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조선일보는 5.18을 이렇게 보도했다.

YOROKOBI 2008. 5. 18. 08:04

5.18을 두번 죽이는 자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진실과 바름을 뒤집어 보도하는 거짓을 행하는 현실이 만화속인지 꿈속인지.....

 

조선일보는 ‘5·18’을 이렇게 보도했다!

[Echo칼럼] ‘5·18’ 28주년 맞아 ‘비겁한 언론’ 되돌아보기

[쥔장의 변]
‘5·18’이 다시 돌아오는군요.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름이 바뀌고, ‘5·18’을 소재로 한 영화('화려한 휴가')까지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광주에서는 미완의 해결 탓에 여전히 '광주사태'라 부른다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말입니다. 5월이 돌아오면 내 심장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마구 헐떡입니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헐떡입니다. 금년은 특히 더 심하군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그럴까요.

‘5·18’ 28주년을 맞아 예전에 썼던 글 한 편을 올립니다. 2002년 5월 19일에 '인터넷한겨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조선일보와 ‘5·18’>) 이 글을 통해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조선일보의 진실을, 아니 대한민국 보수언론들의 벌거벗은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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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언론인이라 할 수 있는 김대중 편집인이 최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열린 IPI(세계 언론인 기구)총회에 다녀온 뒤에 조선일보에 칼럼 하나를 올렸습니다. 제(題)하여 <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2002.5.18)라는.

김 편집인은 이 글에서 미국이 교사한 군부쿠데타 - 프레시안지에서는 이를 '미디어쿠데타'라고 불렀다 - 에 의해 잠시 쫒겨났다가 이틀 만에 다시 복귀한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대(對)언론 독설모음을 수많은 인용부호와 함께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권력과 언론자유의 필연적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사뭇 감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물론 그 속에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후보의 팬클럽인 노사모에게까지 '조폭언론'으로 낙인찍혀 '절독운동'을 위협받고 있는 자칭 '비판언론' 조선일보의 딱한 처지를 베리에이션에 담아 다음과 같이 멋드러지게 표현해내기도 했지요.

".... 이런 와중에서 여전히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생존문제에 매달려 있는 언론후진국들의 외마디 소리들이 약간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언론후진적 상황 가운데 한국이라는 나라도 ‘언론감시대상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한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안쓰러웠다. 하긴 IPI 총회에서 차베스의 독설들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던 그 시각에 한국에서도 ‘조폭언론’에 대한 절독운동을 선동하는 난폭한 소음과 거친 욕설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김 편집인이 차베스의 만행(?)을 보여주는 숱한 장면 가운데서도 유독 '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는 말로 칼럼의 타이틀을 정한 것은 이것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고발당하고 핍박받는 자유언론의 상징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빌라도의 법정에서 로마군병들에게 희롱당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를 향해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고 소리친 것처럼....

그렇듯이 김 편집인에게는 자칭 '비판언론' 조선일보의 운명이 필경 무죄한 사람이로되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던 예수만큼이나 지난하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는 신파조의 제목을 정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김대중 편집인이 언론자유에 대한 탄압의 징표로 내세운 그 외침을 언론자유를 배반한 비열한 언론에 대한 고발의 징표로 다시 돌려 주렵니다. 그것은 김대중 정부 이전에 권력과 한 번도 맞서 본 적이 없는 조선일보의 후안무치한 본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김 편집인이 이 글을 올린 때가 시기적으로 5.18 주간과도 겹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하에서 자칭 '권력과 맞서는 비판언론'이라는 조선일보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광주에서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끔찍한 대학살극과 관련하여 그 비극적인 순간에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가를 당시 신문보도를 검색하며 하나씩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김 편집인을 비롯한 조선일보 기자들이 불의한 권력에 놀아난 자신들의 '불쌍한 꼴'을 정직하게 반추해 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 광주민중항쟁과 조선일보

광주의 비극적인 소식이 조선일보 지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항쟁 후 무려 나흘이 지나서였습니다. 조선일보는 5월 22일 1면에 최규하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 11명의 교체사실>을 전하면서 그 옆에 계엄사 발표를 빌어 <광주 일원 소요사태> 사실을 아주 짧게, 그러나 제목은 큼지막하게 보도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21일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 지난 18일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이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광주 일원 소요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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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면, 1980.5.22
 
당시 조선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는 '계엄사의 찌라시'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 옆에 나와있는 <계엄사「광주사태」발표>입니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계엄사의 발표문을 발췌해서 옮깁니다.

"계엄사령부는 이번 소요사태가 18일 전남대학생 6백69명이 거리에 나와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감으로써 시작됐다고 밝히고,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했다.... 계엄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광주지역 소요가 악화돼 극심한 난동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상은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주동 학생및 깡패 등 현실불만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트린데 기인됐다고 했다.

광주지역에 유포된 유언비어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남자고 여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러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얘들이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러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점거하고 있는 가톨릭센터 건물에는 시체 6구가 있다 ▲데모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가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버렸다 ▲진압군인들은 경상도 출신만 골라 보냈다는 등이다...."


유감스럽게도 계엄사가 발표한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경상도 출신만 골라서 진압부대로 보냈다'는 것 외 몇 가지 과장된 주장들말고는 훗날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계엄사는 자기들이 행한 잔학상이 나중에 알려질 경우 쏟아질 국민적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충격요법을 겸하여 진실과 거짓을 악랄하게 바꿔치기한 것이지요.(그러나 조선일보는 바로 그 다음날 '유언비어에 속지 말자'는 내용의 만평을 내보내 계엄사의 거짓발표에 신속하게 화답했습니다.)

항쟁이 한창 격화되던 5월 23일 조선일보의 1면을 장식한 제목은 뜻밖에도 <광주사태 수습기미>였습니다. 교통·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각계 대표 15명이 당국과 협의하여 "유혈을 피하자"는 설득에 동의했다는 것을 크게 부각시켜 '수습기미'라고 제목을 단 것입니다. 계엄사의 입김에 따라 어떻게든 광주의 문제를 축소시키려는 저의가 엿보이는 듯 합니다.

조선일보는 그 밖에 <광주사태 자제·대화를-가열되면 외세 오판위험>, <계엄사령부, 광주사태에 대해 무기 반납하면 요구 호의수락>, <연합사소속, 한국군 병력 소요사태진압 이동동의>, <평양방송, 일반프로전면 중단 광주사태 계속보도> 등 광주문제와 안보불안을 연계시키는 기사들을 대거 1면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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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7면 사회면, 1980.5.23

23일자 7면(사회면)에서 조선일보는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18일~22일까지의 진행상황을 <폐허같은 광주-데모 6일째>란 제목 아래 비교적 소상하게 스케치해서 내보냅니다. 조선일보가 전하는 광주사태 초기 나흘 간의 진상이 얼마나 진실에 근접했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18일)".... 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연좌시위하면서 '김대중 석방'을 외쳤다. 경찰은 길양쪽에서 페퍼포그를 발사하며 죄어들어가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로파출소를 비롯, 대림동 동산 산수 자산동 5개 파출소를 부쉈다. 오후 3시쯤 학생회관 앞에서 페퍼포그차 1대를 뒤엎고 화염병을 던져 불태웠다.... 오후 5시 전남대, 조선대 등 2개 대학교와 광주교대 등 7개 전문대학에 진주했다...."

조선일보의 스케치를 보면, 무법한 학생들이 떼거리를 지어 파출소를 잇달아 부수고, 페퍼포그차도 뒤엎어 불태워우는 등 파괴행위만 줄곧 일삼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다음에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인가가 진주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진주했다'는 말은 군대에 주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일보 기자의 말인즉, 18일 오전.오후에 걸쳐 학생들의 난동이 이어지면서 군인들이 오후 5시에 각 대학에 진주했다는 것이 됩니다.

(19일)"전날에 있었던 시위의 피해가 전해지며 오전 10시쯤부터 금남로에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도로변에 있던 길이 1백50cm.폭 40cm의 화분대와 부서진 공중전화박스,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고 경찰에 투석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댔다.... 충돌은 확산되어 광주 전역과 MBC 앞 등에서도 출동한 군인과 대치했다. 이때부터 밀고 흩어지는 공방전이 오후 내내 계속됐다. CBS 취재차 1대와 MBC 취재차 3대, 또다른 승용차 2대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탔다.... 이들 사이에 '여자들의 옷까지 벗겼다'는 등의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후 7시 40분 광주고속터미널 앞에는 1천여명이 공중전화박스를 파괴하고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가 '경남' 번호판을 단 화물이 지나가자 차를 세우고 운전사를 끌어내린 뒤 트럭에 불을 질렀다.... 흥분한 이들은 곡괭이 몽둥이 등을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밤이 되면서 군병력이 증원되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위대의 과격한 파괴행위만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계엄군의 활약상(?)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충돌이 계속됐다'거나 '출동한 군인과 대치했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만 나오지요. 시위대는 혼자서 '흥분하고' 느닷없이 '곡괭이' '몽둥이' 등을 들고 설쳐대면서 애꿎은 차량들을 파괴하고 공중전화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치고 트럭에 불을 질러댑니다. 아, "여자들의 옷까지 벗겼다"는 얘기가 루머형식으로 소개되긴 했군요.

(20일)"오전 10시 현재 평온, 요소요소에 집총군인들이 서있고, 상가는 절반가량이 철시한 상태,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표정들. '진압부대는 모두 경상도출신들이라더라', '택시운전사들이 학생을 태우고 가다 찔리기도 했다'는 등의 소문이 시민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치안본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8,19일 이틀 동안 경찰관 6명이 부상하고, 임동파출소가 전소됐다고.... 오후 6시쯤 택시운전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우리가 차로 치어 죽이겠다'고 결의, 시내버스 2대와 택시를 앞세우고 헤드라이트를 켠채 시내로 돌진하면서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8시 10분쯤에는 소방차 3대를 탈취, 사이렌을 울리며 금남로를 통해 도청 앞으로 돌진하면서 시위는 더욱 가열됐다.... 9시쯤 학동파출소와 그 앞에 있는 경찰사이카 2대, 노동청 앞에 있던 택시 1대가 각각 불타고, 9시 40분쯤에는 MBC 건물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밤 10시부터는 시위가 폭동으로 변해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밤 10시 30분쯤에는 도청이 포위됐고 도청에 있던 간부들이 피신, 도청은 함락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조선일보의 스케치를 보다 보면 어떻게 된 게 당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경찰들 뿐입니다. 경찰관 6명이 부상당하고, 밤에는 경찰관 4명이 사망, 3명이 중상을 입고.... 기타 등등. 반면 시위대는 더욱 난폭해져서 "계엄군을 우리가 차로 치어 죽이겠다"고 차량시위에 나서고 그 때문에 광주사태가 한층 더 악화됐다는군요. 그런데 그도 모자라 밤 9시40분쯤에는 MBC건물을 불태우고, 마침내 밤 10시부터는 "시위가 폭동으로 변해" 사상자를 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참으로 못된 폭도들 아닙니까?

(21일)".... 동이 트면서 주위가 밝아지자 밤새 장갑차 군지프를 빼앗은 이들이 이를 이용, 도청 반경 500m거리를 두고 도청으로 쳐들어가려 하고 있고 군-경은 이를 사수하려 안간힘을 쓰는 광경이 보였다. 도청 주변 이외의 지역은 완전히 무법지대같았다.... 낮 12시 30쯤 돼 도청과 도경은 함락 직전이었고, 시내 곳곳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으며, 시 인근 읍-면에서도 주민들이 합세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들의 구호는 현정부 지도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의 극렬한 것들이었다.... 오후 3시쯤 이르러 이들이 인근 나주 등지에서 예비군무기고의 무기를 탈취해 가져다 군-경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도청과 도경에 머물러 있던 군-경은 철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시 30분께 경찰과 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부터는 '카빈으로 무장한 이들이 전남의대와 도경 쪽으로 진출 중' '광주 지원동 석산화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시내로 진출 중'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M1, 38구경 권총, 45구경 권총을 탈취'...."

시위대, 아니 폭도들 하는 짓이 설상가상입니다. 극렬한 구호를 내뱉으며 도청과 도경을 공격하고, 예비군무기고와 화약고를 털어 무장하는 등 그 흉악무도함이 날이 갈 수록 더해갑니다. 반면 우리의 경찰과 군은 "도청을 사수하려 안간힘"을 쓰다가 무장한 폭도들에 밀려 "철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가련함과 애처로움을 필설로 어이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22일)"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된 광주의 22일 아침은 전단살포로 시작됐다. 곳곳에 불탄 자동차들이 널려 있고 수백명이 총을 들고 다닐 뿐 아니라 장갑차와 페퍼포그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어 마치 격렬한 전쟁이 지나친 폐허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21일 밤 도청과 도경을 인수한 후 공공건물 파괴나 난동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본사는 이날 밤 9시 30분 경비전화를 통해 전남도청의 한 간부(부이사관) 댁에 전화, 이날의 광주상황을 알아본 결과, 쌀과 연탄이 떨어져 광주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음이 확인됐다."

"완전히 무정부상태....곳곳에 불탄 자동차....수백명이 총을 들고 다니고....장갑차와 페퍼포그차를 타고 질주....격렬한 전쟁이 지나친 폐허같은 느낌....쌀과 연탄이 떨어져 큰 불편...." 정말 이런 난장판도 없지요?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난동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군요.

[여기서 잠깐]

그러나 18일에서 22일에 이르는 상기한 조선일보의 스케치기사는 완전한 창작입니다. 우선 계엄군 투입부터 사실에 어긋납니다. 훗날 밝혀진 31사단 전투상보에 의하면, 계엄군이 전남대와 조선대 등에 투입된 것은 17일 자정을 기해 선포된 계엄령 전국확대 실시를 전후하여 이루어집니다.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33, 35대대가 전남대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 이어 새벽 2시에는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와 제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가 전남대와 광주교대, 조선대를 차례로 접수합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하여 곤봉과 군화발로 무수히 구타하고 체포합니다.(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등) 또한 공수부대와 합수부(안기부, 경찰, 보안대)는 새벽 5시경까지 학교와 예비검속 대상자의 가택 등을 수색해서 학생들을 잡아갑니다.

18일 전남대정문 앞에서 최초의 충돌이 있기 전에 벌어진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그러니 이후 그들이 시위대를 향해서 어떤 식으로 진압을 감행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글을 쓰는 도중에 계엄군들에 의해 난자된 시민들의 주검을 보고 수도 없이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지면제약상 그리고 너무나 잔인해서 진압과정에서 드러난 계엄군들의 만행을 차마 전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5월 24일자 조간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은 23일과 비슷하게도 <광주 시민·학생 자체수습 나서>입니다. "대책위서 적극 설득 작업, 질서회복 원칙엔 의견일치, 총기 2천5백정 회수"라는 내용이 붙어 있군요. 그 밖에 <美航母 한국해역으로 항진-북괴 오판대비 조기경보기도 파견>, <대간첩대책실무위 신고체제강화 등 논의>, <경제장관회의「긴축정책」선별해제-유보예산 천백27억 집행> 등도 주요기사로 다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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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7면, 1980.5.24

24일자 조선일보 7면 사회면의 으뜸기사는 <「유혈의 거리」청소…질서찾는 광주>입니다. 그 밑으로 <불탄 잔해등 참극 되새겨 학생들「과격제지」에 앞장>이라는 부제가 또렷하게 달려 있습니다. 사진 3개가 보이십니까? 맨 위 사진은 "불타고 찌그러진 차량이 엎어져 있고 보도블록 조각 등이 도로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광주시내 번화가"를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밑 사진(화면 한 가운데)과 그 좌측사진에 붙어있는 설명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광주의 22일과 23일-어제는 폭도화된 청년들에 의해 점령당했던 총(사진 右)이 오늘은 도청 총기반환소에 차례차례 쌓이고 있다.(사진 左)" 조선일보 눈에는 총을 들면 무조건 '폭도화된 청년들'로만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5월 25일자 조선일보의 1면을 장식한 주요뉴스는 <金載圭 교수형-朴善浩·李基柱·柳成玉·金泰元도 어제 서울구치소에서 집행>, <申鉉碻내각 일괄사표 "최근 소요사태 인책"-출범 5개월 6일만에 퇴진>, <북괴는 대남도발 말라-미 한국에 60일분 전쟁물자 비축, 브라운 미 국방경고>, <美航母 미드웨이 요꼬스까항 출항>, 그리고 <제34회 청룡기 쟁탈 중·고야구 선수권대회> 등이었습니다. 안보불안과 전쟁위기감을 고취하는 기사들이 많이 눈에 띄지요?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 2면에 실린 사설 <도덕성을 회복하자-진정 우리에게 너무한 경험 앞에>는 광주사태로 인한 북괴의 정세오판과 재침기회를 떠벌이면서 항공모함을 보내면서까지 우방을 지켜주려는 미국의 은혜를 소상히 나열하는 한편, '북괴의 남침위협'을 "통치기술의 하나로 가벼이 인식하고, '안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식상증에 걸려 있는" 국민들의 나태한 정신상태를 따끔히 질타했습니다. 이 중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어 잠깐 소개합니다.

"이들(고첩)이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등 갖은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리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 피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서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57년전 일본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사설] 도덕성을 회복하자)

이를 간추려 정리하자면, (1)광주항쟁의 촉발은 고첩들의 선동과 관련이 있고 (2)광주항쟁이 격화된 데에는 지역감정과 관련된 유언비어가 큰 역할을 했으며 (3)이 점에서 57년전의 관동대지진과 유사성이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관동대지진은 "잘못된 유언비어 => 흥분한 일본인들의 비이성적인 광란 => 한국인들 살상"으로 이어진 끔찍한 유혈비극이었습니다. 그럴진대 조선일보의 시각대로라면, 광주항쟁은 지역감정을 유포하는 고첩들의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광주시민들이 이성을 잃고 멀쩡한 제 나라 정부를 상대로 극심한 파괴를 일삼은 몰상식한 광란극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조선일보다운 명랑발칙한 발상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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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7면 사회면, 1980.5.25
 
7면으로 가봅시다. <'無政府상태 光州' 1週>라는 큼직한 제목이 눈을 때립니다. 그 밑으로 "銃 들고 서성대는 과격파들, 길목서 저지-무기반납 지연"과 "市民들 '生必品 동나 苦痛스럽다'"는 부제가 역시 선명하게 보이는군요. 이 글을 쓴 이는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기자(현 편집인)입니다. 자! 김대중 기자가 '광주의 1주'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잠깐 들어보시죠.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상태의 光州'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광주에는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타지에서 반입되던 생필품이 끊긴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상점과 시장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의 안정이 보장받지 않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고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얘기했다...."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답니다. 앞서 사진 설명문에 나온 '폭도화된 청년들'(24일 7면)만큼이나 신랄한 표현이지요? 또한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답니다. 정말 사람 살 곳이 못되는 '무정부상태의 광주'가 아닙니까?

5월 27일, 조선일보는 1면에 <한때 잘못 최대 관용>이라는 崔圭夏대통령의 광주 근교 특별담화내용을 "시민 냉정.이성 찾아야", "총기 반환…대화로 해결"이라는 소제목과 묶어 헤드라인으로 내보냅니다.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야 할 대상이 누군지, 아니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쳐야 할 대상이 누군지 헷갈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외 <광주사태 악용 선동말라-북괴 어떤 책동도 성공 못해>라는 李光均 문공부장관의 성명도 1면에 비중있게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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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7면, 1980.5.27

27일자 7면, 조선일보는 <혼미-광주사태 10일째>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상가·은행 등 문 못열어" "외부와 두절, 생필품난 극심"하다며, 임시취재반을 통해 항쟁 10일째로 접어든 광주시내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광주시내의 쌀과 보리는 거의 동이 났고, 일부 문을 연 변두리지역 정육점과 어물전의 재고도 고갈 직전에 있으며, 도시가스도 공급이 제한되고 있다....강경파들은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에 있는 1천여발의 수류탄과 광주시 절반이 파괴될 수 있는 TNT를 터트리겠다'고 위협했다...."

생필품 부족으로 인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덜고, 나아가 극악한 불순분자들의 자해위협으로부터 광주시민들의 안전을 돌봐야 한다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진압작전의 명분은 달리 없어 보입니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기사 아닙니까? 그 옆으로 <계엄사 발표, 광주-목포제외 전남 일원 평온 회복>과 <광주, 괴한침입 총난사 일가족 3명 피살> 등의 기사가 배치되어 광주의 혼미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월 28일 조선일보 1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기사 제목은 <계엄군, 광주 장악>이었습니다. 이날도 예외없이 '비판언론' '자유언론'을 자칭하는 조선일보의 지면은 계엄사 발표를 열심히 실어나를 뿐이었습니다. "새벽 3시 30분 군병력투입을 개시, 1시간 40분만인 5시 10분 광주시내 일원을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며, 군 투입과정에서 무장저항하던 폭도 17명을 사살하고 2백95명을 체포, 보호중"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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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면, 1980.5.28

광주가 계엄군의 무력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이 날, 조선일보는 <악몽을 씻고 일어나자-광주에 국민적 동포애를 호소하면서>라는, 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도 있다. 30년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10.26 이후 거센 변혁기를 가면서 광주에서 극악화해버리고 만 이번 사태의 결과를 놓고 어찌 광주시민들에게만 그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있는 일일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국민-민족집단으로서의 윤리적 차원에서 그러하며, 분단상황의 잠재적, 현재적 위기 속에 30여년을 함께 해 온 동족이요 동포로서 죄의식을 더불어 나누어가짐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이다."


계엄군의 장악과 더불어 "이제 광주시민들은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되고", "계엄군은 자제에 자제를 거듭하며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광주시민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아니, "광주시민들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고, 국민적 동포애로서 죄의식을 더불어 나누어 가지자"는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호소를 듣고 '죄 많은' 광주시민들은 가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차라리 입을 닫겠습니다.

5월 29일, 조선일보는 <서서히 문 열리는 광주>라는 1면 기사를 통해 계엄군 접수 후 달라진 광주의 활기찬(?)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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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면, 1980.5.29

".... 많은 시민들이 집이나 가게 앞에 나와 '이젠 괜찮은 것인가' 하는 표정으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다방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제법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코피를 나르는 아가씨에게 '오랜만에 미인들을 보게 됐다'는 농담도 오갔고.... 식량 등 생활필수품 문제도 사정이 악화되거나 심각한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다. 식당에서는 불고기백반이 팔리고도 있으며 시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식량 등 생활필수품 문제도 사정이 악화되거나 심각한 것 같지는 않다"는군요. 불과 이틀 전만 해도 "광주시내의 쌀과 보리는 거의 동이 났고, 일부 문을 연 변두리지역 정육점과 어물전의 재고도 고갈 직전에 있다"고 호들갑 떨더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27일자 1면, 22일 7면의 스케치기사 참조.)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시키자마자 광주가 대번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그래도 살 만한 곳'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이날도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민족정서를 살려 광주사태가 빚은 이 후유증을 화합과 인정이라는 고약으로 그 아픔을 덜자"고 특유의 매끄러운 달변을 토해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난국은 이 민족정서를 확인, 널리폄으로써 굳은 부분은 부드럽히고 맺힌 부분은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정서의 공감대에서 이 인정을 발굴, 널리 펴길 오늘날의 이 시점이 우리에게 절실히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빚은 이 후유증일랑 먼저 이 화합과 인정이라는 고약으로 그 아픔을 덜고, 이 민족정서를 에너지로 하여 모나지 않는 부드러운, 그러면서 발전적인 분위기를 우리 주변에 깔아나가기로 하자."([사설] 민족정서를 살리자)

그러나 광주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민족정서'니 '단일민족.단일언어.단일문화' 같은 거창한 단어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광주사태가 왜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계획됐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또한 그것이 언론에 의해 얼마나 왜곡.전달됐는가'를 가감없이 진실 그대로 밝히기만 하면 됩니다. 본디 진실에는 수식어가 필요없는 법입니다. 그 자체로 울림이 있으니까요. 알맹이 없는 빈말일 수록 더 요란하고 시끄러운 법 아니겠습니까?
 

5월 31일, 조선일보는 <광주에서 본 광주사태>라는 제하의 임시취재반 현지 방담기사를 내보냅니다. 한바탕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광주의 10일을 차분히 정리해보자는 뜻이었을 테지요. 이 자리에 조연흥 사회부차장, 서청원 기자(현 한나라당 대표), 조남준 기자, 송희영 기자 등 10명의 기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광주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들의 방담을 통해 광주항쟁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을 잠시 들어봅니다.(발췌.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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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3면, 1980.5.31
 
"5.18 조처가 발표된 18일 오전 10시쯤 1백여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이미 학교에 진주해 있던 군(軍)과 실랑이를 벌이게 됐어요./.... / 같은 시각인 오후 3시, 황금동 학생회관 앞에서도 학생들은 최초로 경찰의 가스차를 불태우기도 했어요. / 이때 이미 경찰은 학생이 과격해져 자체 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듯 군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고 해요. / 경찰의 진압능력에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봐야 겠어요...."

앞서도 언급했지만, 공수부대는 이미 17일 자정을 기해 광주 시내 요소요소에 진주해서 18일 새벽부터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의 과격시위를 막지 못해 경찰이 군 병력지원을 요청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말입니다.

"19일 오후 2시 쯤까지 산발적으로 쫒기기만 하던 시위대가 2시20분쯤부터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어요. / 그런데다가 이때부터 시위군중에 지역감정과 관련된 악성루머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 루머는 삽시간에 광주시민을 자극하게 된 겁니다./..../ 정말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진압을 당했는데도 심하게는 하지 않았어요. / 이런 이유 때문에 경찰이 데모를 진압하지 못하고 군에 지원요청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건 정말 아이러니에요...."

계엄군들이 광주시민에게 자행한 짓은 악성루머 수준을 뛰어넘는 끔찍.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을 단지 지역감정과 관련된 유언비어에 자극받아 일어난 비이성적 광란극인냥 몰고 가는 것은 광주시민들을 거듭 거듭 죽이는 짓입니다.

"어찌됐든 운전사들의 차량데모는 이번 광주사태가 이렇게 극한상황으로 치닫게 된 또 하나의 고비가 돼버린 겁니다. / 결국 데모대가 인근 예비군이나 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 무장하게 되자 계엄군은 22일 새벽 4시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청에서 철수했어요./ 이때부터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를 장악하기까지 광주는 완전히 치안, 행정공백지역으로 되어 버렸어요...."

광주항쟁이 극한으로 치닫게 된 것은 차량시위 때문이 아니라 진압군의 잔인무도한 살상행위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광주항쟁이 격화된 책임을 줄곧 광주시민에게 전가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럼 그 동안의 피해상황을 대략이라도 짚고 넘어가죠./ 광주 MBC와 아세아자동차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어요. / 불탄 건물로는 5층 건물인 광주 MBC, 광주세무소, 전남도청차고, 노동청 일부, KBS 일부, 임동, 학동 등 16개 지-파출소 등이 불탔어요./ 다음에 들 수 있는 것이 차량피해입니다. / 탈취됐던 차량이 아세아자동차가 장갑차 포함해서 3백 60여대, 광주고속이 고속버스 포함해서 50여대, 소방차 13대, 그리고 택시-시내버스 등을 모두 합하면 6백여대나 된다고 해요. 이중 상당수가 현재로서는 회수됐으나 경찰은 불에 타거나 전파된 차량이 시외버스 30여대, 택시 48대 정도로 추산하더군요./ .... /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는 인명피해입니다. 어찌됐든 사람의 목숨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회복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인명피해를 논하다가 갑자기 말을 끊고 화제를 바꾸고 맙니다. 앞서 기물파손.차량 파괴를 논하면서 자세한 갯수를 말하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하다면서 왜 광주시민들의 피해사실은 대충 넘어가는 걸까요?

"이번 사태가 준 또 하나의 교훈이라면 현대사회에서 교통이나 통신의 두절이 시민생활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초래하느냐는 점을 들 수 있을 겁니다./ .... /우선 행정의 공백상태 속에서도 전기나 수도 시내전화가 끊어지지 않았고 아무나 총을 들고 다니는 상황 하에서 은행이나 금은방 한 곳 털리지 않았다는 건 시민들 스스로 자랑으로 여겨도 조금도 무리가 없다고 봐요. / 또 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간첩용의자를 잡아 군부대에 넘겨주었다는 건 광주시민, 나아가 온국민의 반공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 게 아닐까요?...."

광주항쟁을 통해서 '현대사회에서 교통이나 통신의 두절이 시민생활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초래하느냐'를 교훈으로 끄집어내는 조선일보 기자들의 학구열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게다가 반공의식의 승리까지 견인해내는 저 열정까지.... 역시 일등신문 기자들이라 다르지요?

"광주시민들은 이번 사태를 외부에서 어떻게 보는지 굉장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은데? / TV에서 '폭도' '난동' 등으로 표현되자 시민들은 '어떻게 80만 광주시민 전체를 그렇게 몰아 붙일 수 있느냐'고 대단히 흥분하기 시작했어요. 이번 전반적인 보도가 대부분의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폭도'와 구분짓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반성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되자 광주취재기자 중 외신기자는 환영을 받은 반면 국내기자들은 생명까지 위협받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어요...."

조선일보 기자들이 제시한 '다수의 광주시민과 소수의 폭도'라는 이분법은 '광주시민=폭도=난동'이라는 기존의 시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교활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조선일보가 '폭도'라고 명명한 사람들을 역사는 '민주화유공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광주시민들은 요즘 다른 지녁에서 시끌복족하게 광주시민에게 구호품을 보내자는 등 모금운동을 펴는데 대해 씁쓸해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떠들썩한 구호보다는 광주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해 달라는 것이죠./ .... / 이번 피해가 시민들의 일상적인 경제와는 거의 연관이 없는 것이어서 결코 시민들이 구호품을 받을 처량한 처지는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조선일보야말로 광주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해바라기언론이라 할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항쟁기간 내내 계엄사의 발표문을 그대로 베껴쓰면서 광주에 대한 그릇된 정보만 제공했습니다. '생필품난 극심'과 같은 기사만 내보내면서....

"그럼 마지막으로 사태수습의 방향, 앞으로의 사태전망 등을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이 광주시민의 정신적인 피해에 대한 보상문제일 것 같습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광주시민들의 의식이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피악해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이 사태가 났느냐, 광주시민들은 그 와중에 무엇을 원하고 있었나, 이 사태에 얼마만큼 슬기롭게 대처했느냐, 남은 숙제는 무엇이냐, 이런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랄까...."

광주항쟁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온전한 진실규명을 거부하고 그것을 22년 전의 그날처럼 지역감정의 차원으로 의도적으로 몰고가려는 어둠의 세력들과 그에 빌붙은 거짓언론들이 아직도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를 지금 조선일보 기자들의 방담기사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3. "불쌍한 조선일보 기자여, 네 꼴을 보라!"

이상으로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적인 기간 동안에 조선일보가 어떤 식으로 지면을 채웠는가를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살펴 보았습니다. 정리하여 몇 가지로 말씀드리자면 ;

(1)조선일보는 광주시민의 피해사실과 계엄군의 잔학상을 일체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는 커녕 시위대의 과격.난폭한 파괴상만 일방적으로 부각시켜 그릇된 이해를 갖게 했습니다.

(2)조선일보는 광주민중항쟁을 어떻게든 북한의 고첩과 연계시켜 그 순수성을 훼손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광주민중항쟁의 초점을 지역감정과 연관된 유언비어에 맞춤으로써 그 본질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3)나아가 조선일보는 불의한 정권에 맞선 시위대를 가리켜 '폭도화한 청년들' '총을 든 난동자'(김대중 기자)라 불러 그들의 시각이 계엄군과 다를 바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4)결론적으로 조선일보는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하여 광주시민들이 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매도했습니다. '동포애' 운운하면서 "광주시민의 '죄의식'을 더불어 나누자"고 호소한 사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각설하고, 당시 조선일보는 여느 신문들과 다름 없이 계엄사의 발표문을 그대로 실어나르는 충성스러운 콘베이어에 불과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를 향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며 '선비의 직언'를 농설하던 그 맹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현존하는 총과 칼의 위협 앞에서 조선일보는 철저하게 계엄사의 지시에 순응.복종했고, 그를 위해 알아서 기는 겁약하고 비굴한 모습만을 연출했습니다.

그런 조선일보가 오늘날 '비판언론'을 참칭하며 '자유언론'의 투사인냥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광주의 학살을 지시한 전두환.노태우는 5.18 특별법으로 - 완전하지는 않지만 - 마침내 단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편에 서서 한 목소리를 내었던 조선일보는 단죄 한 번 받음이 없이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바꾼채 여전히 이 땅에서 일등신문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억압적 상황에서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들이 다 이처럼 밑으로, 밑으로만 기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내가 굳이 조선일보를 지목하여 지난 80년의 비굴을 재론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불쌍한 기자들이여, 네 꼴을 보라'는 말을 빗대어 마치 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자유언론의 상징인냥 자처하며 나아가 오노를 능가하는 현란한 헐리웃액션으로 온 국민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론학자도 아니고 맹렬한 투사도 아닙니다. 단지 두 아이의 아빠이자 평범한 시민으로서 위선과 거짓이 싫어 지난 날의 기록을 뒤지며 미욱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글을 맺기 전에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전두환의 주구, 혹은 계엄군의 찌라시노릇을 한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렵니다.

"불쌍한 조선일보 기자들이여, 네 꼴을 보라~!" (200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