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부분적인 성경 해석의 문제

YOROKOBI 2008. 9. 27. 19:01

부분적인 성경 해석의 문제

성경은 기록 형태로 볼 때 2000년 이상 존재했지만 이를 해석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성경을 구성하는 66권의 책들의 저자들과 기록 내용의 역사와 문화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의 기록 언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사어(死語)이다. 이 때문에 일관성 있게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들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하는 식으로 성구들을 취해 해석하며 설교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해석 방법이 이사야 선지자 당시 남방 유다 사회에서도 유행했다.(사 28:9-10)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사 28:13) 이것은 제사장과 선지자를 포함한 선민이 하나님이 준비한 진노의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옆 걸음치고 비틀거린 결과였다.

이상(異像)을 그릇 풀어 재판할 때 실수했고, 모든 상에는 토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깨끗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불결해졌다.(사 28:7-8) 이것이 남방 유다 사회가 맞은 종말(終末)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한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내린 저주의 결과이며 그 마지막은 파멸의 심판일 것이라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했다.

남방 유다의 멸망과 파멸은 이사야의 소명부터 이미 작정되었다.(사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9-12)

이 당시 선지자와 제사장을 포함한 선민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했다.(사 28:9-10)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했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렘 23:36)

초대교회 시대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잘못된 경향이 설교자들 중에 나타났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이 당시 많은 설교자들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며 전했다. 말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뜻했다. 성경의 성구들 중, 사람 마음에 거슬리는 것들은 전혀 해석하지 않았다. 감동적이고 듣기 좋은 성구들만 골라 설교했다.(갈 1:10) 그리고 지혜의 아름다움은 세상 철학과 사상, 처세술 그리고 윤리도덕에 관련된 교양과 수준이 있는 지혜로운 말들을 의미했다. 그 결과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었고 세상의 일반 상식 수준으로 전락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잘못된 설교자들에 의해 많은 성구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용도 폐기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초점을 맞춰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했다고 단언하며 주장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혼잡하게 한다는 표현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취사(取捨)한 결과 교회와 교인들 사이 나타난 신학적인 또는 교리적인 혼란을 뜻한다. 이를 방지하는 방법은 3가지다.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같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 마음대로 가감(加減)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충성스럽게 전한다는 뜻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전한다'는 것은 설교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춰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하는 식의 성경 해석과 설교를 피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이 왜 여전히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설교하는가? 우선 거의 2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를 지배한 헬라 철학의 이원론(二元論)에 근거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 때문이다. 이원론과 이분법적 사고는 어느 하나를 버리게 만든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 그리고 인간 나라와 땅의 나라, 이 둘 중 전자만 기독교는 중요하게 본다. 그 결과 현세도피적인 즉 내세적인 교리와 신학이 형성된다. 금욕주의적인 내용을 가진 성구들만이 교회에서 자주 인용된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교회와 목회자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해석한다. 자연스럽게 현세적인 것과 관련된 성구들은 용도가 폐기된다.

이분법적 사고로 볼 때 구약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믿음의 위인들이 축첩하는 것을 허락했고 신약 시대와 달리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과 전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달리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 결과 기독교 교회는 신약만 사랑하고 구약을 적게 설교한다.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인 다윗 왕국은 세속 정권으로 경제, 정치와 국방 면에서 강국이었다. 그 아들 솔로몬 시대 그 영화는 세상 관점에서도 극에 달했다. 거룩한 사람들이 세상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이 물질적으로도 다윗 왕국을 충분히 축복한 결과였다.이원론 자체의 모순은 성경의 창조 기사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한 후 하나님은 하늘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을 인간이 다스리도록 했다. 이원론에 의하면 물질계는 악한 것인데 하나님은 이를 다스리라고 아담에게 명했다.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취해야 한다. 세상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함이다.(창 1:26) 헬라의 이원론에 의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신이다. 이것은 물론 비성경적이다.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낼 것이란 약속을 하나님은 줬다.(창 3:15, 요 3:16) 세상이 악해졌기 때문에 교인은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사도 요한의 권면(요일 2:15-17)은 일시적인 것을 사랑함으로 영원한 것을 잃지 말라는 충고다. 믿음의 위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신앙 삶을 살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애굽과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요셉과 다니엘, 에스더, 모르드개, 에스라 그리고 느혜미야는 그 시대 강대국의 총리와 황후 또는 왕의 최측근으로 이방 나라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 이들은 세상을 버린 적이 없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은 이미 존재했다. 또 앞으로 사단도 자기 세력을 이 세상에 형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와 활동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피조물 중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은 선악과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단의 세력을 대항해야 했다. 성경의 이원론은 죄와 악을 관장하는 사단의 존재를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말한다. 결국 이원론은 암시되지만 일원론(롬 11:36)을 기독교 성경은 지지한다.

이렇게 기독교 성경의 이원론은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의 존재를 영적으로 암시할 뿐이다.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교인들은 그와 대적하되 그의 세력 아래 고통당하는 인류까지 대적하면 안 된다. 오히려 구원의 대상으로 알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한 쪽을 버리는 사고와 자세는 비성경적이다. 이 점에서 불신자를 무조건 미워하며 대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대적이 된 인류를 위해 아들을 보냈다.(요 3:16)

세상 정부와 교회 사이 이분법적 대립도 비성경적이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영역 별로 나누어 세속 정부와 교회에게 주었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 주권에 속한다. 당연히 이들은 서로 대립하면 안 된다. 정부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서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성경적으로 잘 실현되도록 서로 도울 뿐이다.

세상 문화와 신앙 사이 관계도 이분법적으로 이해할 어떤 이유도 없다. 둘 사이에 타협이나 절충 또는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신앙을 유지하면서 세속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교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세상 문화는 말살하거나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다. 신앙은 문화의 형태로 표현된다. 문화와 신앙도 각자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만나야 한다.

 

둘째로 기독교 교회는 조직신학적 방법에 의존함으로 성경을 부분적으로 해석한다. 조직신학은 오랜 동안 기독교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교회는 조직신학에 따라 성경을 몇 가지 주제들로 나누어 해석했다. 이들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다. 조직신학은 이들 주제들을 중심으로 성경 구절들을 나누고 그리고 모았다. 이것은 연역적(演繹的)인 연구 방법이다. 시간 개념이 무시된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가 성경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숲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안 결과였다. 자연스럽게 이들 이 외 주제들과 관련된 성구들은 자주 인용되지 못했다.

이런 조직신학의 방법은 주제설교를 통해 잘 반영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렇게 설교를 준비한다. 특정 테마를 정하고 그에 맞는 성구들을 선택하여 모은 후 자신의 논리 구조에 맞춰 설교한다. 겉으로 보아 매우 성경적이지만 그렇지 않다. 본문의 역사적인 사실은 무시되고 의미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성구들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는 반드시 특정한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된다. 주제설교는 이런 상황이 무시된 체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무조건 인용된다. 결국 성경 저자인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시된다.

예를 들어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다. 이 한 장에 근거한다면 사랑이란 주제를 원리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장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는다. 사랑 장은 은사들(고전 12, 14)로 인해 나타난 고린도 교회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된다. 즉 사랑 장은 은사와 관련하여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적용을 위해 기록됐다. 이렇게 모든 성구들은 사실과 의미를 모두 취하고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13장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만 가르치고자 한다.

동일한 문제가 시간을 중요하게 보는 성경신학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 성경 신학도 몇 가지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 언약과 성전 등이다. 여전히 조직신학이 주는 한계를 성경신학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조직신학이나 성경 신학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개념을 가진 단어들은 모두 함께 동일한 성경 본문에 담겨 있다. 이들 단어들은 동일한 문장이나 문단 안에서 문법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설명한다.

가르침은 여러 단어들로 구성된 유기적인 구조 아래 주어진다. 어느 한 단어만으로 이 가르침은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단어들의 도움으로 특정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이 때 저자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지만 특정 단어만 집중한다면 저자가 목적한 가르침은 공중 분해된다. 통합적인 방법만이 성경을 바로 해석한다. 이 방법으로 교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종합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부분적인 성경 해석을 피할 수 있다.

 

셋째로 목회자들도 인간인지라 자기의 주관에 맞는 성구들만 골라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설교할 수 있다. 즉 설교자는 자신의 취향에만 맞춰 성경을 부분적으로 해석한다. 취향은 목회자의 기질과 성격, 취미, 교육과 성장 배경 등과 관련된다. 때때로 그에게 성공을 준 방법이나 주장이 그로 하여금 외길로 성경을 보게 만든다. 이렇게 관심 밖의 성구들은 저절로 무시된다. 예컨대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적극적인 사고에 중점을 두었다. 한국의 조용기목사는 성공이나 형통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한다. 한 동안 그는 꿈과 비전을 강조했다.

이들의 설교는 이미 주관적인 의도에 매몰된 가운데 다른 본문들과 성구들은 이들에 의해 완전히 무시된다. 때때로 목회 성공을 가져다 분 방법이 이들로 하여금 성경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막고 있다. 그 방법을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결국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 뿐이다.

사실 성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주제들을 가진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의 온갖 사상과 철학들을 모두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이 성경에 얼마든지 발견되는 이유다. 그러나 다르게 보이는 이들 주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유기적인 진리 체계를 구성한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면 기록 방법과 내용에서 성경은 유기적 성격과 일관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유기적인 구조가 무시된다면 설교자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주제에 의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수많은 성경의 본문들이 자연스럽게 폐기된다. 이런 설교자를 우리는 거짓 선생이라고 부른다. 둘째 경우가 실수에 연유한다면 셋째 경우는 잘못된 의도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과 설교에서도 자신을 부인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은 절대적으로 요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결국 주관적인 성경 해석과 설교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그의 설교는 비성경적이다. 그 피해는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의 단점이 주는 것보다 기독교 교회에 훨씬 더 막대하다. 주관적인 해석은 종국적으로 기독교 교회를 무너뜨린다. 기독교는 상식의 종교로 변하며 교회는 인간의 조직으로 전락된다. 이런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성경 해석은 교회가 타락한 만큼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해석을 좋아하는 목회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회에 성공한 유명한 목회자들에게 이런 주관적인 성경 해석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이들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억지로 내세운다. 이사야 시대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어니와"(사 32:6-7)

그러나 그 다음 성구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사 32:8)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의롭게 된 성도인 고명한 자는 늘 그에 맞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며 그리고 항상 고명한 일에 서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고 그렇게 자신의 고명함을 증거 할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다음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세계나 인간 사회는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이 구조 속에서 어느 하나 독립적이지 못하다. 자연과 인간이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이 없다면 모든 것이 서서히 멸망한다. 가정도 인간의 몸도 그리고 자동차도 이를 잘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분법의 도움으로 어느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가정에선 가부장적인 권위로 나타나고 사회와 조직에선 독단적인 정치가나 지도자로 나타난다.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유기적이며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 기록도 마찬가지다.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한 개념이나 단어만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은 몇몇 단어들만 강조함으로 다른 개념들이 무시되고 그 결과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게 하고 그렇게 부분적으로 신앙 삶을 살도록 했다. 통합적인 신앙 삶을 위해 통합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선악과가 뜻하는 이분법은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이분법에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사랑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종이 될 것이다.

장창수 / <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