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의 삶

YOROKOBI 2008. 1. 31. 22:29

 

 

시대를 빛낸 문화 예술가

 

 

김승환_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오백년 조선이 기울어 가던 1880년대. 충청도에서 두 인물이 태어났으니 이들은 훗날 민족사에 큰 자취를 남긴 위인들이다. 1880년 12월 8일 회덕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났고 1888년 5월 23일 괴산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이 태어났다. 이분들은 민족해방운동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거니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분 모두 항일반제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다는 점이다.

단재 신채호
어린 시절을 자신이 태어난 회덕 어남리에서 보낸 단재는 부모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돌아와서 학업에 정진했다. 10여 세에 사서삼경을 읽을 정도로 명석했던 그이는 다른 학생보다 빠르게 18세가 되던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냉정하면서도 열혈 청년이던 단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전후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 민족사를 통하여 국운을 일으켜 보고자 한 그이의 노력은 1908년 <독사신론>과 같은 논단으로 표현되어서 훗날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는 기초가 된다. 당시까지는 성균관 박사로 연구와 강의를 주로 했으나 기울어 가는 국운을 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인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구국의 영웅을 소설로 표현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민족 영웅을 통하여 위급한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을지문덕전》과 같은 전기소설이다. 1907년 자강 운동이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다. 단재의 소설 창작이나 논설 쓰기는 상통한다. 그리고 신민회 가입이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상통한다. 모두 민족과 국가를 위한 절대주의였던 것이다.

1909년 친일 매국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했지만 이미 일제의 마수는 조선의 운명을 끊어 가던 때였다. 이듬해 4월, 일제 강점을 예견한 단재는 중국 청도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갔다. 이처럼 단재는 조국을 떠나 떠도는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민족해방을 위한 일념을 살랐으니 참으로 장렬하고 참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무렵 고대 민족의 터전이었던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훗날 민족사의 무대를 반도 중심에서 대륙 중심으로 확장시킨 출발 지점이었으며 김부식을 사대주의로 인식하도록 만든 민족주의 사관의 이정표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의원으로 일을 했지만 이승만의 외교론에 대립하다가 공직을 사퇴한다. 당시 단재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하면서 외교론의 허상을 통렬히 질타했다. 1921년 4월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권을 성토하면서 임정을 떠났다. 이처럼 외교론과 준비론, 자치론을 비판하고 또 이광수나 최남선의 문학을 비판했던 것은 그이의 사상이 무장투쟁과 민중 직접혁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승만과 극단적인 대립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원인의 일부가 되어서 이승만 정부 시절에 단재는 불온한 인물 아니면 만나선 안되는 인물이었다.

이 무렵 단재는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다. 정부가 없다는 것은 권력이 없다는 것이고 권력이 없을 때 제국주의와 같은 지배와 피지배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무정부주의 의열단 선언문으로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썼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비교되는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의 직접혁명과 ‘아’와 ‘비아’의 투쟁을 설파했다. 즉 일본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테러로 비아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단재가 언제 또 어떤 경로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초기의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를 거쳐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이고, 그 무정부주의는 민족해방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1927년 조선 국내에서 일어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좌우합작의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1928년 대만의 기륭항에서 체포되었을 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를 통한 민족해방운동의 군자금을 마련하려던 중이었다. 이렇게 그 는 조선, 러시아, 중국, 일본을 오가면서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쳤다.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받았고 옥중에서 죽었으므로 신채호의 대외 활동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하지만 그이의 역사 연구와 집필과 처절한 저항은 옥중에서 더욱 빛난다. ‘독립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던 그이는 한줌 재가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벽초 홍명희
한편 단재가 귀래리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1888년, 그곳으로부터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괴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벽초 홍명희다.

그이는 《임꺽정》을 쓴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한 단면일 뿐이다.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삼재(三才)로 지칭되기도 하는 벽초는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과 IOC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같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벽초 역시 단재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살았던 지사다. 어떤 이는 벽초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조선에서 부수상을 지냈다는 이유를 들어서 오히려 비판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벽초는 항일민족해방운동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요 애국지사인 것은 분명하다.

벽초는 조선의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단재가 몰락한 양반의 후예여서 가난과 고통으로 인생을 출발한 반면에 벽초는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부유하고 유복하게 인생을 출발했다.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한일합방이란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할 정도로 날카로운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의 천재, 민족어의 스승, 온화한 인품처럼 홍명희에게 붙은 호칭은 그이의 일생이 어떤지 보여 준다.

홍명희는 부친 홍범식 의사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란 비보가 내려지자 당시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젊은 홍범식은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자나 깨나 나라에 충성을 외치던 당시 나라의 중신들과 관리 대다수가 일제를 위하여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홍범식 군수가 자결한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벽초는 조선에서도 늘 ‘나는 홍범식의 아들이다’라고 하면서 일제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겼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벽초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한 후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남쪽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니 청산할 수 없는 미국의 지배 정책을 꿰뚫어 보고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벽초는 아들 홍기문과 함께 담배를 피운 개방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부자가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직 잔존했던 봉건 가부장적 분위기로 보면 쉽지 않은 것이지만 벽초는 그 정도로 진보적이고 유연한 사상가였다. 그랬기에 1927년 자식인 홍기문과 신간회의 주요 인사로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간회 운동과 함께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글재주가 있던 벽초는 많은 독서를 했고 또 여러 글을 썼다. 그러나 한글로 민족의 과거사를 민중적 관점에서 재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특별한 의지와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라를 잃은 시대에 무엇이 정신적 지주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김윤식 교수는 국가 상실이 부의식 상실이고 아버지가 없는 허전함은 고아 의식으로 발전한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의 모든 조선 사람들은 피지배 식민으로서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아 의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인 민족은 존재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지향이 여성성으로 드러난다. 절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님의 침묵〉은 모두 부의식 상실과 어머니 지향 의식이 잘 드러난 가작들이다.

그런데 이 식민지 상황에서 국가를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어 즉 언어였다.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또 미래 독립된 국민국가를 가능케 하는 힘이었다. 조선어를 지키고 가꾸는 것이 바로 국내에서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방법인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보듯이 조선어가 민족의 희망이고 미래였고 또 희미한 국가였던 것이다. 벽초가 《임꺽정》 을 쓴 것은 이런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지고 끊어지면서 창작된 《임꺽정》은 민족어의 보고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아쉽게도 미완으로 끝났지만 그이의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희귀한 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조선 명종조 때의 도적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피지배 조선인의 민중성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임꺽정이 속했던 백정 계급과 같은 피지배계급의 해방을 그리는 것은 곧 조선의 민족해방을 비유한 것이다. 지배 계층의 역사를 그리지 않고 민중 그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벽초의 깊은 뜻이라고 보아야 한다.

해방 뒤 벽초는 현실 정치에 적극 개입했다. 민주독립당과 같은 정당을 만들기도 했고, 작가보다는 사상가 또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김구 들과 함께 1948년 남북제정당연석회의에 참가했던 것인데 그것이 고향을 떠나 조선에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6·25 당시 조선의 부수상이었지만 벽초는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의 김일성 주석은 벽초를 극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이것은 벽초의 인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면 조선의 정치사회적 구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다. 조소문화협회 같은 단체에 관여하는 등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에 중요한 구실을 하다가 1968년 3월 5일 타계했을 때 조선에서는 극진히 장례를 모셨다. 그이의 묘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데 2001년 도종환 시인이 직접 확인한 바 있다.

 


△단재 신채호 생가.


앞에서 우리는 단재와 벽초의 일생을 거칠게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두 분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인간의 교유 관계는 사상이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고 특히 두 분은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았다. <전후삼한고>와 같은 민족 사관을 밑바탕으로 한 역사서술은 벽초가 아니었으면 발표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그이의 민족주의 사관이 빛나는 중요한 저술이거니와 민족사의 무대를 신라 중심주의에서 고구려 중심주의로 이동시킨 의미가 있다. 반대로 벽초가 민족해방을 바라보는 안목은 단재가 아니었으면 덜 정교했을 것이다. 이처럼 두 지사들은 서로 존중하면서 깊은 교유를 했던 것이니 한국 근대사에서 아름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단재 신채호는 이름난 학생이었다. 그이는 강철 같았다. 아니 칼날 같았다. 원래 병약했던 데다가 오랜 수감 생활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단재에게 뜻밖인 제안이 들어왔다. 병보석이었다. 1936년 이국 땅 감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였고 조선에서 오는 지원이나 지지도 끊겨 그야말로 천애 낭떠러지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이에게 병보석은 인간의 이름으로 허락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재는 단호히 거절했다. 친일파가 주선하는 보석보다 차라리 서늘한 감옥에서 죽겠다는 그이의 기백이었다. 그렇게 단재는 죽었다. 이튿날 화장되어 잔뼈와 재 몇 줌으로 그이는 일생을 마감했다. 단재의 유골은 중국 안동과 신의주 그리고 평양과 경성을 거쳐서 조치원에 당도했고 거기서부터는 버스로 고향 충북 청원군 귀래리까지 왔다. 죽은 재로 환향한 그이의 유골은 그이의 성정처럼 파란을 겪었으니 호적이 없는 관계로 매장 허가가 나지 않았다. 사연은 이렇다. 단재가 1910년 망명할 때 일제의 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므로 친척들은 단재 이름을 일제 호적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단재는 조선인이기는 하지만 일제 식민지민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단재의 정신이었다. 그 정신의 기개가 유골의 안장을 막았던 것이니 참으로 장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의 서거는 많은 사람을 비분케 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지기였던 벽초 홍명희의 깊은 애도가 기록으로 전한다.

단재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 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곡 단재〉 가운데)

단재가 죽었단 소식을 전해 듣고 적은 글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단재뿐만 아니라 벽초의 인품도 읽을 수 있는데, ‘내 오십 반생에 중심으로 경앙하는 친구’라던 단재의 죽음을 두고 이토록 초연하다는 것은 벽초가 매사에 진중한 성품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단재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은 잘 표현하고 있다. 단재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벽초는 단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유하는 중에 비로소 그의 인물을 잘 알았습니다. 단재가 의론에 억양(抑揚)하고 행동에 교계(較計)가 적으나, 억양이 과한데 정열이 있어 좋고, 교계가 적은데 속기(俗氣)가 없어 좋았습니다. 단재가 고집 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의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칠지 않았을 것입니다.(〈상해 시대의 단재〉 가운데)

이 글에서 우리는 단재의 유별난 언행을 엿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벽초의 단재에 대한 흠모를 엿볼 수 있다. 당대의 인물을 논하는 자리에서 모든 이를 기껏 능재로 평하던 벽초가 단재만은 ‘천재적 안광’, ‘죽고 난 뒤에도 영원히 살아 있는 인간’으로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만 보아도 벽초의 단재에 대한 존경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북경에서 달포 동안을 함께 지냈다 하니 이때가 1918년 단재가 39세, 벽초가 31세였다. 이후 단재가 벽초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두 분의 우의가 어떠했는지 잘 알려 준다.

산같이 쌓였던 말이 붓을 잡고 보니, 물같이 새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부터 써야 할는지요. 세전(歲前)인가 언제 서중(書中)에 홍 선생은 검사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한, 두미(頭尾) 모르는 소식을 들었더니 지금도 형이 그 곳에 계신지요. 제(弟) 불원간 아마 십 년 역소(役所)로 발정(發程)할 것이니, 아- 이 세상에서 다시 면목(面目)으로 상봉하게 될는지가 의문입니다. 형에게 한 마디 말을 올리려고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습니다. 참자니 가슴이 아픕니다마는 말하련즉 뼈가 저립니다. 그래서 아픈 가슴을 부등키어 쥐고 운명이 정한 길로 갑니다.(단재의 편지 〈홍벽 초씨에게〉 가운데)

북풍의 서리 같던 단재가 이처럼 저린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그 상대가 홍명희였기 때문이다. 여덟 살 연상인 살천스럽던 단재가 ‘제’라는 겸양을 표한 것도 벽초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언제 쓰였는가는 편지 뒷부분이 유실된 관계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홍명희가 검사국으로 넘어간 다음 해라는 것은 분명하다. 홍명희가 신간회 활동 때눔에 검사국으로 넘어간 것은 1930년이다. 위 내용으로 미루어 이듬해인 1931년 단재는 옥중에서 이처럼 애절한 편지를 썼을 것이다. ‘십 년 역소로 발정(發程)한다’는 것은 대련에서 여순 감옥으로 이감된다는 것이고 이 글에는 그런 때인 1932년경의 심경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단재가 벽초에게 하고 싶었던 ‘한마디 말’이란 무엇이었을까. 참자니 가슴이 아프고 말하려니 뼈가 저린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그것은 국권 회복, 자주독립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명제는 두 가지. 첫째, 반제항일 투쟁을 통한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 둘째, 반봉건 근대 시민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다. 이처럼 이들 두 분은 두 가지 민족적 명제를 실천함에 있어서 같은 길을 걸어간 동반자였다.

그렇다면 단재와 벽초는 언제 만났을까? 이 점은 두 분 모두에게 중요하며, 각자에게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어린 시절 충북 괴산에 살던 벽초가 충북 청주 귀래리의 단재를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낭설이다. 1936년 벽초 홍명희는 <상해시대의 단재>라는 글에서 ‘나는 24, 5년 전에 중국 상해에서 단재를 처음 만났습니다’ 하고 써 둔 것으로 미루어 1911년 또는 1912년에 처음으로 만났음이 분명하다.


△벽초 홍명희 생가.


한편 1918년 7월 귀국한 벽초는 향리 괴산에서 은거하다가 이듬해 삼일만세를 맞이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했다가 의병장 한봉수와 함께 의암 손병희를 방문하고 괴산으로 내려온 그이는 1919년 3월 19일 ‘괴산만세시위사건’을 주도했다. 네 번에 걸친 만세 시위에는 수백 명에서 천오백 명에 이르는 대군중이 경찰서와 군청을 점거했는데 이런 거사는 농촌 지역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벽초는 괴산만세운동의 주모자였다. 하지만 그이의 고향 괴산에 서 있는 삼일운동기념비에는 벽초 홍명희의 이름은 빠져 있으니 역사는 무심한 것인가?

벽초가 괴산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것이 단재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밝혀진 것과 같이 홍명희는 괴산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했고 그것 때문에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한 바 있다. 궁벽진 시골 괴산에서 일찌기 만세의 기치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홍명희의 민족해방에 대한 역사적 안목과 세계관 때문이겠으나 그 세계관에 끼친 단재의 영향은 실로 지대했을 것이다. 홍명희가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쓴 상층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나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사회주의 내지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민족개량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 것도 단재의 영향이 컸음을 알려준다.

홍명희가 달포 동안 함께 기거했다고 술회하던 1918년의 단재는 북경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교유하던 때며 사회주의 혁명 또는 무정부주의의 노선이 조선의 혁명에 적합하다고 믿기 시작하던 때다.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한 민중의 직접혁명이라는 것이 실은, 식민지 치하의 조선 백성의 혁명 즉 민족 전체가 민중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직접혁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경에서 머물던 국외자의 인식이고 국내에 머물던 벽초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의 민족해방노선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설령 민중 직접혁명으로 삼일운동을 벽초가 생각했더라도 손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비폭력 방식을 택해야만 했던 현실의 벽은 두터웠다. 단재의 사상에 동의하되 현실적인 노선을 택해야 했던 벽초의 그리고 당시의 한계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단재의 민중 직접혁명론이 벽초의 역사소설, 《임꺽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명종조 시대의 도적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수많은 역사의 소재 중에서 유별나게 천민 백정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홍명희의 민중적 세계관을 말해 주고 있다.

백정은 식민지적 모순을 가장 많이 떠안고 있는 하층민이다. 그리고 봉건적 모순 또한 가장 많이 떠안고 있는 계층이다. 제국주의의 수탈과 식민지 내의 상층민들의 수탈을 이중으로 떠안고 있는 계층이 바로 이 백정이다. 이들 하층민이 가지고 있는 울분과 정서는 민족 단위 노예라는 식민지적 현실 그 자체이므로 《임꺽정》의 민족문학사적 의의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벽초는 ‘조선정조(朝鮮情調)’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을 넘어서서 민족해방의 다른 방법이기에 벽초의 뜻이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