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믿음의 내용을 가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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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가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경험을 믿거나 생각을 믿거나 돈을 믿거나 모두에게는 그 무엇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대상을 가르키는 것이고 믿음은 그 믿음에 대한 태도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그 믿음의 대상과 그 대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기독 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모습에 대하여 논의 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논할 때의 태도. 우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정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의 대상을 우리는 삼위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대상이 삼위 하나님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 논의의 핵심이 기독교적인 지성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인간이 신뢰하는 대상을 동일한 가치로 본다는 것자체서 이미 기독 지성을 떠난 생각이며 이곳에서의 논의 핵심을 벗어난 것입니다. 불교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은 기독카페의 기독 지성의 토론이 아니라 그저 기독이라는 이름과 상관없는 세상에서 형이상학을 논할 때 말하는 세상의 여러 논의 중의 하나 정도일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신앙이라는 틀속에서 말하는 기독 지성이라는 것은 먼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논의이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믿음의 대상에서부터 갈필을 잡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의 어디도 이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교리 이전에 성경의 핵심이며 율법시대 이전의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교리라는 범주를 이미 초월한 인간 본연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이것은 교리로 받아드리고 거부하고의 문제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요구이기에 이를 받아 드리고 거부하는 것은 기독 지성을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논의 할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가치와 세상의 다른 어떤 기준에 의해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 지성이 아닌 이미 기독 지성을 거부한 세속적 인간 교만에 의한 논의일 뿐입니다. 따라서 기독 지성은 늘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경외심에서부터 시작되는 지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한 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독 지성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신성을 모독하는 비신앙적인 논의를 마치 지성의 무엇인냥 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을 망각하고 촛점을 잃은 많은 논의의 한계를 보면서 말씀 드립니다. 기독 지성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믿음의 대상을 다르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함이 또한 문제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일치하고 있지만 그 대상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인 성경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하였기에 이스라엘은 모세가 호렙산에 있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신상을 애굽에서 그들을 건지신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에 예배해야 할 대상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조각하고 스스로 형상화 하였기에 결국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모세로 부터 주어질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하지 않고 다른 그 어떤 철학이나 그 어떤 것으로 믿음의 대상을 말하려는 것에서부터 문제는 야기된다고 봅니다. 기독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위해 성경적의 해석과 적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한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러므로 성경 해석과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들이 우리의 논의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 지성을 말하면서 성경적 권위에 대하여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권위에 대한 시각차이가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성경자체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논의 우선으로 여긴다면 이 역시 기독 지성의 논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 믿음의 모습에 대하여 기독 지성을 논할 때 사실 가장 많이 있었으면 하고 또한 그 논의가 활성화 되길 원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섬김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같더라도 우리의 태도와 삶의 모양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르게 각각 다른 삶의 영역가운데서 나타나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이 각각인 것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한 믿음의 내용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공간에서 이런 믿음의 모습에 대한 논의는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다루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믿음 자체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각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하여 믿음에 모습에 대한 토론이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바리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해하고 또한 포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설교방이나 교리 공부방이 강연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 지성은 복음을 위해 열린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교리로 사람을 포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에서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루어지는 믿음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매우 포괄적으로 다루어 질수 있다고 사려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독 지성인의 행동과 모습이 있기에 이런 점은 더 많이 도전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는 늘 분명한 믿음의 행동들이 요구 되기 때문입니다. 전 이 공간이 이런 점에서 보다 활발하게 여러 믿음의 모양들이 다루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여러 교회의 여러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점을 더 풍성하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것같습니다. 기독 지성을 말하는 이곳에서 전 심도 있게 믿음의 모양들이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기독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여러 논의들을 보면서 저 나름대로 생각 되어지는 것들을 두서 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사실 이 게시판은 여러분들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의 바램이 그렇지만 사실 이곳을 만드는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기독 지성의 이름하에서 하나님의 모독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성경의 원리속에서 나타나길 바라고 더 나아가 바른 기독 지성적 이해를 근거한 우리의 모습에 대한 지성인의 행동들이 제시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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