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사죄해야 할 조작 사건
간첩의 추억(3)-
유신권력에게 피맛을 알려준 최종길 교수 살해, 80년 광주학살의 씨앗을 뿌리다
최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연일 여러 가지 얘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아버지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더라도 ‘유신 소녀’가 아니라 지천명을 넘긴 야당 대표라면 할 말 못할 말은 좀 가려서 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과거의 친북·좌경·용공도 같이 조사하자는 말에는 한편으론 소름이 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군사반란으로 태어난 공화당부터 친다면 집권 경력이 30여년이 넘고 국회의원만 수백명을 거느린 거대 야당의 대표 주변에 저런 얘기하는 것 놔두는 참모들밖에 없단 말인가? 좌경세력 색출한다고 별의별 사람들을 다 잡아들인 나라에서 이제 무얼 더 조사하자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반공을 국시로 삼아온 대한민국에서 빨갱이짓 하고 진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은 남로당 군사부 프락치 박아무개가 숙군 당국에 불지 않아서 살아남았다가 그와 더불어 출세한 몇몇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 아닐까? 과거 청산이 이제 와서 그런 운 좋았던 사람 조사할 만큼 한가한 일은 분명 아니다. 친북·좌경·용공은 너무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너무 가혹하게 처벌한 게 문제였다.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과거 청산 문제 중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든가 군사독재 시기의 각종 의문사와 조작간첩 사건들은 대개 친북·좌경·용공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다가 발생한 일들이다. 그런데도 친북·좌경·용공을 더 조사하자고 하니 얼마나 더 많은 의문사를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얘기인지 늦더위에도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진심 어린 사과라면 한번이면 족하다. 여기저기 수도 없이 사과했는데 무슨 사과를 또 어떻게 하냐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저 유명한 ‘통석의 염’(痛惜의 念) 발언을 비롯하여 숱하게 사과를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과는 받으면 받을수록 화가 난다는 것이다. 정말 진심 어린 사과라면 한번이면 족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딸이 사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진실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전에 사과했잖아라고 나오는 것은 정말 피해자들의 가슴에 두번 못질을 하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박근혜라는 개인이 딸로서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민정당으로 이어진 한나라당의 대표로서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의문사와 각종 인권유린에 대해 사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거를 정리하는 것은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역사학자를 부각해준 것에 대해 현대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가해자로서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책임지는 것이 과거 청산일진대,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오지랖이 넓다한들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박정희가 3선 개헌으로도 성이 안 차 유신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짓밟을 무렵 최종길이라는 촉망받는 법학자가 있었다. 한국 최초로 독일에서 법학박사를 받아와 10년째 모교인 서울대 법대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데모하는 제자들을 달래다가 사제간에 부둥켜안고 울었다고도 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 이어 4일에는 법대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에 나섰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해 그는 교수회의에서 스승으로서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면서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마침 그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제자가 잡혀갈 때 “중정에 가면 성하게 나오는 사람이 없다던데 어쩌냐”며 눈물을 흘렸다던 최 교수는 동생의 안내를 받아 남산에 갔다가 다시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시신도 없는 빈소를 자택에 만들지도 못하고 동생 집에 차려야 했다. 의사인 부인도 부검에 입회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의 죽음이 알려지면 장례를 치르지 못할 것이라 협박했다. 주검은 관에 봉해진 채 마석 모란공원의 장지에서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관뚜껑을 열고 얼굴이라도 마지막으로 보며 엉엉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건만, 따라온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오열조차 못하게 했다. 최 교수의 조카는 “가족들은 중정 직원들의 살벌한 감시 속에서 석고처럼 하얗게 굳어가고 있었다”라고 추모 문집에 적었다. 북을 ‘동토의 왕국’이라 즐겨 불렀지만, 우리들의 ‘겨울공화국’에서 판검사 제자가 즐비한 법학자는 이렇게 묻히고 있었다.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인 유신 1년 뒤에 흔히 의문사 1호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최종길 교수가 이렇게 묻히고 4일 뒤인 1973년 10월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 발표를 한 자는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이었는데, 그는 한달 반 정도 뒤에 검찰총장이 되고, 또 법무장관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의하면 최종길 교수는 일찍이 독일 유학 중에 평양에 가 노동당에 입당한 간첩으로 자신이 간첩임을 자백한 뒤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 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다.
1973년 10월이란 시점을 주목해 보라.
당시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던 김근태였지만, 최종길 교수가 간첩이라는 발표를 듣고는 뭔가 “꼬투리가 잡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파렴치한 유신 독재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밑바닥에는 사실을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간첩이란 말이 지닌 무게. 중세 말 근대 초기 마녀사냥의 시절에 마녀를 변호하면 마녀가 되는 것처럼 간첩은 그런 존재였다. 김근태는 “간첩 혐의라고 권력이 발표한 문제에 관심을 표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였지만 새로운 차원의 결심이 필요했고,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라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가족들조차도 이 발표를 대놓고 부인하지 못했다. 최 교수의 부인은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집에까지 찾아와 큰소리로 당신의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냐며 물었을 때,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바로 옆에 지켜 서서 감시하는 가운데, 그저 돌아가달라는 말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침묵 속에서 최종길 교수는 죽어서 간첩이 되어버렸다. 김영삼 정권 시절 수구세력의 사상 공세의 표적이 되어 물러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요컨대 우리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을 막지 못했고, 또 그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치해온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무능이, 그 이후 이 땅에서 그렇게도 많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권력기관에 의한 의문사를 초래케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저들도 최종길 교수를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소문으로는 전기고문을 하다가 기계의 오작동으로 너무 강한 전류가 흘러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으니 당연히 중앙정보부에서도 감찰실을 통해 자체 조사를 했다. 그 결과는 수사관 둘만 “신병관리 소홀”을 이유로 가벼운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저 악마의 시대에 저들의 반성은 기계 오작동 따위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고문기술자’를 키워내는 것이었나 보다.
우리는 유신 쿠데타 이후 최초의 의문사 사건인 최종길 교수 고문살해 사건이 일어난 1973년 10월이란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는 중앙정보부가 어쩌면 의문사 1호가 김대중이 되었을지도 모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를 때였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 내에서 이후락은 명목상의 부장으로 전락하고 김치열 등 검사 출신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들은 김대중 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유신 1년이 채 안 되어 대학가에는 반유신 투쟁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그들은 뭔가 큰 사건을 만들어내야 했다. 2002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중앙정보부가 최 교수를 조사한 것은 ‘공작’ 차원에서 그를 중심으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에서 발표 시기를 저울질하던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에 끼워넣은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10년 동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으며 많은 판검사들을 키워낸 법학자, 그것도 동생이 중앙정보부원인 사람조차 간첩으로 조작되는 그런 악마의 시대였다. 최종길 교수가 죽고,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 8명이 한꺼번에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재야의 대부인 영원한 독립군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로 워낙 깨끗이 청소한 탓에 한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피를 덜 흘리던 한국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권력이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한 것, 광주는 하루아침에 터진 것이 아니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1980년 ‘광주 사태’라는 이름하에 남도에서 ‘폭도’들이 총을 들고 난동을 피웠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두말 없이 따라하던 착한 백성들이 어쩌다 ‘폭도’가 되어 총을 들었냐고? 학살자와 그 앵무새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독침 간첩!” 독침 사건은 두 군데서 터졌다. 5월24일 계엄사는 “광주 사태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전 및 선동을 위해 남파된 북괴 간첩 이창룡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던 광주의 전남도청에서 독침에 맞았다며 장계범이란 자가 쓰러지고, 상처의 독을 입으로 빨아주던 정형규란 자 역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이 사건은 도청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한 분열 공작으로 밝혀졌지만, 도청은 큰 혼란에 빠졌다.
80년대, 공안기관 버릇 더 나빠지다.
광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시대에는 1970년대에 비해 저항이 거세졌다. 광주에서 사람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저항세력도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저항이 거세질수록 간첩도 많아졌고, 유형도 다양해졌다. 1970년대에는 재일동포 사건이 조작간첩 사건의 대종을 이루었다면,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재일동포 사건이 여전히 강세인 가운데 일본 관련 사건- 국내 인사가 일본에 갔다가 총련이나 한민통 계열 사람과 접촉했다가 간첩으로 만들어지는 사건- 이 부쩍 늘어났고, 납북 어부들도 간첩이 되었다. 유럽 유학생들이 몸조심을 한 탓인지 미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구미유학생 간첩단도 만들어졌다.
현재 밝혀진 조작간첩 사건의 통계나 자료들은 대개 1980년대에 투옥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와의 비교가 힘들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 더 힘없고 더 억울한 사건들이 많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마디로 공안기관의 버릇이 더 나빠진 것이다. 군사독재의 입장에서 정국이 어려울 때 간첩 사건을 터뜨린다는 공식이야 변함이 없었지만, 이런 ‘큰’ 목표가 아니더라도 간첩은 꾸준히 만들어졌다. 계급 정년에 걸려 신경질이 늘어난 과장의 승진을 위하여, 하는 일 없어 보이면 예산이 깎이니까, 막대한 포상금과 해외연수의 기회를 위하여…. 그리고 여기에 일부 반공정신이 투철한 ‘애국시민’들도 가세했다. 경쟁자의 사업이 좀 잘되어도 간첩으로 몬 사례가 있고, 조선대학의 경우는 학내 분규에서 자신의 처남을 간첩으로 신고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살해당한 수지 김도 최종길 교수마냥 죽어서 간첩이 되지 않았던가?
자백은 증거의 왕!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개 두세달씩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문하면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맹신을 갖고 있는 수사관들 앞에서 고문을 견뎌낼 장사는 없다. 고문하다 죽으면 의문사고, 살아남으면 간첩이 된다. 나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수사기관의 지하 밀실에서 저승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 같은 놈 하나 여기서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다.” 누구는 월북하려다가 총 맞아 죽은 것으로 해버린다고 하고, 누구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하고, 좀 솔직한 놈은 ‘심문 투쟁’하다가 죽었다고 하면 시말서도 안 쓰고 끝난다고 하고…. 그 자신이 중앙정보부의 고문 피해자였던 김영삼의 오른팔 최형우도 내무부 장관이 되어서는 간첩은 고문해도 괜찮지 않냐고 했다. 납북 어부 김성학은 “버둥거리는 통에 눈가리개가 벗겨진 사이로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때는 제발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다”라며 몸서리를 쳤다.
간첩은 당연히 교육을 받는다. 그가 짝퉁 간첩인지 진짜 간첩인지 가려내는 방법은 그가 어디서 교육받았는지이다. 김성학은 수사관들의 계속되는 추궁에 “알아야 말을 하지요”라고 답했고, 수사관들은 “네가 재북시 북에서 받아온 지령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을 못하는 모양인데”라며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이렇게 달달 외운 것을 검사 앞에 가서 부인하면 큰일이 난다. 검사는 왜 수사기관에서 부인하지 내 앞에서 하느냐며 다시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재교육! 자백하고 전향하면 선처해준다는 검사의 말 앞에 대개 굴복하고 만다.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지만, 검사 앞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있다. 난수표도, 그 흔한 독침도 없는 조작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나 이적표현물소지죄는 조작간첩 사건의 설거지를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물건’을 만들다 불량품이 난 경우 그냥 곱게 내보낼 수는 없다. ‘도깨비 빤스’의 고무줄보다 더 신축성 있는 고무찬양죄가 있는 한, 그리고 큰 책방에 가면 수십권씩은 버젓이 팔리는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있는 한 국가보안법 불패의 신화는 이어져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조차 어떻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던 기적과 같은 김성학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이 무죄가 나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처벌을 받았다.
박홍이나 황장엽이나 정형근 같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 사회에서 암약하는 고정 간첩이 5만이요, 3만이요라고 떠든다. 진짜 간첩이 그렇게 득시글거린다면 왜 잡지 않는 걸까? 간첩 한명에 포상금이 얼마인데….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것 같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가 간첩 잡는 애국자가 간첩에게 쫓겨다니게 되었냐는 ‘우국충정’ 철철 넘치는 장탄식을 <조선일보>에서 보았다. 이게 무슨 얘긴가 깜짝 놀라 알고 보니 서경원 전 의원이 자신의 방북 사건을 수사했던 정형근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얘기였다.
조작간첩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간첩’ 서준식이 비전향으로는 처음으로 살아서 옥문을 나서면서부터이다. 민가협에서 조작간첩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사람들은 ‘아하, 간첩이란 게 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힘들게 깨달았다. 양심수 석방의 요구에서조차 빠져 있던 간첩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소리 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나는 한평생 한평짜리 독방에서 법무부 교화자료나 뒤적거리며 살아가야 하는가”- <야생초 편지>로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진 황대권의 독백이다- 라는 탄식을 해야 했던 조작간첩들은 대개 석방됐다.
‘상습간첩’ 민경우를 석방하라.
그러나 아직도 몇몇 ‘간첩’들은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이라는 송두율 교수도 풀려났건만, 아직도 옥중에 있다. 북은커녕 해외에도 한번 못 나가본 전 범민련 사무처장 민경우는 벌써 두 번째 간첩죄로 투옥되어 있다. 이 ‘상습 간첩’은 범민련이 이적단체라는 이유로 모든 남북 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탓에 서울에서도 북쪽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본인은 공안기관이 도청하는 통신공간에서 지령을 수수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기밀을 전달하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간첩이 되는 것”이라고 최후 진술에서 항변했지만, 여전히 그는 국가보안법과 공안기관이 살아남기 위해 ‘간첩 리철진’보다 더 어설픈 간첩이 되어야 한다. 이 연재물의 소제목을 ‘간첩의 추억’이라 이름 붙였지만, 민경우와 양심수후원회의 간사로 동분서주하는 그의 부인 김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간첩을 추억이라 얘기하기에는 너무 조급했던 것 같다.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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