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복음주의와 실용주의 이신건 박사께서 몇 달 전 <말씀과 삶>에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서평의 글을 주셨다. 다비아 사이트 <이신건의 책읽기> 메뉴에 올려져 있다. 그 서평을 읽고 그 책이 대단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릭 워렌 목사님의 다른 책들도 역시 그에 못지않은 반응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 부활절에 개척예배를 드린 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새들백 교회는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이미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개척 예배를 드린다는 전단을 새들백 지역에 3만장(?)을 뿌렸다고 한다. 그날 200명이 참석했다. 그것도 신기한 현상이다. 우편으로 전달받은 전단만으로 생판 모르는 곳에서 2백 명이 모일 수 있었는지가 말이다. 그는 이미 그곳의 시장 조사를 충분해 해두었다. 어떤 층을 전도의 대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명확한 로드맵을 만들어 두었다. 교회 개척기라 할 수 있는, 동시에 목회철학이라 할 수 있는 그 책은 세계 곳곳의 목회자들에게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아마 3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교회라고 한다면 3만 명 되는 곳이 여럿이고, 순복음 중앙교회는 수십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하니까 새들백의 3만 명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미국이라는 사회를 배경으로 놓고 본다면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릭 워렌 목사는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까? 요즘 며칠 동안 나는 그분의 설교 50편쯤 읽었다. 그분의 설교를 읽은 덕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설교자들의 특징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청중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 그들의 설교 핵심이다. 그게 설교 내용이기도 하고, 형식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에 내 생각이 좀 복잡하다. 괜찮게 나가는 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은 이렇게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 앞에서 느끼는 당혹과 무력감 같은 것들로 말이다. 왜 나는 그들과 정반대로 설교하는 걸까? 왜 나는 청중이 아니라 철저하게 텍스트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중이 요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설교라고 한다면 아무리 깊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만, 무의미한 게 아닐까? 릭 워렌 목사는 청중의 삶 한 중간에서 설교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맴돌다가 거기서 설교를 끝냈다. 그들의 고민을 적절하게 포착하고 현실적인 대처방안들을 제시했다. 간단하고 명확하고 강력했다. 심지어는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 비슷한 내용의 설교가 많았다.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할 수 있을 길에 대해서, 돈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내의 심층적 욕구를 들어주는 방법에 대해서, 불평을 극복하는 길에 대해서 등등, 대충 이런 주제들을 매우 세련되게 전달하는 설교였다. 청중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신학적인 주제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다. 결혼, 자식, 집, 저금, 직장, 고부갈등, 부부갈등 같은 문제 말이다. 릭 워렌 목사는 이런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것을 설교라고 생각했다. 그의 많은 설교를 읽은 후의 내 심정은 좀 참담하다. 도대체 성서 텍스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왜 정신분석이나 목회 상담의 문제에만 치우칠 뿐이지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할수록 교회가 부흥한다는 이런 현실 앞에서 목사들에게 어떻게 신학적인 설교를 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째로 릭 원렌 목사의 설교는 전형적인 교양강좌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예배 시간에 할 필요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둘째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이 내면적인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만약 앞으로 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위로를 제공하는 집단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거기에는 역사도 없고, 노동 해방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 변혁적 능력도 없다. 순전히 개인의 종교적 영역만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종교 기관이 될 뿐이다. 이미 60년 전에 디트리히 본훼퍼는 이런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인간 삶의 약한 부분을 위로하는 기능으로 전락하는 위험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는 종교보다는 오히려 ‘비종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릭 워렌 목사의 설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그렇게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게 곧 미국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 그대로 '프래그머티즘'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근본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과연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가 그럴듯하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인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옳은 말인가? 그런 실용주의, 그런 도구주의를 옳다고 따라가는 이 세대를 거슬려 헤엄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 어쨌든지 좀 복잡하게 되었다. 다시 천천히 생각할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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