상이 생겨난다. 반면에 진보세력은 ‘민주화 세력’의 주류와 마찬가지로 과거지향적 세력으로 도매금으로 처리되게 된다. 여기에서 한국사회의 미래전망을 제출할 과제를 도외시한 채 자신을 진정한 개혁세력으로서만 자임하게 된다면, 대중이 진보정당을 과거지향적 세력으로 고정시키는 현상에 대해 돌파점을 찾지 못하게 될 뿐이다.
‘진정개혁세력 담론’은 마치 1987년 체제의 탈구현상에 불과한 ‘지역주의’, 지역주의에 반대하는 ‘역지역주의’, 지역주의 종식을 목표로 하지만 지역주의를 재생산해내는 ‘탈지역주의’ 담론과 정확하게 동일한 지반 위에 서 있다. 지역주의는 국민적 일반성을 수립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지역주의 기반 위에서의 탈지역주의 담론은 지역주의를 재생산해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정개혁세력’ 주장도 정치적 사태가 좀 더 진행된다면 다수형성적 계기가 전혀 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진보정당들은 노무현 정부, 또는 ‘우향우’하고 있는 여타 정치세력이 한국사회의 미래전망으로 내놓는 프로젝트에 대해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출하며 경쟁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 양극화와 빈곤화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성장의 걸림돌은 무엇인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경로는 어떤 것인가? 한미 FTA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노동사회를 어떻게 개편해야 하는가? 과연 혈통주의와 가족주의 강화를 통해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극복될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하나의 포괄적 입장과 대안적 가치, 대안적 수행방식을 제출하지 않고서 진보세력이 1987년 정통성의 종식이라는 상황을 기회로서 활용할 방도는 없다. 그리고 어떤 사태이든지 기회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위기가 되는 법이다.
금민 / 프로메테우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