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절한 세상에서 적절한 삶은 무엇인가 고민해야...
적절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갑자기 예수님은 거기에 있는 상자들을 뒤집어엎고 상 위에 놓여있는 돈뭉치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리셨다. 고함을 지르시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마구 내어 쫓으셨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말로서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항의하려 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그의 행동은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신사적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고 무슨 권한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것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었던 것이다. 깨끗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면서 나온 불쌍한 사람들이 탐욕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 예수님의 분노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던 마틴 루터 킹 목사나 테레사 수녀도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기준에서 볼 때 부적절한 삶을 살았지만 보편적인 진리의 기준에서 보면 참으로 적절한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파울러(James Fowler)는 그러한 태도와 삶을 “적절한 부적절성(relevant irrelevance)”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세상이 잘못되어 돌아가는 이상, 권력자들이 부패하여 이기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이상, 힘 있는 사람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자기편만을 위하여 이익을 나누고 있는 이상, 이러한 부적절성은 필요하고 정당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이러한 ‘부적절하지만 적절한’ 분노, ‘부적절하지만 옳은’ 행동, ‘부적절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영성에 근거한’ 선택들이 세상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희망의 방향으로, 그리고 구속적 방향으로 이끌어 온 것이다.
지난 봄에 나는 강원도 지역을 여행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이충석 목사를 만났는데 그분은 정말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의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첫 목회지를 찾을 때 한국에서 가장 작은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강원도 산골을 오랫동안 도보로 여행하면서 드디어 가장 작은 마을을 찾았다. 놀랍게도 주민은 할머니 한 분이었다. 화전민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다가 생활이 어려워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고 그 할머니 한 명만 남은 것이다. 그 마을은 6.25사변도 모른 채 지나간 마을이라고 한다. 이 할머니는 젊어서 입양 보낸 아들이 혹시나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마을에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이 목사는 그 할머니 한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목회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교회를 세웠는데 이번에는 5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큰 은혜를 경험했다. 그의 삶은 낭비같이 보였지만 그것이 낭비라면 거룩한 낭비였음에 틀림이 없다. 요즈음 그의 그 ‘부적절한’ 목회철학을 배우려고 신학생들과 대학생들이 그 산골짝을 찾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면서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적절성’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집을 떠나야 했고, 돈과 재산을 잃어야 했고, 가족들을 돌보지 못했고, 숨거나 감옥에 가야했다. 그들의 삶은 시대적으로 부적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옳았다. 그들은 약했지만 강했고, 어리석었지만 지혜로웠고, 졌지만 이겼고, 실패했지만 성공했으며, 죽었지만 살았다.
일제시대를 살아가면서 겨레를 사랑했던 사람들,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민주주의를 사랑했던 사람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겼던 사람들, 공산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를 희망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이러한 “부적절성”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무한경쟁의 시대다. 우리는 세계화의 시대, 첨단과학의 시대, 거대한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민족적으로는 남북분단과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 이러한 세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시 어떠한 부적절성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적절하고, 정당하고, 옳은 삶을 선택하고 세상을 구속적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이 사라져 버리고 편안해 지는 순간 우리는 부적절한 적절성에 빠지고 말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그러한 삶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제사야 말로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예배"인 것이다.
유장춘/ 청하침례교회 협동목사·한동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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